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와 반복, 사건의 생성
- 들뢰즈 사건의 존재론으로 본 남현설의 현대시 <계단>과 <틈>에 대하여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브뤼노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는 말은 <우리는 아직 조선에 산다>라는 배상호 시를 연상케 한다. 이 말은 인류가 근대를 거치고 이어 포스트모던 시대인 현대를 지나오면서도 여전히 그 의식이 봉건시대에 머물러 있음을 지적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직도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는 명제의 근대적 가치에 매몰되어, 감각되고 지각되는 기표세계를 상관적으로 인식하는 칸트적 세계관은 신유물론 앞에서는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들뢰즈의 ‘차이 나는 반복’으로 생성되는 변이가 근본이 되는 현대철학 후기 신유물론에 정통한 필자로서는 브뤼노 라투르의 지적을 받아들이기는 쉽지만, 칸트적 유물론적 전통적 세계관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현대인들이 ‘동일성의 재현’이란 근대적 세계관으로 세상의 사물을 인식하고 있다. 현실이 본질에 동일화되는 현상, 개별적인 성질이 동일자에 귀속되어 하나의 보편이 되는 환원주의 속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사건’과 마주칠 수 없다. 들뢰즈는 진정한 경험은 아장스망, 즉 새로운 마주침을 통해 생긴다고 하였고, 아장스망을 통한 생성이야말로 진정한 사건이고, 그것이 진정한 경험이라고 하였다. 사건은 동일성의 재현이라는 폭력적 세계관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개념이다. 따라서 동일성으로 세상을 파악하는 근대적 사유 하에서는 우연적 사건의 발생에 따른 의미의 발견이 안 생긴다고 할 수 있다. 들뢰즈는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철학은 다른 개념을 생성시키는 작업이라고 하였다. 들뢰즈는 차이 나는 것의 반복, 접속과 이탈의 자유로움 속에서 사물의 의미가 생기고, 사건이 발생한다고 하였다.
인류가 건너온 시대를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구분할 때,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인 우리는 대체로 17세기부터 20세기 초엽까지로 보는 그 '근대'를 문화와 문명의 발달 속에서 맞이하였고, 중심주의와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타자성 부재 속에서 주체를 내세우며 살아왔다. 고대가 플라톤철학으로 이데아를 동일자로 보고, 그것이 진리이고 보편이라 여겼다면, 중세에 와서는 이데아의 자리를 유일자인 신이 차지하였고, 근대에 와서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에 따른 이성이 신의 영성을 대체하고 그 자리에 인간이 놓였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근대는 인간중심주의가 아니라 신 중심에 기대 인간중심주의 시대라고 해야 할 것이다. 통일교와 신천지교회가 겉으로 평화를 내세우며 정치집단을 집어삼키고 있다. 사이비종교의 정치개입이 도를 넘고 있다고 하겠다. 생각해보면 우리들이 배운 지식이 주로 근대에 만들어졌다는 사실과 서구의 기독교 사상에 기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컨대 갈릴레오, 데카르트, 뉴턴, 라이프니츠, 보일, 멘델, 다윈 등을 비롯하여 우리로하여금 이른바 과학적이고 문명적인 눈을 뜨게 한 분들 대부분은 근대인이었다.
우리는 근대의 시작을 데카르트로 시작해서 칸트 헤겔로 이어졌다고 보지만, 라투르는 근대를 만들어낸 창시자를 과학자 로버트 보일(1627~1691)로 본다. 라투르는 보일의 ‘그릇 안의 입자들이 압력이 커질수록 부피가 작아지’는 실험, 다시 말하면 '일정한 온도에서 기체의 부피와 압력은 반비례한다'는 보일의 법칙이 일종의 사기 혹은 가짜라고 주장한다. 라투르는 과학적 지식이 진정 완벽한 객관적인 진리라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이 ‘근대인’이라고 말한다. 근대적 사물관은 객관대상을 자연과학적 태도로 보고, 오직 상관적으로만 인식할 수 있다. 오죽했으면 칸트는 우리 인간은 인식, 순수이성으로 세계를 설명할 수 있지만 물자체는 알 수 없다고 했고, 헤겔은 절대적 상관주의를 표방하며, 모든 사물은 인간의 인식에서만 존재적 지위를 갖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신유물론자 라투르는 우리가 과학적 논리의 그 부실한 정황을 잘 살펴봐야 착각과 오해를 하지 않는, 근대인이 아닌 '현대인'이 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플라톤은 세상의 진정한 실재, 하나이고 본질이고, 근본이고 보편자는 동일자 ‘이데아’라고 말한다. 언제나 동일한 것이 진실이고 그것을 모방한 세계나 현실은 가짜라고 하였다. 진실이고 진리인 이데아가 ‘형상’이라면, 세계는 가상 현상이고 모상인 것이다. 그는 진짜와 가짜의 기준을 사라지느냐 안 사라지느냐로 잡으며, 그려진 원은 가상으로 드러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보편이 아니라 특수한 것으로써 지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가짜라는 것이다. 실재는 진실존재의 준말로 진짜로 있는 것을 의미한다.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고대에는 ‘아데아’고, 중세에는 ‘신’이고 근대로 와서는 ‘인간의 이성’이 되었다. 인간을 주체로 놓고 대상이 객체가 된 것이다. 이런 고중세 근대로 이어져온 동일자 중심의 이원론의 전통철학은 합리론과 경험론을 거치면서 칸트에서 물자체와 현상의 이원론으로 이분화되었다가 관념론자들이 등장해서 물자체와 현상을 하나로 묶어버린 것이다. 헤겔은 그 전체를 절대정신으로 묶어서 하나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플라톤 칸트 헤겔을 관통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본질주의다. 어떤 진짜가 있다는 것,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었다. 동일성의 철학이다. 이런 전통철학은 하나에서 여러 개가 나올 수 없다는 들뢰즈철학에 도전을 받는다. 들뢰즈 철학은 여러 개의 관계에서 다른 변종, 즉 다중체가 생겨난다고 하는 생성철학을 제시한다. 들뢰즈는 이성이 정신이고, 정신이 자아라고 하는 동일자의 대표로 환원되는 존재론을 거부하고 이성보다 감정을, 정신보다 물질을, 자아보다 타자를 앞세우며 모든 것은 차이와 반복, 변화와 생성 속에서 접속되고 이탈하고 소멸되며 매순간 달라져 가고 차이가 나는 것으로 생성되어가는 ‘되기’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통한 생성의 철학을 행위소네트워크이론으로 정립한 라투르는 근대인들이 사실과 사건, 주체와 대상, 자연과 사회를 엄격하게 구분해 놓은 동시에 자신들이 이러한 이분법을 극복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요소들이 얽혀 있는 복잡한 현실을 근대인들이 간과했다고 말한다. 라투르는 이 세계가 인간, 비인간, 자연, 기술 등 다양한 요소들이 서로 연결되어 관계를 맺는 세계라고 이르며, 이를 개념화하였으니, 그게 바로 '하이브리드 네트워크'로 설명되는 ‘행위소네트워크이론’이다. 러셀의 분석철학에 나오는 지칭이론에 따르면, 의미는 지시대상에 놓여있다. 대상은 객관적인 것에 대한 의미부여이고, 이것이 실증주의의 대상에 대한 과학적 이해라면, 후썰의 현상학은 주관의 세계가 객관대상에 지향된 것을 대상으로 본다. 즉 대상은 인간주체의 정신현상에 나타난 표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대상을 객관대상으로 보지도 않고, 의식 속에 나타나는 것도 아니라는 시각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대상의 의미는 나와 타자의 만남, 존재와 존재의 접속을 통해 생성되고 변이되는 사건의 계열화에서 마주침으로 생겨진다고 하였다. 새로운 배치로 명명되는 마주침의 철학을 들뢰즈는 아장스망이라 하였고, 여기서 생성되는 변종을 다중체라 불렀다.
중요한 것은 베르그송에서 가져온 새로운 배치다. 영토화와 코드화가 생성하는 배치가 사건이다. 세계는 다중의 주체들이 여러 방식으로 접속하고 이탈하면서 차이와 반복을 하고, 생성과 소멸을 통해 변화되어 간다는 식으로 들뢰즈는 설명한다. 차이 나는 것의 반복으로 ‘사건’이 생긴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존재론이 대상을 중요시했다면, 들뢰즈는 기계들의 배치에 의해 벌어지는 사건을 중시했고, 사건 속에 의미가 있다고 했다. 들뢰즈가 세계를 설명하는 개념은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라는 것이다. 반복적인 것의 결과에 가장 어울리는 개념은 동일성인데, 이 동일성은 차이를 부정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들뢰즈는 차이를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반복을 통해서 같음이 아니라 차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사건은 의미다. 들뢰즈에게 단지 차이를 긍정한다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끊임없이 다른 나로 만들어보자는 의미도 들어 있다. 지금의 나와 다른 나로 변화해 보자는 데 의미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들뢰즈의 차이는 만들어 내어야 할 미래의 차이다. 모든 사물이 동등한 입장에서 접속과 이탈을 자유롭게 하면서 차이와 반복을 지향해 나가는 것을 리좀적 사유라고 하는데, 남현설의 시는 이런 탈층화, 탈영토화와 탈코드화, 탈기관화라는 리좀적 사유를 통해 사물들이 어떤 것과 접속하는가에 관심을 둔다. 위계적 나무형 사유는 존재하는 사물들이 무엇이냐고 묻지만 사물의 성격은 그 사물과 관련된 어떤 관계나 구조가 결정한다는 리좀적 사유로 볼 때, 구조주의라 할 수 있지만, 그 관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변한다는 점에서 들뢰즈가 주목하는 관계성은 후기구조주의와 닮았다고 하겠다. 입은 음식과 접속하면 먹는 기관이 되지만, 입술과 접속하면 키스라는 사랑의 기관이 된다. 남현설이 리좀의 사유로 쓴 시는 그가 관통하는 현대문명과의 마주침 속에서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하기 때문에 해체철학이나 생성철학으로 분석이 가능하다고 하겠다.
Ⅱ.
18세기가 막스의 시대라면, 19세기는 푸코, 20세기는 가히 들뢰즈의 시대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인에게 들뢰즈는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들뢰즈의 철학을 이어받은 라투르는 또 자연과 문화, 인간과 비인간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과학을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간주하는 등의 시각을 근대적 오류라 지적하며, 과학 지식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닌,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과정 속에서 구성된다는 독특한 시각을 제시한다. 필자는 라투르의 이 같은 근대성의 한계를 현대인들이 벗어나야 마땅하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그러자면 서로 다른 존재들 간의 소통과 이해를 위해 ‘번역(Translation)’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즉, 과학자, 정치인, 시민 등 다양한 주체들이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고 협력해야만 복잡한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가 다양한 요소들이 얽혀 있는 복잡한 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는 복잡계이므로, 우리는 근대인의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번역'을 통해 여러 요소를 통합하는 그 하이브리드적 시각을 가진 탈근대적 사유, 현대인의 시선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현대인의 이같은 하이브리드적 시각이라야 환경 문제, 기술 발전, 사회 갈등 등 다양한 현실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하는 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고 신유물론을 편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는 라투르나, 여러 개에서 여러 개가 나온다는 들뢰즈의 생성철학은 동일성, 보편성을 기준으로 하는 환원적, 상관적, 폭력적 근대적 세계관이 가진 문제와 한계를 진단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하겠다. 우리는 근대를 이분법의 시대라 불렀지만, 라투르는 근대인들이 주장하는 이분법이 실제로 작동된 적은 없었다고 봤다. 우리는 항상 하이브리드적 존재들과 함께 관계적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동일성의 재현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철학의 허구와 문제점은 이제 명백해졌다. 근대성의 허구를 파헤친 들뢰즈를 이은 라투르야말로 인류세(Anthropocene) 시대에 즈음한 ‘하이브리드 정치학의 창시자’라 하겠다. 남현설의 시는 현대의 물질문명를 비판하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그 사이에서 생성하고 소멸하는 현대의 분절선을 투시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계단’은 들뢰즈가 비판하고 있는 ‘층화’ 즉 위계적, 수직적 사회의 상징이면서 인간이 가진 욕망의 층위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아닐 수 없다. ‘틈’은 들뢰즈의 리좀적 사유가 추구하는 ‘사이’ 즉 ‘between’을 의미한다. 따라서 시인의 시적 태도와 인식은 근대적 사유가 낳은 문명을 비판하고, 신유물론을 지향하는 문명비판, 저항시라고 할 수 있겠다. 평자는 오늘 들뢰즈의 생성철학을 라투르의 행위소네트워크이론과 연관해서 풀어내면서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 따른 사건의 존재론’ 측면, 그리고 가타리와 함께 전개한 안티오이디푸스와 천개의 고원에서 펼친 리좀적 사유를 방법론으로 해서 남현설 시 두 편에 대해 논의해 보고자 한다.
건물들 사이
수직으로 뻗은 계단이
하늘 끝까지 일렬로 매달려 있다
첫 발을 올리면
얇게 내려앉은 콘크리트 바닥이
발을 스친다
올려다보면
침묵처럼 겹겹이 쌓인 계단들이
기다리고 있다
어제 밟았던 단은
오늘의 바닥이 되고
오늘 밟는 단은
내일의 땅이 된다
반복 반복 안에서
아주 조금씩 조금씩 작아진다
얼마나 올랐는지도 모르겠다
등 뒤로 휘청이는 도시가
작은 점으로 멀어지고
앞은 안개처럼 흐릿하다
끝이 없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무릎이 부르르 떨린다
뒤를 돌아보지만
이미 너무 멀리 왔다
돌아갈 수 없다
발아래는 까마득한 공중
앞은 여전히 회색의 벽
알 수 없다
이 길이 어딘지도
왜 오르기 시작했는지도
그저
어느 틈엔가 이 위에 서 있다
길을 잃었다
한 단의 계단 위에
나는
멈춰 있다
남현설 계단(전문)
이 시는 한 발을 ‘놓는 순간’(사건)을 통해 주체와 공간, 시간이 제편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들뢰즈식으로 말하면, 시는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라 가상의 가능성들이 실제화되면서 주체를 재구성하는 사건을 서술한다. 위의 시 도입부 ‘건물들 사이/수직으로 뻗은 계단이/하늘 끝까지 일렬로 매달려 있다/첫 발을 올리면/얇게 내려앉은 콘크리트 바닥이/ 발을 스친다/올려다보면/침묵처럼 겹겹이 쌓인 계단들이/기다리고 있다’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은 무엇일까. 여기서의 현상은 분석철학의 지칭이론에서 말하는 객관대상에 담긴 과학적 이해 안에서 볼 수 있는 모상으로서의 현상이다. 의미는 지시대상에 있다. ‘건물들 사이’와 ‘수직으로 뻗은’은 대표적으로 현대성을 지시하는 말이다. 수직으로 된 건물은 현대를 상징하는 것으로 근대성의 특징인 우리 사회의 층화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이런 현대성을 담은 특징의 나열만으로도 시적 화자는 그 반대의 특징인 수평적이고 평등한 관계를 내적으로 설정해 놓고 있다고 하겠다. ‘하늘 끝까지’는 거세되지 않는 인간의 욕망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인간의 의식 아래 저 깊은 곳에는 무의식이 도사리고 있다.
“건물들 사이‘에서 ’하늘 끝까지 알열로 매달려 있다‘는 구절은 검물(구조), 계간(접속), 하늘(무한), 서로 이질적인 요소들이 하나의 수직적 장을 구성하면서 어셈블루주의 구성을 취한다. 계단은 단순 경로가 아니라 가능태들의 겹(가상 층위)을 매달고 있는 장이다. 프로이트와 라캉은 인간의 무의식에 원초적인 성적 욕망의 덩어리가 있다고 본다. 그 욕망은 결핍으로 생기기 때문에 그 결핍만 채우면 그 욕망이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프로이트는 이를 오이디푸스콤플랙스로 설명한다. 들뢰즈는 욕망이 막연한 결핍이 아니라 구체적이라는 것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힘이라고 말한다. 니체의 힘의 의지와 같은 개념이다. 이 시의 욕망은 ‘일렬로 매달려 있다’ 역시 위계화와 탈층화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근대적 욕망의 특성을 나타내는데, ‘일렬’은 ‘수직적 상승 욕구’와 계층화를, ‘매달려 있다’는 현대문명의 위기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서술어로 볼 수 있는데, 시적 화자는 고층화로 치닫는 현대문명을 부정적 관점으로 주시하면서 문명의 발달을 우려하고 있다. ‘콘크리트 바닥’과 ‘계단’은 현대적 특성의 단적인 상징이고, ‘침묵’은 순응주의로 보편화된 동일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무관심과 무대응, 무저항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매달리다’와 ‘침묵’은 후썰의 현상학적 태도에서 나온 의미의 주관적 해석이라 하겠다.
위의 시 <계단>은 우선 구조적으로 보면, 아래 <틈>이 연이 있다면, <계단>은 연 구분이 없이 연속된 하나의 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조주의가 주체에 대한 도전이었다면, 들뢰즈는 데카르트의 실체적 주체를 거부하고, 변화하는 주체를 내세운다. 평자는 시적 화자가 형식적인 면에서 시의 구조에 신경을 쓴 것도 하나의 의도로 본다. 현대시는 강력한 제작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시적 화자가 현대성의 상징을 계단으로 설정했다면, 일단 계단은 처음과 끝이 아래에서 위로 또는 위에서 아래로 완만하게나마 수직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시인이 연을 만들지 않고 하나의 연에 모든 사건을 다 배치한 것은 시제의 구조를 상정한 의도적인 배치라 하겠다. 내용적으로 보면 들뢰즈의 철학사상이 배어 있는데, ‘첫발을 올리면 얇게 내려앉은 콘크리트 바닥이 발을 스친다’에서 ‘첫발’은 사건이다. 이 접촉은 미세한 강도의 충격을 신체에 가하며, 가상의 가능들을 실제(주체의 상태변화)로 끌어낸다. 콘크리트의 ‘스침’은 감각적 강도로 기능한다. 들뢰즈가 말하는 어펙트(affect, 강도의 변화)가 발생한다. ‘올려다 보면 침묵처럼 겹겹이 쌓인 계단들이 기다리고 있다’에서 계단의 반복적 겹침은 시간의 층위를 형성한다. 과거, 현재, 미래가 층화되어 시간/공간의 겹fold을 이룬다. ‘기다리고 있다’는 표현은 사건의 잠재성(가상)을 예비해 주는 상태를 말한다.
‘오늘의 바닥이 되고/오늘 밟는 단은/내일의 땅이 된다’는 대목에서 오늘의 바닥이 내일의 땅이 된다는 것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사물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동일률에 의한 판단을 의미하지 않고, 사물의 본성을 접속과 이탈 속에서 변할 수도 있는 가변성을 전제로 하고 설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논리학에서 모순율은 본성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판단이다. 따라서 시적 화자의 세계관은 동일성의 재현으로 하는 근대적 사유에서 벗어나 있다고 하겠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시간 속에서 변한다. 동일자의 존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구성소와의 접속으로 다른 변종이 생성되는 과정을 겪어 다중체로 존재한다는 게 들뢰즈의 생각이다. 이 시는 이런 신유물론적 사유 속에서 존재의 변이와 생성에 주목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반복 반복 안에서/아주 조금씩 조금씩 작아진다/얼마나 올랐는지도 모르겠다/등 뒤로 휘청이는 도시가/작은 점으로 멀어지고/앞은 안개처럼 흐릿하다/끝이 없다’라는 대목에서 시적 화자는 현실의 변화와 차이를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이라는 개념으로 풀어내고 있다. 모든 생성은 반복과 반복 속에서 변화를 겪으며 ‘되기’를 지향한다는 게 들뢰즈의 생각이다. 시적 화자의 세계관도 이와 다르지 않다. ‘아주 조금씩 조금씩’은 변화의 양상이나 과정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거시 물리학의 원리로 움직이는 사회다. 거대하고 큰 것만 눈에 보이고, 작고 미미한 것들은 전부 본질로 환원되어 개별적 지위가 상실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눈에 작은 변화는 잘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변화를 눈치채지도 못하고, 현상을 동일성의 재현이라는 보편성의 원리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시적 화자는 이런 근대적 사유를 잘 집어내고 있으며, 이런 현대인의 편협된 사고를 지적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매 반복은 동일을 재현하지 않고 ‘작아짐’이라는 차이를 생성한다. 이 작아짐은 주체의 능력/크기(행동능력)의 탈영로화, 주체가 점차 다른 상태(약화, 소멸 쪽으로 변형)로 이동함을 가리킨다. 이 구절은 차이 잇는 반복의 전형을 보여준다.
‘휘청이는 도시’와 마주침을 통해 시적 화자가 본 ‘앞은 안개처럼 흐릿하다’에서 읽어낼 수 있는 의미는 현대성의 불확실성이다. 근대가 안정성과 확정성 명료성이라는 인과론과 결정론으로 지탱된다는 것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것으로 시적 화자는 현대적 특성을 불안한 미래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시간의 비가역성과 거리의 재구성을 읽어낼 수 있는데, 뒤(과거)는 소거, 원거리화되고, 앞(미래)는 불확정(가상)이면서도 안개같은 밀도를 띤다. 주체는 더 이상 원래의 자리에 있지 않고, 사건이 만든 새 배열 속에 놓인다.
시적 화자가 마주친 세계는 어떤가. 이 시는 현대의 많은 한계 상황을 나타내고, 많은 문제를 적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끝이 없다/다리에 힘이 풀렸다/무릎이 부르르 떨린다/뒤를 돌아보지만/이미 너무 멀리 왔다/돌아갈 수 없다/발아래는 까마득한 공중/앞은 여전히 회색의 벽/알 수 없다/이 길이 어딘지도/왜 오르기 시작했는지도/그저/어느 틈엔가 이 위에 서 있다/길을 잃었다/한 단의 계단 위에/나는/ 멈춰 있다’라는 결말부는 더욱 현대성의 위기를 적나라하게 노출한다. 이 구절은 사건의 귀결을 나타낸다. 신체적 영향affect이 주체의 능력을 재규정한다.(떨림, 힘빠짐) ‘끝이 없다’ ‘너무 멀리 왔다’ ‘돌아갈 수 없다’ ‘길을 잃었다’ ‘멈춰 있다’는 서술어는 전부 하나같이 우리 인간이 끝임없는 질주를 해온 결과를 상정하고 있다. 끝이 없는 길을 너무 멀리 달려왔고, 길을 잃어 돌아갈 수 없어 멈춰 있다는 시적 화자는 확대하면 모든 현대인의 모습이다. 끝없이 욕망을 펼친 것보다도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길 위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왜 그 길을 오르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는 데 현대인이 갖는 문제의 심각성이 놓여 있다. ‘돌아갈 수 없다’는 비가역적 변형을 나타낸다. 되돌아감이 불가하다. 사건은 주체의 정체성을 다시 쓰고, 이전 상태로 복원되지 않는다.
거기에다 ‘발 아래는 까마득한 공중’이고, ‘앞은 여전히 회색의 벽’이 아닌가. 물리적인 환경도 절벽이고, 심리적인 환경도 절벽이다. 인간이 마주한 건 독일 아우토반의 기차길과 같은 천길 낭떨어지다. 시적 화자는 현대를 살아가다가, 자신이 삶의 가장 가느다란 끝자락에 서 있는 듯한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돌아갈 수도 없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자리, 말 그대로, 한 발만 잘못 디뎌도 추락할 것 같고, 가만히 있자니 삶이 말라가는 기분이 드는 그런 순간이다. 그럴 때 떠오르는 말이 ‘백척간두’다. ‘백척간두 진일보’, 이 글귀는 조선 후기 거상이었던 임상옥이 중국에서 인삼 거래를 막아선 상인들의 담합 앞에서, 추사 김정희에게 지혜를 구해 받은 말이다. 백 척은 1척이 약 3.3센티미터이니, 백 척이면 삼십 미터가 넘는다. 그 긴 대나무 꼭대기, 하늘과 땅 사이의 어딘가, 가장 위태로운 그곳에 서 있는 시적 화자의 심정이 읽힌다. 삶의 꼭대기에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인간, 앞으로도 뒤돌아 갈 수도 없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 시는 그것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한다.
무엇이 이 시를 ‘사건적’으로 만드는가를 살펴보자. 사건의 싱귤래러티, ‘첫발’이라는 한 순간이 단순한 시작을 넘어서 주체 사물 공간 시간의 관계망을 재편한다고 하겠다. 계단이라는 공간은 무한한 ‘오를 수 있음’의 가상을 제공했고, 첫발(사건)이 그 가상 중ㅇ 특정 궤적을 실제화함으로써, 가상이 실재로 연결됨을 보여준다. 반복은 동일의 축적이 아니라 매번 주체를 달리 만드는 차이를 생산한다. ‘작아짐’은 차이로서의 반복이다. 콘크리트 스침, 무릎 떨림 등 강도는 몸의 능력을 변형시키며 사건의 결과를 신체화한다. 어셈블라주로서의 계단 풍경, 건물, 계단, 안개, 도시, 신체가 만나 한 작동을 만들어내는 배치-사건은 이 배치의 작동 결과다. 사건은 주체를 이전의 지점에서 떼어내어 새로운 상태로 놓는다. 비가역성과 탈영토화를 보여주는 지점이다. 시가 그려내는 것은 ‘오르는 행위’의 단순한 묘사가 아니다. 들뢰즈적으로 말하면, 시는 한 특이한 사건(첫발)이 어떻게 신체의 역량을 재조정하고, 시간과 공간의 층위를 재편하며, 반복을 통해 주체를 다른 존재(작아짐, 피로, 앞으로 불확정한 상태)로 이끄는지를 보여준다. 사건은 서사적 귀결(목적지 도달)보다 변형의 과정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좁은 벽 사이
시간의 껍질이 벗겨진 자리
햇살도 방향을 잃고
비틀거리며 스며든다
손 끝에 닿으면
금속성 냄새가 나는 빛
웃음도 탄성도 흐느낌도
틈 앞에선 모두 숨을 죽인다
그곳엔
사라진 발자국의 잔해와
부서진 어제의 조각들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틈은 이름 없는
의자 같아서
누구든 앉으면
자신이 어떤 모양인지
잊게 된다
그것이 틈의 일이다
아무도 원하지 않지만
모두가
한번쯤 머물다 가는 자리
틈은 기억이 눕는 자리다
- 남현설의 <틈> 전문
이 시 <틈>은 벽 사이의 간극을 구체적 공간이자 존재론적 사건의 장으로 제시한다. 틈은 단순한 ‘비어 있는 자리’가 아니라 빛 시간 기억 신체가 새로운 방식으로 배치되는 사건의 현장이다. 시적 화자는 틈에서 빛이 물질화되고, 기억이 침전하며, 정체성이 지워지는 체험을 서술하고 있다. ‘틈’이 있는 곳에 빛이 들어간다. 틈은 빛을 받아들이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열린 의식을 나타낸다. 틈을 노래하는 사람은 상식이나 상투적 감성에 호응하는 것이 아니라 이에 온몸으로 저항해야 하는 사람이다. 시적 화자는 사유의 경직성에 대항하여 자유를 구가하고자 한다는 차원에서 저항적이다. 비록 금속성의 냄새가 나는 빛이지만, 빛은 광명이다. 어둠의 대척점에 있어서 일단 받아들여야 한다. 문학이 ‘어불성설’이라는 말은 김지하가 했다. 동시에 평자의 말이기도 하다. 왜 어불성설인가. 문학은 주관적인 것을 객관화해야 하고, 객관적인 것을 주관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을 가지고 사실대로 쓰면 안 되고, 상상력으로 문학화해야 한다. 칸트는 ‘감각적 다양성을 수용해서 하나의 상을 형성하는 능력’을 상상력이라 하였다. 문학적 상상력에 관한 정의로 이보다 명쾌하고 탁월한 정의는 없는 것 같다. 문학의 원리는 ‘이것’을 ‘저것’으로 하는 치환원리다. 인식 논리상 ‘이것’을 ‘저것’으로 동일시하는 것은 모순인 것이다. 소재에 대한 비유창작은 ‘과학적 이해’란 개념화로는 풀어낼 수 없다. ‘서정’ 장르인 시는 비유란 시적 발상 없이는 창작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문학원리는 인식론적으로 보면 이처럼 역설과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문학적 논리에 대입시키면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지는 시가 있다. 바로 남현설의 <틈>이란 시다.
첫째 연은 사건의 장으로서의 ‘틈’을 나타낸다. ‘좁은 벽 사이 시간의 껍질이 벗겨진 자리’에서 틈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시간의 층이 벗져진 장소, 곧 시간의 분절 사건이 일어나는 장이다. ‘껍질 벗김’은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을 흔드는 사건적 단절이다. ‘햇살도 방향을 잃고 비틀거리며 스며든다/ 손 끝에 닿으면 금속성 냄새가 나는 빛’에서 빛이 시각->촉각->후각으로 감각을 넘나드는 전환을 일으킨다. 이는 들뢰즈가 말한 강도intensity, 즉 신체 감각을 재조정하는 사건의 힘이다. ‘빛이 금속성 냄새가 난다’는 범주 전이는 사건이 신체적 직가을 바꾸는 순간을 보여준다.
둘째 연 ‘웃음도 탄성도 흐느낌도/틈 앞에선 모두 숨을 죽인다/그곳엔/사라진 발자국의 잔해와/부서진 어제의 조각들이/천천히 가라앉는다’에서 틈은 정서적 흐름을 차단하는 사건으로 기능한다. 사건은 단지 무언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질서(정서, 언어, 소리)를 정지시키는 특이성이다. 셋째 연 ‘틈은 이름 없는/ 의자 같아서/누구든 앉으면/자신이 어떤 모양인지/잊게 된다’는 대목에서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시적 화자의 시적 태도와 인식은 ‘틈’이라는 사이에서 희노애락이 모두 숨을 죽인다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지점에서 사건은 단순히 현재의 일회적 체험이 아니라 과거의 층위를 재배치하는 작용을 한다. ‘사라지고, 부서진’ 잔해와 조각들은 들뢰즈가 말하는 분절선이나 절편선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 삶의 마디다. 잔해와 조각이 ‘가라앉는’ 모습은 기억의 재배열과 퇴적을 드러낸다. 즉 기억의 침전을 의미한다. 사건은 과거를 새롭게 의미화하면서, ‘시간의 껍질을 벗겨내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이런 마디들 때문에 고착화된 세계, 경직된 세계를 경험하고 이런 세계와 마주친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지나치게 분석지향적 사고, 분석만능주의적 사고에 젖어 사태를 현상적으로 이해하기 이전에 거의 모든 것을 과학적인 태도로, 객관대상으로 인식하고 분석하고 분해해왔다. 그런데 전체를 분석하고 분해해 버리면 대상을 다시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다. 작가는 이런 점을 적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분석하고 분리하기 이전에 분석하려는 개체나 부분이 전체와 어떤 관련성을 맺고 있는지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분석과 분해는 아무런 이해를 도모하지 못하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틈은 누구든 앉으면 자신이 어떤 모양인지 잊게 된다’고 함으로써 의미를 발견하고 사건을 생성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틈애서 주체는 기존 정체성을 상실한다. 이는 들뢰즈가 강조한 주체의 비본질성, 유동성을 보여준다. 사건은 고정된 ‘나’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잠재적 배치를 열어준다. 틈의 미학에서 존재는 고착화된 성질을 버리고, 부드럽게 연화됨을 알 수 있다. ‘자신이 어떤 모양인지 잊게 된다’는 이 대목은 라투르가 이 세계를 인간, 비인간, 자연, 기술 등 다양한 요소들이 서로 연결되어 관계를 맺는 '하이브리드 네트워크'로 설명된다. 들뢰즈가 말하는 삶의 마디를 제거하기 위하여 실선으로 된 분절선을 점선으로 만들자는 것과 같은 인식이다. 작가는 오히려 분리가 거듭될수록 대상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는 불리하다고 말한다. 사물은 마주침을 통해 탈층화되고, 새로운 다른 무엇이 되어간다는 의미다.
마지막 결구 연은 ‘틈’의 역할과 사명을 적고 있다. ‘그것이 틈의 일이다/아무도 원하지 않지만/모두가/ 한번쯤 머물다 가는 자리/틈은 기억이 눕는 자리다’ ‘틈’이 하는 일이 아무도 원하지 않지만 한 번쯤은 머물다 가는 자리다. 사건은 계획된 목적지가 아니라 예기치 않은 체험의 자리다. 사건의 본질은 원하지 않지만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누구나 겪지만 ‘자발적이지 않은 체류’라는 점에서 사건의 비가역성과 특이성이 드러난다. ‘틈은 기억이 눕는 자리다’는 사건이 ‘흔적을 남기며’ 기억으로 침전된다. 틈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기억과 사건이 교차하는 어셈블라주이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획일적이고 동일성의 재현적 가치에 매몰되어 있어 근본적으로 구분된 계층화로 존재하는 데 익숙하다. 따라서 인간은 정체가 모호한, 나와 다른 타자의 층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한다. 관념에 의해 만들어진 사물의 질서가 무의미해지는 그 순간은 일체의 관념을 초월한다. ‘머물다 가기도’ 하고 ‘기억을 누일 수 있기도’ 한 자리처럼 편안한 게 어디 있겠는가.
끝도 아니고 시작도 아닌 경계는 들뢰즈의 리좀적 사유가 열린 아름다움이다. ‘사이’가 예측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준다는 남현설 시인의 주장이다. 이런 사이의 철학은 들뢰즈 생성철학의 핵심 코드다. ‘틈’은 대상이나 존재를 받아들임으로써 마침내 세상의 빛을 보는 것이다. 그것은 또 다시 열림의 대상이 되고 생성의 과정을 통해 승화되기도 한다. ‘틈’을 ‘사이’와 동일시하는 공명전략은 탁견이라 하겠다. 남현설의 ‘틈’은 사건적 공간이다. 시간의 껍질을 벗겨내어 과거 현재 미래를 흔들고, 빛과 감각을 뒤섞어 신체적 강도의 변화를 일으키며, 정서와 언어를 중단시키고, 기억을 가라앉히며 재구성하게 하고, 주체의 정체성을 지우고 새로 배치한다. 즉 틈은 ‘아무 것도 없는 공백’이 아니라 사건이 생성하는 장이며, 거기서 주체는 다른 존재 상태로 변형된다. 들뢰즈적으로 말하면, 틈은 가상virtual의 잠재성들이 실제화actualize되는 장소이고, 사건은 그 실제화의 특이한 방식으로서 주체와 세계를 재편한다. ‘유’이기도 ‘무’이기도 하는 식의 틈의 미학을 패턴화하는 것은 사이의 미학의 장점을 찾아가고자 하는 그녀의 철학적 입장을 강조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겠다.
Ⅲ.
내가 진정한 나로 재탄생하기 위해서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껍데기를 벗어 던져버리고 ‘참나’로 거듭나야 한다. 남현설 시인은 ‘사이’의 작가다. 그래서 날마다 접선과 이탈을 오간다. 틈에 서면 분절이 없어져서 고착성에 젖어 사는 게 아니라 유연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 ‘이탈’을 보는 관점이 우선 남다르다. 남다르다는 것은 현실반발성이 강하다는 말이다. 그녀에게 이탈은 ‘일상이라는 터를 박차고 오르는 힘’이다. 일상은 비상의 보고이자 비상할 수 있는 상상력의 텃밭이다. 들뢰즈의 이론에 따르면 ‘사건’은 전부 접속과 이탈, 차이와 반복적 사고에서 나온다. 그녀가 말하는 틈과 사이는 나와 다름을 조화롭게 끌어안고 거기서 새로운 창조의 빛을 밝히는 구성소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셸리는 ‘사랑의 철학’이라는 시를 통해 경계와 경계 사이에 존재하는 이질적 사물과 사람이 섞여서 하나가 되는 과정을 노래하고 있다. 경계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아니라 다리를 놓을 수 있는 아름다운 사이다. 그 사이에 생성의 의미를 놓는 남현설은 그 틈에 서서 아름다운 차이를 발견하고 이를 신명나게 즐긴다.
머무는 것과 떠나는 것 사이, 해체와 응집의 사이에서 시간은 또 다시 흘러간다. 거대한 아우슈비츠처럼 관리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은 어떤 모습을 해야 할까. 아도르노는 예술이 사회와 비동일성을 주장하며 타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들뢰즈는 ‘차이를 가치화하는 주변부 타자의 담론이 문학’이라 하였다. 스스로 중심을 해체하고 사이를 지향하며, 새로운 것과의 마주침을 위해 새로운 곳에 자신을 배치시켜야 한다. 아장스망의 길, 탈주의 선을 긋고, 리좀적 사유와 노마드 정신으로 분절선을 타파해야 한다. 의미는 사건과의 마주침에서 온다면, 의식의 시간은 사이에 서 있을 때 가능하다. <계단>과 <틈>의 생성미학은 들뢰즈 철학의 맛으로 귀착된다. 끝없는 탈주의 선을 그리면서 멋도 낸다. 예술은 늘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게 되는데, 새로운 예술의 창작은 내용에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재료를 그 누구도 아직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형식은 침전된 내용이기에 진리는 재료를 조직하는 새로운 방식에 있는 것이다. 차이와 반복, 접속과 이탈, 생성과 변화, 평등과 자유 사이에서 부지런히 사건을 지향할 때 응집된 의식,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으니, 사이에 들어서지 않으면 철학적으로 반동적이다.
다른 한편 소수자로서 이 시대에 대항하는 무의식으로 살기 위해서라도 예술은 그렇게 갈가리 찢겨진 것들을 비폭력적인 구성으로 다시 종합함으로써 현실을 화해의 빛 속에 드러내야 한다. 역설적이지만 예술은 비화해적인 것을 증언해야 하며 그것을 화해시키려는 경향을 가져야만 한다는 차원에서 남현설은 <틈>이란 작품에서 ‘빛’의 미학이란 생성의 철학을 제시한다. 현대성의 작은 공간과 인간의 감각 변화를 ‘틈과 사이의 미학’으로 파악해서 그 의미를 읽어내는 철학적 역량은 높게 평가된다. 자신의 안위가 아니라 인간과 사회와 삶의 온당함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그것을 확보하려는 의지로 사는 것이 남현설이 말하는 작가적 삶이요, 욕망하는 주체의 삶은 익어갈 수밖에 없다. 예술은 삶을 받아들이고, 삶에 말을 걸도록 함으로써 거기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드러낸다. 이로써 예술 속에선 ‘존재하는 것’에 대한 탄핵과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기대가 서로 결합된다. 이를 위해 그녀는 탈주의 선이 절실하다고 주문한다. 인문학이란 인간의 삶 곳곳에서 그 의미를 따져 묻고 다른 대안을 탐구하는 과정이다. 사실 인문학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인문학을 하는 과정에서 몸에 배기 마련인 의미를 따져 묻는 성찰과 탐구의 자세다.
들뢰즈는 사건에 의미가 결합될 때, 진정한 경험이 된다고 했다. 들뢰즈에게 중요한 것은 대상이 아니라 기관들의 배치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건 속에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건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언제나 움직이고 의미가 언제나 변하는 것이다. 사건은 계열화라는 특이점을 갖는데, 이 사건들이 우발성과 만나면서 역설의 의미로 확장된다고 하겠다. 들뢰즈는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에 나오는 ‘언표 개념’에 주목하여 사건의 존재론을 언어화와 연결시켜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의미를 따져 묻고 성찰하는 자세가 이미 도구적 이성의 반대편에 서 있는 서정적 자아의 참모습인 것이다. 남현설의 시는 이 지점에서 계열화된 사건을 구성하는데, 사건의 존재론이 탁월하게 빛을 내면서 문학적 성취를 갖는다. 에세이문예 부설 문학평론반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그녀의 철학적 아장스망, 인문학과의 마주침은 그녀에게 사유를 크게 확장시키고 공감 능력과 상상력을 길러 주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보겠다. 실제로 역사상 예술은 현재 보이는 현실 너머를 상상하는 역할을 해왔다. 철학적 소양이 높은 작가는 다른 사람을 하나의 대상, 수치로 대하지 않는다. 그녀는 사건으로, 흔적과 주름을 만들어간다. 남현설은 두 시를 통해 현대적 삶의 흔적과 주름을 이야기하며 현대문명을 비판하고자 한다. 사건을 많이 접한 사람일수록,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기 쉽다. 서로의 사건에 공감하고 의미를 공유하는 사람들끼리는 사이에 들기도 철학적 소통도 쉽다. 생성과 사이미학으로 빛나는 남현설의 문학적 힘은 사건의 존재론이라는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두 편의 시는 현대성을 관통하며 우리에게 역설과 사이의 빛을 선사하는, 독자의 정서에 울림을 주는 파도와도 같은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