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선, 클리퍼선에서 그 정점에 이르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류는 돛단배를 이용하였지만, 19세기에 이르러 그 정점에 이르렀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사이에 이른바 증기기관을 활용한 동력선들이 속속 출현하였지만, 19세기 말까지 상선의 과반은 여전히 범선이었다. 19세기 중엽에 범선과 증기선을 비교해 보았을 때, 범선이 증기선에 비해 떨어지는 분야는 속력 외에는 없었다. 그러나 선주들은 이른바 클리퍼선(clipper)으로 알려진 범선을 건조함으로써 속력의 문제도 해결하였다.
16세기 이래 유럽인들이 주도했던 아시아 무역은 매우 속도가 느린 무역이었다. 18세기 말까지 유럽인들의 대 아시아 무역은 보통 1년이 소요되었다. 이 무역은 주로 영국 동인도회사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거의 독점하여 이렇다할 경쟁이 없었기 때문에 시간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대서양 너머 아메리카의 상황은 유럽과는 판이했다. 이곳에는 아시아 무역을 독점할 국영 회사가 없었고, 창의적이고 이윤추구욕이 높은 개인들만 존재했다. 미국 독립전쟁기 동안 미국의 선주들은 빠른 선박이 약탈과 해안 봉쇄에 매우 유용하다는 사실을 체득했다. 이러한 용도로 미 동해안의 체사피크 만에서 건조된 두대박이 스쿠너선들이 주로 활용되었는데, 19세기 초 이후 이 선형의 배들이 ‘클리퍼선’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클리퍼(clipper)란 낱말은 영어 동사 ‘clip’에서 유래한 것인데, clip은 ‘싹둑 자르다’란 뜻이다. 즉 이 선형의 배들이 다른 선형의 배들보다 더 빨리 항해하여 가위로 잘라먹듯 항해시간을 단축하였기 때문이다. 미 동해안의 스쿠너선들이 재래선 보다 빠르게 항해할 수 있었던 것은 뱃머리가 칼날같이 뾰족하고, 장폭비가 크고, 선체가 V형으로 건조되었기 때문이었다.
17세기 이후 조선공들은 속력이 빠른 배는 “앞쪽은 대구처럼 둥글고 뒤쪽은 고등어처럼 좁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836년 영국인 마크 보포이는 이를 수학적으로 반박했다. 1840년 뉴욕의 조선공인 존 윌리스 그리피스는 고등어처럼 좁은 고물은 배의 속도를 저해하는 와류를 발생시킨다는 보포이의 주장이 사실임을 입증하였다. 그리피스는 모형선박 실험을 통해 보포이의 주장처럼 배의 길이가 길수록 속력이 빨라진다는 점도 증명하였다. 이전까지 범선의 장폭비는 4~5:1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 속력이 빠른 범선은 장폭비가 7~8:1로 길어졌다. 결과적으로 그리피스의 주장처럼, 이물은 뾰족하고, 고물은 둥글고 장폭비가 큰 새로운 형태의 세대박이 범선이 출현하게 되었는데, 기존 선박보다 속력이 최대 3배가량 빨라졌다.
이미 미국 독립전쟁이 끝난 뒤 미국에서도 차를 마시는 것이 널리 유행하여 미국인들도 중국의 광동항에 입항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차 수요자들은 항해 중 차가 썩을 수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들어온 차 가운데 처음으로 들어온 차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여 이 차를 기꺼이 구입하려고 하였다. 그렇게 해서 입항 예정일보다 일찍 들어온 배의 차에는 비싼 할증료가 부가되었다. 1844년 뉴욕 선적의 후쿠아 호(Houqua)는 광동에서 인도양을 거쳐 희망봉을 돌아 뉴욕까지 1만5천마일을 95일만에 항해하였는데, 이는 기존 선보다 무려 16일이나 빠른 항해기록이었다. 후쿠아는 광동으로 되돌아갈 때는 90일만에 주파하였는데, 이는 기존 선보다 23일이나 단축한 것이었다. 후쿠아보다 아홉 달 뒤에 진수된 레인보우호는 처녀항해 때는 좋은 속력을 내지 못했지만, 2항차 때는 광동에서 뉴욕까지 84일만에 귀항함으로써 후쿠아호의 기록을 깼다. 이 두 선박은 이후 선박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단 한번의 항해만으로 선박 건조비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렸던 것이다. 이제 선주들이 선박을 어떻게 건조해야 하는지는 명백해졌다. 미국의 조선소에는 클리퍼선을 건조해달라는 주문이 쇄도하였다.
● 영미 간 ‘차 운송 경쟁'
1846년 12월, 그리피스는 자신의 실험을 현실화시켜 뉴욕에서 ‘시 위치(Sea Witch)' 호를 진수시켰는데, 이 시위치호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클리퍼선이라고 부를만하다. 왜냐하면 클리퍼선의 우수성을 이론과 실험으로 입증한 그리피스 자신의 첫 신조선이었기 때문이다. 시위치호는 그 조선공의 명성에 걸맞은 항해기록을 달성하였는데, 광동에서 뉴욕까지 74일만에 주파하였다. 이는 평균 6.7노트에 달하는 속력을 낸 것이다. 대서양 너머에서 클리퍼선의 눈부신 활약은 영국인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항해법이 폐지된 1849년 이후 영국 항로에도 외국 선박들이 취항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빠른 속력으로 중국의 차를 운송한 경험을 쌓은 양키 선주들이 이 귀중한 항로를 가만둘 리 없었다.
1850년 오리엔탈호(Oriental)가 미국적 클리퍼선으로는 처음으로 런던항에 입항하였다. 이는 이후 미국과 영국 간의 이른바 ‘차 운송 경쟁’(tea race)을 촉발시킨 시발점이 되었다. 항로가 개방되자마자 양키 클리퍼선들이 중국-영국 간 차 무역에서 막대한 이익을 거둬갔고, 이는 영국 선주들의 분발을 촉발하였다. 영국 선주들은 전체적으로 양키 클리퍼선보다 작은 클리퍼선을 건조하여 미국 선주들에게 대항하였다. 이렇게 해서 중국 차 무역 항로에 취항하게 된 영국 클리퍼선인 태핑호(Tapping), 아리엘호(Ariel), 세리카호(Serica) 등이 영국 선주들의 명성을 지킬 수 있었다.
● 현존 유일의 클리퍼선
양키 클리퍼선과의 차 운송 경쟁에서 영국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의 선주인 조크 윌리스가 역사상 가장 유명한 클리퍼선을 2만5천파운드를 들여 1869년에 진수하였다. ‘커티삭’호로 명명된 이 클리퍼선은 현재까지 가장 유명한 범선의 이름이자, 위스키의 이름, 그리고 현존하는 유일한 클리퍼선으로서 명성을 얻게 된다. 커티삭(cutty sark)이란 스코틀랜드인들이 입는 짧은 여성용 속옷(short petticoat)을 가리킨다. 그 유래는 로버트 번스의 시 ‘샌터의 탬’(Tam O'Shanter)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이 시는 매혹적인 속옷 차림을 한 마녀 내니(Nannie)가 번개가 치는 날 밤에 말을 타고 달리는 농부를 쫓다가 말의 꼬리만 잡고 농부를 놓치고 만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커티삭호의 선수상은 이 시에 나오는 마녀 내니의 형상이다. 선주인 윌리스는 1년 전에 애버딘의 선주인 조지 톰슨이 취항시킨 클리퍼선 ‘테르모필레’호와의 경쟁에서 이겨야만 했다. 테르모필레호와 커티삭호는 크기만 약간 다를 뿐 거의 동형선에 가까웠다. 963 등록톤인 커티삭호가 947 등록톤인 테르모필레호보다 약간 컸다.
커티삭호는 길이 85.4m, 너비 11m, 깊이 6.7m의 제원에서 주갑판에서 주돛대의 높이가 46m였다. 돛대는 3개를 설치하였는데, 이물 돛대에만 네모돛 5개, 주돛대에 네모돛 6개, 고물 돛대에 네모돛 5개 등 총 38개의 돛을 달아 돛 면적만 3,035평방미터에 달해 최고 17.5노트까지 항해할 수 있었다. 용골은 48 x 43cm 짜리의 느릅나무를, 외판은 15cm 두께의 인도 말라바르산 티크 나무를 사용하였다. 선원은 26명 정도였다. 1870년 2월 16일, 커티삭호는 처녀항해로 조지 무디(George Moodie) 선장의 지휘하에 위스키와 맥주, 와인 등을 싣고 상하이로 출항하였다.
커티삭호는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거쳐 1870년 6월 2일 상하이에 입항하여 짐을 풀었다. 다시 1450톤의 차를 실은 커티삭호는 6월 25일 출항하여 1870년 10월 13일 런던항으로 귀항하였다. 커티삭호는 이후 8차 항해동안 차 운송으로 이익을 거두었지만, 가장 빠른 차 운송선의 지위는 경쟁선인 테르모필레호에게 자리를 내줘야 했다.
● 커티삭, 차 운송에서 퇴출되다
커티삭호가 취항한 1869년은 세계 해운사에서 주목할만한 해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 해에 수에즈운하가 개통되어 아시아와 유럽 간의 해상로를 크게 단축시켰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제껏 중국 차 운송을 지배해왔던 클리퍼선의 우위가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1875년 경에 이르면 중국과 유럽 간의 차 운송 무역에서 기선이 우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차 클리퍼선의 운항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결국 커티삭호도 더 이상 중국-영국 간 차 운송에서 경쟁력을 상실했음을 뜻했다. 커티삭호는 1877년 마지막으로 중국 차를 런던에서 하륙한 것을 끝으로 차 운송에서 쫓겨나야 했다. 1878년 4월 차를 선적하기 위해 상하이에 입항한 커티삭호는 더 이상 차를 수배할 수 없게 되었다. 운송할 차나 화물을 수배하는 데 실패한 팁태프트(Tiptaft) 선장은 1878년 10월 1등 항해사인 제임스 월러스(James Wallace)에게 선장직을 물려주고 하선하였다. 존 월러스 선장의 지휘하에 커티삭호는 석탄, 쥬트, 우편물 등을 운송하는 데 종사하였다.
1880년은 커티삭호의 생애에서 가장 뼈저린 한해였다. 선원들에게 지독하게 굴어 증오의 대상이던 1등항해사 시드니 스미스가 존 프란시스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제임스 월러스 선장은 시드니 스미스를 감금하였지만, 실습선원 6명을 제외한 나머지 선원들은 일하기를 거부했다. 1880년 9월 5일 커티삭호가 잔잔한 자바해를 항해하는 동안 월러스 선장은 자신의 항해 경력이 끝났음을 깨닫고,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후 취해진 조치들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왜냐하면 신임 선장으로 자질이 부족한 데다 늘 술에 쩔어 지내는 것으로 유명한 윌리엄 브루스 선장이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3년 동안 커티삭호의 선장으로 승선하는 동안 부식을 충분하게 싣지 않아 식량을 구걸해야 했고, 배에 콜레라가 발생하는가 하면, 순다해협을 항해할 때는 거의 좌초할 뻔하기도 했다.
1882년 4월 10일 뉴욕 항에 입항했을 때 커티삭호는 ‘플라잉더취호’처럼 선원의 절반이 굶어 죽었고, 돛은 갈기갈기 찢어졌으며, 삭구는 썩어 있었다. 결국 선주는 브루스 선장을 하선시키고 무어 선장(Frederick Moore)을 승선시켰다. 무어 선장은 1883-85년까지 승선하는 동안 호주와 유럽 간 양모 운송에 종사하여 커티삭호의 생애에서 최상의 운항실적을 기록하였다. 무어 선장은 시드니-런던 간을 80일만에 주파하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최고 기록이었다. 물론 이 기록은 곧 테르모필레호에 의해 깨어졌다.
● 커티삭, 최고 속력 17.5노트 기록
1885년 무어 선장의 후임으로 리처드 우드짓(Richard Woodget) 선장이 임명되었다. 우드짓 선장은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여 커티삭호와 선원들로부터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냈다. 그는 격랑의 40도 대의 무역풍을 이용하기 위해 다른 어떤 선장보다 더 남쪽으로 항해하였다. 이는 남미 남단의 케이프 혼 부근의 유빙과 조우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선장들은 항해하기를 꺼려하는 항로였다. 그러나 우드짓 선장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커티삭호는 유빙을 무난히 헤치고 항해하여 항해시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었다. 우드짓 선장은 첫 항해에서 런던에서 시드니까지 77일만에 항해하였고, 귀로시에는 73일만에 주파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커티삭호는 숙적인 테르모필레를 제치고 1인자의 자리에 올랐다. 뿐만 아니라 1889년 7월 25일, 커티삭호는 최신식 기선인 브리타니아호보다 빨리 항해하는 엽기적인 기록을 달성하였다.
당시 브리타니아호는 14.5~16노트로 항해 중이었는데, 당시 브리타니아호의 당직사관이었던 로버트 올리베이(Robert Olivey) 2항사는 놀라 헥터 선장을 호출하여 범선이 자신의 배를 추월한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당시 브리타니아호의 항해일지에는 “범선이 우리 배를 추월하여 지나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항해기록을 통해 커티삭은 이후 10여 년 동안 호주 양모 항로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커티삭호는 ‘가장 빠른 배’(the fastest ship)이자 ‘영국인들에게 1월 양모를 팔 수 있게 만들 마지막 기회의 배’(last chance ship to make the English January wool sales)로 알려지게 되었다.
● 커티삭, 포르투갈에 매각 ‘페레이라’호로 개명
1890년대가 되면 호주-영국 간 양모 운송 시장에서 기선이 잠입하기 시작하여 범선의 경쟁력이 크게 악화되었다. 이제 커티삭호도 양모 운송으로 이익을 남길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하였다. 선주인 존 윌리스는 1895년 브리스베인을 출항하여 런던으로 귀환한 커티삭호를 2100파운드에 포르투갈의 선사인 페레이라(J.Ferreira)에 매각하였다. 선적이 포르투갈로 바뀐 커티삭호는 이제 페레이라호로 개명되었지만, 선원들은 여전히 커티삭의 스페인어에 해당하는‘페퀘나 카미솔라’호로 불렸다. 페레이라호는 20세기 초까지 포르투갈을 모항으로 하여 리우와 뉴올리언즈 간에 정기적으로 취항하였다. 이때도 페레이라호는 16노트로 항해할 수 있었다고 선원들은 전하고 있다.
1922년 1월 페레이라호는 폭풍우에 떠밀려 크게 파손되어 팔머스로 피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도 수리를 마친 뒤 포르투갈로 귀환한 페레이라 호는 다시 다른 포르투갈인에게 매각되어 ‘마리아 도 암파로’(Maria do Amparo)호로 개명되었다. 그러나 퇴역선장이자 훈련선을 운용하고 있던 윌프레드 다우맨(Wilfred Dowman)이 이를 3,750파운드에 매입하여 다시 옛 이름인 커티삭으로 개명하고 팔머스로 가져왔다. 이 선가는 커티삭의 1895년도 선가보다 약간 더 비싼 가격이었다.
다우맨은 1922년부터 커티삭호를 훈련선으로 활용하다가 1936년 사망하였다. 이후 그의 미망인이 더 이상 운용할 수 없게 되자 1938년 커티삭호를 템즈 항해학교(Thames Nautical Training College)에 매각하여 켄트 주의 그린하이트로 항해하였다. 1938년부터 1950년까지 훈련선으로 사용되던 커티삭호는 1951년 브리틴 축제에 관선용으로 재매각되어 런던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던 중 런던해양박물관의 프랑크 카(Frank Carr) 관장의 주도 하에 커티삭 보존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마침내 영국의 에딘버러 공작을 후원자로 한 보존위원회가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 기념으로 커티삭호를 매입하였다. 1954년부터 현재까지 영국 근교 그리니치의 선거에 안치된 커티삭호는 대영제국의 영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범선으로서 전 세계 1,500만 명이 관람하였다.
● 현존 세계 유일의 차 운송선 커티삭
커티삭호는 19세기를 지배했던 수많은 클리퍼선 가운데 현존하는 유일한 범선이라는 영예를 차지하면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는 단순한 수식어에 그친 것이 아니다. 커티삭을 눈으로 직접 관람하게 되면 그 유려한 선체와 돛대, 그리고 돛대에 나부꼈을 돛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커티삭이 인류의 위대한 유산 중의 하나라는 주장에 공감하게 된다. 2007년 5월 커티삭에 화재가 발생하여 일부 선체가 훼손되었다. 하지만 현재 관람객들이 더 가까이 근접하여 관람할 수 있도록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벌이고 있다.
ⓒ June KI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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