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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어린양
요한복음 1장 29절 / 양의섭 목사
➤“29 ¶ 다음 날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르되,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KJV)
1. 죄란 무엇인가요?
성경은 크게 두 가지 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죄와 용서입니다. 죄는 누가 짓나요? 그것은 우리 인간이 짓는 것이고, 용서는 누가 하는 것인가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란 무엇인가요? “거짓말, 도둑질, 살인, 미움, 사기, 간음, 등등 ” 이런 것을 생각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것들은 죄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죄는 그런 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런 윤리적인 죄보다도 더 심각한, 근본적인 죄가 있습니다.
윤리적인 의미의 단어들은 제하고,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죄란 단어를 보면, 파랍토마(Παράπτωμα)란 단어가 있는데, 이는 바로 서야 할 곳에서 떨어져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 자리에 서 있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파라바시스(Παραβάση)란 단어는 선을 넘었거나 어긴 것을 뜻하여, 이 역시 제 자리에 있지 않은 것을 뜻합니다. 가장 보편적이고 많이 쓰인 죄라는 단어는 하마르티아(ΧαμάρΤία)란 단어로, 표적 또는 목표에서 비켜난 것, 화살을 쏘았는데, 이 화살이 쏜 사람의 의도와는 다르게 엉뚱한 곳에 가 맞은 것을 뜻합니다.
2. 엉뚱한 삶의 자리
그러니까 죄란 사람이 제 자리에 안 있고,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실 때 다 원하신 삶, 하나님의 기대된 생활이 있습니다. 인간은 그 생활을 해 갈 때 갈등이 없고, 행복한 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기대와는 다르게 제멋대로, 제 쾌락대로, 제 생각대로 마구잡이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인, 죄인’하는 것은 도덕적인 죄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죄, 하나님께서 애당초 의도하지 않은 삶을 사는 이를 죄인이라고 합니다.
어떤 권사님 아들이 회사에 취직하였는데, 영업직이었습니다. 영업직이란 것이 요즘엔 모르겠는데, 예전에는 술 마시는 자리였습니다. 이른바 술 상무였습니다. 매일 하는 일이 바이어 접대한다고 룸살롱, 카바레, 나이트클럽엘 드나들었습니다. 이렇게 몇 해를 보내는 사이, 몸이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그 독한 술들을 마시니 몸이 견디겠습니까?
어느 날 역시 룸살롱에서 바이어를 접대하며 술을 마시고 있는데, 순간, 갑자기 내면 깊숙한 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 집사야, 지금 네가 앉아 있는 그곳이 그동안 내가 그토록 너를 복주고 복주어서 보낸 그 삶의 자리냐?” 그러자 갑자기 그곳이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답니다.
고려대 강병화 교수가 17년간 혼자 전국을 돌아다니며 채집한 야생 들풀 4439종의 씨앗을 모아 `토종 들풀 종자은행`을 세운 적이 있는데, 그때 강 교수는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인상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자기가 야생 들풀을 다 조사한 결과, 엄밀한 의미에서 본래부터 잡초는 없답니다. 밀밭에 벼가 나면 잡초고, 보리밭에 밀이 나면 잡초랍니다. 상황에 따라 잡초가 되는 것입니다. 산삼도 원래 잡초였을 거랍니다.
잡초가 뭔가요?
무슨 뜻인가요? 자리를 가리지 못해 자리 잡는 것들이 잡초랍니다. 그러니까 내가 내 삶의 자리에 있지 않고 엉뚱한 곳에 가 있으면 나는 잡초 인생이 되고 맙니다. 아무리 부족해도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면 당당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배운 게 많고, 가진 게 많아 그럴듯하지만, 엉뚱한 삶의 자리에 가 있으면 나는 잡초 인생입니다!
죄란 하나님께서 나를 세상에 보낼 때 가졌던 그런 삶에서 벗어난 제멋대로의 잡초적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셨던 삶이 아닌, 추하고도 더러운, 늘 스스로도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하는 자책감을 갖고 사는 그런 삶이 죄인의 삶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삽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생활을 합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자리를 갖읍시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아무리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살더라도, 그 양심의 가책이 면죄부가 되지 않으며 마침내 죄악 속에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우스운 것은 우리는 양심의 가책만 느끼면, 그런대로 자신은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도, 실제로 돌아섬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고, 도리어 미련한 이라고 주님 앞에서 책망 받을 것입니다. 가책이 있다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며, 그 문제를 과감히 청산하고, 자신의 바른 삶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용기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가책을 느끼는 것으로 만족해하며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묾으로 죄인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3. 죄인에게 그 대속(代贖)물
그런데 이런 죄를 지은 사람을 하나님께선 용서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또 다른 가르침입니다. 어떻게 용서하시나요? 그냥 있던 죄를 없다고 해주시나요? 아닙니다. 그 죄의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하시고 용서하십니다. 대가 없는 용서는 없습니다.
그러면 죄의 대가는 무엇인가요? 사람에게 죄를 지면 물질로 2배나 4배로 변상해 주면 되는데, 물질이 통하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께 지은 죄는 어떻게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요?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23 죄의 삯은 사망이나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해 얻는 영원한 생명이니라.”(롬6:23)
그러니까 하나님께 향한 죄의 대가를 치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요? 죽어야 합니다! ➤“25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지으면 재판관이 그를 재판할 터이나 사람이 {주}께 죄를 지으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자기들의 아버지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창조주}께서 그들을 죽이려 하셨기 때문이더라.”(삼상2:25)
길이 없습니다. 죽어야 합니다. 이런 절망적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그 대속(代贖)물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죄를 지은 자가 그 죄를 사함 받고 싶으면 소, 양, 염소, 그리고 비둘기 같은 살아있는 제물을 가지고 와서, 제사장 앞에서 그 제물에 손을 얹고 고백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내가 죄 값으로 죽어야 하는데, 이 제물의 생명을 내 생명 대신하여 드립니다, 받으시고 나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고백하고는 그 앞에서 죽입니다. 그 죽이는 모습이 사뭇 잔인합니다. 각을 뜨라고 율법서에 명기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제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생명을 대신하여 속죄물을 얻었다 하여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게 율법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유명한 고난 받는 메시아 예언인 이사야서 53장에 이런 증언이 있습니다. ➤“4. ¶ 참으로 그는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였거늘 우리는 그가 매를 맞고 [하나님]께 맞아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였노라. 5. 그러나 그는 우리의 범법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 {창조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4-6)
내가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받은 것은 재수가 좋아서 그런 게 아닙니다. 누군가가 내 대신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았기 때문입니다. 그게 제물입니다.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우리가 당해야 할 질고, 슬픔, 징벌, 고난을 제물이 대신 당했고, 우리가 받아야 할 찔림, 상함, 징계, 채찍질을 제물이 대신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받았답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요? 우리가 한 일이라곤 제멋대로, 제 고집대로 산 것뿐인데, 우리의 잘못된 죄악을 하나님께서 그 제물에게 다 담당, 전가시키셨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그 결과, 우리는 죄의 저주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제물에겐 이런 역사, 영적인 놀라운 권세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제물을 누가 가져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죄를 용서받기 원하는 죄인이 친히 가져와야 합니다. 그것도 가장 좋은 짐승으로, 집에서 아끼는 것으로, 흠 없는 것으로, 자기 생명과 맞바꿀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가져와 드려야 합니다.
4. 하나님의 어린양
자 이런 배경을 두고 오늘 본문을 보자. 메시아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만인 앞에서 선포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어린양, 양을 제물로 삼는데, 그중에도 어린양, 가장 마음이 아프고, 가장 아까운 존재입니다. 애처로운 것입니다. 그 어린 것을 어떻게 잡는가요? 어떻게 죽일 수 있는가요?
그럼에도 그토록 아깝고 안타까운 것을 죽입니다. 왜? 내 죄 때문에! 죄로 인해 벌어진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죄로 인해 껄끄러워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내가 가장 아끼는 것을 희생시킴으로 내 열망이 그 정도임을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어린양은 내 마음의 표현입니다. 내가 그 정도로 관계가 회복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 정도로, 어떠한 대가,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복원되기를, 예전에 그토록 좋았던 관계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증언한 바에 의하면 ‘어린양’까지는 좋은데, ‘나의 어린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요?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요? 틀어진 관계, 죄로 인해 무너진 그 신뢰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선 죄를 지은 내가 ‘나의 어린양’을 내놓아야 하는데 어째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어린양’, 자신의 어린양을 내놓았나요? 내가 ‘나의 어린양’을 내놓기를 기다리고 기다리시다가 ‘너는 종래 너의 어린양을 못 내놓았다.’ 하셔서 이젠 하나님께서 당신의 어린양을 내놓으신 것입니다. 나의 양으로는 죄를 1년에 한번뿐 효력이 없습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께선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가까이 당기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죄는 내가 짓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내가 끊어버렸는데, 그것을 잇고 싶어 하는 분은, 그 대가를 치르시는 분은, 그러면서까지 나를 가까이 당기고 싶어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어린양을 내놓으셨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줄, 그것을 끊은 것은 내 죄악입니다. 내 손으로, 내 죄악의 손으로, 내 탐욕의 손으로 그걸 끊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걸 다시 이으십니다. 그러면 나는 또다시 그것을 끊어버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또다시 그걸 이으십니다. 이게 평생 반복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나는 약속의 줄을 매번 끊고, 하나님은 그걸 매번 다시 이으시고, 이게 평생 반복되는데 이렇게 줄을 끊고, 다시 잇고, 끊고, 잇고 하다보면 줄이 짧아지며 둘 사이가 점점 더 가까워진다는 사실!
죄인인 여러분, 성자와 우리 중에 누가 더 하나님과 가까운가요? 늘 주의 성전에서 자신은 말씀대로 살았다고, 그게 감사하다고, 심지어 나 같이만 살아보라고 한 사람과 언제나 주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통회하는 사람, 누가 더 하나님과 가깝겠습니까? 이상한 말같이 들리겠지만, 궤변같이 들리기도 하겠지만 나는 믿기로는 죄인인 우리들이 하나님과 더 가깝다고 믿습니다!
자,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어린양,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제물입니다. 그것도 가장 아깝고 안타까운 것입니다. 정말 아끼고 싶은 것, 빼돌리고 싶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게 제물이요, 그중에도 어린양은 가장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죄를 지은 편에서, 계약을 파기한 쪽에서 내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화목을 원하는 이가 내놓는 법이요, 죄지은 편이 책임을 진다는 의미에서 내놓아야 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피해자인 하나님이 내놓으셨습니다. 배신을 당한 이가 내놓았습니다. 그것도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 제물로 내놓으셨습니다. 그게 누군가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독생자! 이 세상과 맞먹는 하나님께 가장 소중한 것, 독생자입니다.
그 독생자가 누구라고 세례 요한은 증언하는가요?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하나님이 내놓으신, 하나님께서 가장 아끼시고 아끼시는, 정말이지 결코 죽음에 내주고 싶지 않은 제물, 어린양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당신의 어린양을 내놓으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를 그 어린양 못지않게, 아니 더 사랑하신다는 메시지입니다. 믿어지나요?
어떤 사람이 이 사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왜 사랑하시는가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게 없습니다. 도대체 나의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그토록 사랑하시는가요? 그래서 성경을 뒤적여 보았답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나를 사랑하시는 지,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싶어서 성경 여기저기를 뒤적여 보다가 로마서 5장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8.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분의 피로 통해서 의롭게 되었은즉 더욱더 그분을 통해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으리니 10. 이는 우리가 원수였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을진대 화해하게 된 자로서 더욱더 그분의 생명으로 통하여 구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롬5:8-10)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신 게 언제라고? 내가 착한 일할 때? 내가 선할 때? 내가 똑똑할 때? 내가 기도를 많이 할 때? 내가 신령할 때? 천만의 말씀! 내가 죄인일 때,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예수가 누구냐? 천국은 무슨 천국, 구원을 주려면 십 원을 주라고 하며 하나님 앞에 불신과 불경의 죄를 쌓아갈 때, 하나님은 그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이유? 모릅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냥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뿐입니다. 그 증거가 뭐냐고? 십자가의 예수님, 하나님의 어린양! 지금은 네가 모르나 네가 철이 들면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내 사랑을 알 것이다 하여 내 죄의 대가로 어린양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셨습니다. 내가 요청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십자가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랑에 고개를 숙입니다.
알기 전에는 ‘저게 뭐꼬? 적십자인가? 무덤 표시인가? 더하기 표시인가?’ 엉뚱한 소리를 하곤 했는데 이젠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젠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 십자가에 내가 한 일이라곤 내 죄악으로 예수님을 못 박은 일밖에 없습니다. 그토록 힘들어하신 십자가를 대신 져드린 적도 없고, 무거우시겠다고 받쳐드린 적도 없습니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는 예수님을 그 십자가에 못 박은 것밖에 없습니다.
♬“나 십자가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5. 나를 대신 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로 가까이 누가 눈에 들어와야 할까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보십시오! 바쁘겠지만, 볼 게 많겠지만, 생각할 것도 많겠지만, 이때는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하신 그 하나님의 어린양에 주목합시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내가 이 정도로 너를 사랑한다, 지금은 네가 잘 모르겠지만 네가 철이 들고나면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내 이 사랑을 알 것이다’ 하여 자기의 사랑하는 외아들, 그 어린양을 내 죄의 값을 치르기 위해 죽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외아들, 하나님의 어린양은 죽기까지 말없이 성부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나는 화목이 이루어졌습니다. 내 죄를 대신 속죄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은 하나님의 어린양에게 주목하며 삽시다. 하나님의 어린양을 따라 하나님의 그 뜨거운 심장, 하나님의 그 헤아릴 수 없는 큰 사랑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복의 통로가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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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별이야 운영자 작성시간 24.04.01 설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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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유토피아3 작성시간 24.04.02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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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하늘바라기 작성시간 24.04.02 💖언제나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려는 마음은 마음속에 평안과 안식을 준답니다.
진실한 말 한마디로 믿음과 행복을 줄수 있다면 마음의 문을 열어 진실한 목소리로 행복을 주고 싶습니다.
건강하게 사랑과 행복으로 편안한 삶에 만사형통 하시고 즐겁게 아름다운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
작성자서울장애인교회 작성시간 24.04.07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