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5 : 5. 온유한 자
마 5 : 5. 온유한 자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온유(溫柔)하다는 말은 겸손하다는 말과 비슷하다. 그것은 교만함, 완고함, 패역함, 목이 곧음과 반대된다. 교만한 마음은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나아가지만,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은 믿음과 순종으로 나아간다.
온유는 믿음의 성품이다. 믿는 자와 믿으려 하는 자는 심령이 온유해야 한다.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하나님과 주 예수님을 믿고 그의 모든 교훈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종할 수 있다.
온유한 사람은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을 얻는다. 여기의 ‘땅’은 이 세상에서 땅을 얻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세상에서는 강한 자나 힘센 자가 땅을 차지하겠지만, 천국은 다르다.
천국은 온유한 자가 얻는다. 온유한 자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을 것이기 때문이다.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1] 온유한 자(*, 호이 프라 에이스)는 복이 있나니
'온유(溫柔)한'(*)이란 말은 시편 37: 11의 70인 역에서 나왔다.
* 시 37: 11 -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그 주제는 한 인간이 역경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를 끝까지 보살피실 것이라고 굳게 믿는 신앙으로 인하여 기업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온유(溫柔)'란 외형적인 폭력이나 잔인함의 반대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사랑으로 인하여 고통받고, 그 고통을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의 자세이다.
* 약 3: 13 -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칼뱅(Calvin)은 '온유란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기를 더디 하며 절제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자연적 격노에 대하여 관용을 취하는 덕성'이라고 정의하였다.
세상의 정복자들은 강한 힘과 권력으로 땅을 정복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온유하심으로 세상 만물과 천국의 주인이 되셨다.
* 마 11: 29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마 21: 5 -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사 62: 11, 슥 9: 9) 하라. 하였느니라.
본 절과 7-10절에 있는 다섯 개의 축복 선언은 누가복음에 평행 구절이 없다. 이로 인하여 이것이 후대의 삽입이라고 주장(Wellhausen)하거나 마태의 것들이 누가복음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팔복은 하나의 통일체이며 모든 것들이 천국 시민(메시야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의의 규범(norm)이다.
온유는 믿음의 품성이다. 믿는 자 또는 믿으려 하는 자는 심령이 온유해야 한다.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거칠고 목이 곧아 불신앙과 불순종에 나아가지만,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은 믿음과 순종에 나아간다.
사람이 믿음을 가지려면, 먼저 온유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사람이 구원을 얻으려면, 먼저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오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온유한’이라는 히브리어(아니 י)는 ‘핍박을 당한, 고난을 당한, 가난한, 겸손한, 온유한’이라는 뜻이다.
사람은 고난을 통해 온유해지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환경적 어려움은 사람을 겸손하고 온유하게 만들며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도록 준비시킨다.
온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다. 주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 29).
주의 제자 된 우리는 그의 온유와 겸손을 본받아야 한다. 온유는 또한 성령의 열매이다(갈 5: 23). 그러므로 온유는 성도의 기본적 덕목이다.
에베소서 4: 2는,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고 교훈하였고, 골로새서 3: 12는,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으라”라고 교훈하였다.
우리는 우리 속에 남은 교만하고 거친 마음을 날마다 죽이고 온유한 마음으로 단장되기를 훈련해야 한다. 그런 자가 주님의 제자다운 자요 교회에서 큰 자이다. 주께서는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8: 4).
2]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땅'(*,게)이라는 단어는 마태복음에 45회 나온다. 그것은 유대 땅(2: 6), 이스라엘 땅(2: 20-21), 어느 지역(4: 15. 9: 26, 31. 11: 24. 27: 45), 하늘과 땅(천지. 5: 18,35), 하늘과 구별되는 장소(6: 10. 9: 6), 지면(10: 29), 흙(13: 5,8,23), 육지(14: 24), 온 세상(12: 40,42)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본문의 땅은 시 37: 11의 약속의 땅에 대한 인용이다.
* 시 37: 11 -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여기에서 땅을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바다나 하늘에 반대되는 지리적 공간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또 의미를 이스라엘 땅에 국한할 필요가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구절의 진정한 뜻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창 15: 18)에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이 메시아 왕국의 절정이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이다.
* 사 66: 22 -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계 21: 1 -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세상에서는 강하면서도 공격적인 자, 질서를 무시하는 난폭자가 땅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천국의 기업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온유한 자에게 주어진다.
* 시 37: 1, 11, 22, 34 – 1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11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22 주의 복을 받은 자들은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들은 끊어지리로다. 34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똑똑히 보리로다.
왜냐하면 온유한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해있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하늘의 축복과 땅의 축복이 모두 그들의 소유가 되고
* 고후 6: 10 -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롬 8: 17 -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온유는 믿음의 품성이다. 온유 자체가 믿음은 아니다. 믿는 자는 그리고 믿으려 하는 자는 그 심령이 온유해야 한다.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거칠고 목이 곧아 불신앙과 불순종에 나아가지만, 가난하고 겸비한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부드럽고 온유하여 믿음과 순종에 나아가는 것이다.
온유는 주님의 품성이요 성령의 열매이며 성도 속에 갖추어야 할 기본적 덕목이다.
* 마 11: 29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갈 5: 23 - (성령의 열매는)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엡 4: 2 -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 골 3: 12 -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그러나 우리 속에는 온유보다는 거칠고 목이 곧은 마음이 있지 아니한가? 옛사람의 속성이 남아 있지 않은가? 이것을 다 죽여야 한다. 거친 마음, 과격한 성질과 성격을 성령의 불로 소멸하고 주의 마음을 본받아야 한다. 주의 은혜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히브리어에 '아나'라는 동사와 '아니'라는 형용사가 있다. 그 단어들의 본뜻은 '핍박을 당한다,' '고난을 당한다.'는 뜻인데, 거기에서 발전하여 '가난하다, 겸비하다, 온유하다'는 뜻을 가진다.
우리가 온유한 심령을 가지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는 환경적 어려움을 통하여, 핍박이나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겸비케 하시고 온유한 품성을 갖추도록 섭리하신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이 세상의 땅 몇 평, 혹은 몇 십 평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팔복은 천국의 복이요 천국 시민의 표로서의 복이다.
이 세상에서는 힘센 자, 억센 자, 자기 주관과 주견과 신념이 강한 자가 땅을 차지할 것이다. 그러나 천국은 그렇지 않다. 교회도 그렇지 않다. 온유와 겸손은 천국 시민의 표이다. 누가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가? 온유한 마음으로 주를 영접하고 따르는 자만이 받는다.
누가 천국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큰 자인가? 온유와 겸손으로 단장된 자가 큰 자이다.
3] 천국 백성 ( 마 5: 1-5 )
어떤 심리학자가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두 장의 그림을 그려 상자 속에 넣었다. 한 장은 웃는 얼굴, 밝은 얼굴을 그린 것이었고 다른 한 장은 우는 얼굴, 슬픈 얼굴을 그린 것이었다. 그는 상자에 두 개의 구멍을 뚫고 사람들이 상자 속에 있는 두 장의 그림을 들여다보도록 했다. 그랬더니 웃는 얼굴을 본 사람들의 표정은 밝았지만, 우는 얼굴을 본 사람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이처럼 우리가 세상을 살되 마음의 천국을 이루고 살면 해와 같이 밝게 살겠지만, 마음에 지옥을 이룬다면 정 반대가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천국의 말씀을 주셨다.
(1) 본문에서 몇 가지 사항을 발견할 수 있다.
① 산상수훈의 설교자가 나타난다.
설교자는 예수님 이시다. 예수님은 세상에 그 어떠한 위대한 선지자보다도 위대하신 분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분의 가장 위대한 설교를 이 시간에 듣고 있다. 예수님은 수천 년 전부터 선지자들이 예언하고 기다리던 하나님의 아들이다.
② 설교의 장소가 나타난다.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라고 하셨다. 전승에 의하면 갈릴리 바다 북서쪽 8km 지점에 있는 美의 산 즉 아주 아름다운 산이라 불리는 ‘핫틴산’을 가리킨다고 한다.
우리는 주님 행적의 작은 모습이라도 소홀해서는 안 된다. 왜 높고 화려한 곳에서 말씀하지 않고 작고 보잘것없는 작은 평지에서 말씀하셨을까? 바로 천국 백성의 복되고 아름다운 삶을 교훈하시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 같이 예수님께서 이 산에서 율법의 완성자로서 천국 시민의 법을 가르친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였다.
③ 말씀의 권위가 나타난다.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이 표현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자신의 뜻과 의지를 나타내실 때 주로 사용되던 통상적인 히브리식 표현법으로 설교의 엄숙과 권위를 나타내는 말씀이다. 예수님이야말로 선지자 중의 선지자요 사도 중의 사도이시며 설교자 중의 설교자시다.
예수님은 완전한 영적 권위에 사로잡힌 모습이었다. 마 7: 28-29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했다.
(2) 천국 백성의 마음이 나타난다.
① 천국 백성은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예수님은 이 말씀을 현재형으로 말씀하셨다. 지금 이 시각에 성령 안에서 천국을 누리며 살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마음이 가난해야 한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 예수 없이 성령 없이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예수를 믿을 뿐 아니라 날마다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도 천국을 누리며 산다.
상어는 태어나서 한 순간도 가만있지 않는다고 한다. 움직이지 않으면 몸의 산소 고갈로 죽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마음으로 날마다 찬송하고 예배하며 살아야 한다. 이런 경배의 삶이 있을 때 천국이 임한다.
② 천국 백성은 애통하는 자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천국은 애통이 없다. 그런데 애통을 말씀함은 이 땅 위에 사는 우리에게 교훈하신 말씀이다. 답답한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다. 참 신앙은 문제에 좌우되지 않는다. 그러나 천국이 이런 문제투성이라면 그곳은 천국이 아니다. 천국은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형통한 곳이기 때문이다.
어떤 신사가 정신과 의사를 찾아왔다. 정신과 의사는 그에게 여러 도움 되는 말을 해주면서 때마침 우리 마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희극배우가 와서 공연한다고 하니 그곳에 가서 세상사 다 잊어버리고 좀 웃으면 우울증을 치료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중년의 신사는 한숨을 쉬면서 “선생님 제가 바로 그 희극배우입니다." 세상 방법으로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셔야 한다. 위로라는 말은 단지 마음의 위로만이 아니다. 응답을 의미하는 말씀이다. 애통하면 위로는 물론 응답까지 주신다. 한나가 아들을 낳지 못해 부닌나의 핍박을 받고 울며 기도할 때 마음의 수색이 사라지는 위로가 임하고 사무엘까지 주셨다. 히스기아가 병들어 애통할 때도 15년을 연장시켜 주셨다. 다윗도 큰 죄를 범하고 애통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성령을 회복시켜 주셨다.
사람들은 문제를 가지고도 울 줄 모른다. 잘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믿음을 가지고 나오면 성령께서 도우셔서 기도하게 하신다. 그래도 애통함이 없다면 구약 성도들처럼 가슴을 쳐보라. 가슴을 치면 얼어붙은 심장이 움직이면서 눈물이 나오게 된다. 하나님은 애통해하는 자를 위로하시고 모든 곤경에서 돌이켜 주신다.
우리는 여기서 영적 의미의 애통을 사모하고 있다. 이것은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애통함이 아니다. 우리의 자연적 삶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것은 속세에서는 찾아 볼 수 없으며 그것과 현격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과거와 신약성경에서는 그리했지만, 오늘의 교회에서는 분명하지 않다. 이것이 분명하지 않은 원인는 가짜 믿음에 대한 반응이다. 이것은 가장된 경건의 모양으로 나타날 때가 허다했다.
우리가 일부러 밝고 명랑한 모양을 가장해야 한다는 생각이 유포되어있기 때문이다. 내부에서 비롯되는 삶 대신 그 무엇으로 가장하고 또 어떤 모습을 나타내려고 애쓰는 모든 노력은 여기서 기이하는 것이다. 최종적 원인은 잘못된 죄의식과 잘못된 죄론 때문이다.
기쁨을 찾으려 애쓰는 많은 기독교인이 있다. 그들은 기쁨을 체험할 수 있기 전에 정죄함을 가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회개를 좋아하지 않고 회개를 싫어한다. 정죄 의식을 떠나서 기쁨을 원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주님의 형상과 모범을 닮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한 가지는 주님이 웃었다는 기록을 볼 수 없다. 주님은 슬픔을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가 되어야 했고 실제 나이보다 훨씬 더 들어 보인다는 징후도 있다.
다른 예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볼 수 있다. 자기에 대해 비탄에 잠긴 나머지 고통 중에 울부짖는 사람이었다. 기독교인은 모두 이처럼 되어야 한다. 바울은 마음의 법과 몸의 지체들의 법과의 사이에 이와 같은 갈등을 충분히 알았다. 이것들이 비참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는 이 장막 집에 사는 동안 우리는 무거운 짐에 눌려 신음한다 라고 말하며 우리는 이 하늘에서 오는 우리가 살 집을 우리 위에 덧입기를 사모하면서 이 장막 집에서 신음하고 있다.라고 서술했다. 여기는 유쾌함과 쾌활함이 없다.
애통해한다는 것은 심령이 가난한데서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내가 하나님과 그의 성결을 대면하고, 내가 살아야 할 삶을 응시해 볼 때 나는 나의 철저한 무능과 절망을 본다. 내가 나의 영의 상태를 볼 때, 이것은 즉각 나를 애통하게 한다. 자기와 대면하고 자기와 자기 삶을 참으로 검토하는 사람이면 자기 죄 때문에 필연적으로 애통해야 할 사람이다. 자기 안에 있는 여러 악의 원리들을 의식하고 싸움이 지체들 속에 있음을 발견하며 그것을 미워하고 그것 때문에 애통해한다.
성도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참된 기독교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도 애통해하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 속에서도 같은 것을 보고 사회 상태와 세계 상태에 관심을 둔다. 우리 주님이 애통하신 까닭도 이와 같다. 그는 죄가 우리에게 죽음을 가져오고 삶을 망쳐놓고 불행하게 만든 것임을 보셨기 때문에 나사로의 무덤에서 우셨고, 예루살렘 성을 보고 애통하셨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역시 바로 죄 그 자체의 성격 때문에 애통해야 하며, 죄가 세상에 들어와서 이런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애통해야 한다. 자기의 죄의 상태 때문에 참으로 애통해하는 사람은 회개하려는 사람이다. 자기의 철저한 죄성과 절망을 보고 구세주를 찾고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세주를 발견한다. 성령께서 그의 완전한 만족의 대상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그에게 계시할 때는 사람이 이 철저한 절망 속에 있는 자기를 볼 때다. 그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자기 죄를 위해 돌아가셨으며 하나님 존전에 그의 변호인으로 서 계심을 본다. 그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완전한 준비를 보며 즉각 위로를 받는다. 기독교인의 생활은 이런 식으로 애통과 기쁨이, 슬픔과 행복이 교차하는 삶이다.
③ 천국 백성은 온유한 자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당시 개념으로 성공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차지했는데 구약은 지상의 땅이지만 이것은 천국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이 말씀을 응용해 보면 마음에 비추어 볼 수 있다. 성경은 마음을 토양에 비유했다. 사람의 마음을 정복하는 사람이 성공자다. 정치가도 상인도 교육가도 신앙인도 전도자도 교회도 사람의 마음을 차지하지 못한다면 성공할 수 없다.
심령의 가난이라는 개인의 만족이 다가 아니다. 애통으로 문제의 해결 역시 전부가 아니다. 더 나아가 사람들의 마음을 복음화하는 성공적인 부분도 있어야 한다. 천국은 가장 현명하고 가장 성공적으로 세상을 복음화하는 장점으로 가득한 세계다. 그 장점 중 하나가 온유다. 온유를 달리 표현하면 사랑이다. 사랑하면 어떤 완악한 자도 마음을 열게 된다. 전도도 마음을 열어야 성공한다. 외친다고 무조건 되는 것이 아니다. 목회의 꿈이 있다면 주와 교회를 더욱 사랑하면 된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비전이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온유까지도 이용하려는 마귀나 공산당은 온유의 대상이 아니다. 오로지 이들은 예수 이름과 지혜로 물리쳐야 한다. 나폴레옹은 "나는 칼과 대포로 세계를 정복하려 했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는 사랑으로 이 세계를 정복하였다."라고 말했다. 사랑은 힘이 있다. 천국 백성은 사랑으로 온 세계를 정복하는 자들이다.
온유는 나 자신에 올바른 견해와 동시에 타인과의 관계에 관한 나의 태도를 의미한다. 온유는 자신에 대한 정직한 진단을 통해 나타난다. 나 자신에 대한 온유함은 가난한 심령과 애통에 뒤이어 올 수밖에 없다. 내가 나의 죄 성에 의한 가난한 심령과 애통을 통하여 나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갖게 될 때 나의 교만은 없어질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무능력 앞에 자기에게는 자랑할만한 것이 없다고 느낀다. 동시에 온유는 자기를 주장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를 위해 자신의 지위나 특권, 소유물이나 신분을 요구하지 않는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민감하지 않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취급하든 그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으며, 부당하다고 생각하거나 자기연민에 빠지지도 않는다. 참된 온유는 자신을 더 이상 방어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방어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이 우리 속에서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온유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품행에서 나타나야 한다. 온유는 보복의 영이 완전히 없어졌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아무리 부당한 처사를 받을지라도 인내하고 오래 참아야 할 것을 의미한다. 온유는 항상 배우려는 영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귀를 기우릴 정도로 우리 자신과 우리 능력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품고 있다. 온유는 우리의 모든 것, 우리의 마음과 생각, 우리의 권리, 우리의 대의, 우리의 장래의 전체를 하나님에게 일임하는 것을 의미한다.
온유한 사람은 이미 이생에서 항상 만족을 얻는 사람이다. 그는 이미 만족하고 있는 사람이다.
* 빌 4: 11-13 –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 고전 3: 22 –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동시에 이것은 미래지향적이다. 앞으로 올 그날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새 날과 새 땅을 상속받을 사람이 될 것이다.
* 고전 6: 2 -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 롬 8: 17 -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 딤후 2: 11 –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이것이 온유이다. 자연인에게 온유는 있을 수 없다. 성령이 아니시면 아무것도 우리를 겸손하게 할 수 없으며, 우리의 심령을 가난하게 하며, 우리를 애통하게 하며 우리 자신에 대한 정직한 견해를 갖게 하며,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마음을 줄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주님에게 더욱더 집중함으로써 우리의 철저한 불완전함을 고백해야 하며, 이를 통해 우리 자아와 절교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주님이 우리 전부를 소유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