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제가 여러 사이트에 올린 글인데 여기 알럽카페에는 올리지 않았더군요.
좀 늦었지만, 많은 분들이 보시라는 의미에서 여기에도 글을 올립니다.^^
'날개 접은 파랑새' 정인교
날개를 접은 파랑새 하나가 있다. 이 파랑새는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 중의 스타였다. 그러나 이 파랑새가 날개를 접은 지 꾀 지났고, 이제는 기억 속에 영영 묻혀질 판이다. 파랑새는 바로 정인교이다. 프로원년인 97시즌에 '사랑의 3점슈터'로 스타덤에 올랐음에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던 정인교, 그가 은퇴한 것이다. 이미 한참 지난 일이다. 2003-04시즌 막판에 그는 소속 팀인 삼성에 '은퇴 의사'를 표명했으며, 시즌이 끝남과 동시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자의는 정인교의 은퇴의사이고, 타의는 FA가 된 그를 어느 팀도 찾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파랑새는 떠났다. 팬들의 기억 저편으로 쓸쓸하게 말이다.
□ 약체 리더
미림중에서 농구를 시작한 정인교는 미림중 농구부가 해체되자, 농구를 계속하기 위해 명문 휘문중으로 전학을 간 후, 휘문고로 진학했다. 정인교는 당시 고교 랭킹 1위로 꼽혔던 정경호와 짝을 이뤄 휘문고를 이끌었고, 정인교 개인으로는 88년 쌍용기 대회 최우수선수 상을 받기도 했다. 89년, 당시 고교 랭킹 1위를 놓고 다퉜던 오성식과 정경호는 각각 연세대와 중앙대로 진학했고, 스카우트에서 연세대-중앙대에 밀렸던 고려대는 정인교를 선택했다. 하지만, 이 때부터 정인교는 '약체 리더'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뛰어난 슛 감각을 지녔던 정인교였지만 약한 동료들은 그를 뒷받침해주지 못했다. 고려대가 연세대-중앙대와의 스카우트 싸움에서 연달아 패하면서 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고려대는 90년에 문경은, 김재훈, 김승기, 홍사붕을 91년에는 이상민, 김영만, 양경민을 놓치면서 깊은 수렁에 빠져들었다. 정인교는 홀로 안암골 호랑이를 이끌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상대 팀 입장에서는 정인교만 묶으면 그만이었으니깐. 그러나 몇 년째 스카우트 전쟁에서 패하기만 하던 고려대가 92년에 전희철, 김병철, 박준영 등을 거둬들이면서 정인교에게도 빛이 보이는 듯했다. 드디어 강력한 동료들과 함께 마지막 4학년을 화려하게 장식할 그런 모습 말이다. 그러나 정인교의 꿈은 산산조각 났다. 무릎에 문제가 생겼고, 그는 수술을 받아야 했다. 강력한 후배들과 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정인교를 원하는 실업팀은 많았다. 당시에도 슛 감각 하나만은 최고였기 때문이었다. 삼성과 현대 같은 명문 구단도 그에게 손을 뻗쳤다. 하지만 정인교가 선택한 팀은 산업은행이었다. 그가 산업은행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금융 팀에 가면 정인교 자신이 원하는 농구를 맘껏 할 수 있다는 생각과 자신감 때문. 또한, 당시 고려대 박한 감독의 생각도 정인교와 비슷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부푼 꿈을 안고, 실업 무대에 뛰어든 정인교였지만 팀 성적은 암담했다. 패하기를 밥먹듯이 했다. 그렇지만 정인교 개인은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했다. 매 경기, 20득점 이상을 꼬박꼬박 넣어준 그는 산업은행의 간판 슈터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실업리그 94-95시즌에 득점왕과 3점슛왕을 차지했고, 96-97 농구대잔치 득점왕도 정인교의 몫이었다. 하지만 정인교는 웃을 수 없었다. 팀이 패배만 거듭하기에 바빴기 때문. '도어매트 팀'을 정인교는 홀로 이끌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패배와 상처뿐인 타이틀이었다. 고려대와 산업은행을 이끈 그에게 '약체 리더'라는 이미지가 박히기 시작할 무렵. 서광의 빛이 보였다. 한국농구가 프로화의 길로 접어들 것을 선언한 것이다.
□ 농구가 너무나 즐거웠던 나래 시절
프로 출범과 동시에 정인교의 농구인생이 절정기로 치닫는다. 프로 출범을 앞둔 96년 7월에 나래 이동통신은 정인교의 소속 팀이었던 산업은행과 한국은행을 인수했고, 그 해 9월에 창단식을 가졌다. 나래 구단은 프로농구 참가를 위해 스포츠 불모지인 강원도 원주를 연고지로 삼아 '원주 나래 블루버드'로 새로운 출발을 선언했다. 정인교도 나래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출발을 하기로 맘먹었다.
이윽고 KBL이 출범됐다. 정인교는 97년 2월 2일, 서울 올림픽 경기장에서 열린 동양과의 중립 경기에서 프로 첫 발을 내디뎠다. 나래는 동양에게 아깝게 패했고, 정인교는 3점슛 7개를 던져 5개를 넣으며 총 19득점을 기록했다. 그의 프로 첫 경기가 남긴 기록이었다. 여전히 날카로운 슛 감각은 용병들이 득실거리는 상황에서도 주눅들지 않았다. 이후부터 나래와 정인교는 승승장구했다. 첫 경기 패배이후, 나래는 4연승을 거뒀고, 다시 한 번의 패배이후 6연승을 했다. 그 중에 당대 최강 기아도 그들에게 무릎을 꿇어야 했으며, 이는 당시 스포츠 신문들의 1면을 장식할 사건이었다.
나래 돌풍의 주역은 다름 아닌 정인교였다. 약한 동료들과 함께 뛰며 북 치고 장구 치기를 몇 년, 그는 프로에서 처음으로 강력한 동료들과 함께 했다. 리바운드와 블록슛 그리고 뛰어난 농구센스로 용병 MVP에 뽑힌 제이슨 윌리포드와 원년 득점왕 칼레이 해리스, 그리고 묵묵히 제 역할을 해주는 강병수와 그 외의 롤-플레이어들까지. 정인교가 플레이하기에 딱 좋은 여건이었다. 당시까지, 농구를 해오면서 언제나 혼자서 모든 걸 해야했던 정인교는 무거운 짐을 털어 버리면서 대활약을 펼쳤다. 항상, 상대 수비가 정인교에게 집중됐던 이전과는 달리, 윌리포드와 해리스의 존재로 인해 정인교는 상대적으로 분산된 수비를 이용했다. 작은 신장이지만 한 박자 빠른 슛 타이밍과 클러치 상황에서 어김없이 발휘되는 강심장은 더욱 강한 빛을 냈다. 파란색 나래 유니폼을 입은 한 작은 선수가 던지는 무차별한 3점슛과 클러치 상황에서 꽂히는 3점슛은 상대 팀에게는 공포의 대상, 그 자체였다. 반대로 원주 팬들과 유니세프에게 파란색 유니폼의 한 작은 선수가 터뜨리는 3점슛은 기쁨, 그 자체였다. 스포츠 불모지였던 원주 팬들에게 '파랑새' 정인교의 3점포만큼 마음을 휘어잡는 것도 없었고, 그는 원주의 프랜차이즈 플레이어로 떠올랐다. 또한, 정인교는 3점슛 하나를 성공시킬 때마다 1만원씩 유니세프 구호기금으로 기부됐고, 시즌 후에 890만원을 유니세프에 기탁해 주위를 훈훈케 하기도 했다. 정인교부터 시작된 선행은 이제 웬만한 스타들에게는 모두 퍼져있는 상태.
약체로 평가받았던 정인교의 팀 나래는 돌풍의 핵을 넘어 일약 우승후보로 떠올랐고, 정인교는 '사랑의 3점슈터'와 '파랑새'라는 닉네임을 얻으며 프로 최고의 스타반열에 올라섰다. 변두리 '약체 리더'에서 당당한 'KBL스타'가 된 것이다. 또한, 스포츠 불모지였던 원주에는 정인교의 나래로 인해 '농구 붐'이 조성되며, 성공적인 연고지 정착에 성공했다.
원년시즌, 정인교는 여러 차례 인상깊은 활약을 펼쳤다. 그중 하나가 97년 3월 20일에 있었던 동양과의 홈 경기. 정인교는 매치업 상대였던 김병철을 경기 시작 8분만에 4파울로 만들며 그를 코트 밖으로 쫓아냈고, 이후 3점포를 마구 꽂아댔다. 정인교는 이날 경기에서 무려 10개의 3점슛을 포함해 46득점을 올리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 경기는 여러 가지 시사점을 남겼다. 이전 경기에서 당시 약체로 불렸던 삼성과 현대에게 연패하며 흔들렸던 팀 분위기를 다시 추스른 것과 정인교 개인의 통산 최다 득점인 46점, 그리고 단순히 슛만 잘 던지는 선수가 아닌 상대의 파울을 유도해낼 정도로 물올라 있는 센스 플레이로 수비수를 무력화시키는 선수라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정인교의 활약은 플레이오프에서도 계속됐다. 그는 3점슛 91개(평균 4.3개)를 터뜨리며 원년 3점슛 왕을 차지했다. 많이 넣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3점슛 성공률도 48.15%로 1위에 올랐다. 양적 질적, 어느 하나 모자람이 없는 정인교의 3점슛이었다. 하지만 정인교는 플레이오프를 앞둔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허리를 삐끗하며 인천 대우와의 6강 플레이오프 출전이 불투명했다. 나래는 위기에 봉착했고, 최명룡 감독은 새로운 전술을 강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인교는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그는 팀을 위해 부상투혼을 발휘했다. 출전이 불투명했던 6강 플레이오프 1차전에 나선 그는 1점 뒤지고 있던 경기 종료 1.9초 전에 과감하게 골 밑으로 파고들어 김훈의 파울을 유도했다. 그는 김훈의 파울로 얻은 두 개의 자유투를 모두 성공시키며 팀에 귀중한 첫 승을 안겼다.
챔피언 결정전에서도 정인교의 활약은 멈추지 않았다. 특히, 1차전에서의 활약은 거함 기아를 침몰시키기에 이르렀다. 경기 시작과 동시에 3점슛을 작렬시킨 정인교는 경기 내내 팀의 공격을 주도하면서 기아를 몰아붙였다. 허재와 김영만이 그를 막기 위해 부단히 애썼지만, 빈곳을 찾아 부지런히 움직이는 그의 움직임을 감당해내지 못했다. 3점슛 6개 포함 28득점. 나래는 1차전에서 기아를 물리치며 챔피언 결정전에서 기선제압을 하는데 성공했다. 물론, 결과는 모두가 아시다시피 이후 기아의 4연승으로 막을 내렸지만 말이다. 그 와중에도 정인교는 4차전에서 3점슛 8개를 터뜨리는 등 32득점을 폭발하며 고군분투했다. 당시 그가 터뜨린 8개의 3점슛은 챔피언 결정전 역대 최다 3점슛 개수로 아직까지 남아있다.
프로원년 최고 스타로, 원주 시민의 우상으로 뜬 정인교. 그는 원주시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았고, 많은 원주 팬들 사이에서는 '원주=나래=정인교'라는 공식이 성립됐다. 그는 원주 시민들의 우상으로 떠받쳐졌다. 연봉협상에서도 정인교는 1억 3,000만원에 사인하며, 강동희-정재근-전희철에 이어 연봉 랭킹 4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1997-98시즌, 정인교는 더욱 발전한 모습을 보였다. 97년 11월 16일에 가장 먼저 통산 3점슛 100개 고지를 밟은 그는 플레이 면에서 한층 더 성숙된 모습을 보여 전문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마구잡이 식의 난사가 많이 줄어들었고, 상대의 집중적인 수비를 뚫을 센스와 테크닉도 발전했다. 윌리포드의 스크린을 이용해 순식간에 빈곳을 찾아 꽂아 넣는 3점포나, 더욱 과감해진 돌파는 상대 수비를 농락하기에 충분했다. 스크린과 센스 있는 플레이로 정인교를 지원하던 윌리포드는 여전했고, 여기에 '차세대 스타'로 불렸던 주희정에 용병 윌리엄 헤이즈가 가세했다. 주희정과 헤이즈의 뛰어난 패스는 정인교의 플레이에 돛을 단 격이 됐고, 정인교는 경기 당 5,6개에 육박하는 와이드 오픈 찬스를 맞을 수 있었다.
팬들의 끊임없는 환호와 격려도 정인교에게 큰 힘이 됐다. 기량과 팀 성적에 인기까지. 정인교는 모든 걸 가진 남자가 됐다. "올 시즌에는 경기도 많이 늘어 난만큼 작년보다 3점슛을 2배나 성공시켜 좋은 일도 많이 하겠다." 정인교의 다짐은 세상을 다 가진 자의 당당한 모습과도 별 다를 바 없었다. 1997-98시즌, 정인교는 삼성 문경은과 치열한 3점슛 경합을 펼쳤지만, 정규리그 마지막 날에 12개의 3점슛을 터뜨린 문경은에게 아깝게 밀렸다. 하지만, 팬들과 언론은 진정한 3점 슈터로 정인교를 거론할 정도로 당시 3점슛에 관해서는 정인교가 최고로 불렸다.
나래에서 플레이했던 시절을 정인교는 이렇게 회고한다.
"나래에 있을 때 정말 농구할 맛이 났다. 그 동안 팀 성적이 좋지 못해 팬들에게 외면당했는데 성적이 좋아지면서 팬들의 환호와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돼 정말 기분이 좋았다. 고려대-산업은행 시절에는 팀 성적이 안 좋아서 관중의 환호를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 시절에 농구가 정말 재밌었다."
□ 기아로의 트레이드
영원히 원주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남을 것 같던 정인교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98년 5월 26일. 나래와 기아는 KBL 역사에 남을 대형 트레이드를 성사시켰다. 정인교의 팀이었던 나래가 정인교와 신인 1차 지명권을 기아에 넘기면서 기아로부터 허재를 받는 트레이드를 한 것. 당시에 허재의 트레이드 설은 끊임없었지만, 그 대상이 정인교가 될 줄을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파란색 나래 유니폼이 누구보다도 잘 어울렸던 정인교가 어색한 빨간색 기아 유니폼을 입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정인교도 정인교지만, 원주 팬들이 받은 충격은 더 컸다. 원주의 스타 중의 스타였던 정인교가 트레이드 된 것에 원주 팬들이 격분한 것이다. "나래의 정인교 트레이드는 원주시민과 팬들을 우롱한 처사"라며 구단을 비난했고, 구단과 각 언론에 항의전화가 봇물처럼 터졌다. 강원도의 일부 매체들은 정인교를 트레이드 한 나래 구단에 대해 연일 비판했고, 원주시와 당시 6.4 지방선거가 겹친 정치인들도 덩달아 나래의 정인교의 트레이드를 비난했다. 팬들이 팬클럽 해체를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보일 정도로 '정인교 트레이드'의 여파는 실로 엄청났다. 2년 동안 정인교가 원주에 남긴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태였다. 팬들은 "정인교는 나래의 상징이자, 원주의 정신적 우상이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원주를 떠나라"며 분노했고, 원주시도 나래 구단에 정인교 트레이드의 경위를 문의하면서 '원주 시민들의 정서를 고려하지 않은 처사'였다며 구단에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트레이드 대상이 희대의 농구천재 허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원주 팬들은 정인교의 트레이드를 이해할 수 없어 했다. 이로 인해, 당시 허재의 나래 입단 환영식이원주 팬들의 격앙된 반응 때문에 크게 가라앉은 분위기였다는 후문.
원주 팬들의 뜻밖의 반응에 나래는 정인교를 재영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나래는 기아, 삼성과 함께 삼각 트레이드로 정인교를 재영입 하겠다는 의사를 표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 나래가 주희정, 강병수를 삼성에 내주고 양경민, 김승기를 받으면서 정인교 재영입이 기정사실화 되는 듯했다. 기아가 원래 노렸던 선수는 양경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래의 정인교 재영입은 불발됐다. 정인교의 강력한 반발 때문이었다. 정인교는 "나래로 재영입 될 바에는 차라리 은퇴하겠다"며 기아에서 새로운 농구인생을 설계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98년 여름을 달궜던 '허재-정인교 트레이드'의 여파는 가라앉았다.
당시의 심정을 정인교는 이렇게 말한다.
"트레이드 됐을 때 정말 서운했다.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뛰면서 농구 불모지였던 원주에 농구 붐도 일으켰는데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프로에서는 각 팀마다 필요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트레이드를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니깐."
□ 내리막길의 시작
1998-99시즌, 기아에서 새출발을 선언한 정인교. 하지만 기아에서의 정인교는 순탄치 못했다. 단짝용병이었던 윌리포드가 기아로 영입되면서 두 콤비의 활약이 기아에서도 이어질 것이라는 평가가 무색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이 와중에 정인교는 트레이드 후 첫 원주 방문에서 3점슛 4개로 친정팀 나래를 격침시켰다. 경기 전, 정인교는 원주 팬들에게 "여러분이 제게 명예시민증을 주셨으니, 전 영원한 원주 시민입니다"라며 원주 방문 소감을 말했다. 팬들은 원주 스타가 돌아온 것에 큰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그러나,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180도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정인교의 3점슛이 림을 갈랐을 때, 원주 팬들이 탄식을 한 것이다. 정인교도 어색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프로의 생리였다. 정인교는 그렇게 원주 울타리에서 벗어나며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정인교는 제 자리를 잃은 듯 방황하기 시작했다. 분명 공격력 하나만큼은 뛰어나지만, 작은 신장에서 오는 '미스매치'와 느린 스피드는 기아 팀컬러와 어울리지 못했다. 시즌이 중반이 넘어서면서부터는 벤치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욱 많았다. 이로 인해 정인교는 트레이드 설에 휘말려야 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정인교는 소외되었다. 적어도 플레이오프라는 큰 무대에서는 한 건 해줄 정인교로 기대됐지만, 박인규 감독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 박 감독은 수비에서 문제를 드러내는 정인교보다 봉하민을 중용했고, 정인교는 자신감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박인규 감독과 불화설이 나돌았을 정도로, 팀 내에서 그의 입지는 좁아졌다.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거의 '투명인간' 수준이었을 정도였다.
1999-00시즌을 앞둔 기아는 팀 체질 개선을 위해 박수교 감독을 영입했다. 박수교 감독은 정인교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박 감독은 정인교를 중용했고, 그는 99년 11월 20일, SK와의 경기에서 3점슛 8개에 35득점을 폭발시키며 박 감독의 기대에 부응했다. 신장에서 오는 수비 문제도 더 이상 문제 거리가 아니었다. 악착같은 근성으로 상대 공격수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면서 상대의 오펜스 파울을 유도해낼 정도로 정인교의 수비 능력은 좋았다. 이전의 평가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기아에 서서히 자리 잡을 무렵, 정인교에게 부상이라는 악령이 엄습해왔다. 2000년 2월에 그는 왼쪽 발목을 접질리는 부상을 당한 것. 처음 다친 부위였기 때문에 회복속도도 느렸다. 뒤늦게 삼성과의 6강 플레이오프에서도 정인교는 1,2차전에서 벤치를 지켰고, 3차전에 경기에 나섰지만 무용지물이었다. 기아도 삼성에게 허무하게 무너져야 했고, 정인교도 부상이라는 악령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아쉽게 시즌을 마감해야 했다.
□ 골드뱅크로의 트레이드
기아에서 두 번째 시즌을 마친 정인교는 2000년 7월, 골드뱅크로 트레이드 된다. 박수교 감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인교는 골드뱅크를 택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기아라는 팀이 정인교 자신과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또, 허재의 트레이드 상대로 큰 기대를 받고 기아에 합류했으나, 지난 두 시즌 동안 부상과 슬럼프로 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자책감도 컸다. 정인교는 봉하민과 함께 골드뱅크 정진영, 박재현과 2대2 맞트레이드 됐다. 그는 프로 세 번째 유니폼을 입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빨간색 유니폼을 입어야 했다. 어울리지 않았다. 파란색이 그와 딱 어울리는데.
골드뱅크에서의 생활도 내리막길의 연장선이었다. 물론, 2000년 11월 22일에 친정팀인 삼보를 상대로 가장 먼저 통산 3점슛 500개를 돌파했지만, 그것이 다였다. 진효준 감독이 추구하는 악착같은 플레이를 정인교는 보여주지 못했고, 현주엽과의 플레이도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무려 90kg으로 불어난 정인교의 몸무게는 그의 스피드를 더욱 떨어뜨렸고, 진효준 감독에게 신뢰를 심어주지 못했다. 게다가 시즌이 한창인 1월에는 왼쪽 무릎 인대를 다쳤다. 팀의 성적은 곤두박질 쳤고, 정인교도 벤치를 지키는 시간이 더욱 많았다. 정인교는 고비 때마다 자신의 발목을 잡는 부상의 악령에 몸서리를 쳤고, 심지어는 '은퇴'를 심각히 고려하기도 했다. 방황하던 그는 시즌이 끝남과 동시에 처음으로 시행되는 FA시장에 나서게 된다. 결과는 참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 FA제도의 희생양
정인교는 골드뱅크와의 재계약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이인표 단장은 정인교에게 재계약 조건으로 목표 체중, 즉 90kg에 달했던 그의 체중을 10kg 감량을 내걸었다. 하지만, 얼마 후, 재계약을 약속했던 이인표 단장이 팀을 떠나버렸다. 골드뱅크가 코리아텐더로 바뀌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었다. 정인교는 구단 측으로부터 연봉 5,000만원을 제시받았다. 전년도 연봉 1억 1,000만원을 받았던 정인교로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정인교는 8,000만원을 요구했지만, 턱없는 구단 측의 제시안에 마음이 틀어졌다. 뒤늦게 구단에서 7,000만원을 제시했지만 말이다.
그는 새로운 팀을 찾았다. 몇몇 팀이 그에게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까다롭고도 까다로운 FA제도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처음으로 FA제도를 시행한 탓인지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노출됐고, 정인교가 그 희생양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FA를 영입한 구단은 해당선수의 당해 연봉에 계약기간을 곱한 연봉 총액의 30%를 전 소속 구단에 지급하거나, 보호선수 1명을 제외한 선수 1명을 전 구단에게 내놓아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규정이 정인교를 코트 밖으로 내몬 것이다. 대출혈을 감수하면서까지 정인교를 데려갈 팀은 없었다. 신세기가 적극적으로 정인교 영입에 뛰어들었지만, 끝내 불발되고 말았다. "자존심을 버릴 테니,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라도 주어졌으면 좋겠다"고 했던 정인교는 순식간에 '코트의 미아'가 되고 말았다.
정인교는 자존심을 버렸다. 명예고 뭐고 필요 없었다. 그는 원 소속팀이었던 코리아텐더와 1년간 1,800만원에 수련선수 계약을 맺었다. 억대 연봉스타에서 하루아침에 1,800만원짜리 수련선수로 전락한 것이다. 어색한 자리에서 시즌을 보내던 중, 그에게 기회가 왔다. 2000년 11월 24일 SK나이츠 전에서 그가 수련선수 자격으로 부상으로 코트를 떠났던 지난 2월 이후, 9개월만에 코트에 선 것이다. 최민규의 부상으로 엔트리에 임시 투입된 것. 코리아텐더는 20여 점차로 SK에 끌려다녔고, 승부가 거의 판가름 난 4쿼터 막판에 투입됐다. 팬들은 "정인교!"를 연호 했지만, 정인교의 컨디션은 정상이 아니었다. 몸은 무거웠고, 슛 감도 무뎌졌다. 2개의 턴오버를 저질렀고, 중앙에서 던진 3점슛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얼마 후, 그는 다시 엔트리에서 빠졌다. SK나이츠 전이 그가 2001-02시즌에 뛴 유일한 경기였다.
□ 최희암 감독의 부름
정인교는 다시 FA가 됐다. 어느 팀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대로 묻혀지는 옛 스타로 남을 듯했다. 하지만 정인교의 휘문고 선배인 최희암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막 모비스 신임감독으로 부임한 최 감독은 평소부터 정인교를 높이 평가해 왔었다. 팀 체질개선에 돌입했던 최 감독은 정인교에게 연락했다. "우리 팀에서 뛸 마음이 없느냐?"고 최 감독은 물었다. 정인교의 대답은 간단했다. "Yes"였다. 정인교는 계약기간 2년, 연봉 6,000만원에 모비스의 '파란색' 유니폼을 입으며 재기를 노렸다. 최희암 감독은 정인교에 대해 "재기하겠다는 의지가 강하고, 재능이 있는 선수인 만큼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인교도 "최 감독님이 평소에 날 많이 생각해주셨다. 그러다가 모비스 감독에 부임하시면서 내게 연락을 주셨다. 너무나도 반가웠고 고마웠다"며 최 감독에게 감사를 표했다.
34세 다시 컴백한 정인교의 각오는 남달랐다. 한 때 100kg에 육박했던 몸무게를 정규훈련과 개인훈련, 새벽 및 야간훈련까지 하며 85kg까지 줄였다. 이런 정인교의 모습에 후배들도 자극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팀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좋았다. 전 시즌 꼴찌였던 모비스는 2002-03시즌 들어 6강팀으로 변모했고, 정인교도 한 몫 했다. 특히 2003년 1월 14일에 있었던 삼성과의 경기에서 그는 만천하에 자신의 부활을 알렸다. 모비스는 당시 경기에서 22점차를 뒤집는 극적인 역전 드라마를 연출해냈고, 그 중심에 바로 정인교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 경기에서 21분을 뛰며 3점슛 2개로 6점을 올리고, 2어시스트, 2스틸을 기록했다. 정인교의 3점포가 고비에서 터진 역전·쐐기포라는 점도 의미 있었지만, 그가 2년 만에 처음으로 맛보는 3점슛이라는 것에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단 6점을 기록하고도 인터뷰 실에 들어선 그는 "코트에 서있는 것 자체가 너무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고, 그런 정인교를 보며 최희암 감독도 흡족해했다.
이 경기를 계기로 정인교는 자신감을 되찾았고, 팀의 키 식스맨으로 자리잡았다. 팀 플레이에만 주력하던 모습에서 벗어나 과감하게 3점슛을 쏘며 상대 팀의 허를 찌르기도 했다. 한 방이 필요할 때도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플레이오프에서도 정인교의 활약은 이어졌다. 비록 TG에게 2연패로 무너지기는 했지만, 정인교는 예상치 못한 3점포로 TG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도 했다.
2002-03시즌은 그에게 '희망'을 던져주었고, 결국 그는 자기 자리를 잡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트레이드 된다. 삼성 황문용과 맞트레이드 된 것. 자신이 재기할 수 있도록 그 누구보다도 도움을 준 최희암 감독을 뒤로하고 그는 삼성으로 떠났다. 하지만 섭섭하지는 않았다. 지역방어에 따른 외곽 슈터 부재로 골치를 앓았던 삼성이 자신을 원했기 때문이다. 한편, 정인교를 트레이드 했던 최희암 감독은 모비스에서 성적부진으로 자진사퇴 한 후에 한 신문사에 기고한 칼럼에서 "팀 분위기를 주도했던 정인교를 트레이드 한 것이 실수"였다고 뒤늦은 후회를 했다.
□ 마지막 불꽃
정인교는 삼성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2003-04시즌이 자신의 마지막 무대라는 것을 직감했는지 그는 어느 때보다도 '우승 반지'에 욕심을 냈다. 훈련에 훈련을 또 거듭했다. 엄청난 훈련량으로 후배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시즌에 들어선 정인교는 조용했다. 2003년 11월 6일 오리온스 전이 사실상 그의 마지막 투혼이었다. 그는 시종일관 접전으로 진행되던 이 경기에서 중요한 3점슛 두 방을 작렬시켰고, 날카로운 돌파에 이은 레이업슛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8득점, 5리바운드로 그는 삼성의 6연승에 일조 했다. 하지만, 이것이 정인교의 마지막 활약이었다. 이후부터 정인교의 모습은 보기 어려웠다. 그는 벤치에 앉아있는 시간이 더욱 많았다. 결국 그는 시즌 막판에 은퇴 의사 표명했고, 2004년 3월 7일, KTF전이 그의 고별경기가 됐다. 그는 이 경기에서 6분 6초를 뛰며 3점슛 하나로 3득점을 올렸다.
시즌이 끝난 후 FA시장에서 그를 부르는 팀이 업었다. 그는 유니폼을 벗었다. 우승반지 하나 없이 그가 떠난 것이다. 하지만 한가지 다행인 것이, 삼성의 '파란색' 유니폼을 입고 파랑새가 되어서 떠났다는 점이다. 역시 그에게는 파란색이 어울리는가 보다.
□ 코트로 돌아오기를...
정인교는 유능한 지도자가 될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농구관계자들은 말한다. 농구에 대한 폭넓은 이해는 물론, 원만한 대인관계도 그를 좋은 지도자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요소이다. 그는 지금까지의 농구인생을 거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떠돌이 인생'을 통해 많은 지도자와 선후배들을 만나 다양한 경험을 했고, 벤치에 앉아있는 동안에는 또 다른 모습의 농구를 이해했다. 코트에 서 있을 때와 벤치에서 볼 때의 농구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는 말했다. "벤치에 있는 동안 선수들 심리 상태나 경기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을 파악할 수 있어 좋았다. 나중에 지도자로 활동할 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정인교는 요즘 영어 공부에 열중이라고 한다. 은퇴의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인정하고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려고 한다. 영어 공부를 하면서 그는 지나간 시간이 너무나도 안타깝다고 한다. 이 영어 공부가 코트로 돌아오기 위한 준비는 아닐까?
'파랑새' 정인교가 지도자로 복귀할 그 날을 기다려본다. 필시, 그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정인교의 홈페이지(www.chunginkyo.com)에 들어가 그에게 고마움과 격려의 메시지를 남기는 것은 어떨까?
좀 늦었지만, 많은 분들이 보시라는 의미에서 여기에도 글을 올립니다.^^
'날개 접은 파랑새' 정인교
날개를 접은 파랑새 하나가 있다. 이 파랑새는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 중의 스타였다. 그러나 이 파랑새가 날개를 접은 지 꾀 지났고, 이제는 기억 속에 영영 묻혀질 판이다. 파랑새는 바로 정인교이다. 프로원년인 97시즌에 '사랑의 3점슈터'로 스타덤에 올랐음에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던 정인교, 그가 은퇴한 것이다. 이미 한참 지난 일이다. 2003-04시즌 막판에 그는 소속 팀인 삼성에 '은퇴 의사'를 표명했으며, 시즌이 끝남과 동시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자의는 정인교의 은퇴의사이고, 타의는 FA가 된 그를 어느 팀도 찾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파랑새는 떠났다. 팬들의 기억 저편으로 쓸쓸하게 말이다.
□ 약체 리더
미림중에서 농구를 시작한 정인교는 미림중 농구부가 해체되자, 농구를 계속하기 위해 명문 휘문중으로 전학을 간 후, 휘문고로 진학했다. 정인교는 당시 고교 랭킹 1위로 꼽혔던 정경호와 짝을 이뤄 휘문고를 이끌었고, 정인교 개인으로는 88년 쌍용기 대회 최우수선수 상을 받기도 했다. 89년, 당시 고교 랭킹 1위를 놓고 다퉜던 오성식과 정경호는 각각 연세대와 중앙대로 진학했고, 스카우트에서 연세대-중앙대에 밀렸던 고려대는 정인교를 선택했다. 하지만, 이 때부터 정인교는 '약체 리더'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뛰어난 슛 감각을 지녔던 정인교였지만 약한 동료들은 그를 뒷받침해주지 못했다. 고려대가 연세대-중앙대와의 스카우트 싸움에서 연달아 패하면서 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고려대는 90년에 문경은, 김재훈, 김승기, 홍사붕을 91년에는 이상민, 김영만, 양경민을 놓치면서 깊은 수렁에 빠져들었다. 정인교는 홀로 안암골 호랑이를 이끌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상대 팀 입장에서는 정인교만 묶으면 그만이었으니깐. 그러나 몇 년째 스카우트 전쟁에서 패하기만 하던 고려대가 92년에 전희철, 김병철, 박준영 등을 거둬들이면서 정인교에게도 빛이 보이는 듯했다. 드디어 강력한 동료들과 함께 마지막 4학년을 화려하게 장식할 그런 모습 말이다. 그러나 정인교의 꿈은 산산조각 났다. 무릎에 문제가 생겼고, 그는 수술을 받아야 했다. 강력한 후배들과 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정인교를 원하는 실업팀은 많았다. 당시에도 슛 감각 하나만은 최고였기 때문이었다. 삼성과 현대 같은 명문 구단도 그에게 손을 뻗쳤다. 하지만 정인교가 선택한 팀은 산업은행이었다. 그가 산업은행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금융 팀에 가면 정인교 자신이 원하는 농구를 맘껏 할 수 있다는 생각과 자신감 때문. 또한, 당시 고려대 박한 감독의 생각도 정인교와 비슷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부푼 꿈을 안고, 실업 무대에 뛰어든 정인교였지만 팀 성적은 암담했다. 패하기를 밥먹듯이 했다. 그렇지만 정인교 개인은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했다. 매 경기, 20득점 이상을 꼬박꼬박 넣어준 그는 산업은행의 간판 슈터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실업리그 94-95시즌에 득점왕과 3점슛왕을 차지했고, 96-97 농구대잔치 득점왕도 정인교의 몫이었다. 하지만 정인교는 웃을 수 없었다. 팀이 패배만 거듭하기에 바빴기 때문. '도어매트 팀'을 정인교는 홀로 이끌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패배와 상처뿐인 타이틀이었다. 고려대와 산업은행을 이끈 그에게 '약체 리더'라는 이미지가 박히기 시작할 무렵. 서광의 빛이 보였다. 한국농구가 프로화의 길로 접어들 것을 선언한 것이다.
□ 농구가 너무나 즐거웠던 나래 시절
프로 출범과 동시에 정인교의 농구인생이 절정기로 치닫는다. 프로 출범을 앞둔 96년 7월에 나래 이동통신은 정인교의 소속 팀이었던 산업은행과 한국은행을 인수했고, 그 해 9월에 창단식을 가졌다. 나래 구단은 프로농구 참가를 위해 스포츠 불모지인 강원도 원주를 연고지로 삼아 '원주 나래 블루버드'로 새로운 출발을 선언했다. 정인교도 나래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출발을 하기로 맘먹었다.
이윽고 KBL이 출범됐다. 정인교는 97년 2월 2일, 서울 올림픽 경기장에서 열린 동양과의 중립 경기에서 프로 첫 발을 내디뎠다. 나래는 동양에게 아깝게 패했고, 정인교는 3점슛 7개를 던져 5개를 넣으며 총 19득점을 기록했다. 그의 프로 첫 경기가 남긴 기록이었다. 여전히 날카로운 슛 감각은 용병들이 득실거리는 상황에서도 주눅들지 않았다. 이후부터 나래와 정인교는 승승장구했다. 첫 경기 패배이후, 나래는 4연승을 거뒀고, 다시 한 번의 패배이후 6연승을 했다. 그 중에 당대 최강 기아도 그들에게 무릎을 꿇어야 했으며, 이는 당시 스포츠 신문들의 1면을 장식할 사건이었다.
나래 돌풍의 주역은 다름 아닌 정인교였다. 약한 동료들과 함께 뛰며 북 치고 장구 치기를 몇 년, 그는 프로에서 처음으로 강력한 동료들과 함께 했다. 리바운드와 블록슛 그리고 뛰어난 농구센스로 용병 MVP에 뽑힌 제이슨 윌리포드와 원년 득점왕 칼레이 해리스, 그리고 묵묵히 제 역할을 해주는 강병수와 그 외의 롤-플레이어들까지. 정인교가 플레이하기에 딱 좋은 여건이었다. 당시까지, 농구를 해오면서 언제나 혼자서 모든 걸 해야했던 정인교는 무거운 짐을 털어 버리면서 대활약을 펼쳤다. 항상, 상대 수비가 정인교에게 집중됐던 이전과는 달리, 윌리포드와 해리스의 존재로 인해 정인교는 상대적으로 분산된 수비를 이용했다. 작은 신장이지만 한 박자 빠른 슛 타이밍과 클러치 상황에서 어김없이 발휘되는 강심장은 더욱 강한 빛을 냈다. 파란색 나래 유니폼을 입은 한 작은 선수가 던지는 무차별한 3점슛과 클러치 상황에서 꽂히는 3점슛은 상대 팀에게는 공포의 대상, 그 자체였다. 반대로 원주 팬들과 유니세프에게 파란색 유니폼의 한 작은 선수가 터뜨리는 3점슛은 기쁨, 그 자체였다. 스포츠 불모지였던 원주 팬들에게 '파랑새' 정인교의 3점포만큼 마음을 휘어잡는 것도 없었고, 그는 원주의 프랜차이즈 플레이어로 떠올랐다. 또한, 정인교는 3점슛 하나를 성공시킬 때마다 1만원씩 유니세프 구호기금으로 기부됐고, 시즌 후에 890만원을 유니세프에 기탁해 주위를 훈훈케 하기도 했다. 정인교부터 시작된 선행은 이제 웬만한 스타들에게는 모두 퍼져있는 상태.
약체로 평가받았던 정인교의 팀 나래는 돌풍의 핵을 넘어 일약 우승후보로 떠올랐고, 정인교는 '사랑의 3점슈터'와 '파랑새'라는 닉네임을 얻으며 프로 최고의 스타반열에 올라섰다. 변두리 '약체 리더'에서 당당한 'KBL스타'가 된 것이다. 또한, 스포츠 불모지였던 원주에는 정인교의 나래로 인해 '농구 붐'이 조성되며, 성공적인 연고지 정착에 성공했다.
원년시즌, 정인교는 여러 차례 인상깊은 활약을 펼쳤다. 그중 하나가 97년 3월 20일에 있었던 동양과의 홈 경기. 정인교는 매치업 상대였던 김병철을 경기 시작 8분만에 4파울로 만들며 그를 코트 밖으로 쫓아냈고, 이후 3점포를 마구 꽂아댔다. 정인교는 이날 경기에서 무려 10개의 3점슛을 포함해 46득점을 올리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 경기는 여러 가지 시사점을 남겼다. 이전 경기에서 당시 약체로 불렸던 삼성과 현대에게 연패하며 흔들렸던 팀 분위기를 다시 추스른 것과 정인교 개인의 통산 최다 득점인 46점, 그리고 단순히 슛만 잘 던지는 선수가 아닌 상대의 파울을 유도해낼 정도로 물올라 있는 센스 플레이로 수비수를 무력화시키는 선수라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정인교의 활약은 플레이오프에서도 계속됐다. 그는 3점슛 91개(평균 4.3개)를 터뜨리며 원년 3점슛 왕을 차지했다. 많이 넣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3점슛 성공률도 48.15%로 1위에 올랐다. 양적 질적, 어느 하나 모자람이 없는 정인교의 3점슛이었다. 하지만 정인교는 플레이오프를 앞둔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허리를 삐끗하며 인천 대우와의 6강 플레이오프 출전이 불투명했다. 나래는 위기에 봉착했고, 최명룡 감독은 새로운 전술을 강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인교는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그는 팀을 위해 부상투혼을 발휘했다. 출전이 불투명했던 6강 플레이오프 1차전에 나선 그는 1점 뒤지고 있던 경기 종료 1.9초 전에 과감하게 골 밑으로 파고들어 김훈의 파울을 유도했다. 그는 김훈의 파울로 얻은 두 개의 자유투를 모두 성공시키며 팀에 귀중한 첫 승을 안겼다.
챔피언 결정전에서도 정인교의 활약은 멈추지 않았다. 특히, 1차전에서의 활약은 거함 기아를 침몰시키기에 이르렀다. 경기 시작과 동시에 3점슛을 작렬시킨 정인교는 경기 내내 팀의 공격을 주도하면서 기아를 몰아붙였다. 허재와 김영만이 그를 막기 위해 부단히 애썼지만, 빈곳을 찾아 부지런히 움직이는 그의 움직임을 감당해내지 못했다. 3점슛 6개 포함 28득점. 나래는 1차전에서 기아를 물리치며 챔피언 결정전에서 기선제압을 하는데 성공했다. 물론, 결과는 모두가 아시다시피 이후 기아의 4연승으로 막을 내렸지만 말이다. 그 와중에도 정인교는 4차전에서 3점슛 8개를 터뜨리는 등 32득점을 폭발하며 고군분투했다. 당시 그가 터뜨린 8개의 3점슛은 챔피언 결정전 역대 최다 3점슛 개수로 아직까지 남아있다.
프로원년 최고 스타로, 원주 시민의 우상으로 뜬 정인교. 그는 원주시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았고, 많은 원주 팬들 사이에서는 '원주=나래=정인교'라는 공식이 성립됐다. 그는 원주 시민들의 우상으로 떠받쳐졌다. 연봉협상에서도 정인교는 1억 3,000만원에 사인하며, 강동희-정재근-전희철에 이어 연봉 랭킹 4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1997-98시즌, 정인교는 더욱 발전한 모습을 보였다. 97년 11월 16일에 가장 먼저 통산 3점슛 100개 고지를 밟은 그는 플레이 면에서 한층 더 성숙된 모습을 보여 전문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마구잡이 식의 난사가 많이 줄어들었고, 상대의 집중적인 수비를 뚫을 센스와 테크닉도 발전했다. 윌리포드의 스크린을 이용해 순식간에 빈곳을 찾아 꽂아 넣는 3점포나, 더욱 과감해진 돌파는 상대 수비를 농락하기에 충분했다. 스크린과 센스 있는 플레이로 정인교를 지원하던 윌리포드는 여전했고, 여기에 '차세대 스타'로 불렸던 주희정에 용병 윌리엄 헤이즈가 가세했다. 주희정과 헤이즈의 뛰어난 패스는 정인교의 플레이에 돛을 단 격이 됐고, 정인교는 경기 당 5,6개에 육박하는 와이드 오픈 찬스를 맞을 수 있었다.
팬들의 끊임없는 환호와 격려도 정인교에게 큰 힘이 됐다. 기량과 팀 성적에 인기까지. 정인교는 모든 걸 가진 남자가 됐다. "올 시즌에는 경기도 많이 늘어 난만큼 작년보다 3점슛을 2배나 성공시켜 좋은 일도 많이 하겠다." 정인교의 다짐은 세상을 다 가진 자의 당당한 모습과도 별 다를 바 없었다. 1997-98시즌, 정인교는 삼성 문경은과 치열한 3점슛 경합을 펼쳤지만, 정규리그 마지막 날에 12개의 3점슛을 터뜨린 문경은에게 아깝게 밀렸다. 하지만, 팬들과 언론은 진정한 3점 슈터로 정인교를 거론할 정도로 당시 3점슛에 관해서는 정인교가 최고로 불렸다.
나래에서 플레이했던 시절을 정인교는 이렇게 회고한다.
"나래에 있을 때 정말 농구할 맛이 났다. 그 동안 팀 성적이 좋지 못해 팬들에게 외면당했는데 성적이 좋아지면서 팬들의 환호와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돼 정말 기분이 좋았다. 고려대-산업은행 시절에는 팀 성적이 안 좋아서 관중의 환호를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 시절에 농구가 정말 재밌었다."
□ 기아로의 트레이드
영원히 원주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남을 것 같던 정인교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98년 5월 26일. 나래와 기아는 KBL 역사에 남을 대형 트레이드를 성사시켰다. 정인교의 팀이었던 나래가 정인교와 신인 1차 지명권을 기아에 넘기면서 기아로부터 허재를 받는 트레이드를 한 것. 당시에 허재의 트레이드 설은 끊임없었지만, 그 대상이 정인교가 될 줄을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파란색 나래 유니폼이 누구보다도 잘 어울렸던 정인교가 어색한 빨간색 기아 유니폼을 입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정인교도 정인교지만, 원주 팬들이 받은 충격은 더 컸다. 원주의 스타 중의 스타였던 정인교가 트레이드 된 것에 원주 팬들이 격분한 것이다. "나래의 정인교 트레이드는 원주시민과 팬들을 우롱한 처사"라며 구단을 비난했고, 구단과 각 언론에 항의전화가 봇물처럼 터졌다. 강원도의 일부 매체들은 정인교를 트레이드 한 나래 구단에 대해 연일 비판했고, 원주시와 당시 6.4 지방선거가 겹친 정치인들도 덩달아 나래의 정인교의 트레이드를 비난했다. 팬들이 팬클럽 해체를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보일 정도로 '정인교 트레이드'의 여파는 실로 엄청났다. 2년 동안 정인교가 원주에 남긴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태였다. 팬들은 "정인교는 나래의 상징이자, 원주의 정신적 우상이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원주를 떠나라"며 분노했고, 원주시도 나래 구단에 정인교 트레이드의 경위를 문의하면서 '원주 시민들의 정서를 고려하지 않은 처사'였다며 구단에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트레이드 대상이 희대의 농구천재 허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원주 팬들은 정인교의 트레이드를 이해할 수 없어 했다. 이로 인해, 당시 허재의 나래 입단 환영식이원주 팬들의 격앙된 반응 때문에 크게 가라앉은 분위기였다는 후문.
원주 팬들의 뜻밖의 반응에 나래는 정인교를 재영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나래는 기아, 삼성과 함께 삼각 트레이드로 정인교를 재영입 하겠다는 의사를 표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 나래가 주희정, 강병수를 삼성에 내주고 양경민, 김승기를 받으면서 정인교 재영입이 기정사실화 되는 듯했다. 기아가 원래 노렸던 선수는 양경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래의 정인교 재영입은 불발됐다. 정인교의 강력한 반발 때문이었다. 정인교는 "나래로 재영입 될 바에는 차라리 은퇴하겠다"며 기아에서 새로운 농구인생을 설계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98년 여름을 달궜던 '허재-정인교 트레이드'의 여파는 가라앉았다.
당시의 심정을 정인교는 이렇게 말한다.
"트레이드 됐을 때 정말 서운했다.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뛰면서 농구 불모지였던 원주에 농구 붐도 일으켰는데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프로에서는 각 팀마다 필요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트레이드를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니깐."
□ 내리막길의 시작
1998-99시즌, 기아에서 새출발을 선언한 정인교. 하지만 기아에서의 정인교는 순탄치 못했다. 단짝용병이었던 윌리포드가 기아로 영입되면서 두 콤비의 활약이 기아에서도 이어질 것이라는 평가가 무색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이 와중에 정인교는 트레이드 후 첫 원주 방문에서 3점슛 4개로 친정팀 나래를 격침시켰다. 경기 전, 정인교는 원주 팬들에게 "여러분이 제게 명예시민증을 주셨으니, 전 영원한 원주 시민입니다"라며 원주 방문 소감을 말했다. 팬들은 원주 스타가 돌아온 것에 큰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그러나,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180도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정인교의 3점슛이 림을 갈랐을 때, 원주 팬들이 탄식을 한 것이다. 정인교도 어색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프로의 생리였다. 정인교는 그렇게 원주 울타리에서 벗어나며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정인교는 제 자리를 잃은 듯 방황하기 시작했다. 분명 공격력 하나만큼은 뛰어나지만, 작은 신장에서 오는 '미스매치'와 느린 스피드는 기아 팀컬러와 어울리지 못했다. 시즌이 중반이 넘어서면서부터는 벤치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욱 많았다. 이로 인해 정인교는 트레이드 설에 휘말려야 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정인교는 소외되었다. 적어도 플레이오프라는 큰 무대에서는 한 건 해줄 정인교로 기대됐지만, 박인규 감독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 박 감독은 수비에서 문제를 드러내는 정인교보다 봉하민을 중용했고, 정인교는 자신감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박인규 감독과 불화설이 나돌았을 정도로, 팀 내에서 그의 입지는 좁아졌다.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거의 '투명인간' 수준이었을 정도였다.
1999-00시즌을 앞둔 기아는 팀 체질 개선을 위해 박수교 감독을 영입했다. 박수교 감독은 정인교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박 감독은 정인교를 중용했고, 그는 99년 11월 20일, SK와의 경기에서 3점슛 8개에 35득점을 폭발시키며 박 감독의 기대에 부응했다. 신장에서 오는 수비 문제도 더 이상 문제 거리가 아니었다. 악착같은 근성으로 상대 공격수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면서 상대의 오펜스 파울을 유도해낼 정도로 정인교의 수비 능력은 좋았다. 이전의 평가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기아에 서서히 자리 잡을 무렵, 정인교에게 부상이라는 악령이 엄습해왔다. 2000년 2월에 그는 왼쪽 발목을 접질리는 부상을 당한 것. 처음 다친 부위였기 때문에 회복속도도 느렸다. 뒤늦게 삼성과의 6강 플레이오프에서도 정인교는 1,2차전에서 벤치를 지켰고, 3차전에 경기에 나섰지만 무용지물이었다. 기아도 삼성에게 허무하게 무너져야 했고, 정인교도 부상이라는 악령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아쉽게 시즌을 마감해야 했다.
□ 골드뱅크로의 트레이드
기아에서 두 번째 시즌을 마친 정인교는 2000년 7월, 골드뱅크로 트레이드 된다. 박수교 감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인교는 골드뱅크를 택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기아라는 팀이 정인교 자신과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또, 허재의 트레이드 상대로 큰 기대를 받고 기아에 합류했으나, 지난 두 시즌 동안 부상과 슬럼프로 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자책감도 컸다. 정인교는 봉하민과 함께 골드뱅크 정진영, 박재현과 2대2 맞트레이드 됐다. 그는 프로 세 번째 유니폼을 입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빨간색 유니폼을 입어야 했다. 어울리지 않았다. 파란색이 그와 딱 어울리는데.
골드뱅크에서의 생활도 내리막길의 연장선이었다. 물론, 2000년 11월 22일에 친정팀인 삼보를 상대로 가장 먼저 통산 3점슛 500개를 돌파했지만, 그것이 다였다. 진효준 감독이 추구하는 악착같은 플레이를 정인교는 보여주지 못했고, 현주엽과의 플레이도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무려 90kg으로 불어난 정인교의 몸무게는 그의 스피드를 더욱 떨어뜨렸고, 진효준 감독에게 신뢰를 심어주지 못했다. 게다가 시즌이 한창인 1월에는 왼쪽 무릎 인대를 다쳤다. 팀의 성적은 곤두박질 쳤고, 정인교도 벤치를 지키는 시간이 더욱 많았다. 정인교는 고비 때마다 자신의 발목을 잡는 부상의 악령에 몸서리를 쳤고, 심지어는 '은퇴'를 심각히 고려하기도 했다. 방황하던 그는 시즌이 끝남과 동시에 처음으로 시행되는 FA시장에 나서게 된다. 결과는 참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 FA제도의 희생양
정인교는 골드뱅크와의 재계약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이인표 단장은 정인교에게 재계약 조건으로 목표 체중, 즉 90kg에 달했던 그의 체중을 10kg 감량을 내걸었다. 하지만, 얼마 후, 재계약을 약속했던 이인표 단장이 팀을 떠나버렸다. 골드뱅크가 코리아텐더로 바뀌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었다. 정인교는 구단 측으로부터 연봉 5,000만원을 제시받았다. 전년도 연봉 1억 1,000만원을 받았던 정인교로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정인교는 8,000만원을 요구했지만, 턱없는 구단 측의 제시안에 마음이 틀어졌다. 뒤늦게 구단에서 7,000만원을 제시했지만 말이다.
그는 새로운 팀을 찾았다. 몇몇 팀이 그에게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까다롭고도 까다로운 FA제도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처음으로 FA제도를 시행한 탓인지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노출됐고, 정인교가 그 희생양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FA를 영입한 구단은 해당선수의 당해 연봉에 계약기간을 곱한 연봉 총액의 30%를 전 소속 구단에 지급하거나, 보호선수 1명을 제외한 선수 1명을 전 구단에게 내놓아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규정이 정인교를 코트 밖으로 내몬 것이다. 대출혈을 감수하면서까지 정인교를 데려갈 팀은 없었다. 신세기가 적극적으로 정인교 영입에 뛰어들었지만, 끝내 불발되고 말았다. "자존심을 버릴 테니,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라도 주어졌으면 좋겠다"고 했던 정인교는 순식간에 '코트의 미아'가 되고 말았다.
정인교는 자존심을 버렸다. 명예고 뭐고 필요 없었다. 그는 원 소속팀이었던 코리아텐더와 1년간 1,800만원에 수련선수 계약을 맺었다. 억대 연봉스타에서 하루아침에 1,800만원짜리 수련선수로 전락한 것이다. 어색한 자리에서 시즌을 보내던 중, 그에게 기회가 왔다. 2000년 11월 24일 SK나이츠 전에서 그가 수련선수 자격으로 부상으로 코트를 떠났던 지난 2월 이후, 9개월만에 코트에 선 것이다. 최민규의 부상으로 엔트리에 임시 투입된 것. 코리아텐더는 20여 점차로 SK에 끌려다녔고, 승부가 거의 판가름 난 4쿼터 막판에 투입됐다. 팬들은 "정인교!"를 연호 했지만, 정인교의 컨디션은 정상이 아니었다. 몸은 무거웠고, 슛 감도 무뎌졌다. 2개의 턴오버를 저질렀고, 중앙에서 던진 3점슛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얼마 후, 그는 다시 엔트리에서 빠졌다. SK나이츠 전이 그가 2001-02시즌에 뛴 유일한 경기였다.
□ 최희암 감독의 부름
정인교는 다시 FA가 됐다. 어느 팀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대로 묻혀지는 옛 스타로 남을 듯했다. 하지만 정인교의 휘문고 선배인 최희암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막 모비스 신임감독으로 부임한 최 감독은 평소부터 정인교를 높이 평가해 왔었다. 팀 체질개선에 돌입했던 최 감독은 정인교에게 연락했다. "우리 팀에서 뛸 마음이 없느냐?"고 최 감독은 물었다. 정인교의 대답은 간단했다. "Yes"였다. 정인교는 계약기간 2년, 연봉 6,000만원에 모비스의 '파란색' 유니폼을 입으며 재기를 노렸다. 최희암 감독은 정인교에 대해 "재기하겠다는 의지가 강하고, 재능이 있는 선수인 만큼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인교도 "최 감독님이 평소에 날 많이 생각해주셨다. 그러다가 모비스 감독에 부임하시면서 내게 연락을 주셨다. 너무나도 반가웠고 고마웠다"며 최 감독에게 감사를 표했다.
34세 다시 컴백한 정인교의 각오는 남달랐다. 한 때 100kg에 육박했던 몸무게를 정규훈련과 개인훈련, 새벽 및 야간훈련까지 하며 85kg까지 줄였다. 이런 정인교의 모습에 후배들도 자극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팀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좋았다. 전 시즌 꼴찌였던 모비스는 2002-03시즌 들어 6강팀으로 변모했고, 정인교도 한 몫 했다. 특히 2003년 1월 14일에 있었던 삼성과의 경기에서 그는 만천하에 자신의 부활을 알렸다. 모비스는 당시 경기에서 22점차를 뒤집는 극적인 역전 드라마를 연출해냈고, 그 중심에 바로 정인교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 경기에서 21분을 뛰며 3점슛 2개로 6점을 올리고, 2어시스트, 2스틸을 기록했다. 정인교의 3점포가 고비에서 터진 역전·쐐기포라는 점도 의미 있었지만, 그가 2년 만에 처음으로 맛보는 3점슛이라는 것에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단 6점을 기록하고도 인터뷰 실에 들어선 그는 "코트에 서있는 것 자체가 너무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고, 그런 정인교를 보며 최희암 감독도 흡족해했다.
이 경기를 계기로 정인교는 자신감을 되찾았고, 팀의 키 식스맨으로 자리잡았다. 팀 플레이에만 주력하던 모습에서 벗어나 과감하게 3점슛을 쏘며 상대 팀의 허를 찌르기도 했다. 한 방이 필요할 때도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플레이오프에서도 정인교의 활약은 이어졌다. 비록 TG에게 2연패로 무너지기는 했지만, 정인교는 예상치 못한 3점포로 TG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도 했다.
2002-03시즌은 그에게 '희망'을 던져주었고, 결국 그는 자기 자리를 잡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트레이드 된다. 삼성 황문용과 맞트레이드 된 것. 자신이 재기할 수 있도록 그 누구보다도 도움을 준 최희암 감독을 뒤로하고 그는 삼성으로 떠났다. 하지만 섭섭하지는 않았다. 지역방어에 따른 외곽 슈터 부재로 골치를 앓았던 삼성이 자신을 원했기 때문이다. 한편, 정인교를 트레이드 했던 최희암 감독은 모비스에서 성적부진으로 자진사퇴 한 후에 한 신문사에 기고한 칼럼에서 "팀 분위기를 주도했던 정인교를 트레이드 한 것이 실수"였다고 뒤늦은 후회를 했다.
□ 마지막 불꽃
정인교는 삼성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2003-04시즌이 자신의 마지막 무대라는 것을 직감했는지 그는 어느 때보다도 '우승 반지'에 욕심을 냈다. 훈련에 훈련을 또 거듭했다. 엄청난 훈련량으로 후배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시즌에 들어선 정인교는 조용했다. 2003년 11월 6일 오리온스 전이 사실상 그의 마지막 투혼이었다. 그는 시종일관 접전으로 진행되던 이 경기에서 중요한 3점슛 두 방을 작렬시켰고, 날카로운 돌파에 이은 레이업슛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8득점, 5리바운드로 그는 삼성의 6연승에 일조 했다. 하지만, 이것이 정인교의 마지막 활약이었다. 이후부터 정인교의 모습은 보기 어려웠다. 그는 벤치에 앉아있는 시간이 더욱 많았다. 결국 그는 시즌 막판에 은퇴 의사 표명했고, 2004년 3월 7일, KTF전이 그의 고별경기가 됐다. 그는 이 경기에서 6분 6초를 뛰며 3점슛 하나로 3득점을 올렸다.
시즌이 끝난 후 FA시장에서 그를 부르는 팀이 업었다. 그는 유니폼을 벗었다. 우승반지 하나 없이 그가 떠난 것이다. 하지만 한가지 다행인 것이, 삼성의 '파란색' 유니폼을 입고 파랑새가 되어서 떠났다는 점이다. 역시 그에게는 파란색이 어울리는가 보다.
□ 코트로 돌아오기를...
정인교는 유능한 지도자가 될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농구관계자들은 말한다. 농구에 대한 폭넓은 이해는 물론, 원만한 대인관계도 그를 좋은 지도자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요소이다. 그는 지금까지의 농구인생을 거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떠돌이 인생'을 통해 많은 지도자와 선후배들을 만나 다양한 경험을 했고, 벤치에 앉아있는 동안에는 또 다른 모습의 농구를 이해했다. 코트에 서 있을 때와 벤치에서 볼 때의 농구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는 말했다. "벤치에 있는 동안 선수들 심리 상태나 경기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을 파악할 수 있어 좋았다. 나중에 지도자로 활동할 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정인교는 요즘 영어 공부에 열중이라고 한다. 은퇴의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인정하고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려고 한다. 영어 공부를 하면서 그는 지나간 시간이 너무나도 안타깝다고 한다. 이 영어 공부가 코트로 돌아오기 위한 준비는 아닐까?
'파랑새' 정인교가 지도자로 복귀할 그 날을 기다려본다. 필시, 그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정인교의 홈페이지(www.chunginkyo.com)에 들어가 그에게 고마움과 격려의 메시지를 남기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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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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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선수명단 작성시간 04.08.03 어릴때 기아-나래 경기보면서 인상깊던 선수였는데.. 읽었던 글인데 또읽어도 재미있고 여운이 남네요.. 지도자로 제2의 농구인생 열어가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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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변인 S.W 작성시간 04.08.03 너무 .. 초라하게 농구인생이 끝나는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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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3Point 작성시간 04.08.03 아 이상학님 반갑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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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Card*하경우*] 작성시간 04.08.03 정인교 선수, 참 안타까운 케이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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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홍군 작성시간 04.08.03 참 또라이같이 만들어 놓은 F.A제도의 희생양이죠. 그때도 정말 안타까워서 친구들이랑 화를 많이 냈었는데...어떻게 저게 F.A제도냐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