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마22:20-22절)
몇몇 신학자들이 소수의견이긴 하지만 지금의 예수를 믿는 회심의 순간이
개혁주의자들이 말하는 회심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쪽 복음에 나오는 몇 구절의 말씀으로 예수를 믿으면 또는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식으로 구원을 싸구려로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예수를 믿으면 구원이라는 말이 보편화 되어 예수 믿는 본인조차 회색지대에서
헤매는 실정입니다. 거기다가 과학과 문명의 발달로 인해 사람의 가치관이 세속화
되어 행복을 추구하는 메시지를 희구하는 대중에게 쉬운 말로 접근하다가 이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평생 말씀을 전하다가 은퇴를 한 후에 미국에 가서 관상의
기도를 배워 그걸 전파하고 있습니다. 그건 진리를 모른다는 자기 고백이므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지려면 지금까지 여러 차례 징계를 받긴 했지만 아직도 한 참 불과
같은 시험을 통과하면서 밀린 숙제를 해야 할 겁니다. 그건 그가 몸담았던 단체의
회심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통과하지 않는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범죄하므로 생명나무를 잃어버린 건 인간의 모양뿐 하나님의 형상은 없다는
뜻입니다. 뱀의 말을 듣고 타락한 땅의 형상을 가졌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율법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려고 안간힘을 쓰긴 하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엔 하나님의 자녀도 아니고
거기다가 아브라함의 자녀도 아닌 마귀의 자녀들이 되어 버렸습니다(요8:44)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녀들이며 하나님의 선민들이라고 철석같이 믿었지만 거짓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로마의 황제를 실권자로 여겼습니다.
그들의 메시야는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다윗왕국과 같은 지상천국을 건설하는 분으로
여겼습니다. 어쩜 지금도 예수를 믿어 세상에서 떵떵거리는 삶을 살고자 하는 신자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기에 설교가 거의 인간의 웰빙에 대한 내용에 치우치는 겁니다.
예수를 대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고 하나로
연합이 되어 그리스도를 주로 부르는 것이 참 회심의 순간입니다. 예수가 왕이라는
것과 나의 구주라는 건 다른 이야깁니다. 왕은 대상이 많지만 구주는 일대일입니다.
참 회개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도전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혼인) 그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어 그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기 때문입니다(롬5:1-2) 제자들은 주님을 배우는 사람들인데 3복음을 통해
밖에 계시는 예수를 배우던 것이 요한복음은 우리 속에 오신 그리스도를 성령체험으로
배워 거리낌 없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믿음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 믿음을
두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 하는 자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곧 장사꾼의 속내로 말씀을 싸구려로 전하는 자들에
의해 진리가 감추어지고 맙니다(고후4:2) 이 망할 자들이 복음을 가립니다(고후4:3)
이 세상 신은 유대인이 말하는 하나님은 실제의 하나님이 아니듯 세상이 말하는 하나님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그 안에 비치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 하나님의 형상이 되십니다(고후4:4)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잠20:27)이기 때문에 우리의 몸 곧 모양이 하나님의 형상과
말씀의 램프냐 타고난 인간성의 램프냐는 건 잠깐만 보면 금방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중요한 것은 3복음서를 통해 육신으로 오신 예수를 배우던 제자들이
진리의 성령이 임하셔서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배우므로 영화(靈化)되어서 드디어
주의 영과 생명이 하나님의 형상화 되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드러내는 램프가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쉽게 말하여 靈化되는 것이 榮化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영광은 의식과 가치를 의미합니다. 가치관과 인생관이 달라져 운명이 바뀌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시고 영화롭게(롬8:30) 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따르지 않으므로 율법의 자리 곧 율법의 교훈, 절기, 속죄, 의식 등을 지키기
때문에 성령은 밖에 나타나는 에피 성령의 역사뿐이고 그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은사뿐입니다. 안타깝게도 이와 같은 패턴이 성령세례라는 유치한 말로
유통이 되니 통탄할 노릇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사람 앞에 서면 펄펄 뛰다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풀이 죽어 그 얼굴이 파리하든지 아니면 누렇게 변해가는 겁니다.
그러나 새 언약 곧 그리스도께서 개인의 주가 되어 그 안에 계신 주와 하나가 되는
진리를 배우는 사람은 언제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죽었고 다시 살아난 자로 돌아가면
율법의 수건은 벗겨지고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어 거울을 통해 얼굴을 보듯
주의 영광을 보는데 그의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고후3:17-18)
만일 이와 같은 실재가 없다면 아직 젖먹이든지 아니면 세상 신에 취해 비틀거리고 있는
겁니다. 땅의 포도주에 취해 있어 그리스도의 신부의 예복이 뭔지도 모르며 자신의 행실을
단속하려고 안간힘을 쓸 뿐입니다. 땅의 형상이기에 혈과 육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랄 수
없습니다. 문제는 복음이라며 역사적인 사건의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느냐 아니면 부활과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아담 안에 죽었던 자들 안에 부활이 되심을 증거하느냐 하는
싸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할 말이 태산이지만
오늘은 이 정도로 하고 내일 다음의 말씀으로 심령들을 계속하여 후벼 파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