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 회복 1 (막 3:1-5)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이 시간에 “능력 회복”이라는 제목입니다.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삼손의 예를 들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삼손이 들릴라의 유혹에 못 이겨 능력의 비밀을 알려줘 머리카락을 삭도 당하고 능력을 잃었습니다. 그 결과 눈도 빼임 당하고 매일 경기장에 불려가 사람들 앞에 놀이꺼리가 되는 비참함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능력을 잃어버린 자의 모습입니다.
능력을 회복하는 길은 무엇일까요?
1. 예수 안에서 능력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1절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눅6:6에는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했습니다. 왜 이렇게 자세히 기록했을까? 거기에 담긴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오른손은 권능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이 손이 말랐습니다.
언제부터 말랐을까요? “손 마른”을 원문으로 보면 (헬, 엑세람메넨), 손이 '가뭄이 든 땅'처럼 굳어진 상태를 뜻합니다. 시제로 보면 완료 수동태 분사로서 그의 손 마른 것이 선천 아닌 후천적임을 보여줍니다. 본래 손이 건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건강하게 태어났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능력이 없다고 없는 것 아닙니다. 예수 믿을 때 이미 능력을 받은 사람입니다. 능력의 예수를 모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막16:17-18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눅10:19에도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다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돌아와 기뻐한 것을 보면 정말 능력을 주셨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해보니까 나타나더라는 말입니다. 처음 예수 믿을 때 능력 받은 분들이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해보니까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찬양해 보세요. 어둠이 물러갑니다.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의 보좌가 움직입니다.
능력도 권세도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그 생각이 문제입니다. 복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을 배우고 깨달아야 합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일지라도 뽕나무 더러 바다에 심기우라 해도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 정도까지 나가시기 바랍니다. 성도의 능력은 예수 안에서 받았다에서 출발합니다.
2. 신앙의 병을 고침받아야 합니다.
1절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이 마른 사람에 대해서 기독교 초기의 문헌에는 그가 석공이었다고 합니다. 무거운 바윗돌, 아무나 석공 합니까? 건강하지 않으면 못합니다. 그는 건강한 사람이었지만 어느 날부턴가 오른손이 힘이 빠지고 마르기 시작했습니다. 질병이 온 것입니다.
이처럼 능력을 가진 자로 거듭났어도 신앙에 병이 들면 능력을 잃게 됩니다. 세상을 사랑함도 병입니다. 불신도 의심도 게으름과 나태도 병입니다. 염려와 근심도 미움과 증오도 병입니다. 교만도 자만도 열심을 잃은 것도 병입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어내는 공장과 같다." 했습니다. 우상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랍니다. 다 영적 기운을 막는 것들입니다. 삼손의 능력이 사라졌다면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2:5에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라” 여기 “생각하고”(헬, 므네모뉴에)는 '계속해서 기억하고 묵상하여 뼛속 깊이 생각하라'는 현재 명령형입니다. 내 신앙의 병이 어디서부터 깊어졌는지 집요하게 추적하여 원인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기도가 약합니까? 보혈을 모릅니까? 죄 가운데 있습니까? 감정을 너무 억제하는 건 아닙니까? 생각이 복음화되지 못했습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딤전5:6에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했습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성령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단해보시기 바랍니다.
3. 율법의 송사를 이겨야 합니다.
2절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여기 “주시한다”는 (헬, 파레테룬) '함정을 파놓고 걸려들기만을 사냥꾼처럼 악의적으로 째려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고소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흠을 찾는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병을 고치면 안식일을 범한 것으로 고소하려고 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침은 진정한 안식을 주는 것인데 율법의 중심을 모르고 한 생각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서 능력을 빼앗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율법적인 눈이 너무 밝은 것입니다.
율법은 좋지만 율법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양심도 율법의 기능이 있습니다. 양심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바울은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1:19) 했습니다.
양심이 너무 예민하면 죄 아닌 것도 죄로 인식하여 정죄에 빠지고, 양심이 너무 둔해도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해 또 죄에 빠집니다. 복음적인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복음적 양심이란 정죄 받아 마땅한 죄인이지만 예수님의 속죄 공로로 사함을 받았다는 확신입니다.
그렇지 않고 사탄의 끝없는 참소를 받아들이는 한 우리는 어떤 능력도 잃고 맙니다. 애굽의 장자 재앙처럼 우리 심령을 죽이려는 죽음의 재앙에서 피할 곳은 오직 예수 보혈입니다. '그래도 나는 보혈을 믿는다.'라는 믿음으로 나가세요.
계12:10-11에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즉 복음의 확신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참소를 당했음을 전재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복음에 서서 율법적 신앙에서 벗어날 때 하늘의 찬양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좋은 난방기구라도 콘센트에서 플러그가 빠져 있으면 따뜻해질 수 없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없는 능력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성도는 예수 안에서 능력을 받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능력이 없다면 어디에서 문제인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여 진리에 서고 회개하여 온전히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능력으로 충만한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