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속성인 신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이 예수께서 지상에서 행하신 사건을 담고 있지만
요한복음은 죽으시고 다시 사신 다음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일어난 일을 말씀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그리스도의 속성을 모르면 성경을 이해하기 힘이 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듭남 없이 성경대로 살면 된다고 말을 하는데 그건
명분주의자들의 무책임한 말들입니다. 성령이 아니면 말씀대로 살아지지 않습니다.
자기도 안 되면서 남을 가르치려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속성을 모르는 거짓말쟁이들입니다.
거짓말쟁이란 말은 예수께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과
같은 율법을 좇는 종교적 위선자들에게 붙여준 이름입니다(요8:44)
율법이 거짓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죄에 빠져 바로 율법을 준수할
능력이 없음에도 순종할 수 있다고 가르치니 그게 바로 거짓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거짓이 전문인 그 아비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하와에게 뱀이 결코 죽지 않는다(창3:4)고 한 말은 인간적으로는 거짓말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육신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죽는다는 것을 육신의 죽음만 생각하고 아담 안에서 하나님과
분리가 된 사망에 의해 영원히 멸망하는 죽음을 모르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야말로 흙만 먹는 독사의 자식들입니다. 땅에 속한 자들입니다(계12:12)
영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그와 함께 그 분의 속성을 따라가므로 닮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신령한 체 한다고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의 속성이 흘러나오므로 그 사람은 영적인 사람으로 인정받습니다.
기독교 외에도 영적인 신비한 체험을 말하는 종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그의 영과 생명에 의해 그리스도의
속성인 사랑이 배어 나오지 않으면 그걸 영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신비롭기만 하면 다 영적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원시적인 종교성을 가지고 자연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명상을 영성이라고
말하거나 진리를 따르지 않고 마음을 비우고 조용히 하나님을 체험하려는 기도를
영성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민망할 정도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또 요즘 하나님을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표적운동이 성행합니다.
그 표적이 잘 못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건 초보적이며 육신에 속한 것들입니다.
인간적이란 말은 육신적이라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의
순수함이나 착함 같은 것을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하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육으로 난 것은 잘났던 못났던 영원히 육일뿐입니다(요3:6)
생물에 있어서도 종(種)의 전환은 없습니다. 따라서 거듭나서 진리의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그의 영과 하나가 되는 계명을 지켜(요14:21)
신비한 연합을 이루지 않는 한 인간이 아무리 신비한 경험을 한다
할지라도 그 육신은 언제나 육신일 뿐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을 개종중생(改種重生)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씨로 변환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이 얼마나 순수한가 또는 진실한가
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향과 그 정도를 지켜봐야 합니다.
잘못하면 그 사람의 인품이 자신에게 유익이 되므로
그 사람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 할 수도 있습니다.
다분히 실존적인 계산이죠. 옆에 두어도 손해를 끼칠 사람이 아니라
도움이 되겠다는 뜻으로 순수하다 진실하다는 등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목사에게 그 사람 참 인간적이라고 하면 칭찬이 아니라 욕이 됩니다.
휴머니즘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 말이 기분 좋게 들리겠지만
영적인 사람들은 결코 달가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바울 같은 이는 더욱 질색입니다.
만약 사도 바울에게 “당신 참 인간적인 사람이다”라고 하면
아마 물구나무서기를 해서라도 따라와서 따지고 말겁니다.
목사에게는 “그 사람 참 영성이 대단해 또는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야” 이런 평가가 나와야 제대로 된 것입니다.
육신적이고 인간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고전 2장에서는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한다고 말씀합니다.
성령의 일은 영적이어야 알아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제가 목회를 할 때에 요한복음을 10년 만에 깨닫는 분을 보았습니다.
드디어 요한복음이 들린다고 교회에서 집까지 계속 울고 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요한복음이 왜 중요한가?
진리의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과 생명을 공급받아
그 분의 속성이 나타나는 구원을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지성교육이 온 땅에 가득한데 그리스도 안에서 주의 영과 생명이
공급되므로 타고난 본성이 아닌 하늘의 신령한 본성을 공급받는 구원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입니다.
요한복음은 우리가 비록 혈과 육으로 난 사람이지만 거듭나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좇아 사는 신령한(靈化) 사람이 되는 비결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를 놓치면 기독교가 정신을 함양하고 사회계몽을 하는 정도가 되어
윤리나 도덕 또는 철학에 관한 이야기만 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의 백성다운 삶은 예수의 재림 뒤에 천년왕국에 이루어질
일로만 여기고 하나님이 부여하신 현재의 신령한 삶의 복을 가릴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천사들이 인자의 영광을 가지고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죽기 전에 보리라(요1:51)고 약속했으나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남의 동네 얘기인줄 알고 있는 듯합니다(마16:28,요1:51)
그러나 요한복음은 진리의 성령 안에서 인간을 거듭나게 해서
바로 영화(靈化)시킬 수 있는 진리의 책입니다. 3복음서와 다른 내용입니다.
만약 이 사실을 모르면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해도
무언가 공허한 영혼의 허기를 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안 하면 찜찜해서 또 참기도가 아닌 기도에 집중합니다.
어쩜 신경성 기독인의 고질병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평강이 없이 찜찜한 느낌을 받는
이유는 지금 내 영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탄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수용하여 주와 함께 죽고 다시 사심에
연합이 되어 진리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루틴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요한의 물세례만 알뿐 주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에 합하는 성령세례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응답의 증거는 진리를 따라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를 향한 정조준으로
제대로 믿고 앙망하면 평강과 기쁨의 영적인 유쾌함이 속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요한복음의 말씀을 깨달으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훤하게 열려
언제나 기도의 참 맛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항상 승리의 찬양을 주께 드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