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김덕령장군 생가 탐방
1567(선조 즉위년)∼1596(선조 29)
김덕령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본관은 광산, 자는 경수이며 광주출신이다.
아버지는 붕섭이며, 어머니는 남평반씨로 직장 계종의 딸이다.
20세에 형 덕홍과 함께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의 막하에서 전라도 경내로 침입하는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주에 이르렀을 때 돌아가서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형의 권고에 따라 귀향하였다.
1593년 어머니 상중에 담양부사 이경린, 장성현감 이귀 등의 권유로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그 세력이 크게 떨치자, 선조로부터 형조좌랑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의 군호를 받았다.
1594년 세자의 분조로 세워진 무군사에 지략과 용맹이 알려져 세자로부터 익호장군의 칭호를 받고 이어서 선조로부터 다시 초승장군의 군호를 받았다.
그뒤 최담년을 별장으로 하여 남원에 머물다가 다시 진주로 옮겼는데, 이때 조정에서는 작전상의 통솔과 군량조달의 문제로 각처의 의병을 통합, 충용군에 속하도록 하였으며, 이로써 의병장이 되어 곽재우와 함께 권율의 막하에서 영남서부지역의 방어임무를 맡았다.
왜적의 전라도 침입을 막기 위하여 진해·고성 사이에 주둔하며 적과 대치하였으나 이때 강화회담이 진행중이어서 별다른 전투상황도 없고, 또 군량의 부족으로 그 예하 3천여명 가운데 호남출신 5백여명만 남기고 모두 귀농시켰다.
그해 10월 거제도의 왜적을 수륙양면으로 공격할 때 선봉장으로 활약하여 이를 크게 무찌르고 이어서 1595년 고성에 상륙하려는 왜적을 기습, 격퇴하였다.
그뒤 진주에 둔전을 설치하는 등 장기전에 대비하여 출전의 차비를 갖추었지만, 강화의 추진으로 출전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자 울화가 생겨 과음을 하고 군법을 엄하게 함에 막료·군졸간에 불평의 소리가 높았고, 조정에서도 실망한 나머지 그에 대한 논의가 빈번히 제기되었다.
1596년에는 도체찰사 윤근수의 노복을 장살하여 투옥되었으나 영남유생들의 상소와 정탁의 변호로 곧 석방되었다. 그해 7월 홍산에서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원수 권율의 명을 받아 진주에서 운봉까지 진군하였다가, 난이 이미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로 돌아가려 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해 진주로 돌아왔다.
이때 이몽학과 내통하였다는 충청도체찰사 종사관 신경행과 모속관 한현의 무고로 최담년 · 곽재우 · 고언백 · 홍계남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에 정탁·김응남 등이 그의 무관함을 힘써 변명하였으나 20일 동안에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체구가 작지만 날래고 민첩하며 신용이 있었다고 하여 용력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많다.
1661년(현종 2)에 신원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1681년(숙종 7)에 다시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1710년에 봉사손인 수신도 녹용되었다.
1788년(정조 12) 의정부좌참찬에 추증되고 부조특명이 내려졌다. 죽기 전에 지었다는 〈춘산곡〉 시조 한 수가 전한다. 1678년(숙종 4) 광주의 벽진서원에 제향되었는데 이듬해 의열사로 사액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역사적으로 무등산의 정기를 받은 사람은 많지만, 김덕령金德齡 장군(1567-1596)처럼 굵고 짧은 생을 살았으면서도 남도인들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드물다. 그가 죽은 지 400여년이 지났지만 그를 묘사한 이야기와 설화로 김덕령 장군의 의욕과 충정이 민초들의 가슴에 전달되고 있다. 일신의 영달만을 추구하는 정승・판서는 나라의 초석을 갉아먹는 민초들의 적에 불과하다. 진정한 위정자라면 민초들의 한을 풀어주고, 민초들의 신명을 이끌어내며, 나라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초개같이 버릴 줄 아는 사람만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다. 충장공 김덕령 장군이 죽기 전에 읊은 시가 애절하다.
춘산에 불이나니 못다 핀 꽃 다 불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연기 없는 불은 끌 물 없어 하노라
김덕령에 관한 설화
김덕령은 광주 석저촌 사람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병을 물리쳐 형조좌랑의 직함을 받았다. 문헌설화는 〈연려실기술〉·〈동야휘집〉·〈풍암집화〉·〈대동기문〉 등에 전하며, 구전설화는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 있다. 이야기는 대개 김덕령의 출생, 용맹과 활약, 억울한 죽음으로 정리된다. 출생은 풍수설과 관계되어 있다.
그의 부모는 중국 지관이 봐둔 땅을 몰래 조상의 묘지로 써서 비범한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쓰는 방법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김덕령이 비참하게 죽었다고 한다. 김덕령은 매우 힘이 세어 손으로 호랑이를 잡았으며, 100근이나 되는 철퇴를 양 허리에 차고 다녔기 때문에 그의 초상만 봐도 왜장이 도망갈 정도였다고 한다. 문헌에서는 김덕령이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죽은 것으로 되어 있어 실제 그의 행적과 비슷하나 구전설화에서는 그 내용이 다르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나라에서는 김덕령이 힘이 세면서도 출전하지 않았다고 하여 그를 역적으로 몰아 죽이려고 했으나 어떤 방법을 써도 죽지 않았다. 그러자 김덕령은 '만고충신효자 김덕령'이라는 비(碑)를 세워주면 자신을 죽이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요구를 들어주자 그는 자기 다리 아래 있는 비늘을 뜯고 그곳을 3번 때리면 죽는다고 알려주어 결국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이 설화는 좌절당한 영웅과 민족적 영웅의 모습을 지닌 민간영웅담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김덕령장군 영정▼
충장사▼
광주시 북구 충효동마을, 이곳은 광주시 충효동 김덕령 장군의 생가가 있는 마을이다.
충효마을은 정조대왕이 지어준 최초의 마을 이름이다▼
수령 430년 된 왕버들 세 그루. ▼
김덕령장군이 태어난 시기와 엇비슷한 하다충효마을은 광산 김씨 낭장공파 집성촌이다. 1470년대 무렵 병조참판을 지낸 김덕령 장군의 4대 조부인 문손(文孫)이 광주 서구 금호동에서 살다가 충효 마을에 살고 있는 광주 노씨 부인과 혼인해 처가마을에 옮겨와 살면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596년 김덕령 장군이 역적 누명을 쓰고 옥사를 당하고, 정유재란 때 김 장군의 처인 흥양 이씨 부인을 비롯해 큰 처남 이인경의 부인 광산 김씨, 작은 처남 이원경의 부인 제주 양씨, 의병 참여를 적극 권유한 자형 김응회씨, 김응회씨의 어머니 창령 성씨 등 5명이 왜군에 쫓기다 순절하거나 칼에 맞아 죽게 되는 불운이 잇따라 억울한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심었다는 것이다.
또 김덕령 장군의 형인 김덕흥씨가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사망하자 의병을 수합, 권율 장군 휘하에서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는데 힘썼던 김덕령 장군의 탄신을 기념하기 위해 왕버들을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처럼 많은 사연을 안고 있는 충효동 왕버들 주변에는 환벽당, 충장사 및 소쇄원, 식영정, 독수정, 가사문학관 등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는데다 김덕령 장군 관련 스토리텔링까지 더해 광주ㆍ전남 문화관광 1번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할 것으로 보인다.
광주시 문화재전문위원인 오광인 전남대 명예교수는 "충효동 왕버들은 수관 자체가 우람하고, 아름다운 나무의 고유 형태를 지녀 조경적ㆍ미적 가치가 뚜렷하다. 또 많은 전설과 설화가 담겨 있고 자연과 인간, 그리고 문화를 절묘하게 나타내며 신비로운 모습과 특징을 지니고 있는 상징적인 자연기념물이다"고 말했다.
광주시 북구 충효동 마을 일대가 관광지로 개발되고 있다
역사적 스토리가 많은 곳이다▼
평지보다 약간 높은 구릉에서 바라보니 무등산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좋은 집터라는 느낌이 든다 ▼
이곳이 김덕령장군의 생가터다
집은 물론 없고 비석만 집터를 지키고 있다 ▼
이 집은 생가터 바로 옆에 후손이 지은 한옥이나 이마저 무너지고 있다▼
정겨운 시골풍경이다▼
충효샘, 충효마을 공동우물▼
충장공 김덕령 장군 일가를 기리는 정려비각▼
김덕령장군 산소 ▼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