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우는 베드로*권오진 목사

작성자(一麥.)|작성시간26.06.10|조회수43 목록 댓글 2

우는 베드로

마가복음 14:54, 66-72 / 권오진 목사

 

지난주일 설교 마지막 부분에 15세기 이탈리아 수사이며 화가인 ‘프라 안젤리코(천사같은 수도사)( (Fra(수도사) Angelico(천사 같은) 1387-1455)’의 그림 한 점을 보여드렸습니다. <조롱당하는 그리스도>란 제목의 그림이었습니다. 오늘도 프라 안젤리코 수사의 그림 한 점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가 이 그림을 소개하려고 생각한 동기는 올해 설 연휴에 읽은 책 때문입니다. 책 제목은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입니다. 책 마지막 부분에는 10년 동안 자신이 보았던 작품 중에 제일 마음에 들었던 그림 한 점을 소개합니다. 그 그림이 프라 안젤리코 작품입니다. 패트릭 블링스가 최고라고 소개한 작품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 입니다. 이 그림을 보시면서 패트릭 블링스가 이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를 들어보세요.

 

“예수의 몸은 태풍에 요동치는 배의 돛대에 못 박힌 것처럼 보인다. 그를 중심으로 나머지 세상이 흔들리며 돌아가고 있는 듯하다. 우아하면서도 부서진 몸은 뻔한 사실을 다시 상기시킨다.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 고통 속의 용기는 아름답다는 것, 상실은 사랑과 탄식을 자극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림의 이런 부분은 성스러운 기능을 수행해서 우리가 이미 밀접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불가해한 것에 가닿게 해 준다. 그러나 안젤리코 수사가 묘사한 것은 예수님의 몸뿐만 아니다. 그는 십자가의 발치에 뒤죽박죽으로 모여있는 구경꾼 한 무리를 상상했다. 옷을 잘 갖춰 입은 사람, 말을 타고 있는 사람 등 꽤 많은 구경꾼의 얼굴에는 놀라우리만치 다양한 반응과 감정들이 떠올라 있다. 침통해 하는 사람들,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들, 지루해하는 사람들, 심지어 다른 곳에 신경이 팔려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세상 사람들의 반응은 뒤죽박죽되어 있습니다. 전부 자기가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을 생각하면서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내용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예수님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받으시고 신성 모독죄로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정죄 된 내용을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공회에서 재판받으실 때, 그곳에 함께 있었던 베드로에게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베드로에 관한 기사는 54절에 시작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54절) 그리고 이어 예수님이 공회에서 재판받으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히 자신의 정체성을 밝혔습니다. 오늘 다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드로 – 예수님 – 베드로” 이런 구조를 샌드위치 구조라고 한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렇기에 베드로 이야기를 살펴보려면 샌드위치 구조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샌드위치 윗부분 54절을 다시 보세요.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54절) 이 말씀에는 긍정적인 부분이 하나 나오고, 부정적인 부분도 하나 나옵니다. 긍정적인 부분은 “베드로가 예수를 ... 따라”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다 도망갈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어떤 순간에도 버리지 않겠다고 말한 자답게 예수를 따라서 온 것은 아주 긍정적이 면입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요소도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오기는 했지만 “멀찍이” 따라왔다는 것입니다. 여차하는 순간 도망갈 수 있도록 멀찍이 따라온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멀찍이”는 위험한 단어입니다.

 

그럼 샌드위치 아래쪽 내용을 생각해 봅시다. 이 내용을 생각하려면 예수님과 베드로가 겟세마네 동산으로 오며 나눴던 말씀을 먼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막 14:29-30) 베드로는 다른 제자는 다 버려도 자신은 그렇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완벽하게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새벽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까지는 멀찍이 따라왔습니다. 베드로의 장담대로 되는 듯합니다. 하지만 샌드위치 아래쪽의 말씀인 오늘 보면 예수님의 예언대로 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받는 시간에 밖에서 있었던 일을 다룹니다. 이제 말씀 순서대로 <세 번의 고발과 세 번의 부인> 내용을 살펴봅시다.

 

1. 첫 번째 고발과 첫 번째 부인 (66~68절)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66-68절)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 보면 장소에 대한 표현이 다르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같은 장소를 다르게 표현한 것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세 번 부인했다는 것입니다. 고발자 – 대제사장의 여종이었습니다. 고발한 내용 -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베드로 - <무슨 말 하는 거야? 도무지 못 알아듣겠네!>하며 부인합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분이 행하시는 수많은 이적을 보았건만, 여종의 고발 한마디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해 버립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부르신 이유는 “자기와(예수) 함께 있게 하시려고”(막 3:14) 부르셨는데, 베드로는 예수님이 부르신 근본적인 이유까지 부인한 것입니다.

 

2. 두 번째 고발과 두 번째 부인 (69-70절 a)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 또 부인하더라” (69-70절 a) 고발자 – 여종(눅, 다른 사람(남자)) 고발한 내용 -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저 사람도 한 패라오) 베드로 – 부인함 ※ 제자란 모름지기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인데, 베드로는 예수님과 한패라는 말에도 그렇지 않다고 부인합니다.

 

3. 세 번째 고발과 세 번째 부인 (70b-71절)

“…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70b-71절) 고발자 – 곁에 있던 사람들(여러 사람) 고발한 내용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네가 갈릴리 사람이니 틀림없이 저들과 한패라>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여종에게 부인하는 말을 들어보니 갈릴리 사투리를 쓰거든요? 그러니 베드로가 예수님과 한패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 부인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 난 정말 모르는 사람이오>라고 부인합니다. 이 세 번째 부인에는 안타까운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저주하며 맹세하되” 베드로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는 것으로 모자라 예수님을 저주까지 했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 완벽하게 부인합니다. 그 순간 예수님이 예언하신 대로 닭이 두 번째 울었습니다.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72절) 닭 울음소리를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났고 울기 시작합니다. 닭도 울고, 베드로도 울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 26:75 / 눅 22:62))

 

세 번 부인한 베드로는 <엎드려 우는 베드로>로 변합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빈 무덤을 찾아가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만 마가복음에는 여기가 베드로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엎드려 우는 베드로>에게서 우리는 희망을 엿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눈물이 참회의 눈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눈물을 흘릴 것까지 아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다시 보자고 약속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막 14:28; 16: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베드로의 세 번의 부인의 결과로 <엎드려 우는 베드로>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기독교 역사를 보면 죽음 앞에서도 당당한 신앙의 선배들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주간 있었던 일본 기독교 역사 탐방을 통해서도 또 느끼고 왔습니다. 일본 에도 시대(1603-1867), 대략 260년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죽음을 선택한 믿음의 선배들을 대할 때면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대단하고 확실했는지 알게 됩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멀리 떠날 때도 있습니다. 이때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말씀 안에서 나의 믿음의 현주소’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엎드려 우는 베드로>처럼 우리도 주님 앞에 엎드려 통곡하면서 울어야 합니다. 그 눈물이 있는 자에게 주님이 주시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제 오늘부터 한 주간 동안 내가 베드로라 생각하고, 자신의 신앙의 부족함을 발견하고, 주님 앞에 나와 <엎드려 우는 자 되어>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회복의 역사를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남은 인생을 회복하여 베드로처럼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가 모두 되시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하늘바라기 | 작성시간 26.06.10 💖인간은 세상을 홀로 살아 갈수 없기에 함께 어울려 살아가며
    나보다 먼저 남을 배려할줄 알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몸이 가는 길에 바람이 불면 흔들리지만 마음이 가는 길은 바람이 불면 사랑하게 된다는데
    오늘은 몸보다 마음이 먼저 길을 나서보는 것은 어떨까요?
    행복한 시간 속에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편안하게 빵긋 웃으며 행복이 가득한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 작성자별이야 운영자 | 작성시간 26.06.10 설교 감사합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