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마귀에게 받으셨던 시험에는 ‘고난’이 없습니다—‘유혹’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십일의 금식을 마치시는 날—금식 사십일 째—마귀가 감히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께 세가지 시험을 했는데, 그 세가지는 ‘명하여 돌을 떡이 되게 하는 것,’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것,’ ‘천하만국을 받는 조건으로 마귀에게 엎드려 경배하기’ 입니다. 마귀가 그 세가지로 시험을 한 이유에 대해서는 많은 설들이 있습니다—결국 아직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시험에 ‘고난’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유혹’만 있습니다.
그 부분이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시험과 욥이 받았던 시험간에 나타나는 두드러진 차이(점)입니다—예수님께서는 ‘유혹’으로 시험을 받으셨던 반면에 욥은 ‘고난’으로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마귀가 예수님을 공격하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사단에게 내어 주셨듯 그리고 사단이 가룟 유다를 통해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형을 당하게 역사할 때 예수님을 보호해 주지 않으셨듯이, 하나님께서 예수님도 예수님을 시험하는 마귀에게 공격을 받도록 내어 주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예수님을 공격하지 않은 것은—그래서 예수님을 고난으로 시험하지 않고 유혹으로 시험한 것은—하나님의 섭리가 있으셔서 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시험이 큰 시험인가?’하는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당연히, ‘유혹’이 ‘고난’보다 큰 시험입니다—성경에서, 다윗의 사례처럼, ‘고난’을 통해 일어선 사람들이 ‘유혹’앞에 힘없이 무너지는 사례들을 통해 ‘유혹’이 ‘고난’보다 큰 시험임을 볼 수 있지만, 굳이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인생을 오래 산 사람이면 ‘유혹’이 ‘고난’보다 큰 시험이라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받으셨던 시험(유혹)이 욥이 사단에게 받았던 시험(고난)보다 큰 시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유혹’이라는 시험을 받으셨고, 나중에는 십자가를 지는 ‘고난’이라는 시험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저희가 받는 시험을 이해하십니다—다음의 구절에 나타나듯이, 저희가 겪는 ‘유혹’과 ‘고난’을 아십니다: 저희의 대제사장님은 저희의 연약함을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죄만 짓지 않으셨을 뿐 모든 일에 저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히 4:15; 제 번역입니다)
반가운 소식입니다—예수님께서 저희를 이해하시되 머리로만 이해하시는 것이 아니시고 겪어 보셔서 마음으로 이해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저희가 겪는 ‘고난’과 ‘유혹’이라는 시험들이 어떠한지를 잘 아십니다—언제 어떠한 시험을 허락하셔야 할 지를 잘 아십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들에게 ‘고난’이 많습니다—‘고난’이라는 시험을 통해서는 오히려 신앙이 성숙하는 반면에 ‘유혹’이라는 시험을 통해서는 대부분의 경우 타락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대중매체 뿐만이 아니라 소문 등을 통해서도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소식이 사람들이 권력, 재력, 지위가 등을 가지면서 타락했다는 비극입니다. 가슴 아프게도, 그들 중에는 한때 ‘고난’을 통해 일어났던 전임사역자들도 많습니다—‘고난’이라는 시험을 통해서는 오히려 신앙이 성숙하는 반면에 ‘유혹’이라는 시험을 통해서는 타락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에 ‘고난’이 많다는 사실은 축복입니다—저희의 신앙이 예수님의 수준이 아닌 이상 ‘유혹’으로 시험을 받으면 다 타락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이라는 시험을 통해서 오히려 신앙이 성숙하기 때문입니다. 욥과 같은 믿음의 사람도 ‘고난’으로 시험을 받았다면, 저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유혹’으로 시험을 받을 만한 수준은 못됩니다. 그러므로 ‘고난’으로 시험을 받는 것은 사실 감사의 조건입니다—신앙이 성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들에게 ‘고난’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권력, 재력, 지위 등이 없다는 것은—그래서 ‘유혹’으로 시험을 받지 않는 것은; 따라서 삶에 ‘고난’이 많은 것은—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의 삶이 서럽고 억울하고 고달프겠지만, 신앙이 성숙하는 지름길이고 천국에서 권력, 재력, 지위 등의 부귀영화를 영원히 누리게 되는 은혜의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에 나타나는 ‘고난’이 덧없지 않습니다—받을만한 가치가 있고 그래서 의미가 있습니다. 천국에서 누리게 될 부귀영화까지는 고려하지 않더라도 신앙이 성숙하면서 즐기게 될 하나님과의 교제를 생각하면, 당장의 서러움과 억울함과 고달픔은 견딜만 합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재림이 무척 가까워 졌다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못견딜 것도 없습니다—조금만 더 참으면 됩니다.
그러므로
힘내시기 바랍니다—조금만 더 참으시면 됩니다.
성령님께서 도우십니다—성령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 출처: Daum Café, “Dean’s Study (딘스 스터디):” http://cafe.daum.net/deanjestory/CTuB/7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