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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키시마마루호 폭침사건...해방 조선 귀국선... 일본 해군함에 타고있던조선인 5000여명을 바다에 수장시키다.천인공로할 사건...

작성자홍삿갓|작성시간21.01.03|조회수503 목록 댓글 0

 

 

 

 

 

 

43친우 여러분.. 장마라 많이 불편하지만..비가 오니..약간 시원하지요.

 

매미소리가 나기 시작했어요... 조금 참으면 가을이 온다는 소리.....

 

곧 8월15일이  됩니다만.. 우리에게 해방은 어떤 의미일까요...

 

 

 

 

일제의 압박을피해  또는 독립운동을 위해..징용으로 끌려갔다가..

 

  해방조국으로 돌아오는  마음은 흥분으로  들떠 있어겠지요..

 

그.."'귀국선""'은

 

광복 후 일본과 중국 혹은 멀리 남방에서 돌아오는 귀국동포들의

 

감격을 표현한 노래이며.. 노랫말은 모두 3절로 되어 있고 그 첫 절은 다음과 같답니다요.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산천 찾아서

 

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꽃을

 

얼마나 외쳤던가 태극 깃발을

 

갈매기야 웃어라 파도야 춤춰라

 

귀국선 뱃머리에 희망도 크다""""''

 

 

 

4분의 2박자에 내림나장조로 되어 있고. 트로트 리듬에,

 

 형식이 무시된 28마디의 곡이며. 노랫말은 작사자가 부산 부두에서

 

 귀국선의 모습을 직접 보고 만들었다 하지요.

 

 

 첫 음반이 실패한 이후 노래는 무대공연을 통해 알려졌으며..

 

 

  1951∼2년 무렵 대구에서  재취입하여

 

 흥행에 성공, 크게 유행되었지요.

 

 흔히 있었던 일본음계에 의한 일본식의 대중가요와는

 

  다른 선율진행으로, 개성이 뚜렷한 광복 가요의 인상을 주었다는군요.....

 

 

 

 

""'우키시마""<浮島'>>란 한자뜻이 가라앉지 않는 섬..

 

그러나 가라앉은 배의 이름이 되었으니 작명이 잘못된것같지요...

 

 

 

우키시마 호 침몰 사건 1945년 8월 22일 ..해방이 되어 조선으로 귀환하는

 

조선인을  가득 싣고 있었지요..

 

그 조선인은  일제 강점기 주로 징용에 동원되어 노예처럼 부려지던 조선인이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고저 희망에 부풀어.. 조국의 땅으로 가고자 하는

 

불쌍한  조선인이 거의 전부  승선하고 있던 귀국선이었지요...()

 

 수송선 우키시마마루(浮島丸)호가 원인 모르는 폭발사고로 침몰한 사건이며.

 

 항복 선언을 한 지 일주일 후인 1945년 << 팔월 22일....

 

 

 

오전 10시, 우키시마마루 호는 조선인 7000여 명을 태우고 일본 북동부의

 

<<<,아오모리 오미나토>>>을 출항해 <<,부산>>>.으로 향했다.

 

도중인 24일, 돌연 방향을 틀어 <<교토 마이주르항..>>>>.으로 기항하는

 

 중에 폭발과 함께 침몰하였답니다요.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는  <<기뢰>>>에 의해 침몰한 우발적인

 

사고라는 설, <<,일본 해군이..조선에 가기싫어>>>이 고의적으로 격침시켰다는 설이 양립하고요.

 

 

공식적으로는 사고 당시 <,조선인>>.3,725명과 일본 해군 승무원 255명이 타고 있었으며

 

, 이 중 한국인 524명과 일본 해군 25명 등 549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실종되었다고

 

 발표되었으나, 사망자가 5000명을 넘는다는 자료도 있다는군요

 

.

희생자와 유족들이  일본 법원에 국가의 배상청구 소송을 제소하였고

 

 교토지방재판소에서는 일본 정부의 안전 배려 의무 위반을 이유로

 

 생존자 15명에게 1인당 300만 엔의 위로금 지급 판결을 내렸으나,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 요청은 기각했다. 그러나 이 판결마저

 

 오사카 고등재판소에서 번복되어 원고패소판결을 내렸다는군요....

 

 

아직까지 이 사건의 진상조사나 일본 정부의 사과나 배상은 이뤄지지 않고 있지요...

 

 

 

 

 

 

 

 

 


. 일본측은 승조원들이

 

 탑승자들을 갑판으로 유도했다고 하는데, 사건 바로 다음해인 1946년에 남긴 생존자

 

 채아무개 씨의 증언은 정반대..일본 해군승조원이 조선인을..을 갑자기 배 밑으로

 

내려가도록 채근하는 사이에, 승조원들은 우키시마호의 ""소함"<<작은보트>>."'을 타고 배를 빠져나갔으며

 

 그 뒤에 배가 폭발했다는 것이지요.

 

 

 

또다른 생존자 강아무개 씨 역시 당시 배에 있던 일본 해군들이 사라지는 일들이 있었고

 

배가 폭발하기 직전에는 일본 해군들이 기관실로 몰려갔다고 증언했지요.

 

강씨의 위 증언에서는 승조원들이 강제로 조선인들을 선창에 밀어넣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없고, 자기는 "선상 제일 꼭대기"에 타고 있었다고 분명히 하고 있다는군요

 

.

우키시마 호가 기뢰에 의한 폭발이 아닌 내부에 설치된 폭발물에 의한 폭발이라는

 

 근거는 생존자들의 증언에서 나오고 있는데... 생존자들은 하나같이 폭발음이 3~4회

 

 들렸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만약 기뢰에 의한 폭발이라면 폭발음이 서너 차례

 

들린다는것은 이상하다는 것. 게다가 기뢰에 의한 폭발일때 나타나는

 

수십 m의 물기둥도 나타나야 하는데 그런 것 또한 없었다는 것.

 

 설사 기뢰였다고 해도 기뢰가 존재하는 걸 알고 있는 일본이

 

출항을 시도했다는 것부터가 의심스럽다는것이지요...

 

 

 

 



 1954년, 일본 기업이 선체를 인양했을 당시 배의 선체가 모두 바깥쪽을

 

 

향해 구부러져 있었다는 것도 자폭설의 근거로 제기된답니다요

 

 만약 수뢰에 접촉해서 폭발한것이라면 안쪽으로 구부러져야

 

 마땅하겠지만, 우키시마호의 선체는 모두 바깥쪽을 향해 구부러져 있었다는 것

 

. 이는 선체 내부에서 폭발이 일어났다라고 생각할수 밖에 없다는 것이랍니다요...

 

 

 

 

 

 

 

 


 """''사람들의 기억너머로 사라졌을 이 사건을 끄집어 내 세상에 알린 것은

 

 1962년 ""'마이즈루시"""' 중학교 교사들이었다는군요

 

 

 

 

. 1962년 마이즈루중학교에 부임해 온 젊은 교사 노다 미키오(작고)는 일본인학생과

 

조선인학생간의 분쟁 원인이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임을 깨닫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고민하던 중 이 사건을 알게 되었답니다요

 

 

 

그는 이 사건이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데 놀랐고 사건의 본질이 결국 일본에 의한

 

 식민지지배에 있음을 깨닫고 뜻이 맞는<< 노다 미키오>><<, 수기나가 야스로오>>>

 

,<<< 요에 가츠히코>>>등 지인들을 모아 ‘우키시마마루호 순난자추도실행위원회

 

’(현재 ‘우키시마마루호 순난자를 추도하는 모임’)를 만들었다지요

 

 

 

 

 이들은 모임을 통해 사건을 조사하고 추모운동을 펼치기 시작했으며.  

처음에는 소규모 법회로 시작했던 추모행사는 시민들의 지지를 얻으면서

 

추모공원 설립, 추모비 건립 등으로 이어졌다는군요

 

.

 

 1989년 <<쇼와천황>>>의 서거했을 때 쇼와시대를 정리하는 특집이나

 

 연표 등이 제작되는 점을 노려 각 출판사에 우키시마마루사건이

 

 포함되도록 편지로 사건을 알리는 역할을 한 것도 추모모임이었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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