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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19:1-12 /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작성자큰사랑|작성시간26.06.07|조회수0 목록 댓글 0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 왕상19:1-12

(446.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 / 1466.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왕상19:1-12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2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3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4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5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주 사십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9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0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11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 나의 영적인 상태는 어떻습니까? 상중하로 친다면?

2) 아합과 이세벨이 누구인지 설명해 보세요.

3) 3, 엘리야가 도망간 이유는 무엇일까요?

4) 숯불에 구운 떡과 물은 무엇일까요?

5)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는 말씀은 칭찬일까요, 책망일까요?

6) 어떻게 해야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요?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엘리야는 누구인가?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입니다. 성령에 감동된 사람이었고요. 사역 중에 이적과 기사가 나타납니다. 죽은 자를 살리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모세와 함께 십자가 사역에 대해 의논하기도 했습니다.

 

17:1-3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엘리야는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겁니다.

그런가 하면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입니다.

 

왕하2:11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구약의 맨 마지막 구절에 엘리야의 이름이 나옵니다.

 

4:5-6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드는 역할을 할 것임을 예언합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엘리야의 역할을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17:11-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그는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왕 앞에서도 직언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직전에는 바알 선지자들과의 450:1의 대결에서 승리, 그들을 처단하기도 했습니다. 사람이 가장 조심할 때가 큰 성공을 이뤘을 때입니다. 엘리야를 향한 고통이 다가올 때는 잘 버텼는데요. 성공을 이루니 단번에 넘어집니다. 그리고 탈진합니다. 이렇게 대단한 선지자도 탈진할 때가 있더라는 겁니다. 갈멜산에서의 위대한 승리를 전해 들은 왕비 이세벨이 이를 갈며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선언합니다.

 

왕상19:1-2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2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이 소식을 들은 엘리야가 낙심합니다.

광야로 도망가서 하나님께 차라리 죽여주시라고 탄식합니다.

 

왕하19:3-4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4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의 문제입니다.

몇 가지 문제를 함께 고민해 보는 시간입니다.

 

 

2. 영적 자존감 체크

 

자존감 약해질 때 나타나는 현상들 / 데이비드 J. 리버만

 

데이비드 J. 리버만은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인가(아카데미북)라는 책에서 자존감을 다루고 있는데요. 그는 이 책에서 자존감이 약해지면 세 가지 서로 다른 성격유형이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순응(順應): 약해진 자존감에 따라, 자아가 무너집니다. 그러면 무너진 만큼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게 됩니다. 강자에게 굽힙니다. 타협하게 되고요. 그러나 좋은 방향이 아닙니다. 상대에게 양보함으로써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느끼기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이는 겁니다.

북한 주민들이 권력이 잘못된 걸 알면서도 바른말 못 하고 명령에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많습니다. 권력의 주변에서 비위 맞추고 순응하면서 자신의 속을 채우려던 일단의 사람들을 구역질 나도록 보고 있습니다.

 

거만: 약해진 자존감이 돌출된 자아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자신의 가치를 남들이 하찮게 여기는 것을 감추려고 일부러 강한 척, 정의로운 척, 합니다. ‘거만으로 나타난 약해진 자존감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그래요. 문제를 제기하면 거꾸로 고집을 부리고요. 오히려 큰소리를 칩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것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사실이었습니다만, 바리새인들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거만했습니다. 예수님을 정죄합니다. 결국 예수님을 죽이는데 동의합니다. 거만의 극치입니다.

 

회피: 약해진 자존감 오염되어서 나타난 자아의 모습입니다. ‘회피는 판단을 당하거나 비평을 받거나 거절당하거나 굴욕을 당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결정적 시간이 오는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갑니다. 현실도피 합니다. 노숙자들이 그런 경우입니다. 분명 잘못된 걸 알아요. 그런데 해결할 용기가 없어요. 그래서 도망갑니다. 그냥 집을 나가 캐세라 세라, 막 삽니다.

 

이 세 가지 경우마다 각기 다른 불안정을 겪게 됩니다.

일단 불안정을 겪으면 관점이 좁아지고 성격 중에 불건전한 면이 도드라진다고 합니다.

 

본문의 엘리야에게는 이 세 부분이 다 나타나는 것이 보입니다.

 

이세벨에 순응합니다. 자아와는 상관없이 말입니다. 현실의 벽에 순응하는 순간 무서워집니다. 그래서 도망갑니다. 1-3절까지 내용입니다.

보이지 않던 거만이 나타납니다. 4절입니다. ‘저를 죽여주세요. 나는 내 열조보다 못합니다!’ 그럽니다. 이 말씀은 뒤집어서 생각하면 나는 꽤 괜찮은 사람입니다. 조상들 다 포함해서 생각해도 최고였습니다!’ 이런 의미를 갈고 하는 말씀입니다. 평소에는 느낄 수 없던 거만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10절에서는 나의 열심이 특심(特甚)합니다!’ ‘의로운 사람들은 다 죽고 나만 남았습니다!’ 그럽니다. 영적으로 상당히 거만한 모습입니다.

회피합니다. 브엘세바로 도망갑니다.

 

이때 도망가서 숨지만 말고요. 순응, 거만, 회피... 어떤 부분이 문제인지를 체크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문제해결이 되고요. 하나님의 깊으신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엘리야를 통해서 약해진 나의 자존감을 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너 여기서 뭐 하니?’ 주님이 물으실 때 반항만 하지 말고 진정한 자아로 접근해야만 합니다.

 

 

3. 솔루션

 

이번에 생각할 것은 솔루션입니다. 내가 누구인 줄 알면 그다음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내가 자꾸 현실에 순응합니다. 거만이 보이고, 회피의 모습이 나옵니다. 원인은 자존감입니다. 자존감이 낮아져서 그러는 겁니다. 원인을 알면 답도 나옵니다. 답은 본문 안에 있습니다. 자존감 떨어지고, 절망해서 죽고 싶을 때 엘리야처럼 따라 하면 됩니다.

 

1)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어라(5).

 

왕상19:5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엘리야가 천사의 인도하심을 구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천사가 찾아와서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엘리야만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수호천사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다만,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고 나를 살피십니다.

 

121: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그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무너졌을 때, 하나님은 나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절망의 현장으로 찾아오신다는 말씀입니다. 엘리야는 죽고 싶을 만큼 자존감이 무너졌습니다(4절 참조). 그런데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약해지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하십니다. 그걸 바로 잡으시려 하나님은 직접 찾아오십니다. 오늘 엘리야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오셔서 직접 물으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저도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이 질문에 찔립니다. 저도 한동안 자존감이 떨어져서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자존감은 열등감과 거의 같습니다. 열등감을 감추려고 일부러 거만한 척, 하는 거라니까요. 교회를 접고 집으로 들어갔을 때, 아주 많이 힘들었습니다. ‘내가 이거밖에 안 되는 건가?’ 회의가 몰려왔습니다. 도망가고 싶었습니다. 엘리야의 마음을 십분, 이해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엘리야가 문제지요? 그러면 저만 문제인가요? 우리 모두 다 같은 선상에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엘리야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엘리야의 내면에 들어있는 나 자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문제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문제 앞에서 쩔쩔매는 나에게 주님이 찾아오셔서 물으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이 말씀은 뭐가 문젠데? 너 잘못 가고 있잖아? 하시는 핀잔도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버리시지는 않으십니다. 나를 찾아오십니다. 그렇게 엘리야를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약속하셨습니다.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오시는데 늦으시는 게 아니고 속히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저는 사업이 부도나고, 낙심천만해서 있을 때 찾아오신 주님을 잊을 수 없습니다. 찾아오셔서 하신 첫 말씀이 내가 너를 안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속에는 내가 망한 사정, 힘든 상황, 춥고 배고픈 것까지 다 들어있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마음에 평안이 옵니다. 눈물이 쏟아집니다. 그 눈물은 위로의 눈물이었습니다.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힘이 들어 있었습니다.

혹시 이 중에 갈 바를 알지 못하겠고, 내가 어떻게 할지도 모르겠는 분. 조용히 주님을 기다리기 바랍니다. 잠잠히 주님만 바라보세요.

 

62:1-2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2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62:5-8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6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7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8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그러면 잠잠히 다가오셔서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잠잠히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 나를 보고 미소 지으시는 하나님. 그 주님을 느끼시기를 축복합니다.

 

2) 숯불에 구운 떡을 먹어라(6)

 

왕상19: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기서 은 뭘까요? 말씀입니다. 지쳤습니까? 번 아웃(Burn out) 되셨습니까?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냥 떡이 아니고 숯불에 구운 떡입니다. 숯불은 무슨 의미일까요? 성령을 의미합니다. , 성령의 감동으로 깨달은 말씀이 숯불에 구운 떡입니다. 그냥 성경 읽는 것과 성령의 감동으로 읽는 말씀은 차원이 다릅니다. 성령은 삼위이신 하나님 중 한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가장 홀대하는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령은 성경의 저자(著者)입니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여기서 감동은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 성경의 저자(著者)는 성령인 것입니다.

예언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베드로후서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성령이 저자인 성경은 저자가 직접 풀어줄 때 가장 효과가 있습니다. 지금은 성령시대입니다. 성령시대의 한복판에서 우리가 성경을 깊이 이해하려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에 비추어 읽는 성경! 그것이 숯불에 구운 떡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이 떡을 먹습니다. 그랬더니 기운이 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일반적인 떡만 구합니다. 영적인 부분이 안 보여서 그렇습니다. 이게 아닙니다.

영적인 떡을 구해야 합니다. 주님도 이 부분을 책망하십니다.

 

6:27-31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그래서 우리는 항용 떡이 아닌, 거룩한 떡을 구해야만 하는 겁니다.

 

사무엘상 21:4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항용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그 소년들이 부녀를 가까이만 아니하였으면 주리라

 

엘리야는 일찍부터 불을 체험했습니다. 능력이 나타났고요.

 

왕상18:37-38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38.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어린아이 대하듯 숯불에 구운 떡을 다시 먹이십니다. 제 생각인데요. 엘리야의 경우에는 성령의 불이 오히려 타성에 젖어버렸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암시를 불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았다!’는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왕상19: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어쨌든 번아웃 된 엘리야가 숯불에 구운 떡을 먹고 다시 일어섭니다. 본문은 타성에 젖은 엘리야를 깨뜨리고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훈련장입니다. ‘숯불에 구운 떡 먹기!’ 이것이 영적 자존감 찾기 솔루션 두 번째 과정입니다.

 

3) 말씀의 힘을 의지해 길을 떠나라(7-8)

 

7.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주 사십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솔루션 두 번째는 말씀에 의지해 순례자의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 환경을 바꾸는 겁니다. 안 될 때는 환경을 바꿔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주변의 환경이 우리 목표물들을 놓치게 만들곤 합니다. 밤중에 거리 나가보세요. 휘황찬란한 불빛들 때문에 우리가 찾는 목표물을 놓칠 때가 많습니다. 이럴 때는 다 내려놓고 길을 떠나 나의 본질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광야 호렙산으로 보내십니다. 그곳은 영적인 산입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았던 산입니다. 시내산이나 호렙산이나 같은 산입니다. 하나님은 그 길로 엘리야를 보내십니다. 거기서 엘리야는 재충전을 받습니다.

 

우리는 서울에서 지금 서울에서 포천까지 와있습니다. 이게 우연이 아닐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적인 순례길을 떠나게 만드신 거라고 봅니다. 여러분들도 솔직히 고생입니다. 가까운 곳에 가면 쉽잖아요. 이때 우리 교회 오는 길을 영적인 순례길이라고 여기면 어떨까요? 호렙산 골짜기에서 엘리야가 하나님을 만나듯, 우리도 여기, 일동순복음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새롭게 삶의 에너지를 재충전 받는 영적 주유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4) 굴속으로 들어가 하나님과 독대하라(9)

 

세 번째 솔루션은 굴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거기서 하나님과 독대하라는 겁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던 대부분의 장소는 굴속이었습니다. 사울의 횡포를 피해서 숨어들었던 굴속에서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후에 힘이 생깁니다. 다시 일어서곤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시편은 대부분 처음에는 부르짖음으로 시작합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제가 죽을 지경입니다.’ ‘저 원수들을 그냥 두고만 보실 겁니까?’ 그러다가 중간쯤 가서는 확신에 찬 고백이 나옵니다. ‘나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만족한다!’ ‘주는 나의 피난처!, 산성, 구원의 뿔!’ 마칠 즈음에는 기쁨에 가득 찬 하나님 찬양, 신앙고백으로 마치곤 합니다. 굴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겁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그다음부터는 겁나는 게 사라집니다. 두려움은 그치고 확신에 찬 희열이 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엘리야도 굴속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왕상19:9 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우리도 이 하나님 만나야 합니다. 여기서는 크게 소리 질러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습니다. 문제 있는 분들, 사방이 꽉 막혀 죽을 것 같은 분들, 다 오셔서 부르짖으세요. 여기서 하나님을 만나기를 축복합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숨었던 굴이 아둘람입니다. 이곳에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400명가량 쫓아옵니다. 나중에는 600명까지 됩니다.

 

삼상22:1-2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는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명 가량이었더라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가 다 세상의 낙오자들입니다. 놀라운 것은 나중에 이들 중에서 왕이 나옵니다. 장관이 나오고요. 장군들도 배출됩니다. 나라의 지도자들이 만들어집니다. 굴은 이런 곳입니다. 내가 변해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거듭나는 장소입니다. 우리 일동순복음교회가 이런 장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저는 솔직히 교회 이름을 아둘람이라고 하면 어떨까? 이걸 항상 생각합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을 담아서 보기에 그렇습니다.

 

5)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여라(12)

 

솔루션 마지막 단계!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는 겁니다. 작을지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명이 생깁니다.

 

누가복음 24: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여기서 주의사항이 있습니다. 세미한 음성이 하찮게 들려도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지 말라는 겁니다. 세미한 음성에 내 생각으로 덧칠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말씀을 물질적으로 손익계산해서 비교하지도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다가 망하는 수가 있습니다.

 

민수기 22장에는 모압 왕 발락과 바람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압 왕 발락이 고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는 위압감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때문에 자신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아 고민입니다. 방법은 아는 것 같습니다. 영적인 것으로 풀어야만 되는 것임을 알고 발람을 부릅니다. 발람은 세상 사람임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흔치 않은 사람입니다. 그를 불러냅니다. 부탁할 내용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저주해 달라!’는 겁니다. 가부를 결정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발람에게 응답하십니다.

 

22:9-12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와 함께한 이 사람들이 누구냐 10.발람이 하나님께 고하되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이 내게 보낸 자라 이르기를 11.보라 애굽에서 나온 민족이 있어 지면에 덮였으니 이제 와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라 내가 혹 그들을 쳐서 몰아 낼 수 있으리라 하나이다 12.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

 

거절당한 모압 왕은 다시 발람을 초청합니다. 더 많은 사례비를 지참하고 말입니다. 발람이 흔들립니다. 하나님도 가라고 하십니다.

 

22:20 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찌니라

 

이튿날 발람이 나귀를 타고 모압을 향해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길에는 하나님의 천사가 칼을 빼들고 지켜서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발람에게는 안 보이는데 나귀에게는 보이는 겁니다. 겁에 질린 나귀가 자꾸 길가로 비켜섭니다. 막다른 골목으로 밀려서 결국 발람의 다리가 긁히는 부상을 입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발람이 나귀를 세 번 때립니다. 그러자 나귀가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나귀 입을 여셨습니다.

 

22:28-30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번을 때리느뇨 29.발람이 나귀에게 말하되 네가 나를 거역하는 연고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 30.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나는 네가 오늘까지 네 일생에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느니라

 

그때 하나님이 발람의 영안을 열어주시자, 발람도 나귀가 보았던 칼 든 천사를 보게 됩니다. 깜짝 놀란 발람이 땅에 엎드립니다. 천사가 말씀합니다. ‘나귀가 아니었으면 너는 벌써 세 번 죽었다!’(33) 그러자 겁에 질린 발람이 몰라서 그랬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면 안 가겠습니다.’(34) 그럽니다. 그때 하나님은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해라!’(35) 그러십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 대한 결말을 성경을 통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발람은 하나님이 전하라는 말씀만 전했어야 하는데, 이스라엘의 약점을 은밀히 알려줍니다. 여색(女色)에 약한 이스라엘을 알려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대로 넘어가고요. 대가를 톡톡히 치릅니다. 민수기 25장에서 보면 여색에 빠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페널티를 받아 24,000명이 염병으로 죽게 됩니다.(25:9 참조) 예수님도 계시록에서 이 부분을 지적하십니다.

 

2:14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결국 발람은 여호수아의 칼에 죽임을 당합니다.

 

13:22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도륙하는 중에 브올의 아들 술사 발람도 칼날로 죽였었더라

 

발람은 물론 이스라엘을 저주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전하라는 말씀만 전했습니다. 그러나 편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약점을 알려줬습니다. 약점을 알려준 대가는 물질적 보상이었습니다. 결국 물질의 유혹으로 말씀 경계선 밖으로 넘어가고 만 것입니다. 세미한 음성이지만, 그 말씀이 얼마나 무서운 지를 간과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참혹합니다. 발람, 발락, 모압, 이스라엘까지 다 망합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소홀히 한 결과가 소름 끼칠 만큼 무섭습니다.

 

강신주의 감정수업에 있는 사랑에 대한 글.

 

사랑’ / "당신 뜻대로 하겠어요." 이런 마음이 들었던 적이 있는가? 이런 경험이 없다면 불행히도 한 번도 사랑이란 감정을 느껴보지 못한 것이다. 사랑의 감정에 포로가 되는 순간 황소고집도 꺾이고 오히려 그것을 기쁨으로 여기게 된다. 사랑이란 자신의 뜻보다 상대방의 뜻에 따라 사는데도 기쁨을 느끼는 감정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사랑이란 자발적인 노예상태에 빠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가급적 상대가 원하는 것을 주려고 노력합니다. 상대방의 뜻대로 결정할 때가 많습니다. 손해가 나도 말입니다. 사랑이 그런 것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렇지요? 그렇다면 우리도 사랑에 반응해야만 되는데요. 자발적인 노예상태에 빠질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걸 실행하셨습니다. 가장 낮은 자의 위치로 오셨습니다. 자발적인 노예가 되셨지요.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이 얻으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손해 무지하게 보는 장사입니다. 그런데 그 장사를 결행하십니다. 이유는 딱 하나, ‘우리를 사랑하셔서입니다.

이제 이런 부분을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자기 십자가를 져라!’ 아주 들릴 듯, 말 듯한 세미한 음성입니다. 이 음성을 들은 우리는 계산합니다. 주판알 튕겨보니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못 들은 척합니다. 때로는 거절합니다. 자발적 노예상태를 자원하고도 기뻐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싫다고 뒤로 간다면 우리는 발람과 다를 게 없게 됩니다.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士知己者死 女悅己者容(사지기자사 여열기자용)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는 뜻입니다. 여자가 가장 기쁠 때는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고 느낄 때입니다. 그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 몸과 마음 다 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겁니다. 또한 여자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위해 모든 걸 걸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께 인정받고 있는가? 이 느낌이 든다면 우리도 선비처럼, 여인처럼 반응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한 영혼을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고요. 나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인정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하찮은 것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그래서 당장의 먹을 것, 입을 것, 살아가는 것들에 치중합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불안한 만큼 뭔가를 채우려고 합니다. 돈으로 채우는 사람이 있고요. 음식으로 채워서 거식증에 걸리기도 합니다. 심지어 쓰레기로 채우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한 몸 눕힐 공간조차 없을 만큼 온통 쓰레기로 채우고 사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낮은 자존감의 불안감의 표출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영적 자존감을 높이고 살고 있나요?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합니까? 주님 한 분 외에는 아무 것도 없어도 받아들일 수 있는지요? 이게 안 되고 자꾸 계산이 앞선다면 문제 있는 겁니다. 그런 분에게는 주님이 엘리야에게처럼 물으실 겁니다. ‘@@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런 사람에게는 솔루션이 필요하고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잠잠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라

숯불에 구운 떡을 먹어라

말씀의 힘을 의지해 삶의 방향을 전환하라

굴속으로 들어가 하나님과 독대하라

세미한 음성에 귀 기울여 순종하라

 

이 부분이 내게 와 닿는가? 찔린다면 프로그램 따라오면 됩니다. 아무 느낌 없다? 문제 있는 겁니다. 깊은 고민 있길 바랍니다. 그래서 엘리야처럼 새롭게 사명으로 일어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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