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동이 같은 생활필수품들도 버려보세요 = 요한복음4;3-30(190922)
PW : 믿음 BIW : 물동이를 버려두고 가라 AG : 수가성 여인
TS : 믿음이란 버릴 것을 버리는 것이다.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코끼리를 사랑한 터프가이 개미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터프가이 개미가 코끼리에게 꽃반지를 내밀며 말했습니다.
“미스 코! 나랑 살림 차리자!”
그러자 황당한 코끼리는 대꾸도 하지 않고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터프가이 개미가 코끼리를 강제로 덮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때 야자열매가 코끼리 머리 위로 ‘빡’하고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자 미스 코끼리가 아파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으아악!”
이 소리에 개미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괜찮아! 처음엔 다 그런 거야!”
그러자 옆에 있던 하루살이가 이 장면을 보고 중얼거리는 것입니다.
“하여튼, 오래 살고 볼 일이야!”
하루살이는 오래 살아봐야 하루에 불과합니다.
자신이 처한 처지도 모르면서 막무가내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처한 처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겸손하게 살아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입으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P4.
예수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돌아가는 길에 사마리아 성으로 들어가신다.
유다에서 갈릴리로 돌아가는 길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다.
굳이 사마리아 성을 지나서 갈릴리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도 예수님과 제자들은 사마리아 성으로 들어가셔서 수가라는 성읍에 있는 우물가로 찾아가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성으로 찾아간 시간은 태양열이 작열하는 정오쯤 되는 시간, 점심 식사 시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시내로 먹을 양식을 구입하러 간 시간이다.
아마도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이 먹을 양식을 사기 위해서 동네로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4장의 사건을 사도 요한이 기록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사건에 대해서 다른 복음서에는 전혀 기록되지 않는다.
오직 요한복음에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요한복음에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기록하지 않은 사건들이 많이 기록하고 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기록하지 않았는데, 유독 요한복음에서만 기록하고 있는 사건들이 많다.
가나 혼인 잔치 사건도 요한복음서에만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사도 요한이 이 사건들의 목격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도 요한이 직접 목격한 사건들이기 때문에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가 이 사건들을 복음서에 기록하였을 것이다.
사도 요한이 직접 목격한 사건이 아니라면 이렇게 생생하게 기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제자들은 수가성 우물가에 예수님이 쉬실 수 있도록 해 드리고, 요한은 예수님의 말벗이 되어 드리면서 함께 있었을 것이다.
몇몇 제자들이 마을에 먹을 수 있는 빵을 구입하러 간 사이에 예수님은 우물가에 앉아서 어느 여인을 만나게 된다.
이 여인은 중동지역에 형성되어있는 하나의 문화 때문에 심한 고통을 당하는 여인이다.
그 문화라는 것은 흔히 계대법이라는 가문의 대를 이어가야 한다는 제도로서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 ; Levirate marriage)에 의해서 고통을 당하는 여인이다.
형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취하여 형의 아들을 낳아서 형의 대(代)를 이어가도록 하는 제도이다.
이런 제도는 우리나라 역사에도 등장하는 제도 중에 하나이다.
고구려에도 형사취수제도를 사용했던 혼인제도이다.
이런 문화는 성경에서도 여러 차례 등장한다.
창세기 38장에 등장하는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 사이에 일어난 사건도 이 문화에 의해서 생겨난 사건이다.
룻기에서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내 딸들아 되돌아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룻기1;11-13)”라고 말하면서 두 며느리에게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권면하는 말에도 형사취수제에 의한 계대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에게 찾아와서 부활에 대하여 질문하면서 일곱 형제와 한 여인에 대하여 거론하는 것도 이 문화에 근거하여 질문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서 메시야이신 자기 자신을 여인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이 여인과 결혼한 남편은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형사취수제에 의해서 남편의 시동생에게 자신의 몸을 맡길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면 시동생에게서 후사를 낳았으면 좋았을텐데 이 여인은 본래부터 불임여성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상하게도 후사를 낳지 못하고 시동생도 세상을 달리하고 만다.
여인은 계속 형사취수제에 의해서 다음 시동생을 맞이해야 하고, 또 다른 시동생을 맞이해야 하는 짖긋은 운명이 되고 만다.
그러면서 다섯 남자들이 세상을 떠나게 되고, 지금 여섯 번째 남자와 함께 살아야 하는 현실이 되고 만다.
이 여섯 번째 남자도 여인과 잠자리를 같이 하면서 아기씨를 주어야 하는 남편 대리자 역할을 할 뿐, 실제적인 남편은 아니다.
이 여인의 입장에서 보면 시집 한 번 잘못 가서 시댁의 모든 남자들을 잡아먹은 몹쓸 년이 되는 것이다.
시댁의 입장에서는 여자가 잘 들어오면 가문이 흥하지만, 여자가 잘못 들어오면 가문을 깡그리 말아먹는다는 말처럼 이 여인을 며느리로 맞이한 대가가 자신의 아들들을 모조리 죽이게 되는 아주 사나운 여인으로 보는 것이다.
시댁은 이 여인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이 치솟아 있다.
그럼에도 그 당시 대(代)를 이어가야 한다는 문화에 의해서 여인을 쫓아내지도 못하고, 계속 아들들을 그 여인의 남편대리자로 주어야만 하는 현실이 너무 고통스럽기만 하다.
여인은 여인대로, 시댁은 시댁대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 고난. 역경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여인은 내리쬐는 햇살이 너무 뜨거워서 사람들이 잘 나들이하지 않는 낮 시간을 이용하여 물동이를 이고 우물가로 찾아오는 것이다.
여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우물가로 나아왔는데, 어떤 유대인 남성이 우물가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 남자는 여인에게 대뜸 “마실 수 있도록 물 좀 주세요.”라고 하면서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유대인 남성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는 ‘마실 수 있는 물 좀 달라.’라고 말로 시작하더니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으로까지 발전해 나가게 된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라고 계속 도전하는 말씀을 하신다.
이에 여인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언약해 온 메시야를 알고 있음을 말하게 된다.
예수님은 메시야 대망 사상을 알고 있는 여인에게 “네게 말하는 내가 바로 그다”라고 말씀하면서 “내가 바로 네가 말하는 바로 그 메시야이니라.”라고 여인에게 말씀하고 있다.
여인은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메시야가 오시게 되면 그 메시야가 자신들에게 모든 것들을 남김없이 낱낱이 밝혀 줄 것입니다.’라고 생각했었는데, 자신 앞에 앉아 있는 멀쩡하게 생긴 유대인 남성이 ‘바로 내 자신이 그 메시야이니라. 내가 그 메시야이니라. 내가 바로 그 그리스도이니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인은 순간 무언가에 홀린 것 같은 감동을 받게 된다.
그동안 형사취수제 때문에 가슴 속에 한 맺힌 응어리로 사무친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은 감동을 받게 된다.
여인은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아주 이상한 신비로운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면서 ‘내가 여기 가만 앉아 있어서는 안 되지 않나?
마을 사람들에게 이 사람에 대하여 말하면서 알려야 하지 않겠나?
지금 자기 자신의 가슴에서 울렁울렁 일어나고 있는 그 무언가를 전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여인은 마음 속에서 ‘지금 물동이를 이고 물을 뜨고 돌아가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 않나? 지금 자신이 만난 이 사람을 마을 사람에게 전해야 하는 것이 우선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요동치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물동이를 버려두고 갈 수 있단 말인가? 그럴 수 없다.
① 지금 내가 물을 뜨러 왔지 않나?
물을 뜨러 왔으면 물을 뜨고 가야 하지 않나?
그런데 물 뜨고 갈 물동이를 버려버리면 물을 길고 갈 수 없지 않나?
물을 뜨고 가지 않으면 시댁 식구들에게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물이라도 잘 뜨고 가야 시댁에서 살아남을 수 있지 않겠나?
② 내가 지금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가서 마을 사람에게 메시야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동네 사람들이 내 말을 들어주기나 할까?
시댁 식구들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조차 나를 사람 취급하지 않고 있는데...
③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분은 유대인의 하나님이지 않나? 우리 사마리아 사람들을 사람 취급도 해 주지 않는 그런 하나님이시지 않나?
그런데 내가 물동이까지 버려두고 마을에 내려가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분이 보낸 메시야를 내가 보았노라고 전한다면 동네 사람들이 나보고 “미쳤나? 정신 나갔냐? 남편을 몇 명 잡아먹더니 안전히 미쳤구나.”라고 하면서 비난하면 어쩌나?
D4.
① 여인을 하나님의 딸로 만나 주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유다에서 갈릴리로 돌아가는 길목에 굳이 사마리아 성을 지나서 갈릴리로 돌아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갈릴리로 돌아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굳이 사마리아 성을 지나서 갈릴리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하신다.
예수님은 태양열이 너무 뜨거워서 아무도 다니지 않는 낮 시간, 정오 시간에 어느 가련한 여인이 물 뜨러 올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신다.
예수님은 몇몇 제자들에게 ‘지금 배고프고 시장하니 먹을 수 있는 빵을 사오렴.“이라고 하면서 동네로 내려보내고 요한과 몇 명의 제자들과 함께 우물가에 앉아 계신다.
하늘 아버지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아무도 잘 다니지 않는 시간에 우물로 물 뜨러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넣어주신다.
여인은 될 수 있으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하여 물동이를 이고 우물로 물 뜨러 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물 뜨러 온 여인에게 ”지금 목이 많이 마르니 마실 수 있도록 물 좀 주세요.“라고 하면서 여인에게 말을 걸면서 여인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시작하신다.
예수님은 여인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비로소 자신이 바로 그 메시야이심을 밝혀 주신다.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밝혀 주면서 여인의 가슴에 뜨거운 감동으로 용트림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다.
예수님은 그 당시 계대법, 형사취수제의 문화의 테두리에 갇혀서 고통당하는 여인을 풀어 놓아주신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여인으로 회복시켜 주신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당한 사마리아 여인이라고 생각하는 여인을 하나님의 딸로 회복시켜 주신다.
예수님은 문화의 틀 속에 갇혀서 온갖 고통을 당하고 있는 여인을 자유롭게 풀어놓아 주신다.
우리 예수님은 온갖 불신, 거짓, 근심, 걱정, 염려, 원망, 불평, 우울증. 자학 덩어리에 갇혀서 신음하는 우리들을 풀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베풀어주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신다.
②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들어갈 수 있는 감동을 주시는 예수님.
하나님은 여인에게 지금 물을 뜨러 갖고 온 물동이를 버릴 수 있도록 감동을 주신다.
사실 여인에게 물동이는 꼭 있어야 하는 생활필수품이나 다름없다.
물동이가 있어야만 그래도 시댁에서 밥 빌어먹을 수 있는 생활수단이 되는 것이다.
여인이 자신이 살아가는 근거나 다름없는 물동이를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들을 버려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결코 버려서도 안 되고, 버릴 수도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여인에게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갈 수 있도록 붙들어주고 있는 물동이를 버릴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물동이를 버리면 마치 죽을 것 같지만, 이제는 영혼이 다시 살아서 하나님의 딸로 거듭나는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지 않고 그대로 갖고 있으면 여전히 과거가 가져다주는 고통에 얽매여 사는 여인이 된다.
그러나 이제는 메시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입은 여인이 되었기 때문에, 과거의 삶을 그대로 표출해주고 있는 물동이와 같은 낡은 생각, 틀, 삶의 방식, 삶의 도구를 과감히 버리지 않으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없다.
낡은 생각, 사상, 전통, 문화와 같은 물동이를 버릴 때,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히 목 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수를 마실 수 있다.
③ 메시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자랑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는 예수님.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뛰어 들어가서 마을 사람들에게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하면서 자신이 만난 메시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전하게 된다.
여인이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전하게 되자 30절에서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인이 전하는 메시야를 만나기 위해서 예수님 앞으로 달려 나온 사마리아 사람들은 직접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직접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을 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39절에서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마리아 마을 사람들은 여인이 전하는 소리를 듣고서 메시야이신 예수님께로 나와서 직접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신앙인들에게 가장 큰 은혜와 복이 있다면 우리들이 만난 구세주 예수, 메시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여인이 전하는 메시야를 전해 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께 와서 직접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을 듣게 된다.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게 된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42절에서 여인에게 이런 말을 한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라고 하면서 여인에게 예수님을 믿는 신앙의 고백을 들려주게 된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낮 시간에 아무도 몰래 물을 뜨러 온 여인은 메시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하나님의 딸로 회복되는 은혜를 입게 된다.
여인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사랑을 입어서 지금까지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런 삶을 살았었지만, 이제는 어느 누구에게도 기죽지 않고 하나님의 딸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진정한 자유와 평강과 안식을 누리며 살아가는 여인이 된다.
여인은 자기 자신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동네 사람들에게도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전하여 마을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아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구세주로 믿고 구원받은 영혼들이 될 수 있는 전도자가 되는 축복을 받게 된다.
여인은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받을 상급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놓은 여인이 된다.
L4 & B4.
우리 예수님께서 수가 성으로 찾아가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주시고 하나님의 귀한 딸로 회복시켜 주신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켜 주신다.
이미 우리들은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 백성으로, 성도로, 주님의 사람으로, 주님의 일꾼으로, 주님의 직분자로 회복시켜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주셨다.
하나님께서 여인에게 물동이를 버릴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처럼,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물동이와 같은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수가성 여인에게 있어서 물동이는 너무 중요한 것이고,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생활필수품이다.
여인에게 물동이는 없어서는 안 되는 생활필수품이다.
여인에게 물동이가 없으면 더 이상 물을 뜨다가 가정살림을 할 수 없다.
유대인들은 반드시 우물로 가서 물동이로 물을 떠 와야만 가정살림을 할 수 있다.
그렇게 중요한 것이요 생활필수품임에도 불구하고 메시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는 물동이를 버리고 마을로 달려가서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지금 당장은 물동이를 버리는 것 같지만, 그 물동이는 물동이에 발이 달려서 다른 데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수가성 그 우물가에 있다.
다시 그 우물가로 찾아가서 물동이를 이고 가서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가 생활하면 되는 것이다.
지금은 버려버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원히 버려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물동이는 가정 살림을 살아야 하는 여인에게 있어서 생활필수품이기 때문이다.
버려서는 안 되는 생활필수품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은 버려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도 우리들이 살아감에 있어서 꼭 필요한 생활필수품들과 같은 것들을 가지고 있다.
가령, 생각, 사상, 문화, 전통을 버린다 한들 끝까지 버릴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여전히 생각이나 사상이나 문화나 전통이라는 물동이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들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으면서 우리들 곁에 있는 것들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귀신주의, 샤마니즘, 무속주의에 사로잡힌 우리 전통문화를 미련없이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매일매일 버리는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날마다 자기 자신을 죽이는 작업을 해야 하듯이 귀신주의에 빠진 전통문화를 버리는 작업을 수없이 실행에 옮겨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 한민족은 전통문화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게 되어 있다.
전통문화의 테두리를 벗어나서는 살아갈 수 없도록 생활 프레임과 틀이 고착되어 있다.
유대인들이 중동지역에 널리 퍼져 있는 문화의 테두리 가운데 살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 한민족은 한민족이 지닌 역사와 문화의 프레임과 틀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지금 당장 물동이를 버려야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실 수 있는 은혜와 축복을 입는 것이다.
우리들도 우리 전통문화를 버리려는 작업을 수없이 실행에 옮겨야만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전폭적으로 받으면서 올바른 믿음의 사람으로 세움을 입게 되는 것이다.
다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봐야 한다.
어쩌면 지금 당장 여인이 가진 물동이와 같은 것들을 버릴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떻게 생업터전을 버릴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떻게 가족을 버릴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떻게 전통문화의 틀을 버릴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버릴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떻게 자유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신분증을 버릴 수 있겠는가?
이런 것들은 아무리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 없는 것들이지 않나?
그렇지만 주님을 만남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됨에 있어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지금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물동이와 같은 것들을 버리려고 하는 마음의 자세와 가치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라고 말하는 베드로에게 마가복음 10:29-30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서 먼저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100배나 되돌려받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물론 예수님을 위하여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덩달아 핍박을 받게 되겠지만, 내세에 영생을 받아 누리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우리들은 주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지금 무엇을 버려야 할까?
① 우리의 아집, 고집, 편견, 선입견, 자존심, 전통문화를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극히 교만하게 만들어가는 걸림돌이 되는 것들이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것들을 버려야만 우리들은 주님 앞에서 겸손하게 낮아지는 신앙인이 될 수 있다.
주님 앞에서 우리들 자신의 어깨에 힘을 팍팍 주면서 뻐겨 봐야 우리들 자신만 망가지고 추해질 뿐이다.
주님 앞에서 우리들은 최대한으로 낮아지고 낮아지고 낮아지면서 무릎을 꿇을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은 하나님 앞에서 납작 엎드리면서 져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납작 엎드려서 지는 삶을 살려고 하면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신다.
우리들을 승리자로 높여주신다.
우리들 자신을 은연중에 괜히 드러내며 높아지려는 습관, 습성을 버려야 한다.
사람이란 존재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우쭐거리는 맛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다.
“난 적어도 이런 사람이야. 나보다 00한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하면서 은근히 자기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높이고 교만해지려는 것들을 버려야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높여주신다.
② 자기 자신을 비굴하게 낮추려고 하는 열등감도 버려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이요 주님의 일꾼이요 성도요 종이라는 자아 정체감,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결코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비굴하도록 낮추려고 하는 열등감에 빠지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열등감으로 치부하는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죄악이다.
교만도 죄악이지만, 열등감도 죄악이다.
지금 이런 것들을 버린다고 해서 완전히 버려져서 빈털터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버리면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가 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지금은 버리는 것같아 보이지만, 하나님은 좋지 않은 것들은 좋은 것들로 바꾸어서 되돌려 주시고, 좋은 것들은 더 좋은 것들로 만들어주시면서 우리들에게 되돌려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것들로 채워 주시고 싶어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가장 최선의 방법으로 되돌려 주고 싶어 하신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버림이 곧 승리요 얻음의 길이 활짝 열린다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오늘 우리가 찾아야 하는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버릴 수 있는 것이 믿음이요 은혜임을 확신해야 한다.
오늘 우리가 찾아야 하는 믿음은 버릴 줄 아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요 얻어짐의 결과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찾아야 하는 믿음은 버리는 것이 새로운 얻음의 길이 활짝 열리는 지름길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와우리교회 http://cafe.daum.net/GRACEOFJESUS
♥♥♥ 프레임 설교를 하시려는 분들에게 책을 소개합니다.
이 책은 출판되어진 책이 아니라 제본된 책입니다.
① 프레임설교의 이론과 실제(1권, 2권)
② 청중마음열기 2권(유머편, 예화편)
③ 감으로 읽는 성경이야기
④ 은혜로운 물붓기
⑤ 성경의 여인들 이야기 3권(구약1권, 2권, 신약1권)
혹시 관심이 있으신 분은 010-5797-9094(한상원목사)로 연락 주시면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