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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간추린 '데이비드 로빈슨 이전'의 스퍼스 역사 (1967~1989)

작성자Doctor J|작성시간07.08.23|조회수8,856 목록 댓글 31

   

 

간추린 데이비드 로빈슨 이전의 스퍼스 역사

 

 

그 동안 느껴온 것인데, 스퍼스팸을 이루고 있는 팸원들의 연령층이 크게 3부류로 나뉘는 것 같습니다. 한 부류는 데이빗 로빈슨, 션 엘리엇등과 함께 시작한 세대. 또 하나는 팀 던컨과 함께 스퍼스의 팬이 된 세대. 그리고 또 하나가 2002, 2003년을 기점으로 지노빌리, 파커등과 함께 한 세대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동안 스퍼스팸에 올라온 글들을 주욱 읽어보면, 데이빗 로빈슨 이전의 스퍼스에 대해서는 글이 거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응원하는 팀의 뿌리와 역사를 모르면 그 팀의 반쪽짜리 팬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몇 분이 제게 쪽지를 보내주시며 스퍼스의 역사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부족하나마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역사에 대해 글을 써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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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퍼스의 존재감을 세상에 알린 아이스맨과, 팀을 컨텐더로 만들어 놓은 제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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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스퍼스는 영원한 스퍼스다’ ("Once a Spur Always a Spur")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해병대가 한 말이 아니고, 샌안토니오 시민들이 하는 말이고, 스퍼스 관계자나 선수들이 하는 얘기입니다. 미국의 4대 메이저 스포츠중, 유일하게 샌안토니오를 연고지로 삼고 있는 프로팀이 스퍼스인지라, 샌안토니오 시민들은 그야말로 전 시민이 스퍼스의 팬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어떤 끈끈한 유대관계가 구단과 커뮤니티 사이에 존재합니다. 스퍼스를 거친 많은 과거의 선수들이 아직도 스퍼스 구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스퍼스 경기의 중계라든지 그 외의 스퍼스의 커뮤니티 활동에 어느 타 구단보다도 적극적이란 사실이 이를 증명해 줍니다. 데이비드 로빈슨의 Carver Academy나 조지 거빈의 ‘George Gervin Youth Center’는 샌안토니오의 명물이고, 거리의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주는 교육장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매년 2월이면,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전용구장이 도시의 전통적인 연례행사 ‘San Antonio Stock Show & Rodeo’에 사용됩니다. 스퍼스 구단차원에서 스퍼스 팀이 샌안토니오 커뮤니티와 더 결속되게 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입니다. 그래서, 2월달에는 스퍼스가 타 팀들보다 좀 더 긴 원정경기 시리즈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이 원정시리즈를 Rodeo Road Trip이라 부르죠. 스퍼스 팀에게 좀 불리한 일정이 아니냐는 팬들의 우려와는 달리, 오히려 스퍼스는 시즌 중 슬럼프에 빠졌다가도, 2월달의 로데오 Trip 동안에 경기력을 끌어 올리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이제는 무슨 징크스라도 되는 양, 스퍼스 선수들은 이 긴 원정경기 시리즈를 기다린다고까지 합니다. 지난 시즌, 스퍼스가 전반기에 한참 헤매던 때에, 지노빌리를 식스맨으로 기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 로데오 Trip 기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스퍼스는 리그 최고의 팀이 되죠.

 

오늘 글은 일단 데이비드 로빈슨의 입단 전까지의 스퍼스팀에 대한 역사에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Dallas Chaparrals (ABA 1967-1973)

 

많은 스퍼스 팬분들이 두려워하는 댈러스. 그 댈러스에서 스퍼스팀은 태어났습니다. 그 때에는 리그가 둘로 나뉘어져 있었지요, ABA NBA. 스퍼스의 전신인 Chaparrals 팀은 ABA 리그 소속이었습니다. ABA 리그가 창단하던 해에 리그를 시작한 11팀들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에는 팀의 성적도 그저 그랬었고, 댈러스 시의 팬들의 호응이 없어서 참 암울한 나날을 보냈었습니다. 댈러스하면 미식축구팀 카우보이스 아닙니까? 신생 농구팀이 주목을 받을 이유가 없었지요. 스타급 선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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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llas Chaparrals 시절의 스퍼스

 

 

San Antonio Spurs (ABA 1973-1976)

 

1973년 시즌이 끝나고, 이 댈러스 농구팀은 샌안토니오의 부유한 36명의 주식가들에게 인수됩니다. 그리고 연고지가 샌안토니오로 바뀌면서, 이 팀은 스퍼스’ (박차)란 특유의 서부 지방색을 따르는 이름으로 개명되죠. 바로 이 때에 팀 칼라도 검은색과 은색으로 바뀝니다.

 

갑자기 이 스퍼스팀은 큰 홍보효과와 함께, 첫 경기에서 6,000명이 넘는 샌안토니오 주민들을 경기장으로 끌어 들입니다. 당시에는 이 정도 숫자면 큰 관중동원이었습니다. 이 때부터 스퍼스 팀 특유의 질식수비가 선을 보이며, 당시에는 드물게도 한 시즌에 상대팀의 득점을 49번이나 100점 이하로 막는 기록을 내기도 했습니다. 이 당시 팀을 이끌던 선수가 스퍼스 역사상 첫번째로 영구결번 된 제임스 사일러스 (James Silas)였습니다. 그리고 시즌 중반에 스퍼스의 프론트는 조지 거빈 (George Gervin)을 영입해 오는 대업을 완수합니다. 이 때부터 스퍼스는 ABA의 강자로 떠오르기 시작하죠.

 

1974-75 시즌을 앞두고 샌안토니오의 HemisFair Arena에 새 보금자리를 잡은 스퍼스는, 시즌 시작하자마자 수비와 느린 농구를 강조하는 톰 니삭 감독을 해고합니다. 그리고 런앤건농구를 강조하는 봅 배스 감독을 대행으로 내세우죠. 개인적으로는 이 감독교체가 스퍼스가 NBA의 강자로 떠오르는 시간을 많이 지연시켰다고 봅니다. 당시로서는 관중수입쪽에 더 초점을 맞추었던 행정이었죠. 그야말로 어느날 갑자기, 스퍼스는 프로농구 최고의 런앤건팀으로 거듭납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제임스 사일러스와 조지 거빈, 그리고 날아 다니는 파워포워드 래리 키넌의 기술과 스피드가 드디어 화려하게 꽃을 피우기 시작한거죠.

 

구단 차원에서 밀어주는 ‘Showtime’ 스타일의 뛰고 덩크하는 농구. 조지 거빈은 당시의 변모한 팀 칼라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상대방이 100번을 슛 쏘면, 우리는 107번을 쏜다는 자세로 매 경기에 임했지요라고. 이렇듯 수비가 아닌 공격으로 맞불을 놓아 이기겠다는 맨탈리티가 샌토니오에도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 새로운 스퍼스가 인기는 좋아졌던 반면, 플레이옾에서는 매 번 1라운드나 2라운드에서 고배를 마시게 되는 종이호랑이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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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퍼스 구단 역사상 최초의 수퍼스타 제임스 "Captain Late" 사일러스 

  

조지 거빈 시대 (NBA 1976-1985)

 

1976 ABA NBA와 합병됨에 따라, 스퍼스는 ABA 팀들 중 다른 세 팀과 함께 NBA 에 들어오게 됩니다. 여러가지 시스템이나 ABA 팀들에 대한 텃세에도 불구하고, 스퍼스는 NBA에 들어온 첫 시즌에 44 38패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둬서 NBA를 놀라게 합니다. 물론 이제부터 스퍼스는 철저히 아이스맨조지 거빈의 원맨팀이 되죠. 어느 상황, 어느 팀을 만나도 줄기차게 33-35점을 득점해 주는 조지 거빈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몰랐습니다. 무려 4번의 득점왕. 지금으로 치면 전성기의 트레이시 맥그레이디나 코비 브라이언트 정도의 포스와 인기를 누렸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던 또 다른 ABA 출신의 수퍼스타 줄리어스 어빙과 매 시즌 올스타 게임 인기투표 수위를 다투던 거빈이었죠. 두 선수 다 대부분의 득점이 덩크나 핑거롤, 그리고 속공에 이은 화려하고 창조적인 플레이들이었습니다.

 

스퍼스는 이 거빈이 NBA에 합류한 후 7시즌동안, ABA 출신 수퍼스타 래리 키넌, 그리고 포인트 가드 쟈니 무어와 준족의 스몰포워드 마이크 밋첼을 앞세워 5번이나 디비젼 타이틀을 따냅니다. (여기를 클릭하시면, 제가 스퍼스팸게에 쓴 스퍼스 출신 스타선수들의 짧은 프로필을 보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퍼스의 이 뛰는 농구는 플레이옾에서 항상 수비 위주의 팀에게 발목을 잡혔지요. 더군다나 당시에는 모제스 말론을 앞세운 휴스턴과 압둘자바의 레이커스가 서부에 버티고 있어서 이렇다 할만한 빅맨이 없었던 스퍼스로서는 최고성적인 1982년 컨퍼런스 파이널에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83년 시즌을 앞두고 시카고 불스의 올스타 센터 아티스 길모어를 영입해 오지만, 이미 물에 오른 매직 존슨의 레이커스나 떠오르는 팀, 포틀랜드 블레이저스, 덴버 너겟츠등의 팀들을 넘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1984-85 시즌을 마치고 리빌딩에 들어가기로 작정한 스퍼스는 거빈을 마이클 조던의 백업요원으로 내줍니다. 거빈에게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모멸감을 받은 순간이었다고 밝혔고, 결국 그는 1985-86 시즌 후 스스로 은퇴를 하고 맙니다. 다음 시즌에 이탤리 리그에서 한 시즌을 더 뛰기는 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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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퍼스 구단을 대표할 만한 수퍼스타 조지 "아이스맨" 거빈

  

암울한 시기 (1985-1989)

 

거빈을 내준 이 후 네 시즌동안 스퍼스의 성적은 115 215. 앨빈 로벗슨이란 1984년 드래프트 7번픽이며, 뛰어난 수비를 자랑하던 올스타 가드가 활약했으나, 결국 많은 팬들을 잃었고, 샌안토니오 시민들의 농구에 대한 관심도 다 사라져 갈 즈음에 들려온 유일한 희소식 바로 그들이 1987 NBA 드래프트 1순위를 뽑을 수 있게 된 것이죠. 해군복무를 2년 더 해야한다는 로빈슨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스퍼스는 제독을 1번으로 지명합니다. 데이비드 로빈슨의 지명은 명장 래리 브라운 감독의 구미를 당겼고, 결국 그는 1988-89 시즌을 앞두고 이 암울한 팀의 사령탑을 맡습니다. 그가 기자회견에서 한 유명한 말, “내년에 데이비드 로빈슨이 온다고 해서 이 팀을 맡은 것입니다. 로빈슨이 안 온다면, 억만금을 준다 해도 이런 수비를 전혀 안하는 허접한 팀에 올 필요가 없었습니다.” 결국, 래리 브라운 감독은 일년 후에 합류한 로빈슨과 함께, 90년대의 스퍼스 초석을 다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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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사 시절의 로빈슨과 1989년 당시의 젊은 래리 브라운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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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는 얄팍한 역사지식으로 대충 써보았습니다. 이 정도만 알고 계셔도, 스퍼스 팸원으로서는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 Doctor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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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Doctor J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05.08 아마도 삭님이 이 글을 공지에 올리신 것 같은데... 이 글보다는 차라리 제가 썼던 '스퍼스 올타임 팀'(2937번)이 공지글에 더 어울리지 않겠나 생각해봅니다.^^;
  • 작성자Ray20Allen | 작성시간 10.07.30 잘봤습니다~
  • 작성자샌안토니오덩컨 | 작성시간 11.05.13 멋진글 잘 봤습니다~!
  • 작성자Arousal | 작성시간 13.05.19 예전에 봤던 글이지만 이제서야 리플을 다네요. 좋은 자료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Crazy Mcgrady | 작성시간 15.04.30 생각날때마다 다시 보곤하는데, 정말 잘 써주셔서 너무 재미있습니다.
    67년 댈러스 샤파랄스로 ABA참가에서 73년 우리가 아는 스퍼스로 이전, 76년 NBA로 이동과 당시 팀을 이끌던 아이스맨 조지 거빈
    쉽게 잘 이해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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