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요한복음 강해16-불신앙

작성자(一麥.)|작성시간26.06.10|조회수36 목록 댓글 3

요한복음 강해 (16) - 표적을 구하는 불신앙
요한복음 2:18 / 김형익 목사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매우 실제적으로 경험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표적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주심으로써 표적을 달라고 구할 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비즈니스, 건강, 자녀문제…기타 등등 많이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명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는 더 심하게, ‘표적을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믿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듣습니다. 이것이 정말 잘못된 것입니까? 성경이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저는 ‘하나님 이 문제를 풀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의 증거로서 표적을 요구하는 태도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묘하지만 분명히 다른 차이입니다.

1. 두 가지 반응
주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은 그 자체로 하나의 표적이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사렛출신의 청년이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난동을 부린 것을 성전 시위대나 고위 제사장들 또는 자기 물건을 지킬만한 험한 장삿군들 중 아무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무기를 들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노끈으로 채찍을 삼은 것 하나 밖에 없었는데 말입니다. 그분은 마치 성전의 주인처럼 행세를 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불과 주님의 제자가 된지 며칠 밖에 되지 않은?은 시편 69:9에 있는 구약의 예언을 생각했다고 했습니다(17). 그들은 ‘아, 하나님의 예언이 이 분, 메시야를 통해서 성취되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반응이 여기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합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한편에서는 주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함으로써 더욱 확인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동일한 것을 보고도 표적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즉, 이것만으로는 믿을 수 없으니까 다른 표적을 더 해보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표적을 구함으로써 잃어버리고 마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그리고 주님의 말씀과 행위는 언제나 사람들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그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말입니다. 오늘날도 그것은 무서우리만치 동일합니다. 똑같은 복음의 말씀을 듣는데 그 말씀으로 거듭나고 구원을 얻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 말씀을 거절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2.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은 영적 이해가 부족한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미 저는 표적을 구하는 마음 자체가 불신이라는 뜻을 보였습니다. 이렇게 표적을 구하는 것은 그들의 영적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것은 영적 어두움의 증거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표적을 구한 많은 경우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 중에서 두 가지 예만 들려고 합니다.

A. 떡을 먹은 사람들(요 6:30~33): 오병이어 기적을 본 후에 표적을 구하고 있다.
요한복음 6장에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옵니다. 이 기적을 보고 또 체험했습니다. 그들이 배불리 먹고서 하는 말을 보십시오. “당신은 이제 무슨 표적을 보여 우리로 당신을 믿게 하시겠습니까?”(요 6:30). 나중에 그 본문을 상고할 때 더욱 자세히 살피겠지만, 놀랍기만 한 것은 그런 기적을 본 후에 그들이 요구한 것이 믿을만한 표적을 달라고 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그들은 한 번이 아니라 모세가 40년 동안 광야에서 한 것처럼 매일 매일 이렇게 해보라는 뜻이었습니다.

B.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마 12:38):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신 후에 표적을 구하고 있다.
마태복음 12장에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몇 사람이 예수님께 표적을 구했는데, 이 표적을 구하기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눈 멀고 벙어리된 자를 고쳐주셨습니다(마 12:22). 그러자 이것을 지켜보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요구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심한 말을 하십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39).” 이와 유사한 상황이 마태복음 16장에서도 재연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하늘의 표적을 구합니다(마 16:1). 여기서도 주님은 같은 말씀으로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꾸짖으셨습니다(마 16:4).


3. 주님이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음란하다’고 하신 뜻(마 12:38; 16:38)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왜 그들은 자기 눈 앞에서 기적을 보면서도 주님께 또 표적을 요구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주님은 왜 그들에게 악하고 음란하다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악한 것은 그렇다 치고 왜 음란한 것입니까? 악한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믿지 않는 마음입니다. 믿지 않는 마음을 악심이라고 합니다(히 3:12). 그러나 음란하다고 한 것은 단지 성적인 죄를 지적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음란한 것과 같은 마음의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음란한 것은 자기의 배우자로 만족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이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면에서 이것은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않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내게 하고 계시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표적을 구하는 것입니다. 자족함이 없는 마음입니다. 만족이 없으니까 뭔가 새로운 것을 찾고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병이어로 배불리 먹은 후에 사람들이 표적을 구한 것은 한 번이 아니라, 하루가 아니라 평생토록 매일 그런 기적을 행하라는 요구입니다. 그들은 이 사건, 이 표적을 통해서 그들 앞에 계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이 이 세상의 정욕에 붙들려 있었기 때문에, 만족함이 없었고 이 참에 봉을 잡자는 식의 생각이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이 음란한 마음입니다. 눈 멀고 벙어리된 자를 고치신 것을 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마음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뭐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들은 표적을 보고 믿을 생각이 없습니다. 이것이 악한 것입니다. 무엇을 해도 그들은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요구는 끝도 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이것이 음란한 마음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에도 이런 성향이 혹시 여러분 가운데에서 발견되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어떤 기적을 보여주셔야 그 살아계심과 능력을 믿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을 주님은 악하고 음란한 마음이라고 하셨고 그들에게는 결코 요구하는 표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4. 마리아와 세례 요한은 악하고 음란한 것이 아니다(요 2:3; 마 11:2~3).
여기서 우리가 멈추어 생각할 것 하나는 주님께서 표적을 나타내시는 것과 사람들이 표적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주님은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표적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요나의 표적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죽은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에 대한 말씀인데, 주님이 다시 사셨어도 사람들은 거짓말을 지어냈고 믿지 않았다는 것,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표적을 또한 나타내셨습니다. 

 

가나의 결혼식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주셨습니다. 이 사건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알렸습니다(요 2:3). 비록 주님은 이것을 책망하셨지만, 표적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마리아가 책망을 받은 것은 표적을 구한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표적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마리아가 구한 것은 필요를 채워주십사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여기서 마리아의 마음은 악하고 음란한 마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께 여러분의 필요를 채워달라고 기도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표적을 주시면 믿겠습니다’는 식으로 나아가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세례 요한을 보십시오. 그는 생애의 마지막에 감옥에서 제자들을 주님께 보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온 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한 자로서 예수님을 지켜보면서 왜 그가 메시야로서 세상에 자신을 분명하게 드러내시지 않는지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서 ‘당신이 그분입니까?’라고 묻게 한 것입니다(마 11:3). 사실상 세례 요한도 어떤 표적을 구하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역시 우리는 이것을 악하고 음란한 마음과는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단지 확신이 흔들리는 때를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들에게 이런 상황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믿고자 하는 마음이었지, 악심도 음란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그렇게 책망하시기 보다는 이사야 61:1~2을 인용하여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걷고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라’고 하셨습니다(마 11:5). 이것이 보여주는 바는, 믿는 사람도 믿음이 연약하여 표적을 구하게 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5. 위험!: 악하고 음란하게 표적을 구하는 자들은 사단의 미혹을 받는다(마 24:24; 살후 2:9~10).
제가 오늘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이 지적하시는 바 악하고 음란한 마음, 믿지 않고 자족함이 없는 마음으로 표적을 구하는 자들은 결국 사단의 미혹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마음은 사단이 미혹하기 가장 좋은 마음의 상태입니다. 여러분, 자족함이 없는 사람이 뭔가 유혹에 걸려드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일확천금을 바라는 사람은 사기를 당하고 거짓에 속기도 쉬운 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으로는 표적을 구하는 태도에 연관되어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이 이들을 미혹하고 그들이 미혹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표적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이들에게 넘치도록 표적을 보여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 주님은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표적을 주시지 않으나, 거짓 그리스도들은,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의 요구대로 표적을 행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후서에서 이렇게 지적합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라고 말입니다(살후 2:9).

그러므로 여러분, 기적이 나타나는 곳이 옳은 곳이고 주님이 역사하시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결국 그런 기적을 추구하는 자들은 그런 기적으로 말미암아 사단에게 속고 멸망하게 된다는 성경의 경고를 들으십시오.

6. 적용할 원리들
유대인들이 주님께 표적을 구한 것은 결코 그들의 진지한 신앙적 요구가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것은 악하고 음란한 마음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적용할 원리들이 있습니다.

A. 하나님은 우리가 음란한 영에 의해서 표적을 구한다면 그 요구를 듣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음란한 영에 의해서 표적을 구한다면 듣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결코 우리의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을 주님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눈멀고 벙어리된 자가 깨끗이 나음을 입었는데도 그 앞에서 표적을 보이라고 하는 마음을 이해하시겠습니가? 그들은 이미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자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고 다고 하느니라(잠 30:15).” 이런 마음의 상태로 하는 기도를 하나님은 듣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태도입니다(약 4:3).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혹시 여러분은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거나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행하고 계시는 방법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지는 않습니까? 믿음은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는 능력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나의 고난과 고통도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실 장래의 은혜의 한 수단임을 그가 믿음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받은 구원에 대한 감사가 메마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의 영생을 얻은 것이 감사한데, 나머지 모든 것들은 다 덤으로 얻은 것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부족의 마음 상태로 고통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B. 구원얻는 것은 표적을 봄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이다(눅 16:31; 살후 2:10).
구원얻는 것은 더 대단한 표적을 봄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거지 나사로와 부자가 죽어서 하나는 천국에, 하나는 지옥에 갔습니다(눅 16:27~31). 부자는 자기가 지옥에 온 것이 너무나 슬퍼서 아브라함에게 부탁합니다.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찌니라.” 부자의 대답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나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아브라함의 마지막 말입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무슨 의미입니까? 죽었다 산 자가 말한다고 해서, 이런 표적이 있다고 해서 믿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어도 믿지 않은 것을 보십시오. 모세와 선지자들은 성경의 진리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성경의 진리로 확신을 얻지 못한다면 그는 표적을 통해서도 구원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행하신 표적을 보고 믿는 자는 더 이상의 표적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자는 표적을 통해서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앞서 인용했던 데살로니가후서 2장을 보면, 사단이 능력, 표적, 거짓 기적을 행한다고 했는데, 멸망당하는 자들이 거기 속아서 망하게 되는데, 이는 또한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살후 2:10). 무슨 뜻입니까? 이 말은 ‘저희가 진리를 사랑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구원을 얻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표적을 사랑했지, 진리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체험을 사랑했지, 진리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은사와 능력을 사랑했지 진리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흥분하고 들떠서 뭔가 새로운 체험을 갈망하고 추구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신앙적 태도입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마음은 이렇게 막 들떠서 흥분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상쾌함과 기쁨과 만족을 주십니다. 영적 체험이 가장 깊이 표현되는 시편을 읽어보십시오. 우리는 이런 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체험이나 표적같은 감각적인 요구를 주님 자신보다 더 앞에 두지 마십시오. 그것은 영적인 간음인 것입니다.

C.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기를 구하라.
우리의 초점은 언제나 주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표적이 아닙니다. 표적이 드러내고 나타내는 것은 언제나 주님 자신이었습니다. 주님이 아니라 표적에 여러분의 초점이 가지 않도록 하십시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려고 하지 않을 때, 사람은 표적으로 그것을 대신하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다나엘이나 빌립, 안드레나 요한 등 주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결코 표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그 분 자신에게 관심을 가졌었으며 그분과 교감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분과 함께 있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유대인들을 보십시오. 표적을 구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주님 자신이 아니라, 표적을 구했으며, 주님 자신과 교제를 나누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했던 사람들이 가졌던 관심은 더 먹는 것이었지, 주님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형편, 어떤 처지에 계시던지 여러분의 최대의 관심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형편 때문에, 이 처지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것이 여러분의 소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성도들이 가졌던 신앙의 자세임을 기억하십시오. 이렇게 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법으로 표적을 여러분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하늘바라기 | 작성시간 26.06.10 💖인간은 세상을 홀로 살아 갈수 없기에 함께 어울려 살아가며
    나보다 먼저 남을 배려할줄 알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몸이 가는 길에 바람이 불면 흔들리지만 마음이 가는 길은 바람이 불면 사랑하게 된다는데
    오늘은 몸보다 마음이 먼저 길을 나서보는 것은 어떨까요?
    행복한 시간 속에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편안하게 빵긋 웃으며 행복이 가득한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 작성자별이야 운영자 | 작성시간 26.06.10 설교 감사합니다.
  • 작성자이현채 | 작성시간 26.06.11 보라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요(잠 11:31).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