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2: 30. 반대하는 자요 헤치는 자다 31. 성령을 모독하는 것
마 12: 30. 반대하는 자요 헤치는 자다 -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
예수께서는 또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다.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은 그 생각과 뜻과 입장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의 교회를 세우려면,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뜻과 우리의 입장을 그의 생각과 그의 뜻과 그의 입장에 일치시켜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교회를 세우는 자들이 아니고 허무는 자들이 될 것이다.
1]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의 반대적 의미는 막 9: 40과 눅 9: 50에 의하면 '우리'(마가) 또는 '너희'(누가)를 '위하는 자'이다.
* 막 9: 40 -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 눅 9: 50 -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에서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게 무관심한 자들에 대해 언급한 것이며 누가복음에선 예수를 따르기를 거부하는 어떤 사람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본문의 논지는 매우 직선적으로 중립적인 태도가 있을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권세와 사단의 권세가 서로 투쟁하는 와중(渦中)에서 중립적 입장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본문의 '함께 아니하는 자'에 대해 크리소스톰은 '마귀'로, 벧겔과 네안더는 앞에서 나온 '유대 마술사' 등을 언급한다고 본다. 이 중에 크리소스톰의 견해가 환영받고 있다.
단순히 예수와 그의 가르침에 대해 무관심한 자, 예수와 연합(union)하기를 싫어하는 자를 말한다기 보다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바리새인들과 그의 추종자들처럼 '공공연히 예수를 비난하고 서로 의문을 제기하는 자'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2]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구약에서 흔히 하나님이 추수하는 분으로 묘사되었다.
신약에서도 예수는 마지막 날이 이르기까지 계속적으로 모으고 또한 추수하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
* 마 3: 12 -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 마 13: 30 -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기적행위를 보고 그를 메시아로 고백하려는 자들에 대해 예수가 바알세불의 힘을 입은 자라고 거짓 증언함으로써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려는 것을 방해하였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전진과 확산을 막기 위해 예수로 부터 사람들을 흩으려는 자들이 '모으지 아니하는 자', 곧 흩어버리는 자들이다.
예수의 위대한 사역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 모으는 것이다. 사탄은 되찾은 양 조차도 다시 빼앗고 될 수 있는 대로 그들을 흩으려는 악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
본문은 예수의 사역에 있어서 결단코 중간적 입장에 머무를 수 없음을 강력히 시사해 주고 있다. 정녕 예수의 사역에 적극 동참치 않는 자들은 예수의 나라를 전면적으로 반대하는 자들이다.
3] 중립은 없다
우리의 의식구조에는 '적당한 것'을 매우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말 그대로라면 그것은 참 좋은 의미다. 그러나 대체로 이것은 애매모호한 입장을 대변하는 낱말이 되었다.
본문에서 보면 신앙에는 중도라든지 중립이라든지 적당이라는 것이 통용되지 않는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1)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거대한 나라가 있다.
이 세상에는 수 많은 나라들이 존재한다. 그 국체와 정체는 다양하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에서 크게 본다면 오직 두 가지의 나라가 있을 뿐이다.
① 하나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 또는 하늘나라로 불리는 나라다.
이 나라는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파하심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 막 1: 15 –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이 나라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나라다. 이 나라는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쫓으시는 주님의 사역 속에서 이미 임하였으며, 주님을 영접한 자들의 마음 속에 도래하였다.
* 마 12: 28 -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성도의 마음은 놀라운 변화와 함께 평화와 구원의 기쁨을 맛보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넘치는 생활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 고후 5: 17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② 다른 하나는 사탄의 나라다.
사탄이 머리가 되어서 주장하는 나라다. 귀신들을 통하여 인간을 속박하고 영적으로 지적으로 육체적으로 인간을 괴롭히며 범죄와 질병의 노예가 되게 한다.
할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미혹하여 범죄하게 하고 절망과 타락 속으로 끌어들인다. 냉철히 본다면 모든 인간은 누구나 크게 나누어 이 두 나라 중의 어느 한 나라에 속하게 된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신명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신 30: 19)라고 하시면서 양자택일할 것을 요구하셨다.
마찬가지로 우리 앞에도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만 있을 뿐, 중립지대는 없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두 나라 중 어느 나라에 속한 백성인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면 사탄의 나라다. 이도 저도 아닌 제 삼의 나라는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광과 생명이요 사탄의 나라는 저주와 사망이다.
(2) 하늘나라에 속한 자
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다.
주님은 본문에서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라고 규정하셨다. 역으로 말한다면 주님과 함께 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함께 하는 자'란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 함께 하는 자는 그를 믿는 자를 말한다. 그의 말씀을 순종하고 따르는 자이다. 그와 친숙한 교제를 나누는 사이를 말한다.
또한 최선을 다하여 그의 말씀을 지키려는 자다. 그는 사모하고 존경하기에 자아를 버리고 그분을 본받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고는 영원토록 그와 함께 할 이유가 없다.
여러분은 이런 관계에 있습니까? 주님과 매일 함께 하는 생활을 합니까? 그렇다면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착각하지 말라.. 중립지대는 없다. 다른 한 나라 사탄의 나라에 아직 매여 있음을 알아야 한다.
② 예수님과 함께 모으는 자다.
예수님은 그의 백성을 모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성도란 예수님을 기준으로 하여 모인 자들을 말한다.
그리고 죄를 좇아 자신의 뜻을 좇아 사방으로 흩어진 사람들을 예수께로 모으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천사장의 호령 나팔 소리와 함께 그의 모든 백성들을 부르실 것이다.
그러면 모든 백성은 그에게로 모여들고 그와 함께 그의 영원한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며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3) 사탄의 나라에 속한 자
본문에서 주님은 사탄의 나라에 속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을 규정하여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자'라고 확실히 말씀하셨다.
주님과 함께 모으지 않는 자는 주님을 해치는 자다. 주님과 결별하고 멀리 떨어져 간다. 그는 생명선에서 멀어지는 자다. 이것이 곧 사탄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 사탄의 나라는 오래 가지 못한다. 그 나라는 이미 멸망이 예고되었으며,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할 것이며, 그 영광은 길이 계속될 것이다. 이 두 나라 중 우리가 속해야 할 나라는 어디인가? 아니 우리는 지금 어떤 나라에 속해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에 속한 존귀한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다.
마 12: 31. 성령을 모독하는 것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
주께서는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앞에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 살인과 간음의 죄라도, 또 하나님을 비방한 죄라도 회개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며 비방하는 죄는 사하심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성령을 비방하면 성령의 감동으로 이루어지는 회개를 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그런 죄의 경계선을 넘고 있다고 보인다. 그들은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시는 그의 신적 영광을 보고도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한다고 비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성경에 말씀한 ‘진리를 안 후 짐짓 범하는 죄’(히 10: 26)나 ‘사망에 이르는 죄’(요일 5: 16)와 비슷하다.
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공동 번역에서는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짓거나 모독하는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다 용서받을 수 있지만'으로 번역되어 있다.
헬라어 본문의 문자적인 의미 역시 '사람에 의해 저질러진 죄와 비방은 사하심을 받게 될 수 있으나'의 뜻으로 번역된다.
이는 하나님의 자비가 무한, 풍성하므로 인간의 모든 죄악이 도말(塗抹)될 수 있다는 성경의 보편적 진리를 입증해 준다.
* 시 63: 3 -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 시 86: 5 -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 시 130: 3-4 – 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4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 사 1: 18 -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 미 7: 19 -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 요일 1: 7 -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의 대속사역은 완전, 충만하여 그 어떤 죄악일지라도 능히 용서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모독'에 해당하는 헬라어 '블라스페미아'(*)는 '심한 비방'이나 상대방에 대한 지독한 '모독' 또는 어떤 대상을 '반대하여 말하다'(32절)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하나님을 비방하는(blasphemy) 행위에는 매우 심각하게 대처(reaction)했다.
* 마 9: 3 -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 마 26: 65 -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
그러나 예수는 이 부분에서 인자, 곧 자신을 거역하는 행위와 심지어 암묵(unspokenness)적 의미에서지만 하나님을 훼방하는 행위조차도 용서의 가능성이 주어짐을 시사하셨다.
2]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이 선언은 하나님의 자비가 예수의 대속 사역에 어떤 결함이나 불충분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성삼위 하나님의 위상(位相) 중 제 3위에 해당하는 성령의 탁월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란 성령의 이지적 사역을 사탄의 능력으로 간주하는 것이라 보는 학자들이 있다(Broadus, Chafer, Gebelein).
그런 점에서 바리새인들은 이미 그 죄를 범하고 말았는데,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덧입은 예수의 이적을 바알세불의 소치(result)로 매도했다. (24절).
이와 대조적으로 본문을 예수를 헐뜯고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고일 뿐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우리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성령의 독특한 사역에 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 발생하신 분으로서 창조와 구속을 완성하는 사명을 맡으셨다.
* 요 15: 26 -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 요 16: 7 -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 롬 8: 9 -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 갈 4: 6 -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분은 죄인들에게 죄를 자각하게 하고, 예수의 초청을 수락(acceptance)하게 하며, 영원한 진리를 깨닫게 함으로써 더 성숙한 신앙 인격체로 자라나게 하신다. 비록 성부를 경원(敬遠)시 하고 성자를 미워한 자라 할지라도,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역사로 인해 참회(懺悔)의 자리에 설 수 있다.
* 딤전 1: 13 -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하지만 성령이 역사를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비방, 모독하는 것은, 곧 참회와 중생에 이를 수있는 모든 가능성을 차단해 버리는 일로서 결국 심판에 회부 될 수밖에 없는 불행한 결과를 낳게 된다.
* 요 3: 36 -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신. 구약을 통틀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대한 규정이 있다. 그것은 '짐짓 범한 죄', 곧 의지적 결단에 의해 자행한 죄이다.
* 민 15: 30 - 본토인이든지 타국인이든지 고의로 무엇을 범하면 누구나 여호와를 비방하는 자니 그의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
* 히 6: 4-6 –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 히 10: 26-32 –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31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 요일 5: 16 -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며, 은혜의 빛이 어떻게 비취는가를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그것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을 말한다. 이는 부지중에 교회를 핍박했던 바울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범죄이다.
* 고전 15: 9 -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이 같은 범죄는 '성령을 훼방하는 것'과 긴밀한 관련성이 있다.
예수가 행하시는 놀라운 사역들(치유, 금식, 부활하심 등)이 분명히 하나님과 성령의 능력 안에서 행해지는 것임을 충분히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완강하게 부인하는 것은 결단코 용서받을 수 없다.
성령의 역사가 분명한 것임을 인지하면서도 의도적으로 그것을 거부하고, 성령께서 인간의 내면에 들어오셔서 감동, 감화하심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고의적으로 배척하는 것은, 곧 용서의 가능성을 완전히 막아버리는 일이 된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란 어떤 특수한 경우에만 적용시킬 수 없는 일이다. 죄를 깨닫게 하고 참회하게 하는 성령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거나 고의적(故意的)으로 성령에 대항하려는 고집스럽고도 악의에 찬 심령과 그 모든 활약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Alford, Plummer, Robinson 등).
이것은 오늘날 은사 운동이나 거짓된 신비주의를 경계하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오늘날 은사 운동이나 거짓된 신비주의는 교리적 정통성이나 건전성과 분별력이 없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지 않고 사람이 높임을 받고 성결과 절제의 도덕성이 없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실 때도 심지어 자신을 높이지 않으셨다. 그것은 오늘날 자신을 높이고 자랑하고 세속적이고 탐욕적이며 정욕적인 신비주의자들의 행위와는 완전히 다르다.
주께서는 이런 유의 사람들이나 인물들을 조심하라고 교훈하셨다. 또 사도 바울도 비슷한 교훈을 하였다. 우리는 성령을 모독하지 말자.
* 마 7: 22-23 –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 마 24: 24 -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 살후 2: 9-10 – 9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오늘날 성령께서 기적을 행하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이 교회의 전통적 입장이며 경험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선포된 바른 설교나 계획되고 행해지는 사업들이 성경 교훈에 맞을진대 그것을 함부로 비난하거나 반대하거나 대적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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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一麥.) 작성시간 23.01.02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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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jung8h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3.01.03 비난하거나 반대하거나 대적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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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jung8h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3.01.03 비난하거나 반대하거나 대적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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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하늘바라기 작성시간 23.01.02 💖보좌의 능력과 축복을 가진 자의 지혜로운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도 멋진 날 되시길 바랍니다.💖 -
답댓글 작성자jung8h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3.01.03 비난하거나 반대하거나 대적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