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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짐의 책임과 기억의 온기-에세이문예 가을호[계간평]

작성자저산|작성시간26.06.20|조회수32 목록 댓글 0

                                                                   기울어짐의 책임과 기억의 온기

― 허영자 허형만 이서연 고미라 조옥임의 시를 읽고

 

 

 

권대근

문학박사, 하북미대 객좌교수

 

“시는 사물의 이름을 다시 부르는 행위이며, 잊힌 존재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다.”

                                                                                                                   ― 마르틴 하이데거

 

 

Ⅰ. 로그인

 

좋은 시는 거창한 사건보다 일상 속에 숨어 있는 존재의 진실을 드러낸다. 현대시는 점점 더 화려한 수사보다 삶의 내면을 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번에 읽은 허영자의 「흰 수건」, 허형만의 「뒷굽」, 이서연의 「너에게 ‘나무’라는 이름을 지어주는 이유」, 고미라의 「벽 앞에서」, 조옥임의 「송림동 8번지」는 서로 다른 형식과 정서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공통적으로 인간 존재의 상처와 성찰, 그리고 회복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이들 작품은 모두 삶의 주변부에 놓인 사물이나 풍경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비춘다. 수건, 구두 뒷굽, 나무, 벽, 골목길과 같은 일상의 소재들은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존재의 윤리와 기억의 저장소로 기능한다. 특히 이 시들은 근대적 주체가 세계를 지배하는 시선보다 자신을 성찰하고 타인의 삶에 귀 기울이는 자세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Ⅱ. 여름을 적셨던 에세이문예 발표 시 5편

 

1. 자기 성찰의 윤리 - 허영자의 「흰 수건」

 

허영자의 「흰 수건」은 매우 짧은 시이지만 강한 도덕적 긴장을 품고 있다. “흰 수건에/ 얼굴을 닦으려다 멈칫한다” 시의 핵심은 ‘멈칫한다’는 동작에 있다. 수건은 일반적으로 몸을 닦는 도구이지만, 여기서는 인간 양심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화자는 자신의 얼굴을 닦으려다 “슬프고 부끄러운 초상화”가 찍힐까 두려워한다. 이어 두 손을 닦으려다 “생활을 헤집고 온 비굴의 때”가 묻을까 두려워한다. 흰색은 순결과 무구함의 상징이다. 그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직면한다. 시인은 거창한 자기반성 대신 얼굴과 손이라는 가장 일상적인 신체 이미지를 통해 삶의 부끄러움을 환기한다.

 

흰 수건에

얼굴을 닦으려다 멈칫한다

거기

슬프고 부끄러운

초상화 찍힐까 봐

흰 수건에

두 손을 닦으려다 멈칫한다

거기

생활을 헤집고 온

비굴의 때 묻을까 봐

 

- 허영자 <흰 수건> 전문

 

특히 “비굴의 때”라는 표현은 탁월하다. 살아가기 위해 감내했던 굴종과 타협의 흔적이 손에 묻어 있다는 인식은 현대인의 실존적 자화상이라 할 만하다. 이 시는 단순한 윤리적 교훈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를 심판하는 내면의 법정을 보여준다. 짧지만 밀도가 높은 이 작품은 절제된 언어가 얼마나 큰 울림을 낳을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수작이다. 또한 화자는 자신의 삶을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순결의 상징인 ‘흰 수건’ 앞에서 스스로 성찰한다는 점에서 더욱 엄격한 책임의식을 보여준다. 여기서 흰 수건은 단순한 생활용품이 아니라 인간의 양심과 순수를 비추는 하나의 거울로 기능한다. 결국 시인은 누구나 삶 속에서 묻혀온 부끄러움과 타협의 흔적을 응시하게 함으로써, 진정한 인간다움은 자신을 돌아보는 겸허한 성찰에서 비롯됨을 일깨워 준다.

 

2. 기울어진 존재에 대한 성찰 ― 허형만의 「뒷굽」

 

허형만의 「뒷굽」은 일상적 사물을 통해 인간 존재를 성찰하는 뛰어난 알레고리 시다. 구두 뒷굽이 한쪽으로 닳아 있다는 사실에서 시는 출발한다. 그러나 시인의 관심은 신발이 아니라 그 신발을 신고 살아온 인간에게 향한다. “참 오래도 신으셨네요” 수선집 주인의 말은 화자에게 “참 오래도 사시네요로 들리고, 참 오래도 기울어지셨네요”로 변주된다. 이 과정은 매우 시적이다. 사물에 대한 말이 곧 인간에 대한 말로 전환된다. 인간은 누구나 삶을 살아가면서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정치적으로도, 가치관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완벽한 균형은 불가능하다.

 

구두 뒷굽이 닳아 그믐달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수선집 주인이 뒷굽을 뜯어내며

참 오래도 신으셨네요 하는 말이

참 오래도 사시네요 하는 말로 들렸다가

참 오래도 기울어지셨네요 하는 말로 바뀌어 들렸다

수선집 주인이 좌빨이네요 할까 봐 겁났고

우빨이네요 할까 봐 더 겁났다

구두 뒷굽을 새로 갈 때마다 나는

돌고 도는 지구의 모퉁이만 밟고 살아가는 게 아닌지

순수의 영혼이 한쪽으로만 쏠리고 있는 건 아닌지

한사코 한쪽으로만 비스듬히 닳아 기울어 가는

그 이유가 그지없이 궁금했다.

 

- 허형만 <뒷굽> 전문

 

특히 “좌빨이네요 할까 봐 겁났고 우빨이네요 할까 봐 더 겁났다”는 대목은 오늘날 이념적 양극화가 심화된 사회 현실을 풍자한다. 그러나 시는 정치적 논평에 머물지 않는다. 결국 화자가 묻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존재이다. 순수의 영혼이 한쪽으로만 쏠리고 있는 건 아닌지 여기서 뒷굽은 영혼의 형태가 된다. 시인은 물리적 마모를 정신적 편향으로 확장하면서 인간 존재의 균형 감각을 질문한다. 일상성과 철학성이 자연스럽게 결합된 이 작품은 허형만 시 특유의 성찰적 깊이를 잘 보여 준다.

 

3. 이름 짓기의 사랑 - 이서연의 「너에게 ‘나무’라는 이름을 지어주는 이유」

 

이 시는 다섯 작품 중 가장 짧지만 가장 따뜻한 서정을 품고 있다. 화자는 한 사람을 향해 ‘나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이름 짓기는 단순한 명명이 아니다. 존재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행위다. “사랑에 묶인 시어들/ 잎 피우는 뿌리더라” 이 대목은 시 전체의 핵심이다. 나무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꽃을 피우지 않는다. 뿌리로 버티고 잎을 틔우며 묵묵히 살아간다. 시 속의 ‘너’ 역시 세월 속에서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온 존재다.

 

바람의 무늬 따라

속심없이 살어온 너

 

세상에 누가 될까

세월 지운 흔적 속에

 

사랑에 묶인 시어들

잎 피우는 뿌리더라

 

- 이서연 <너에게 ‘나무’라는 이름을 지어주는 이유> 전문

 

이 시의 미덕은 상대를 평가하거나 규정하려 하지 않고, 그 존재가 살아온 시간의 결을 따뜻하게 읽어낸다는 데 있다. 시인은 화려한 꽃이나 열매보다 보이지 않는 뿌리의 삶에 주목함으로써, 묵묵히 견디며 살아온 인간의 내면적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짧은 시형 속에서도 한 사람의 생애와 인품을 나무라는 상징에 응축해 놓은 점이 인상적이다. 특히 시조 형식을 활용하면서도 관념에 흐르지 않고 인간적 온기를 담아낸 점이 돋보인다. ‘속심없이 살아온 너’라는 표현에는 존경과 연민이 동시에 스며 있다. 이 작품은 결국 사랑이란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일임을 말한다. 나무라는 이름은 칭호가 아니라 헌사다.

 

4. 벽을 넘는 것이 아니라 벽과 함께 자유로워지는 일 - 고미라의 「벽 앞에서」

 

고미라의 「벽 앞에서」는 삶의 절망과 초월의 가능성을 함께 탐색하는 시다. 벽은 인간이 마주하는 한계의 상징이다. 그러나 시인은 벽을 단순한 장애물로만 보지 않는다. “벽을 부수지 않고도 자유할 수 있다”는 말, 한 구절은 시 전체를 관통하는 깨달음이다. 화자는 벽 앞에서 무기력해지지만, 창밖을 지나가는 까마귀를 보며 생각을 전환한다. 까마귀는 어두운 몸이라고 어두운 날갯짓 하지 않았다

 

삶의 막다른 벽 앞에서

사람들은 몇 번을 부딪쳐 보았을까

오늘도 하늘은 푸르고

내겐 날개가 있었을까

기억의 문제가 아님을 아는 무기력함이

틈을 파고드는 사이,

창밖으로 까마귀 둘이 지나갔다.

까마귀는 어두운 몸이라고

어두운 날갯짓 하지 않았다.

다만 짝을 지어 날아가는 모습에

마음이 무거워짐은 왜였을까

인연의 날갯짓을 꿈꾸던 시간은

점점 퇴화하여 가고

꿈을 향해 끄적이던 가슴을 펼쳐 보이면

삶의 벽에 흐르던 아린 눈물이

쉽게 끄적이는 낙서처럼 흔하게 사라질까 봐

약해지는 마음 곤추세웠다.

벽을 부수지 않고도 자유할 수 있다는 말이

순간 심중에 떠오르고

젖어 있던 날개가 꿈틀거렸다.

날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음을.

그러나 진실도 깨우침도 잠깐일 때가 있어

순간의 마음 하늘에 매어두었다.

누군가의 무너진 가슴에도

자유의 말씀 따뜻한 새똥처럼 떨어져

푸른 빛 먹고 날았던 기억 되살릴 수 있다면.

 

- 고미라 <벽 앞에서> 전문

 

매우 인상적인 역설이다. 어둠은 외형일 뿐 본질이 아니다. 검은 몸을 가졌다고 해서 삶까지 검은 것은 아니다. 시는 점차 개인적 절망에서 공동체적 희망으로 확장된다. 누군가의 무너진 가슴에도 자유의 말씀 따뜻한 새똥처럼 떨어져 ‘새똥’이라는 일상적 이미지를 은총과 연결한 발상은 독창적이다. 흔히 더럽다고 여겨지는 것이 생명을 틔우는 씨앗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담겨 있다. 다만 일부 진술적 문장이 시적 긴장을 다소 약화시키는 면도 있으나, 전반적으로는 신앙적 깨달음과 삶의 성찰을 설득력 있게 형상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5. 사라진 주소의 애가(哀歌) - 조옥임의 「송림동 8번지」

 

다섯 편 가운데 가장 서사성이 강하고 정서적 울림이 큰 작품이다. 이 시는 재개발로 사라진 공간에 대한 기억의 기록이다. 그러나 단순한 향수의 시가 아니다. 시인이 복원하려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다. “가방 대신 하루를 감아 들던 팔” 한 구절만으로도 산업화 시대 서민들의 고단한 생애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또한 새벽마다 연탄재를 줄 세워 버리던 손으로 비탈진 밤을 데우던 고모의 체온에서는 가난한 시절을 지탱했던 공동체적 온기가 살아난다.

 

재개발 깃발이 꽂히기 전

한 지붕에 네 가구가 사는

조각달이 뜨는 동네

 

초등학교 앞 문방구에서 사 온

노란 병아리 한 마리를

하루 종일 미선이와 바라보았지

 

신발공장으로 약과 공장으로

어린 동생들을 위해

가방 대신 하루를 감아 들던 팔

식구 많던 미경 언니의 무거웠던 발걸음

저녁이면 더 깊게 패던 어깨들이

골목 끝에서 그림자로 서성인다

 

새벽마다 연탄재를 줄 세워 버리던 손으로

비탈진 밤을 데우던 고모의 체온

그 손의 온기가 나를 식지 않게 한다

 

이제는 사라진 그 골목의 발걸음 소리

새벽을 깨우던 청소차 종소리 대신

포동포동 살찐 달이 뜨는 밤이면

 

층층이 들어선 고층아파트 어느 한 칸에서

병아리처럼, 미선이는 웃고 있을까

 

주소는 사라지고

가라앉은 달 하나

끝내 차오르지 못한 송림동 8번지.

 

- 조옥임 <송림동 8번지> 전문

 

시의 후반부는 더욱 애잔하다. 병아리처럼, 미선이는 웃고 있을까 어린 시절 친구를 떠올리는 이 질문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다. 사라진 공간 속에 남겨진 시간에 대한 물음이다. 마지막 연은 특히 뛰어나다. “주소는 사라지고/ 가라앉은 달 하나/ 끝내 차오르지 못한 송림동 8번지” 주소는 행정적 표식이지만 동시에 존재의 흔적이다. 재개발은 공간을 새롭게 만들었지만 그 안에 깃든 기억까지 복원하지는 못한다. 시인은 ‘차오르지 못한 달’이라는 상징을 통해 끝내 완성되지 못한 서민들의 꿈과 삶을 애도한다. 개인적 기억이 공동체적 기억으로 확장되는 과정이 자연스럽고 설득력 있다.

 

Ⅲ. 로그아웃

- 상처를 기억하는 시, 존재를 일으켜 세우는 언어

 

이번에 읽은 다섯 편의 시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간 존재의 상처와 회복을 노래한다. 「흰 수건」은 자기 성찰의 윤리를, 「뒷굽」은 기울어진 존재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너에게 ‘나무’라는 이름을 지어주는 이유」는 사랑의 명명 행위를, 「벽 앞에서」는 절망을 넘어서는 정신의 자유를, 「송림동 8번지」는 사라진 공간과 공동체에 대한 기억의 윤리를 보여 준다. 이들 시가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화려한 수사나 난해한 관념이 아니다. 오히려 삶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발견한 인간성의 온기다. 수건과 구두, 나무와 벽, 골목길과 병아리 같은 작은 사물들이 시인의 손을 거치며 존재의 은유가 된다.

시는 시대의 아픔을 기록하는 동시에 인간이 다시 살아갈 이유를 발견하게 하는 예술이다. 특히 삶의 주변부에 놓인 사물과 기억, 상처 입은 존재들을 새롭게 조명할 때 시는 단순한 표현을 넘어 존재를 구원하는 언어가 된다. 오늘의 시가 해야 할 일은 새로운 언어를 발명하는 것만이 아니다. 잊혀 가는 것들의 목소리를 다시 들려주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 다섯 편의 시는 우리 시대의 상처를 기록하면서도 끝내 인간에 대한 신뢰를 놓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시가 아직도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이 작품들은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으로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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