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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는 소금 비유*최태선목사

작성자(一麥.)|작성시간22.03.23|조회수315 목록 댓글 3

☞예수가좋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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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는 소금 비유

마태복음 21장 33-46절 / 최태선 목사


➤“33. ¶ 다른 비유를 들으라. 어떤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그 주위에 울타리를 두르고 그 안에 포도즙 틀을 파고 망대를 세운 뒤 농부들에게 그것을 세주고 먼 나라로 갔다가 34. 열매 맺는 때가 가까이 이르매 농부들에게 자기 종들을 보내어 그들이 그것의 열매를 받게 하니 35. 농부들이 그의 종들을 잡아 하나는 때리고 다른 하나는 죽이고 다른 하나는 돌로 치매 36. 그가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더 많이 보내니 그들이 그 종들에게도 그렇게 하거늘 37. 그가 맨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을 그들에게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으나 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는 자기들끼리 이르되, 이 사람은 상속자니 오라, 우리가 그를 죽이고 그의 상속 재산을 빼앗자, 하고 39. 그를 붙잡아 포도원 밖으로 내던지고 죽였느니라. 40.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오면 그 농부들에게 어떻게 하겠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그가 그 사악한 자들을 무참히 멸하고 자기 포도원은 제 때에 자기에게 열매를 바칠 다른 농부들에게 세주리라, 하매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 기록들에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 바로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한 말씀을 결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버지께서 너희로부터 [하나님]의 왕국을 빼앗아 왕국의 열매를 맺는 민족에게 주시리라. 44. 누구든지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부서지겠고 누구에게든지 이 돌이 떨어지면 그를 갈아서 가루로 만들리라, 하시니라. 45. 수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분의 비유들을 듣고는 그분께서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신 줄 깨달았으나 46. 그분께 손을 대려 할 때에 무리를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그분을 대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더라.”(마 21:33-46 KJV)


녹지 않는 소금


 ‘소금은 짜기만 한 것이 아니라 녹는 것이다. 소금은 그 짠맛을 통해서 모든 음식에 맛을 더해 준다. 그러기 위해 소금은 녹아야 한다. 녹지 않는 소금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예수께서 ➤“18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에서 일 점 일 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마침내 다 성취되리라.”(마 5:18)라고 말씀하셨다면 소금의 특징을 빌려 우리가 세상 속으로 녹아들어가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셔서일 것이다. 그분 스스로 “세상의 소금”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녹여 없애신 존재가 아니었던가?’


  ‘녹지 않는 소금’은 회칠한 무덤과 같았던 바리새인과 같이 변질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절묘하게 표현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금이 아니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소금이 짜지 않다는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의 생명에 도취되어(구원받았다고) 녹지 않음으로써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날카롭게 풍자하면서 십자가를 통해 세상의 소금으로 자신을 녹여 없애신 예수님을 떠올리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이 세상의 소금이라고 주장하면서 남에 대해 우리 신앙의 짠맛만을 주장하고 남에게로, 세상 속으로 녹아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기가 남을 간들게 하고 맛들게 하는 유일한 기준이라고 생각하며 자기중심의 존재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그리고 배타적이고 교만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까지 교회는 그런 식으로 세상을 가르치려 하였고, 그리스도인은 그런 식으로 인간을 상대해 온 것은 아닌가?


 “우리가 짜다”는 것만을 강조하면서 현실과 시대에 녹아들 생각은 않고 세상이 싱겁다며 소금을 뿌리려고만 한 것은 아닌가? 전통에 가리어, 체면에 가리어, 환상에 홀려서 자신을 녹일 생각은 하지 않고 녹지 않는 소금만을 뿌리려고 한 것은 아닌가? 녹아 없어진 예수를 녹지 않는 소금으로, 녹아 없어져야 할 교회를 녹지 않는 성채로, 녹아 없어져야 할 자기 존재를 녹지 않게 하려고 애만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세상이 우리에게서 바라는 것이 마치 우리의 흥분과 구호로 빚어진 녹을 줄 모르는 교회이기나 하듯이 말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교회와 세상, 우리와 남 사이에 녹지 않는 소금 벽만 높이 쌓고 있다.’ ‘신앙인은 교회의 삶과 현실의 삶을 이분화하지 않는다. 신앙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에서의 행위이다. 일상에 바빠 교회에 나올 수 없는 사람도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하느님은 바쁜 사람이든 한가한 사람이든 모두가 추구해야 한다. 소위 교회 울타리만이 아니라 그밖의 우리의 일상의 장소에서 체험되고 또 되어야 한다.


 신앙은 일상을 의미 있게 잘 살게 하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행위이다. 교회는 그런 신앙의 장소이어야 한다.’ 일상을 의미 있게 잘 살게 하는 신앙, 그런 신앙의 장소인 교회란 과연 어떤 교회일까요? 오늘의 말씀이 바로 그것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만족하던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주어진 포도원의 비유는 우리의 신앙, 그리고 우리의 교회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포도원의 비유


 어떤 집주인이 땅을 샀습니다. 과수원을 만들기 위하여 돌을 가려내고 땅을 골라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포도원 둘레에 울타리를 치고 원두막을 지었습니다. 포도즙을 짤 수 있는 구덩이도 팠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포도원을 돌보던 주인에게 고향 떠날 일이 생겼습니다.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맡기고 외국으로 나갔습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국외로 나가야 했으며, 오래도록 돌아올 수 없는 형편에 처했습니다. 그래서 포도가 익어갈 무렵 주인은 세를 받아오도록 농부들에게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주인의 것을 돌려주지 않고 종들을 잡아 때리고 죽여 버렸습니다. 농부들은 포도원 주인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기 때문에 종들만 처치하면 삯을 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아무것도 받지 못한 주인은 다시 한 번 종들을 보냈습니다. 이번에도 농부들은 처음처럼 종들을 잡아서 때리고 죽여 버렸습니다. 어떻게 할지 망설이던 주인은 어떻게 해서라도 삯을 받아 내려고 자신의 아들을 보냈습니다.


  농부들이 자기 아들은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농부들의 마음은 전혀 딴 곳에 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포도원을 송두리째 먹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오자 농부들은 광분했습니다. 그를 죽이면 포도원을 상속할 사람이 없으므로 포도원은 절로 그들의 소유가 되리라 판단하고 아들을 잡아 포도원 밖으로 끌고 나가 죽여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여기서 끝났습니다.


 이야기가 어떻게 될지 여운이 남습니다. 포도원이 농부들의 소유가 될 수 있을 것인지, 주인이 돌아온다면 어떻게 될지 결말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아들의 비유에서처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스스로 답을 찾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습니다. “그 악한 농부들을 틀림없이 엄벌에 처하겠지요. 그리고 열매를 바칠 수 있는 다른 농부들을 고용하겠지요.”


포도원의 비유에 담긴 의미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지시하는 고정 비유어로 사용되었습니다. 포도원도 하나님의 통치가 직접 나타나는 세력권, 즉 아직 구약적인 의미의 영역인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이런 면에서 관찰하면 포도원의 비유는 바로 앞에 나온 두 아들의 비유와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포도원의 비유는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느니라.”(마 21:31)는 두 아들 비유의 결론을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❶첫째, 두 아들의 비유가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다룬 데 비해 이 포도원의 비유는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를 다루고 있습니다. 포도원은 엄밀하게 따져서 이스라엘이나 교회와 같은 시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스스로 내린 결론, ➤“41.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그가 그 사악한 자들을 무참히 멸하고 자기 포도원은 제 때에 자기에게 열매를 바칠 다른 농부들에게 세주리라, 하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버지께서 너희로부터 [하나님]의 왕국을 빼앗아 왕국의 열매를 맺는 민족에게 주시리라.”로 해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악한 농부를 '너희'로 불리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로 대표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다른 농부를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의 비유어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악한 농부들이 빼앗기고 다른 농부들이 받게 될 포도원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目的)이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여러 번 천명하셨습니다.(마 10:5-6, 15:24). 뿐만 아니라 당신의 활동 범위도 이스라엘로 제한하셨습니다. 당신의 사역을 암탉이 병아리를 모으는 것 같이 이스라엘을 품으려고 한 것이었다고 회상하신 적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한 눈으로 보신 것은 구약성경과 맥을 같이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아는 백성이요,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가 특별하게 나타난 역사임을 인정하셨습니다. 예수님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천국을 소유한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우선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 다스리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들의 위치가 독특했던 만큼 하나님을 거역한 역사도 특별히 혹독하게 다루어집니다. 이스라엘은 주인이 원한 포도를 맺는데 신경을 쓰기보다는 포도원을 소유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돌려 드릴 수 없었던 민족의 역사가 이스라엘의 역사인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주인이 포도원의 삯을 받으려고 보냈다는 종들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주님에게로 돌아오라'고 외쳤던 하나님의 종들, 즉 선지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런 선지자들을 죽이고 돌로 치고 온갖 수모를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스러운 역사는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민족보다 더 극악했던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포도원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대대로 고난 받은 선지자 계열에, 유대 지도자들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원수 계열에 세우셨습니다.


 ❷둘째, 두 아들의 비유가 침례요한에 대한 답이었다면 포도원의 비유는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답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마지막으로 보낸 아들은 예수님의 자화상입니다. ➤“23. 그분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때에 수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그분께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들을 행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네게 주었느냐?” 라고 묻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포도원의 비유로 당신의 권위와 출처를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은 포도원 주인의 아들입니다.


  그는 자신의 포도원, 즉 자신의 나라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구약시대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나라 그것이 신약시대에는 하나님 나라라고 불립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구약시대와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이 땅에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한편으로는 당신을 충실히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만나기도 하셨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족의 차가운 눈총과 질시 가득한 비난, 악의에 찬 항의와 반대 등을 피부로 느끼셨습니다.


 그들이 결국 당신을 죽이리라는 사실도 알고 계셨습니다. ➤“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는 자기들끼리 이르되, 이 사람은 상속자니 오라, 우리가 그를 죽이고 그의 상속 재산을 빼앗자, 하고 39. 그를 붙잡아 포도원 밖으로 내던지고 죽였느니라.”고 비유하실 때 예수님은 당신이 성 밖 골고다로 끌려가 죽임을 당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비유에서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주어진 최후의 큰 희망을 자신들의 손으로 뿌리째 뽑아버릴 것을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것입니다.


 농부들이 포도원 주인의 호소를 묵살하고 아들을 죽임으로써 이스라엘의 특권에는 종지부가 찍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악 전체를 하나로 묶으시며 당신에 대한 거역을 그 절정으로 이해하셨습니다. 포도원 비유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도 모른 채 의분에 차서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버지께서 너희로부터 [하나님]의 왕국을 빼앗아 왕국의 열매를 맺는 민족에게 주시리라.”라고 대답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그 대답은 그들이 직면하게 될 운명이었습니다. 곧 이스라엘의 말로였습니다.


새로운 나라, 새 백성


 이제 그들은 하나님 백성의 위치를 잃게 됩니다. 다른 백성이 등장하여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역사를 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시편의 한 구절을 인용하셨습니다.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 기록들에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 바로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한 말씀을 결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버지께서 너희로부터 [하나님]의 왕국을 빼앗아 왕국의 열매를 맺는 민족에게 주시리라.” 이스라엘의 실패와 자격 박탈, 그리고 새로운 백성의 출현 사이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의 활동과 삶이 구약시대와 신약시대, 옛 백성과 새 백성을 나누는 역사적 분기점입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이 죽일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새롭게 시작하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십니다. 건축가들이 쓸모없다고 버리지만, 새 집을 짓는 모퉁이의 머릿돌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예언적 효과만이 아니라 “나도 너희에게서 하나님 나라를 앗아갈 것이다”라는 선언적 효과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신지, 자신이 서 있는 역사적 위치가 어디이고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전에 이스라엘에게 허용하셨던 은혜와 특권과 그들의 역할을 영원히 철회하신다고 선언하는 것이 바로 이 포도원의 비유입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알리는 독특한 사명을 부여받았던 한 민족은 그 역할을 끝내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갑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존재해도 평범한 한 민족이나 한 국가로만 명맥을 유지할 뿐 예전과 같은 특별한 의미는 갖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포도원의 비유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그 분기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이스라엘에서 새로운 백성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구상해 오셨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이스라엘이란 기본적인 틀을 깨고 새롭게 만들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이 제자들을 통해 계속해서 등장할 또 다른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두 아들의 비유에서는 침례요한과 관련해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희미하게 암시하는 정도로 그쳤던 사람들, 즉 가련한 세리와 창기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마음의 눈이 열려 예수님에게 온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라고 장담하십니다. 씨 뿌리던 예수님의 손길에서 한 그루씩 자라나기 시작한 하나님 나라의 나무들에게 이제 백성이란 칭호를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인정하시는 것은 곧 자신이 왕으로 등극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왕과 백성이 서로를 믿고 인정하는 일종의 조인(調印)식인 셈입니다. 포도원의 비유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인정하시는 인정서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자신이 그 나라의 왕이심을 천명하는 역사적인 순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당신의 포도원에 초대하셨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풍성한 열매를 거두라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부르시고 그들을 축복하시며 그 증표로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율법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한 위치에 세우신 것은 특별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율법대로 사는 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인 율법대로 삶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위대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가슴 속 깊이 새기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야만 했습니다.


 그들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나타내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다른 민족에게 알리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고 역할이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에는 경건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의롭게 살다간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순종하는 이스라엘보다는 거역하는 이스라엘을 보여 주는 책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입김이 곳곳에 미치는 역사는 간간이 몇몇 지도자들을 통해 나타날 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보다는 멋대로 살아가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 아래 인간의 모습을 확대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승리의 역사라기보다는 실패와 좌절의 역사였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회개하고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라고 외쳤지만, 열매를 바치기보다는 오히려 선지자들을 죽이고 버린 역사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셔야만 했습니다. 다른 해결책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기다린 것은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행복한 이스라엘을 건설해 줄 영웅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과 방법은 인간이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예언이 있었지만, 예언을 성취하면서도 예언의 범주를 훌쩍 뛰어넘은 방법으로 주인의 아들은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아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열매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아들을 유린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맺은 최악의 열매는 아들을 몰라보고 죽인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생각하며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거룩한 아버지의 도성의 종말에 가슴이 아프다 못해 아렸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포도원이었지만 그곳에서 예수님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셨습니다.


 나귀를 타고 애써 찾아온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에서 그분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으로부터 아니 배척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제 그분은 빈손으로 내동댕이쳐질 것입니다. 피를 뿌리며 걷게 될 '돌로로사'의 길, 혼미해져가는 의식 속에서 마지막으로 바라보게 될 예루살렘의 하늘을 생각하면서 아들의 비애는 분노로 변했습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열매 없음에 진노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새로운 나라 건설


 그것이 끝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에게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백성'들이 그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농부들이 거부한 열매, 즉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백성이 그들의 특징입니다. 열매를 받으러 갔으나 열매 대신 십자가를 지고 쫓겨날 포도원 주인의 아들, 그에게 바야흐로 새로운 백성과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건축자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돌, 그것이 모퉁잇돌이 되어 새집이 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새집, 새 백성, 새로운 농부의 특징은 열매를 맺는다는 데 있습니다. 열매가 무엇을 뜻하느냐는 우선 접어두더라도 악한 농부들을 부르신 것이나 다른 농부들을 고용하는 목적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그리고 이스라엘 전체에게서 받고자 하셨던 그 열매를 새로운 백성에게서 받으려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변함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파멸은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했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 백성을 세우셔서 옛 계획을 이어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당신께서 요구하시는 열매를 맺고, 그 열매를 두 손 가득 바칠 사람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부르십니다. 열매는 그 백성이 가진 가능성이요 그들이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무엇이 그 열매인가에 대한 답을 비유는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실패와 관련하여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나쁜 열매가 하나님의 아들을 부인하고 죽인 것입니다. 새 백성의 가장 큰 열매는 그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그분의 통치를 받아들여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온 삶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나라는 이스라엘로부터 버림을 받았으나 모퉁잇돌이신 예수님 위에 차곡차곡 지어져 가는 하나님의 집이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공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예수님의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이란 의미로 '도를 좇는 사람'이라 여겼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예수님을 좇아 예수님께서 걷던 길을 걸었습니다. 그들이 좇던 것은 예수님의 좇던 것, 곧 예수님의 목표와 동일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분의 사명선언문이라 불리는 이사야의 이 글에서 발견하는 것은 공의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정의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여셨습니다.


➤“16. ¶ 그분께서 자기가 자라난 나사렛에 가사 자기의 관례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읽으려고 서시니 17. 섬기는 자가 대언자 이사야의 책을 그분께 넘겨드리거늘 그분께서 그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라. 일렀으되, 18. [주]의 [영]께서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그분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기 때문이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마음이 상한 자들을 고치며 포로 된 자들에게 구출을, 눈먼 자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상처 입은 자들을 자유롭게 하며 19. [주]의 받아 주시는 해를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6-19).


 그 나라는 하나님의 공의를 공기처럼 자유롭게 마실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 일을 위해 그분에게 주의 성령이 임했던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삶과 사역에 동참하는 모든 백성들에게도 똑같은 능력과 권위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세상에서 가장 낮고 깨어진 곳으로 내려가게 하였습니다. 그분의 사역은 능력을 보이는 사역이나 강연이나 종교적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사역은 공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규칙에서 벗어난 것들을 바로잡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질병과 고통은 하나님 나라 규칙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가서 건강을 되찾아주셨습니다. 누구나 한 번 죽는 것은 예정된 일이지만, 어떤 곳에서는 죽음이 제때보다 먼저 찾아옵니다. 그래서 그분은 가서 바로잡으셨습니다. 만질 수 없는 질병이라는 저주를 받아 세상에서 변두리로 내몰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가서 그들을 어루만져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그와 같이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끔찍한 괴로움과 고통을 이겨내라. 바로 잡으라. 억압당하는 사람들에게 소망과 자유의 메시지를 전하고 그들을 지지하라. 그들을 더 혹독하게 지배하려는 사고방식과 세상, 그리고 억압의 구조에 대항하라. 거저 받은 것을 이제 아낌없이 베풀라. 바로 잡으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공의를 위해 새로운 백성들이 된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그리스도의 긍휼


 새로운 사명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은 제자들을 처음 내보내도록 그분을 움직인 것,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를 내보내도록 그분을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분을 성육신하게 하신 근본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긍휼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간다는 것은 곧 그분의 그 긍휼을 느끼는 것입니다. 죄의식에 사로잡힌 상태나 동요하는 양심, 어렴풋한 측은함을 뛰어넘어 애간장이 끊어지는 긍휼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긍휼은 본질적인 부분으로 나아가 행동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하늘을 움직일 기도를 드리게 하고 추수해야 하는 이 세상으로 사역자들을 보내달라고 간청하게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권위로 공의를 드러내기 위해 움직이도록, 가서 바로잡도록 누군가에게 동기를 부여해 주고 움직일 수 있는 힘을 부여합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바라보시며 그 긍휼을 느끼셨습니다.


 매우 지치고 연약한 그들을 보시고 그분은 몸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분은 목자 잃은 양과 같은 무리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마음속의 긍휼이 그분을 깨뜨리고 그들에게 다가가게 하였습니다. 긍휼이 그분을 깨뜨렸듯이 우리도 깨뜨리고 긍휼이 그분을 보냈듯이 우리도 보낼 수 있도록 우리들도 긍휼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의를 행하면 행할수록 우리 안의 긍휼이 더욱 강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존재 자체가 긍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를 살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것이 그 긍휼이 될 때, 우리는 녹지 않는 소금이 아니라 녹는 소금이 되어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백성으로 우리의 왕이신 그분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가좋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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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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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성하 | 작성시간 22.03.26 잘 보고 갑니다.감사드립니다.
  • 작성자유토피아3 | 작성시간 22.03.23 감사합니다.
  • 작성자서울장애인교회 | 작성시간 22.03.27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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