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로마서 10 : 16-21
듣지 못하는 청각 장애자와 보지 못하는 시각 장애자, 누가 더 불행하다고 생각됩니까? 시각 장애자가 더 답답할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이나, 길을 가는 것이나 무엇을 해도 시각 장애가가 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시각 장애자들은 청각이 매우 발달되어 작은 소리만으로도 사리를 판단을 합니다. 시각 장애자들 대부분이 믿음이 좋습니다. 청각 장애자들은 말을 듣지 못하니까 눈으로 보고 오해를 잘 합니다.
고인이 되신 강영우 박사는 맹인으로서 지리산을 등산해서 천왕봉에 올랐을 때 지리산의 그 아름다운 광경을 느낀 소감을 말했습니다. 구름 위에 높이 솟은 산봉우리에서 천하 절경을 보고 너무나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눈을 뜬 사람들보다 더 실감나게 말 할 때 이해를 못했습니다. 보지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연의 그 아름다움을 말 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연의 소리를 듣고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소리를 듣고 충분히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롬10:17)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말씀이 들려지지 않으면 믿음은 생기지 않습니다. 말씀 듣는 귀가 열릴 때 믿음이 생깁니다. 눈으로 보는 것으로는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명의 맹인들의 눈을 띄워 주셨습니다. 듣지 못하는 어눌한 사람도 고쳐주시기도 하셨지만 맹인만큼 많지는 않습니다. 청각 장애자보다 시각 장애자가 더 불쌍하기 때문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앞을 볼 수 없는 시각 장애자, 맹인들의 믿음이 더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대부분의 맹인들이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자 하여 나왔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바디메오와 삭개오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두 사람이 너무 대조적이라는 것입니다. 바디메오는 맹인이요 구걸하는 거지였고, 삭개오는 부자요 세리장입니다. 바디메오는 맹인으로 눈은 어두웠지만 귀는 밝았습니다. 맹인은 청각이 매우 발달되어 소리만 듣고서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가를 압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나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고서도 젊은 사람인지 나이 많은 사람인지, 사기꾼인지, 외식쟁인지, 깍쟁인지, 동정심이 많은 사람인지를 압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의 소리만 듣고 동정심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일 때는 ‘한 푼 주세요’ 라고 소리쳐서 구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무리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바디메오는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예수님을 향하여 소리쳤습니다. 사람들이 바디메오를 꾸짖어 잠잠하라고 한 것을 보면 소리가 제법 컷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디메오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눅18:39). 잠잠하라고 꾸짖어도 더욱 크게 소리 쳤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긴가민가 하였다면 잠잠하라고 했을 때 더 이상 소리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그냥 쉽게 넘어 갈 수 없습니다. 아주 중요한 교훈이 되는 말씀입니다. 바디메오는 맹인입니다. 밝은 눈으로 예수님을 본 사람은 “나사렛 예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눈으로 볼 수 없는 맹인은 가르쳐 주는 대로 ‘나사렛 예수여’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리고에서 두 번째로 만난 삭개오도 예수님을 보고자 하여 나왔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고자 했지만 사람이 많고 키가 작아 예수님을 볼 수 없어서 잘 보기 위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에게로 오셔서 ‘삭개오야 내려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보았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날 밤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비로소 예수님이 자신의 주가 되시는 분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삭개오 역시 자신의 밝은 눈으로 보고서는 예수님을 올바르게 알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자신의 구원자 이심을 알았습니다.
여리고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나사렛 예수’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맹인 바디메오는 말씀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로 알았습니다. 같은 예수지만 ‘나사렛 예수’와 ‘다윗의 자손 예수’로 아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로 압니다. ‘나사렛 예수’는 나사렛에서 자란 예수, 인간 예수라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수 있겠느냐’(요1:46)라고 말했습니다. 나사렛은 당시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작은 촌락에 불과 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을 업신여기는 비하의 말입니다.
바디메오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예수님이 ‘나사렛 예수’(인간 예수)가 아니라 구약 성경에 다윗의 자손에게서 메시야가 날 것이라는 예언된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부른 것은 예언된 성경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신적 지위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신적 능력을 소유한 분이시란 확신이였습니다. 맹인은 자신의 고통을 해결해 주실 분이라는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소리를 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믿음이 보는 데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 듣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내가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우리도 맹인인가’라고 반문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9:41)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밝은 눈으로 아름다운 자연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만약 우리가 맹인이였다면 얼마나 불행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관광을 하면서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즐기는 것입니다. 맹인이였다면 그러한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그러나 보는 것이 타락의 원초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류의 타락의 원인을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하와가 뱀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그 나무를 본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그래서 그 열매를 따먹고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하였습니다.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더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을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습니다(창2:5-7). 인류를 타락하게 한 원인은 눈으로 보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 不如一見)이란 말이 있습니다. ‘한번 보는 것이 백번 듣는 것보다 낫다’는 말입니다. 세상적인 지식은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보아서는 안되는 것을 봄으로 해서 큰 불행으로 빠져들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 왕이 범죄하게 된 동기가 옷을 벗고 목욕하는 여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삼하11:2).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므로 해서 일생을 불행하게 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행에 빠지는 원인 중에 보아서는 안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로마 제국의 박해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네로 황제는 기독교를 말살시키려고 온갖 수단 방법을 다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생명있는 종교이기 때문에 박해를 받을수록 더 강했으며 성도들의 믿음은 더욱 좋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로마 황제가 예수를 믿었습니다. 이제 숨어 박해 받던 성도들이 마음대로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교회당이 곳곳마다 세워지고 찬송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로마 제국의 국고로 교회당을 지었습니다. 성전은 웅장하였고 화려하였습니다. 최고의 걸작품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이름있는 화가들이 성전 벽에 성화를 그렸습니다. 성전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으며 웅장한 궁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문제는 성도들의 말씀 듣는 귀를 막은 것입니다. 성전에서 말씀이 점점 사라져 버렸습니다. 기독교 문화는 발달되었지만 말씀 없는 종교로 타락되고 말았습니다.
화려하게 지은 성전을 지금은 성전이라고 하지 않고 궁전이라고 합니다. 여행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 주는 관광 코스가 되었습니다. 벽화는 전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입니다. 말씀을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성전에서 말씀이 사라졌습니다. 성경말씀을 성전 벽에 벽화로 그려져 눈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말씀이 없는 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로마 카토릭은 성경을 잃거나 강해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어졌습니다. 말씀 듣는 귀를 막아 버린 것입니다.
교황의 교시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황이 한 마디씩 하는 말을 신도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지금도 천주교회는 성경을 봉독하거나 설교를 하기보다는 추기경이나 신부가 가르치는 말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기도하는 것도 역시 기도문을 낭송하거나 주문을 외웁니다.
이렇게 말씀이 사라지고 변질된 기독교를 말씀 중심으로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개혁주의는 성경 중심, 말씀 중심의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초대 선교사들이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분들이였다는 것은 한국 교회에 큰 축복입니다. 그래서 세계 어느 나라의 교회들보다 한국 교회가 말씀 중심으로 바로 서 있습니다. 말씀 중심은 맹인이 예수님에 대한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라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나사렛 예수’로 아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 예수’로 알고 믿는 신앙이 말씀 중심의 신앙입니다.
성전은 성도들이 예배드리는 곳으로서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 말씀을 잘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최고의 음향 시설을 합니다.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이 말씀을 듣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 교회가 급속도록 변질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성전이 화려해 집니다. 성전을 궁궐처럼 꾸밉니다. 눈을 즐겁게 하는 분위기로 꾸며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점점 말씀을 듣는 귀를 막고 눈을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로 압니다. ‘나사렛 예수’로 아는 사람들을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로 아는 바디메오를 예수님이 만나 주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삭개오 역시 예수님을 보고자 했지만 예수님이 그의 집에까지 오셔서 말씀으로 가르쳐 깨닫게 하였습니다. 비로소 삭개오는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해 주실 분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아십니까? 맹인처럼 ‘다윗의 자손 예수’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말씀을 들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말씀 듣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실 때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심을 믿을 수 있습니다. 말씀 듣는 귀가 열려야 예수님을 만난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듣지 않으면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눈으로 보고 아는 예수가 아니라 말씀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로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실 때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축복하십니다. 성도 여러분은 말씀 듣는 귀가 열려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이 주는 복을 받을 수 있기를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