실크로드
오랫동안 마음속에서만 그려 오던 길을 마침내 눈앞에 마주하였다. 실크로드! 이름만으로도 수천 년의 시간과 문명이 겹겹이 쌓여 있는 듯한 이 길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인간의 이동과 교류, 욕망과 신념이 응축된 역사 그 자체였다. 이에 버금가는 차마고도(車馬古道)의 길이 있으나 실크로드에 비하면 변방의 길이다.
작년 시안(西安)을 방문했을 때도 이미 실크로드의 입구에 서 있었지만, 그 길로 직접 들어서지 못한 아쉬움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대신 생생한 역사 유적과 공연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그 길의 숨결을 느껴야 했다.
시안이 실크로드에서 차지하는 중요성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시안은 장안(長安)이라는 이름으로 한·당 제국의 수도였으며,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었다. 이곳은 물자가 모이고 사상이 교차하며, 제국의 질서가 세계로 뻗어나가던 중심지였다.
화청궁(華淸宮)에서 공연되는 「장한가」와 「12·12 서안사변」은, 시안이 단순한 고대 도시가 아니라 사랑과 비극, 권력과 격변이 중첩된 역사 무대였음을 실감하게 하였다. 특히 중국 특유의 압도적인 군무를 앞세운 대규모 연출은, 개인의 삶을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 배치하는 중국 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었다.
시안에서 관람한 공연 「타령전기(駝鈴傳奇)」는 실크로드가 단순한 무역로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 놓인 인간의 여정이었음을 생생히 보여주었다.
낙타의 방울 소리를 따라 서역으로 떠난 아들이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이야기에는, 실크로드를 오갔던 수많은 상인과 사절, 승려들의 운명이 겹쳐 보였다. 그들이 맞닥뜨렸을 사막의 고독, 이국의 문화, 생사의 갈림길은 오늘날의 안전한 여행과는 비교할 수 없는 험난한 여정이었을 것이다.
잘 훈련된 낙타와 늑대를 연기한 커다란 개들은 무대예술의 진수를 보여주었으며, 나아가 이 길이 얼마나 어렵고 위험한 공간이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실크로드가 세계사에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이 길을 통해 비단만 이동한 것이 아니라, 불교·이슬람·기독교와 같은 종교, 종이·화약·인쇄술과 같은 기술, 그리고 예술과 사상이 동서로 확산하면서 토착화되었다.
전한 시대 장건(張騫)이 개척한 실크로드는 물건을 옮기는 통로가 아니라 문명을 교차시키는 거대한 혈관이었다. 서로 다른 세계가 충돌하고 융합되면서 인류의 사고와 생활방식은 점차 넓어졌고, 이는 곧 세계사의 방향을 바꾸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 길 위에는 이름 없이 사라진 이들뿐 아니라, 분명한 족적을 남긴 사람들도 존재한다. 「고선지」 장군과 「혜초」는 그러한 상징적 인물이다. 「고선지」는 멸망한 고구려인의 후손인데 당나라의 장수가 되어 중앙아시아까지 진출하여 실크로드의 군사·정치적 질서를 확보했던 인물이다.
반면 「혜초」는 무력을 들지 않고 신앙과 지적 탐구를 통해 같은 길을 걸었다. 통일신라 승려였던 「혜초」는 실크로드를 따라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순례하며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이 책은 「혜초」가 723년경부터 727년까지 4년 동안 인도의 오천축(동서남북 중앙)과 중앙아시아 40여 국가를 다녀온 여행기이다. 중국 광저우에서 배를 타고 동인도로 갔다가, 귀국은 파미르고원과 타클라마칸 사막 등을 거쳐서 육로로 왔다. 중국 오대산에서 입적하신 분이다.
두 사람은 시대와 역할은 달랐지만, 우리의 선조가 실크로드라는 세계무대에서 능동적 주체로 활동했음을 보여주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처럼 정복과 순례라는 상반된 방식은, 실크로드가 하나의 기능으로 규정될 수 없는 복합적 공간이었음을 말해 준다.
맥적산(麥積山) 석굴은 간쑤성 텐수이(天水)에 있는데 보릿단을 쌓은 듯한 사암 봉우리의 곳곳을 판 자리에는 흙을 빚어 만든 불상(塑造)들이 있다. 이들의 표정이 온화하고 인간적이며, 옷 주름의 표현이 자연스럽고 부드럽다.
돈황(燉煌)의 막고굴(莫高窟)은 이러한 실크로드의 정신이 돌과 벽화(壁畫)로 응결된 장소다. 천 년에 걸쳐 조성된 이 석굴들은 단순한 불교 사원이 아니라, 동서 문명이 만난 기록 보관소라 할 수 있다. 인도·페르시아·중앙아시아의 화풍이 중국적 미감과 결합된 벽화들, 그리고 그 속에 등장하는 신라인의 모습은 실크로드가 중국만의 길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제 61굴의 오대산도(五臺山圖) 속 신라 송공사(送供使 : 공양물을 가지고 성지나 사찰로 파견된 사절·관리), 제 355굴의 조우관(鳥羽冠)을 쓴 신라인 벽화는 한반도가 이 거대한 교류망의 변방이 아니라 일원으로 참여했음을 증명한다.
돈황석굴은 후대에 불교미술과 종교사 연구의 보고가 되었을 뿐 아니라, 문화 교류의 실증적 증거로서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다. 특히, 장경동(藏經洞)에서 나온 수많은 자료는 돈황학(敦煌學)의 토대가 되었는데 우리나라에도 그 일부의 자료가 있다.
시안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이어지는 광활한 풍광 역시 장대한 자연의 또 다른 얼굴이다. 황하강의 흙탕물을 건너서 본 웅장한 ‘황하석림’과 내몽골의 ‘바단지린 사막’에 숨겨진 다양한 사막호수와 하늘과 맞닿은 듯한 ‘청해호’의 푸른 수면, 마치 미국 유타주의 ‘브라이스 캐년’을 방불케하는 ‘평산호 대협곡’ 등은 지질변동의 생생한 현장이었다.
거대한 와불이 있는 ‘대불사’(大佛寺)와 명나라가 축조한 ‘가욕관(嘉峪關), 일곱 가지 색을 보여주는 ‘칠채산’, 돈황의 ‘명사산과 ‘월아천’은 인간 문명이 자연의 극한 속에서 어떻게 생존하고 적응해 왔는지를 보여준다.
이 길의 풍경은 화려함보다는 장엄함에 가깝고, 그 속에서 인간은 늘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이 길에 있는 주천(酒泉)과 장액(張掖) 일대는 「 이릉 」 (李陵) 장군이 주둔하며 흉노족과 대적했던 곳이다. 기련천산(祁連天山)에서 싸우다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포로가 된 그를 「 사마천 」 ( 司馬遷)이 비호했다가 치욕적인 궁형(宮刑)을 당하고, “죽음은 단 한 번입니다만 그 죽음은 어느 때는 태산보다도 무겁고, 어느 때는 홍모(鴻毛)보다도 가벼운 것”이라고 하면서 불후의 명작인 『 사기 』 (史記)를 완성했던 그 절박한 심정을 떠올렸다.
이번 실크로드 여행은 단순한 관광을 넘어, 문명과 인간에 대한 성찰의 시간이었다. 특히, 중국은 거대함 속에서 개인을 역사에 편입시키는 나라이고, 그 과정에서 기억을 공연과 유적으로 끊임없이 재현한다. 동시에 정교한 문화유산의 복제전시와 연구는 과거를 잊지 않으려는 집단적 의지이자, 현재를 정당화하는 문화적 방식이기도 하다.
실크로드는 더 이상 과거의 길이 아니지만, 서로 다른 세계가 만날 때 갈등과 교류가 동시에 발생한다는 사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나아가 예전에 비해 날로 변모하는 중국의 문화와 사회 발전상을 보았다. 넘치는 인력과 아파트 숲, 깨끗한 숙박시설 및 공중화장실은 예전의 중국이 아니었다. 또한 도로에 가득한 화물차량의 질주와 망망(茫茫)한 대지를 꽉 메운 태양광 및 풍력발전 시설은 치솟는 경제성장의 상징이었다.
반면에 뿌리 깊은 봉건제도와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권위적인 통제와 무조건적인 복종의 강요, 인명을 경시하는 풍조, 표현의 자유 제한, 심각한 일당독재의 부패 문제 등은 대국으로서 미래에 풀어야 할 과제인 듯하다.
향후 하서주랑(河西走廊)을 중심으로 발전했던 서하제국(西夏帝國)에 대한 탐구와 우르무치와 투르판을 넘어 유럽대륙에 이르는 실크로드의 추가 탐방이 기대된다. 다만 쉽지 않은 여행이라 건강관리에 유념할 일이다.
결국 실크로드는 질문을 던지는 길이다. 인간은 왜 이동하는가, 무엇을 교환하고 무엇을 남기는가. 그 길 위에서 남겨진 유적과 이야기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를 넓히라는 조용한 교훈을 전하고 있다. 동시에 후대에 어떻게 문화유산을 전하고 발전시켜야 할지에 대한 역사적 소명과 책임을 당부하고 있다. 뜻을 함께한 동반자들에게 감사드린다.
(2026.6.6.작성/6.10.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