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삼중주
마태복음 22:37~40 / 이규현목사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야 우리가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면,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압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 성경을 읽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신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했습니다(빌 3:8).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최고의 지식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은 혼란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정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는 사람,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온전하게 살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마 22:36)”라고 질문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항해하는 선장은 나침반을 보며 배가 어디로 가는지, 배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방향을 이탈하면,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삶의 나침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바로 가고 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 우리는 나침반 없이 살았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사는지 알지 못한 채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유행을 따라가고, 사람을 따라가고, 돈을 따라가고, 세상의 잡다한 이론을 따라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는 사람은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온전하게 살 수 없습니다. 삶이 수수께끼 같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살면서 방황할 때가 많습니다. 술을 마시며 방탕하게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온전하게 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방황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삶이 분명합니다. 인생은 한 번 뿐입니다. 인생 연습은 없습니다. 돌아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 잘 살아야 합니다. 물론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방향을 향해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자기 사랑이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삽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갈망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우선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자신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지나치게 주목하는 것은 일종의 죄입니다. 죄인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자신을 지나치게 주목한 결과, 하나님과 이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세상에서는 자신을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라, 자신에게 투자하라, 자기 행복을 추구하라고 가르칩니다. 부모들은 자녀에게 자신을 집중하라고 합니다.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라고 합니다.
자아 성취를 강조합니다.
그런데 자신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우리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웃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 22:39)”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없습니다. 오직 자신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고통하는 사람을 보고도 자신과 상관없는 일로 여깁니다. 그 결과,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자신에게 몰두한 나머지, 자신의 욕구만 중요하게 여깁니다. 자신의 만족과 기쁨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소비합니다. 이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마귀는 예수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3)”고 했습니다.
이것은 “네가 가진 능력으로 너의 필요를 채워라”는 의미입니다. “네가 원하는 것을 취하라”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 성취, 자신의 만족을 추구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으로 자신을 만족하게 하려고 합니다. 자신을 배부르게 하는 떡을 많이 가져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떡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떡을 더 많이 가지려고 몸부림칩니다. 물질주의 세상에서 떡을 더 많이 가지려고 몸부림치지만, 자신이 생각한 만큼 가지지 못하면 우울해집니다. 그래서 자신을 닦달합니다. 그런데 떡을 많이 가지려고 할수록 오히려 배고픕니다.
이를 통해 떡이 자신을 만족하게 하지 못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이웃으로부터 멀어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만 바라봅니다. 자신을 지나치게 주목한 결과, 자신에게 매몰되어버립니다. 떡이 우상이 된 시대입니다. 우상은 거짓입니다. 우상은 하나님이 아닌데, 하나님으로 착각하게 합니다. 가짜를 진짜로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우상을 하나님으로 아는 사람은 온전하게 살 수 없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만족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계속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만족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여기고 만족하려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여기는 순간, 삶이 혼란해집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로 인해 현대인들은 불안합니다. 불안한 현대인들은 자신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자신의 만족을 위해 노력합니다.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합니다. 그런데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사람은 외롭습니다.
외로움은 무섭습니다.
외로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병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은 외로움을 극복하려고 노력합니다. 게임, 도박, 스포츠 등에 몰두합니다. 광적으로 좋아합니다. 단순히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광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우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상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자신을 집중하게 합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신을 만족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때로는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절망합니다. 허무를 느낍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보았습니다.
그 후, 아담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후, 아담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숨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을 피합니다. 하나님과 멀어진 사람은 온전히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멀어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전혀 누리지 못합니다. 야고보서 1장 16~17절에 보면,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받아 누리는 삶이 가장 복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자신이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불법 구매와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마음껏 누리면 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이 아닌 다른 사랑을 갈망합니다. 부부관계의 성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온전하지 않은 관계의 성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조품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하지 않은 관계를 통해 만족하려는 사람은 참된 만족과 기쁨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나 우상숭배는 참된 예배가 아닙니다. 진짜가 아닙니다. 가짜에 몰두하면, 진짜를 놓칠 수 있습니다. 가짜로 인해 진짜를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상숭배를 통해서는 참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인색한 분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오해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만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위해 열심을 내는 사람은 쉽게 지칩니다. 자신을 위한 에너지와 열정은 쉽게 바닥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눅 10:29)”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중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는 그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습니다. 한 제사장과 한 레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누군가를 도와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저 자신의 길을 갔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뿐, 고통하는 이웃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한 제사장과 한 레위인은 이웃과 단절된 상태의 사람을 의미합니다.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율법교사에게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36)”라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것을 질문하셨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자신이 맡은 업무를 했을 뿐, 고통하는 이웃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레위인과 제사장은 종교인에 불과했습니다.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하지 않으면, 레위인과 제사장처럼 될 수 있습니다. 이웃과의 관계가 단절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때로는 위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웃과 연결되도록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웃과 연결되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건강한 삶입니다. 이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기초하여 설립한 기독교 자선 단체가 매우 많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누고 베푸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삶에 골몰합니다. 그러나 나누고 베풀며 살려면, 자신에게 골몰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라는 우상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혼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이웃과 함께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이웃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주목하는 사람은 자유가 없습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은 삶이 자유롭습니다. 삶이 풍성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사람을 보는 관점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그런데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한 것이지만, 이것은 결코 건강한 모습이 아닙니다. 자신을 주목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에너지를 모두 사용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다릅니다. 사람에게 마음이 활짝 열려있습니다. 누구든 섬기려고 합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에 보면,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삶의 이유와 목적을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걸작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일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발견해야 합니다. 삶의 이유와 목적을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사명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랑의 순서가 중요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온전하게 살 수 없습니다.
본문 마태복음 22장 3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질서가 있습니다. 무질서하게 사랑하는 사람, 무엇을 먼저 사랑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없는가, 스스로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만 온전히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 성숙한 사람입니다. 삶이 부요합니다. 안정적입니다.
그러므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최고의 예배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만 사랑한다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디베랴 호수에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6, 17)”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사명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빌립보서 2장 4절에 보면,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할 때, 삶이 풍성해집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과 다르게 사는 비결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