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변 이어서 번역 詩之法有五:曰體制,曰格力,曰氣象,曰興趣,曰音節。 詩之品有九:曰高,曰古,曰深,曰遠,曰長,曰雄渾,曰飄逸,曰悲壯,曰淒婉。其用工有三:曰起結,曰句法,曰字眼。其大概有二:曰優遊不迫,曰沉著痛快。詩之極致有一:曰入神。詩而入神,至矣盡矣,蔑以加矣!惟李杜得之,他人得之蓋寡也。 禪家者流,乘有小大,宗有南北,道有邪正,具正法眼者,是謂第一義;若聲聞、辟支果,皆非正也。論詩如論禪,漢、魏、晉等作,與盛唐之詩,則第一義也;大曆以還之詩,則已落第二義矣;晚唐之詩,則聲聞、辟支果也。學漢、魏、晉與盛唐詩者,臨濟下也;學大曆以還者,曹洞下也。大抵禪道惟在妙悟,詩道亦在妙悟。且孟襄陽學力下韓退之遠甚,而其詩獨出退之之上者,一味妙悟故也。惟悟乃爲當行,乃爲本色。然悟有淺深,有分限之悟,有透徹之悟,有但得一知半解之悟。漢魏尚矣,不假悟也;謝靈運至盛唐諸公,透徹之悟也;他雖有悟者,皆非第一義也。吾評之非僭也,辨之非妄也。天下有可廢之人,無可廢之言,詩道如是也。若以爲不然,則是見詩之不廣,參詩之不熟耳。試取漢、魏之詩而熟參之,次取晉、宋之詩而熟參之,次取南北朝之詩而熟參之,次取沈、宋、王、楊、盧、駱、陳拾遺之詩而熟參之,次取開元、天寶諸家之詩而熟參之,次獨取李、杜二公之詩而熟參之,又取大曆十才子之詩而熟參之,又取元和之詩而熟參之,又取晚唐諸家之詩而熟參之,又取本朝蘇、黃以下諸公之詩而熟參之,其真是非亦有不能隱者。儻猶於此而無見焉,則是爲外道蒙蔽其真識,不可救藥,終不悟也。 夫詩有別材,非關書也;詩有別趣,非關理也。而古人未嘗不讀書,不窮理,所謂不涉理路,不落言鑒者,上也。詩者,吟詠情性也。盛唐詩人,惟在興趣;羚羊掛角,無跡可求,故其妙處,瑩徹玲瓏,不可湊泊;如空中之音,相中之色,水中之月,鏡中之象,言有盡而意無窮。近代諸公作奇特解會,以文字爲詩,以議論爲詩,以才學爲詩;以是爲詩,夫豈不工,終非古人之詩也。蓋於一唱三歎之音,有所歉焉。且其作多務使事,不問興致;用字必有來曆,押韻必有出處;讀之終篇,不知著到何在。其末流甚者,叫噪怒張,殊乖忠厚之風,殆以罵詈爲詩。詩而至此,可謂一厄也,可謂不幸也。然則近代之詩無取乎?曰,有之。吾取其合於古人者而已。國初之詩,尚沿襲唐人。王黃州學白樂天,楊文公、劉中山學李商隱,盛文肅學韋蘇州,歐陽公學韓退之古詩,梅聖俞學唐人平澹處;至東坡、山穀,始自出己法以爲詩,唐人之風變矣。山穀用工尤深刻,其後法席盛行,海內稱爲江西宗派。近世趙紫芝、翁靈舒輩,獨喜賈島、姚合之語,稍稍複就清苦之風,江湖詩人,多效其體,一時自謂之唐宗;不知止入聲聞、辟支之果,豈盛唐諸公大乘正法眼者哉!嗟乎,正法眼之無傳久矣!唐詩之說未唱,唐詩之道有時而明也。今既唱其體,曰唐詩矣,則學者謂唐詩,誠止於是耳。茲詩道之重不幸耶!故予不自量度,輒定詩之宗旨,且借禪以爲喻,推原漢、魏以來,而截然謂當以盛唐爲法。後舍漢、魏而獨言盛唐者,謂唐律之體備也。雖獲罪於世之君子,不辭也。
이어서 《滄浪詩話·詩辨》의 역문을 올리겠습니다.
시의 법(法)
시의 법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체제(體制)요,
둘째는 격력(格力)이요,
셋째는 기상(氣象)이요,
넷째는 흥취(興趣)요,
다섯째는 음절(音節)이다.
시의 품격
시의 품격에는 아홉 가지가 있다.
- 높음(高)
- 고아함(古)
- 깊음(深)
- 원대함(遠)
- 장후함(長)
- 웅혼함(雄渾)
- 표일함(飄逸)
- 비장함(悲壯)
- 처완함(淒婉)
이다.
시를 짓는 공부
공을 들여야 할 곳은 세 가지이다.
- 기결(起結)
- 구법(句法)
- 자안(字眼)
이다.
시의 큰 요체
시의 큰 요체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여유롭고 조급하지 않은 것(優遊不迫)이요,
하나는 침착하면서도 통쾌한 것(沉著痛快)이다.
시의 최고 경지
시의 궁극적 경지는 하나뿐이다.
곧 「입신(入神)」이다.
시가 신묘한 경지에 들어가면
이미 지극한 데 이른 것이며,
더 보탤 것이 없다.
오직 이백과 두보만이 그 경지에 이르렀고,
다른 사람 가운데 그 경지에 도달한 이는 매우 드물다.
시와 선(禪)
선가에는
소승과 대승이 있고,
남종과 북종이 있으며,
바른 길과 그릇된 길이 있다.
정법안(正法眼)을 갖춘 자가
제일의(第一義)이다.
성문승과 벽지불의 경지는
참된 최고 경지가 아니다.
시를 논하는 것도 선을 논하는 것과 같다.
한·위·진의 시와
성당의 시는
곧 제일의이다.
대력 연간 이후의 시는
이미 제2의 경지로 떨어진다.
만당의 시는
성문과 벽지불의 경지에 불과하다.
묘오(妙悟)
대체로 선의 도는 묘오(妙悟)에 있고,
시의 도 또한 묘오에 있다.
맹호연은 학문과 공부의 깊이에서
한유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도 시만은 오히려 한유보다 뛰어난 까닭은
오직 묘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직 깨달음이 있어야
참다운 길이며
본래의 면목이다.
그러나 깨달음에도
얕고 깊음이 있다.
한정된 깨달음이 있고,
철저히 꿰뚫는 깨달음이 있으며,
어렴풋이 반쯤 이해하는 깨달음도 있다.
사령운에서 성당 제시인들에 이르는 경지는
철저한 깨달음의 경지이다.
시를 배우는 방법
엄우는 이어서 말한다.
한위의 시,
진송의 시,
남북조의 시,
심전기·송지문·왕발·양형·노조린·낙빈왕·진자앙,
개원·천보의 여러 시인,
그리고 이백·두보,
대력십재자,
원화 시인,
만당 시인,
송나라 소식·황정견 이하의 작품까지
차례로 깊이 읽고 비교해 보면
누가 참되고 누가 그렇지 못한지는
자연히 드러난다고 한다.
시에는 별재(別才)가 있다
시에는 특별한 재능이 있으니
단지 독서의 많고 적음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다.
시에는 특별한 흥취가 있으니
단순한 이론과도 관계되지 않는다.
그러나 옛 시인들이 독서를 하지 않았거나
이치를 탐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치의 자취를 드러내지 않고,
말의 설명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가장 높은 경지이다.
성당시의 특징
시는 성정을 읊는 것이다.
성당 시인은 오직 흥취에 있었다.
영양이 뿔을 걸고 떠난 듯
찾을 흔적이 없다.
마치
허공의 소리,
형상 속의 빛,
물속의 달,
거울 속의 그림자와 같다.
말은 끝나도
뜻은 끝이 없다.
송시(宋詩)에 대한 비판
엄우는 당시 송대 시풍을 비판하며 말한다.
근세 사람들은
문자를 가지고 시를 만들고,
의론을 가지고 시를 만들고,
재주와 학문을 가지고 시를 만든다.
비록 공교롭기는 하지만
끝내 고인의 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노래하듯 여운이 남는 풍미가 부족하다.
또한
고사 사용에만 힘쓰고,
흥취는 돌보지 않으며,
한 글자마다 출전을 찾고,
운자마다 근거를 따진다.
그러나 시를 다 읽고 나면
정작 어디에 감동해야 할지 알 수 없다고 비판한다.
결론
나는 단언하노니,
마땅히 성당을 법으로 삼아야 한다.
후에 특별히 성당을 말하는 것은
당나라 율시에서 그 체제가 완전히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비록 세상 군자들의 비난을 받는다 하더라도
나는 이 주장을 거두지 않겠다.
이 「시변(詩辨)」은 중국 시론사에서 가장 유명한 글 가운데 하나로, 선생님께서 평소 말씀하시는 수함경미(受含景味), 기승전결, 격조와 풍골, 성당시 숭상의 사상적 근원이 되는 대표적인 시학 이론입니다. 특히 엄우가 제시한 다섯 기준인 체제·격력·기상·흥취·음절은 오늘날 한시 평론에서도 여전히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으로 꼽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