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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말의 믿음*이상봉목사

작성자(一麥.)|작성시간22.03.28|조회수333 목록 댓글 4

☞예수가좋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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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말의 믿음

마태복음 1장 3-6, 16절 /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고 다윗 왕은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자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님이 태어나시니라.”(마 1:3-6, 16 KJV)


 창세기 38장에는 유다와 다말 이야기가 나온다. 유다는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사람과 결혼하여 엘, 오난, 셀라 세 아들을 낳는다. 창세기 27장46절에는 리브가가 에서의 이방 며느리들 때문에 “내가 헷의 딸들로 인하여 살기에 지쳤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인 이 사람들 곧 헷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유익이 되리요?” 라고 말했다.


 유다는 예수님의 족보를 이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가나안 사람 수아와 결혼을 해서 아들 셋을 낳는다. 이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셨고, 이들은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올 수 없었다. 엘이 죽고, 오난도 창조주 앞에서 악하므로 죽이고, 다말은 믿음으로 씨를 이었기에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 왔다. 다말은 유다의 씨를 받아서 인해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다. 인간들이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하나님은 예수님의 혈통을 이어 가셨다.


 예수님의 족보에 이방 여인이 그저 쉽게 들어온 적은 없다. 이방의 여인이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올 수 있는 경우는 믿음으로 이어지는 순수 혈통으로 되는 것이다. 룻도 그랬고 기생 라합도 그랬다. 그리스도의 족보에 나타난 이 다섯명의 여인들은 믿음의 혈통을 획득하며 성경에 이름을 기록하게 되었다.


 아브라함의 장자권 곧 약속의 씨가 되는 특권은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 중 둘째인 이삭으로 이어갔고, 이삭의 장자권은 그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 중에서 둘째인 야곱이 이어갔다. 그리고 야곱의 장자권은 그의 12 아들 중 3 아들이 각기 한 부분씩 나누어 이어갔다. 야곱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은 장자의 명분(재산권)을 물려받아서 형제들의 두 배 몫의 기업(땅)을 가져갔고, 셋째 아들 레위는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의 권리를 가져갔다. 그리고 넷째 아들 유다는 장자의 통치권 곧 형제들 중에서 머리가 되어 온 이스라엘 집을 다스리게 되는 권리를 이어갔다.


  아브라함의 선택 그리고 이삭부터 유다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장자가 아닌 사람들이 장자권을 이어갔다는 사실은 모두 구원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통한다. 그 누구도 자신의 인간적 조건과 자격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 은혜로 들어온 것이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목적에 의해 들어온 것이다. 이것은 다 우리로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유다는 이러한 은혜의 구원에 대해 누구보다 할 말이 많은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참으로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에게는 요셉이나 레위와 같이 장자권을 얻기에 합당해 보이는 어떤 특별한 자격이나 행위도 없었다. 그는 오직 은혜로 장자의 지위를 얻었다. 그러므로 그가 받은 것은 바울의 말처럼 ‘삯’이 아니라 ‘복’이었다.


  ➤“3. 성경 기록이 무어라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하느니라. 4. 이제 일하는 자는 품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5. 일을 하지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느니라. 6. 이것은 또한 다윗이 행위가 없어도 [하나님]께서 의를 인정하시는 사람의 복된 일을 묘사하여 7. 이르되, 자기 불법들을 용서받고 자기 죄들이 가려진 자들은 복이 있으며 8. [주]께서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4:3-8)


다말은 가나안 사람으로 유다의 며느리이다.


 창세기 38장에서 시아버지 유다와 며느리 다말의 동침 사건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연관된 ‘계대 결혼’(Levirate Marriage)과 고엘 (גאל)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유다와 다말의 동침 사건으로 메시아의 계보를 잇는 후손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계보가 요셉에게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유다에게로 이어짐을 보여주기 위해 요셉의 이야기 중간에 긴급히 배열되어 있다.


  창세기 38장의 유다와 다말의 동침은 단순한 성윤리적인 사건이 아니라, 후에 모세의 율법으로 완성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성취된 계대 결혼제도 속에 나타난 고엘 사상을 보여 준다. 그런데 구원(선택,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그런 구원이 실제 삶 속에서 어떤 형식으로든 나타나게 되기 마련이다. 구원은 사람으로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것은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한 말을 빌자면) 하나님이 그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계대(繼代) 결혼 제도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는 모세의 율법으로 계시되기 전부터 이미 족장들의 삶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명령)의 형태로 존재해 왔다. 고엘 제도는 고대 근동 히브리 사회에서 발견할 수 있는 독특한 제도로 친족 및 혈연 공동체를 중심으로 사회생활이 이루어지던 때에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서로의 생명과 재산 및 가문을 보호해 주기 위한 일종의 상호 보호 제도이다. 그 후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으로 모세를 통해 선포되었다.


 ➤“5. ¶ 형제들이 함께 거하는데 그들 중 한 명이 죽고 아이가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밖에서 남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녀의 남편의 형제가 그녀에게로 들어가 그녀를 아내로 취해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녀에게 행할 것이며 6. 이로써 그녀가 낳는 맏아들이 죽은 그의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7. 그러나 그 사람이 자기 형제의 아내 취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거든 그의 형제의 아내는 성문으로, 장로들에게로 올라가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이스라엘 안에서 자기 형제에게 이름을 일으켜 주기를 거부하여 내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행하려 하지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8. 그의 도시의 장로들은 그를 불러서 그에게 말할 것이며 만일 그가 그 일을 고집하며 말하기를, 그녀를 취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지 아니하노라, 하거든 9.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의 앞에서 그에게 다가가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응답하여 이르기를, 자기 형제의 집을 세우려 하지 아니하는 그 사람에게는 이같이 하리라, 할 것이며 10. 이스라엘 안에서 그의 이름을 자기 신이 벗겨진 자의 집이라 할 것이니라.”(신 25:5-10).


계대(繼代) 결혼 제도에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하나는 죽은 자의 씨를 잇기 위해 대신 동침하는 행위이며, 다른 하나는 대신 동침하는 사람을 일컫는 ‘고엘’이다. 계대 결혼의 두 가지 의미는 모세의 율법에 나타난 토지 제도 속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즉 가난한 친족을 위해 그 토지를 대신 사 주는 행위와 그 토지를 대신 사 주는 사람을 가리키는 고엘이 그것이다.(룻 4장). 이처럼 계대 결혼 제도와 토지 제도에는 죽은 자를 대신해 동침해야 할 의무를 가진 자와 희년이 될 때까지 가난한 친족을 위해 대신 토지를 매입해 줘야 할 의무를 가진 자가 언급된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 의무를 이행하는 사람을 히브리어로 ‘고엘’이라고 부른다.


 구약 원문에 언급되는 고엘에 대한 우리말 번역은 친족, 기업 무를 자, 구속자, 구속주 또는 대속자 등으로 나타난다. 고엘의 의무와 역할은 구약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지만 모두 그리스도의 대속 사건 곧 죄인을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건에 대한 그림자요, 모형이다. 예를 들면, 다말과 동침해 아들을 낳아주는 유다(창 38장), 룻에게 씨를 주어 아비멜렉의 아들을 낳는 의무를 가진 보아스(룻 4장), 조카 하나멜의 밭을 대신 사 주는 예레미야(렘 32장) 등이 모두 고엘이다.


  가난한 친족을 위해 대신 땅을 사 주는 기업 무를 자와 죽은 형제를 위해 대신 동침해 아들을 낳아 주는 구약 시대의 고엘 제도는 후손을 보존하고 가난한 친족을 보호하여 대(代)를 잇게 하는 당시 사회법인 동시에 영적으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대한 모형이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를 대신해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다. 곧 대속적 죽음인 것이다. 고엘 사상은 계대 결혼 제도와 토지 제도 외에도 짐승의 피가 대신 뿌려지는 제사제도 및 창조주 하나님을 구속자 또는 구속주로 부르는 하나님의 호칭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예표 및 모형으로 구약 전체에 걸쳐 포괄적으로 나타난다.


 ➤“15.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그녀의 씨 사이에 적개심을 두리니 그 씨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계대 결혼을 비롯한 구약의 모든 언약적 사건은 유기적이며 점진적이다. 유다 가정에서 행해진 계대 결혼은 성경의 역사 속에서 유기적이며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성취된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결혼 제도를 통해 이 땅에 후손을 남기시는 창조 질서를 마련하셨으며, 또한 후손이 끊기는 가문이 없도록 하기 위해 계대 결혼 제도를 선민들에게 계시하셨다.


  다시 말해, 계대 결혼 제도 속에 담겨 있는 구속자의 의미 곧 고엘 사상은 마침내 그리스도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에서 성취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는 마지막 고엘이다. 창세기 38장의 계대 결혼 즉 죽은 자의 후손을 잇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는 이 제도는 친족으로 하여금 죽은 남자의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과 홀로된 여인을 보호하는 것 등의 사회적 의미가 있다. 동시에 언약적으로 여자의 후손을 통해 메시아를 보내시려는 하나님의 구속 섭리 가운데 그리스도의 계보(족보)의 흐름과 우리 주님의 대속적 죽음을 보여 주는 모형적 의미가 더 크다.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라(창 38:8)


 창세기 38장의 내용은 유다의 말과 행동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이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설명된다. 그 이유는 유다의 말과 행동에 신명기 25장의 계대(繼代) 결혼 제도가 그대로 반영돼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유다의 말과 행동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창세기 38장의 유다 가정의 계대 결혼 이야기는 일종의 문학적 구조와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긴장과 반전 속에서 매우 흥미진진하게 전개 된다.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에게 세 아들 곧 엘, 오난, 셀라가 있었다.


  유다는 장남 엘을 위해 이방 여인 다말을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엘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 그때 유다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둘째 아들 오난을 향해 계대 결혼의 의무를 이행하라고 말했다. ➤“8.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그녀와 결혼하여 네 형에게 씨를 일으키라, 하매 9.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아니할 줄 알았으므로 자기 형수에게로 들어갈 때에 자기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그 씨를 땅에 흘리니 10. {창조주}께서 그가 행한 일을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도 죽이시니라.”(창 38:8-10)


  모세의 율법으로 성문화된 계대 결혼 속에 내재된 하나님의 명령을 잘 보여 준다. 유다는 죽은 자의 씨를 보존하기 위해 가까운 형제로 하여금 죽은 자의 아내와 동침하도록 규정한 하나님의 계시인 계대 결혼의 의무와 권리로 둘째 아들 오난에게 형수와의 동침을 요구한 것이다. 결국 유다가 둘째 아들 오난에게 형수와의 동침을 요구하는 모습은 당시의 성적 타락에 대한 결과가 아니라, 족장 시대에 이미 계시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계대 결혼에 근거한 명령이었다.


 계대 결혼의 의무와 권리에 따라 오난은 죽은 형의 아내 곧 형수와의 동침을 시도했다. 그러나 오난은 형수와의 동침에서 고의적으로 형수의 몸 밖에 사정(射精)해 버렸다. 그 이유는 계대 결혼 제도 아래서 자신과 형수와의 동침을 통해 태어나는 첫 아들은 자신의 씨(후손)가 되지 않고 죽은 형의 씨(후손)가 되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생기지 않도록 일부러 바닥에 사정해 버린 오난의 행동은 하나님의 계시인 계대 결혼 제도에 불순종하는 결과이며,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한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런 악을 저지른 오난을 죽이셨다. 하나님의 편에서 보는 오난의 죄악은 하나님의 계시(啓示) 곧 계대 결혼에 대한 불순종이었다.


 그렇다면 유다의 장자권은 그의 삶 속에서 어떻게 나타났으며 어떻게 실현되었는가? 야곱은 죽기 전에 유다에 대해 이렇게 축복(祝福)했다. ➤“8. ¶ 유다야, 너는 네 형제들이 찬양할 자니라. 네 손이 네 원수들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자식들이 네 앞에서 절하리로다. 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네가 탈취한 것을 떠나서 위로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린 것이 사자 같고 늙은 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깨워 일어나게 하리요? 10. 실로가 오실 때까지 홀(笏)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법을 주는 자가 그의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니 그에게 백성이 모이리로다. 11. 그가 자기의 어린 수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자기의 나귀 새끼를 좋은 포도나무에 매리니 그가 자기 옷을 포도즙에 빨며 자기 의복을 포도의 피에 빨았도다. 12. 그의 눈은 포도즙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창49:8-10)


 이것은 과연 그대로 실현되었는가? 그렇다. 이것은 적어도 두 방면에서 분명하게 실현되었는데, 첫째는 인구 면에서였고 둘째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차지하는 지위 면에서였다.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창 38:11)


 유다는 둘째 아들 오난이 계대 결혼에 불순종한 결과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임을 당한 사실을 알고 몹시 두려워했다. 그리고 유다는 그의 마지막 아들 셀라마저 그의 형들처럼 하나님 앞에서 죽임을 당할까 염려한 나머지 며느리 다말을 불러 셀라가 장성할 때까지 친정에 가 있으라고 말했다. 이것은 유다가 셋째 아들 셀라의 죽음을 염려하여 며느리 다말과의 동침을 막으려는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다.(창 38:11, 26).


 실제로 유다는 아들 셀라가 장성하였으나 며느리 다말과의 동침할 기회를 주지 않았으며 후에도 계속 며느리 다말을 친정에 머물도록 했다(창 38:14). 이런 유다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인 계대 결혼에 순종하지 않으려는 시도로 드러나 훗날 자신의 행동이 며느리 다말의 행위에 비해 옳지 않은 일이었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요인이 되었다. (창 38:26).


 이처럼 유다는 장성한 셀라가 다말과 동침할 수 있는 기회(계대 결혼)를 박탈함으로써 셀라로 하여금 고엘로서 의무와 권리를 포기하게 만드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그 후 유다 가정의 고엘 곧 후손을 남기기 위해 대신 다말과 동침해 줄 사람은 셀라 다음으로 없는 듯 보였지만, 사실 시아버지 유다가 셀라 다음 차례의 고엘이었다. 따라서 다말은 비록 유다가 시아버지일지라도 계대 결혼의 순서상 그가 자신과 동침할 수밖에 없는 고엘이라는 사실 때문에 양털 깎는 시기를 이용해 유다에게 몰래 접근했던 것이다.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창 38:16)


 남편 엘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함으로 죽임을 당했고 시동생 오난마저도 계대 결혼에 대한 불순종의 대가로 죽임을 당한 후,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의 권고에 따라 유다의 마지막 아들 셀라가 장성할 때까지 친정에 가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말은 셀라가 장성하였으나 시아버지 유다가 자신과 셀라와의 동침할 기회를 일부러 주지 않음을 알고 다른 기회를 찾고 있었다. 여기서 다말이 찾고 있는 기회는 유다 가정에서 자신과 동침할 수 있는 셀라 다음으로 고엘의 만남이었다. ​셀라가 장성했으나 시아버지 유다의 의도적인 방해로 자신과의 동침이 허락되지 않음으로써 고엘로서 셀라의 의무와 권리는 이미 사라져 버렸다.


 이제 유다 가문에서 다말 자신과 동침할 수 있는 사람(고엘)은 계대 결혼의 순서상 셀라 다음으로 시아버지 유다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와의 동침 기회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다말이 유다와의 동침을 시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로 주신 계대 결혼의 순서에 따라 합법적으로 유다로 하여금 고엘의 의무를 이행하게 하는 것이다. 비록 유다는 후에 다말인 줄 모르고 그녀와 동침했으나 유다는 자신이 먼저 다말과의 동침을 요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계대 결혼에 따른 고엘의 의무를 이행한 것이 되었다.(창 38:16).


 마침내 유다와의 동침 기회를 찾던 다말에게 기회가 왔다. 양털 깎는 시기가 이른 것이다. 족장 시대의 양털 깎는 시기에는 남자들이 모두 일정 기간 가정을 떠나 양떼가 있는 곳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다말의 입장에서 유다에게 접근하기 훨씬 쉬웠을 것이다. 유다가 집을 떠나 딤나로 올라갔다는 소식을 들은 다말은 친정에서 생활할 때 입는 과부의 의복을 벗어 버리고 창녀처럼 변장한 후 시아버지 유다가 올라간 딤나로 달려갔다. 그리고 시아버지 유다가 알아보지 못하도록 면박을 하고 사람의 눈에 잘 띄는 곳에 앉아 있었다.(창 38:14).


 이런 다말의 행위는 대가를 받고 몸을 파는 창녀의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진 계대 결혼의 순서에 따라 자신과의 동침할 기회를 유다에게 제공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유다로 하여금 고엘로서 의무를 다 하도록 지혜롭게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때마침 유다는 아내가 죽은 상태에서 몹시 외로운 처지였음으로 딤나 길 옆 에나임 문 곁에 앉아 있던 다말을 창녀로 인식하고 동침할 것을 요구했다.


동침을 요구하는 유다의 증거물


 ​동침을 요구하는 유다의 말에 다말은 염소 새끼와 바꾼다는 증거물로 유다가 갖고 있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먼저 요구했다. 다말이 요구한 유다의 물건들은 후에 사형 선고를 받은 다말이 자신의 생명을 살리는 증거물로 사용했다. 시아버지 유다에게 일부러 접근해 동침한 후 잉태한 며느리 다말의 행위는 창녀의 행위로서 비난 받아야 마땅한가? 그뿐 아니라, 시아버지와 동침한 그 자체만으로 다말의 행위는 비윤리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로 매도돼야 하는가? 결코 아니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다말의 유다에게 접근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주어진 계대 결혼의 순서에 따른 의로운 행위였다.(창 38:26).


잘못 된 재판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창 38:24)


 이처럼 구약은 인간의 윤리나 도덕적 접근을 통해 이해되는 인간의 해석물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 아래 영적 시각으로만 알 수 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산물이다. 유다가 다말과 동침한 후 석 달이 지났을 때 다말의 임신소식이 유다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다말은 과부로서 다른 남자와 행음해 임신했다는 오해를 받고 고소를 당했다. 사람들이 다말의 임신 사실을 간음으로 추정하고 그녀를 시아버지인 유다에게 고소한 것은 당시 유다가 한 가문의 족장으로서 사법권과 행정권을 모두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다는 재판관으로서 의무를 다하지 않고 급히 판결을 내리고 말았다. 즉 당시 재관관인 유다는 고소당한 다말을 자세히 심문(審問)하지도 않고 그녀를 끌어내 불사르라고 성급히 사형 선고를 내렸다. 유다의 판결은 며느리 다말이 시아버지를 유혹해 동침했다는 이유에서 내려진 것이 아니라, 자기 가문의 남자가 아닌 다른 남자와 행음해 임신한 것으로 오해하고 다말을 화형에 처하도록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이다.


  ​그때 다말은 사람들에 의해 화형 집행 장소로 끌려가면서 시아버지 유다를 향해 외쳤다. “이 물건들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으로 인해 내가 임신했습니다. 당신은 제발 살펴보십시오. 이 도장과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입니까?" 유다는 다말이 내미는 자신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보고 며느리의 화형 집행을 멈추게 한다. 그리고 다말을 향해 그는 나보다 옳다고 고백한다. 다말이 증거물로 가져간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는 다말과 아이의 생명을 살리는 증거물이 된 것이다. 다말이 내민 증거물들은 왜 다말의 생명을 살렸는가? 그것들은 당시 재판관인 유다의 판결과 사형 선고가 잘못임을 가르쳐 주는 증거물이었다.


 나아가 그것들은 다말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유다의 씨이며 동시에 다말과 유다와의 동침은 간음이 아니라 유다 가문의 정상적인 계대 결혼의 순서에 따라 이뤄진 사실임을 말하는 증거물이었다. 결국 다말은 시아버지와 동침해 임신한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에 오히려 화형을 면할 수 있었다. 유다가 다말과 동침한 것은 유다 가문에 있어서 계대 결혼의 순서상 지극히 합당한 일이었고 엉겁결에 유다는 고엘로서 의무를 성공적으로 다말에게 행한 것이 되었다.


 만약 다말이 유다가 다른 남자와 동침해 잉태했다면 그녀는 간음한 것이 되어 당시 사회법으로 화형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자신의 시아버지라 할지라도 계대 결혼 순서상 셀라 다음으로 자신과 동침해 후손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은 유다(고엘)임을 알고 다말은 변장한 후 유다에게 접근해 동침하고 유다의 통치권의 상징인 증거물들(도장, 끈, 지팡이)을 가져갔던 것이다.


 다말은 너무나 지혜로운 여인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생명을 내걸었던 의로운 여인이었다. 다말은 메시아의 계보(족보)에 오르는 거룩한 여인들 중에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창 38:26)


 마침내 유다는 자신을 유혹해 동침한 후 잉태한 다말을 향해 “그는 나보다 옳도다.”(창 38:26)고 말했다. 이 부분에 대한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그녀는 나보다 더 의롭다’(צ'אדקה מימני 차데카 밈멘니)이다. 다말은 자칫 화형에 처해질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하나님의 계시인 계대 결혼에 순종해 유다 가문의 씨(후손)를 남겼다는 의미에서 의로운 여인이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인 계대 결혼에 순종하는 것보다 아들 셀라의 죽음을 더 염려하면서 홀로 된 며느리 다말에게 동침할 자격자인 셀라를 고엘로 주지 않은 유다 자신의 행위를, 씨를 남기기 위해 계대 결혼의 순서에 따라 유다 자신에게까지 접근한 다말의 행위와 비교할 때 다말의 행위가 지극히 합당하고 옳은 행동이었다.


 그러므로 유다는 다말이 제시한 증거물들을 보고 자신의 잘못된 사형 선고를 철회하고 다말의 생명을 살렸으며 다말의 행동은 자신보다 의롭다고 외친 것이다. 마침내 재판 과정에서 유다와 다말의 동침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으나 그것은 오히려 계대 결혼 제도에서 지극히 합당한 다말의 의로운 행위로 인정되었다. 그녀는 유다 가문의 씨를 보존했고, 언약의 후손을 이었다. 유다의 입에서 나온 다말의 의로움은 하나님의 계시로서 계대 결혼에 순종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는 결단을 내리고 자신과 동침을 시도한 그녀의 순종과 믿음을 가리킨다.


 동시에 셀라의 죽음을 염려한 나머지 셀라를 다말의 고엘로 주지 않을 만큼 계대 결혼에 순종하지 못한 자신의 연약한 믿음을 질타하는 의미도 유다의 고백 속에 담겨 있다. 어떠한 형태의 말씀이든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세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성숙한 의로움이다. 다말은 족장 시대에 살았던 한 평범한 여인이었으며 자신의 어려운 환경과 역경 속에서도 주님의 계시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던 의로운 성도였다.


 창세기 38장에 유다의 가정 이야기 가운데 시아버지 유다와 며느리 다말과의 동침 사건이 선택적으로 기록되었다. 또 유다와 다말의 동침 사건으로 메시아의 계보를 잇는 후손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동시에 창세기 38장은 그리스도의 계보가 요셉에게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유다에게로 이어짐을 보여주기 위해 요셉의 이야기 중간에 긴급히 배열돼 있다. 또한 창세기 38장의 유다와 다말의 동침 사건은 단순한 성윤리적인 사건이 아니라, 후에 모세의 율법으로 완성되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성취된 계대 결혼 제도의 고엘 사상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 한 여인의 의로운 삶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여기서 우리는 다말이라는 한 여인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유다가 약속의 후사로서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의 며느리 다말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말은 자기 시아버지의 씨를 받음으로 [베레스]와 [세라] 쌍둥이를 낳은 독특한 이력을 지닌 여인이다. 그는 본래 유다의 아들 엘의 부인이었는데 자기 남편 엘이 아이를 낳기 전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어 버림으로써 자녀를 가지지 못하게 되자 관례(慣例)를 따라 미혼인 그녀의 시동생들과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자 했는데 이마저 여의치 않게 되자 그 시아버지 유다를 통하여 불법이지만 씨를 받았다.


 이로써 그녀는 자녀들을 낳게 되었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특히 한국 사람들이 보기에는 매우 부도덕하고 해괴한 일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일을 소개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이 일을 행한 유다와 다말을 주님의 족보에 올려놓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낳은 (부정한 자식) 베레스가 당당히 약속의 후사(장자)가 되어 다윗과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말의 행위가 음행과 부도덕 이상의 고엘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다말이 그 시아버지를 기만하여 그와 부정한 관계를 가진 것은 아들을 얻기 위한 열망에서 나온 것이다. 그녀가 아들을 그토록 집요하게 추구한 것은 아담과 하와가 아들을 추구한 것과 같으며 노아의 아버지 라멕이 아들(노아)을 추구한 이유와 같으며 아브라함이 아들(이삭)을 추구한 이유와 같다.


 즉 하나님 약속의 구원을 사모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백성의 공통적인 특징은 한 ‘계시’(이상)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계시는 곧 약속이다. 여자의 후손이 죽을 운명의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바로 모든 하나님의 사람에게 있는 이상이요 소망인 것이다. 다말은 자기에게 아무 세상적 영광이나 소망이 없었을지 모른다. 그녀는 남편도 죽고 재산도 없고 친정도 별 볼일 없는 처지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랬기 때문에 더욱 야곱의 집에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았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무렵 이집트의 히브리 산파들은 왕의 지엄한 명령을 어기고 히브리인 남자 아기들을 살렸다. 그것은 그들이 왕보다, 이집트에서의 편안한 생활보다 더욱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았고 소망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고 하나님 앞에서의 의(義)로움이다. 다말에게는 다른 아무 것도 없었을지라도 바로 이 믿음이 의로움 있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고 또 유다가 보기에도 좋았다.


  유다는 다말처럼 다른 모든 면에서 못났고 보잘 것 없는 자였을지라도 적어도 이 점에 있어서 즉 약속을 믿고 소망하는 자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분명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유다가 이스라엘의 장자라는 증거로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서 크고 창대한 자가 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분명한 증거는 유다가 다말을 그녀의 부정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인정하여 “네가 나보다 옳다”고 한 것이다.


우리가 내세울 약조물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다말은 오직 약속의 아들을 추구했다. 그의 소망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그녀의 다른 삶이 어떠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그녀가 도덕적인 사람이었는지 성실한 사람이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유다에게 행한 일을 볼 때 그녀가 그다지 요조숙녀였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 없이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대로 그 어느 누구라도 그리스도를 붙잡는데도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설 수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어떤 사람이 도덕 선생이나 청렴한 관리처럼 도덕적이거나 창녀나 부정한 관리처럼 부도덕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오늘 현재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붙잡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면 주의 의로움이 필요할 것이다.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말이 유다의 지팡이와 인장을 내세운 것같이 그 의로움은 오직 아들(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때 당당하게 서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들 안에 거해야 한다.


 다말은 본래 의로움이 없는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점에 있어서는 그녀의 시아버지인 유다도 마찬가지이다. 둘 다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아들을 얻기 위해 다말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다말은 유다가 그의 막내아들 셀라를 자기에게 남편으로 주지 않자 창녀로 변장하여 유다에게 다가가서 부정한 관계를 맺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아들을 안 주려면 당신의 씨라도 달라는 식이었다.


 그리고 유다는 창녀로 변장한 그의 며느리와 부정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이 두 사람에게 무슨 내세울 의로움이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을 인정하셨다. 그것은 그들에게 약속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말은 적극적으로 그것을 추구했고 유다는 그것을 추인(追認)함으로써 소극적으로나마 그것을 추구했다. 우리도 다말과 같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예수가좋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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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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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유토피아3 | 작성시간 22.03.28 감사합니다,
  • 작성자서울장애인교회 | 작성시간 22.03.30 감사합니다.
  • 작성자성하 | 작성시간 22.03.30 잘 보고 갑니다.감사드립니다.
  • 작성자su132929 | 작성시간 22.04.04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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