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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태신앙(母胎信仰)은 [못해 신앙]일까?

작성자초산나|작성시간19.04.08|조회수500 목록 댓글 4

 

 

                                 

 

 

무능력하고 무기력하고 구원의 확신이 없는 신앙을 [못해 신앙]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못해, 못해]를 입에 달고 사는 [못해 신앙]은  [모태 신앙(母胎信仰)]에서 기인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주로 한국적인 환경에서 많이 사용되는 모태 신앙이라는 말은 영어로 [Cradle Christiian] 혹은  [Christians by birth]라고 말한다.

 

얼마 전 도전적인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모태신앙이란 말이야 이를테면 '못해 신앙'이야...

그러고 보니 참으로 그랬다. 모태신앙이 [못해 신앙]었다.

"전도도 못해', '기도도 못해', '헌신도 못해'... 무엇도 못하고, 무엇도 못하고, 못하는것이 참 많은 것이 신앙 중에 모태신앙이었다.

모태신앙이라는 말이 참으로 나에게 거슬렸다.  이유는 내가 믿는 가정에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주님을 만난 적이 없이 혈통으로만 교회를 다녔기 때문이다. 모태신앙이 주님과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이며 영적인 관계가 없는 허점이 뚜렸해서 언젠가는 '못된 신앙'이라고 한적도 있었다...... .. "

 

이같이 써 내려가다가 이 글은 아래와 같이 끝을 맺었다.

 

"아무쪼록 간절히 원하는 바는 전 세계의 '못된 신앙', '못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다 예수를 개인적으로 만나고 그 분을 사랑함을 이기지 못해서 전도하고 기도하고 헌신하는 뜨거운 믿음의 사람들로 변화받기를 오늘도 기도한다.... "

 

우리가 알고 있는 모태신앙의 고민은 바울로부터 시작될 때가 많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극적인 변화가 있어야 할텐데 모태신앙은 그런 극적인 전환점이 없다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경로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데서 고민이 시작된다.  

 

그러나 이 생각에는 한 가지 함정이 있다. 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 주님과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바울이 돌아오기 위해서는 180도 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태신앙의 경우, 바울처럼 심히 엇나가 있는 경우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의 폭이 30도, 50도 정도로 작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태신앙의 경우 어떻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는지 알 수 있을까?

 

R.C. 스프룰(R. C. Sproul)이 쓴 [구원의 확신]이라는 책은 우리에게 두 가지 원리를 설명해 준다. 두 가지 질문을 통해 답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예수님을 온전히 사랑하나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할 수가 없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성령님께서 주시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님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만 받는 선물이다. 만약 내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는 증거인 것이다.

 

둘째, “성경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하나요?”

 

첫 번째 질문과 이어지는 질문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어떨까?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하고 죄 짓는 것에 대해 아파한다. 물론 인격적 만남 이후에 아예 죄를 짓지 않는 건 아니다.  대신 죄에 대해서 슬퍼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것을 회개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무기력하고 무능할 수 있다. 그것은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살펴보면 알게 된다. 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사랑하면 날마다 보고 싶어진다. 사랑하면 시시때때로 소식을 전하고 싶어진다. 다 주고도 모자란다.

 

모태신앙이 [못해 신앙]은 아니다. 아직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수  있을는지 몰라도. 그런데  그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꼭 극적인 바울의 회심같은 사건을 겪어야만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뢰와 같은 소리를 통해서도 그리고 세미한 음성을 통해서도 들리는 것이다.

 

나는 모태 신앙이다. 한 때 무기력한 신앙을 소유한 적도 있었다. 잘못되고 타락한 삶을 살기도 했다. 그 때 모태 신앙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소망이 없는 곳을 향해 멸절하고 말았을 것이다.

 

외가로부터 모태 신앙은 흘러왔다. 목사님이신 아버님으로부터 그 모태신앙이라는 DNA가  흐르고 있다.

 

으악하고 소리지르며 태어났을 때 알지도 못하는 피덩어리의 귀에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소리가 진동했다. 첫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 눈믈 나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피덩어리가 어찌 들을 수 있었을까? 이것이 모태신앙이다. 여기에 무슨 결신이고, 결단이고, 구원의 확신이란 말을 꺼낼 수 있겠는가?

 

나는 싫었다. 주일에는 학교 공부나 교과서를 펼쳐 놓고 시험공부를 할 수 없었다. 예배, 노방전도, 구제활동, 성경공부에 전념해야 했다. 이것은 자발적인 신앙생활이 아니었다. 반강제적이었다.

 

교인들도 주일에는 장사도 하지 말아야 했다. 돈을 주고 식당에 가서 음식을 사 먹어도 안되는 날이 주일이었다. 이런 율법을 강요하는 신앙생활이 어디있단 말인가?

 

학교 등교시간에 지각을 하는 한이 있어도 가정예배는 드리고 가야 했다. 많은 식구가 모여서 식사를 할 때도 함께 기도하기 전에는 배가 고파 죽는 한이 있어도 밥을 먼저 먹을 수 없었다.  

 

외할머니는 주일 날 헌금할 돈을 반듯이 다리미질 하셨다.  할아버지 옷을 손수 벗기시고 새 옷으로 갈아 입히셨다. 그리고 예배드리러 가시는 모습이 그렇게 기쁜 모습일 수가 없었다.   모태신앙은 이런 모습을 보고 자란다.

 

심심하다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할머니를 졸라대면 어김없이 성경에 있는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그 외할머니는 성경에 있는 이야기를 다 들려 주시기 전에 하늘나라로 가시고 말았다.

 

노래도 찬송가 밖에 부르지 못하게 하여 잠간 사회생활 할 때 유행가를 몰라 불편(?)할 때도 있었다. 나는 지금 모태신앙에 관하며 글을 쓰고 있다.

 

나는 서재에서 공부 할 때 Abiding Radio라는 Streaming 영어 찬양방송을 듣는다.  감사한 것은 대부분의 찬송을 나도 함께 콧노래로 따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은혜가 배가 된다. 이 모두 어렸을 때의 모태신앙 덕인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할머니 아니 증조 할아버지 그보다 더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나의 모태신앙이 시작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를 어렸을 때 모태신앙으로 키워주신 돌아가신 외할머니와 어머님께 감사드린다. 100세가 다되셨는데도 건강하게 활보하시며 맑은 정신으로 아직도 아들의 [모태신앙]을 위해 기도하시는 아버지 목사님께 감사드린다.

 

모태신앙은 결코 [못해 신앙]이 아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디모데후서 1:5"  (장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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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love is | 작성시간 19.04.09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 작성자요게벳~! | 작성시간 19.10.23 자료 감사합니다.
  • 작성자beliveyel | 작성시간 20.12.23 자료 감사합니다.
  • 작성자love is | 작성시간 21.11.08 자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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