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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tah Jazz [All That Jazz]

소금호수의 팀 Utah Jazz의 역사

작성자Jerry Sloan|작성시간13.08.08|조회수4,424 목록 댓글 29

안녕하세요. Jerry Sloan입니다.

 

애증의 팀,Utah Jazz에 대해 글을 쓰려고 늘 고심했었는데

 

얕은 지식도 지식이지만 먹고 살기 바쁜(솔직히 말하면 게을러서 못하고 있었다는게 현실) 현실때문에 늘 미루고 미루다가

 

드디어 써보게 되네요. 많이 부족한 필력이고 얕은 지식이지만 좋게 봐주셨으면 합니다. ^^

 

 

 

 

Utah Jazz는 유타 주의 솔트레이크 시티를 연고지로 두고 있는 구단입니다.

 

때문에 유타주의 간단한 역사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봐서 자료를 찾아봤습니다.

 

Utah라는 뜻은 유트(Ute) 인디언족의 언어인데 '산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나바호 인디언들이 살고 있던 이 지역이었는데 

 

1847년 7월 24일 종교의 자유를 찾아 브리감 영이라는 사람이 몰몬교도들을 이끌고 이하여 정착촌을 건설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정착촌이 현재의 솔트레이크 시티입니다.

 

유타지역은 원래 멕시코 땅의 일부였는데 맥시코와의 영토 분쟁으로 인하여 전쟁이 일어나 미국이 승리함으로서 1848년에 조약

 

으로 미국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1850년에 미합중국의 유타준주로 등록되었다가 1896년 1월 4일 45번째 로 가입되었습니다.

 

이곳에는 대표적인 명물로 소금호수인 솔트레이크 호가 있는데 염도가 무려 27%나 되죠. 이때문에 유타는 소금호수의 도시로

 

불립니다. 인구는 약 250만명 정도가 살고 있는 도시이며 솔트레이크 지역에 60%이상의 인구가 모여살고 있습니다.

 

몰몬교도들이 이주를 시작해 발전한 곳이기 때문에 약 90%이상의 주민들이 백인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중 60%이상은

 

몰몬교도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범죄률이 매우 낮고 깨끗한 도시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러한 종교적 색깔이 강하고

 

조용한 동네이다보니 FA시장으로나 마켓으로나 매력이 없는 도시죠.

 

하지만 유타주에는 프로미식축구 팀이나 프로야구팀등 다른 프로스포츠 팀이 없고 오로지 유타재즈라는 프로농구팀만 있기

 

때문에 유타주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역대 최고의 뎁시델을 기록한 적이 있을정도로

 

열정적인 팬들을 보유하고 있죠. 대부분 경기마다 티켓은 잘 팔리고 플레이오프때는 입장권을 추첨을 통해 판매해야 될 정도로

 

인기가 하늘을 찌를듯하죠.

 

하지만 이곳에서 구단의 역사가 시작된건 1979년이었으며 재즈의 역사는 그 이전에 뉴올리언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74년에 뉴올리언스 재즈라는 이름으로 NBA의 18번째 구단으로 탄생된 팀으로 재즈 음악의 본고장인 뉴올리언스였기에

 

팀의 이름이 재즈가 되었습니다.

 

 

 

초기 재즈의 로고로서 1978년까지 사용되었던 로고입니다.

 

뭔가 모르게 촌스러우면서도 클레식컬해서 정겨운 이러한 로고의 형태는 크게 변하지 않고 이후로 약간씩 변하지만

 

기본틀은 변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때의 재즈를 암흑시대로 감히 표현하는데 그 이유는 말 그대로 답이 없는

 

암흑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창단이후 뉴올리언스 재즈는 팀의 흥행과 발전을 위해서 당대의 슈퍼스타 피트 마라비치를

 

1974년 5월 3일 호크스에게 1974년 1라운드 지명권,1975년 1.2라운드 지명권 1976년 2라운드 지명권 3장을 주고

 

데리고 옵니다.

 

 

 

피트 마라비치,그는 지금으로 따지자면 코비 브라이언트같은 리그 최고의 가드였습니다.

 

당시 최고의 연봉이었던 190만 달러를 그에게 줬다는건 재즈가 얼마나 마라비치에게 기대를 했는지 알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마라비치는 연봉값을 충분히 해줬습니다. 탄탄한 기본기와 눈으로 보고도 믿을수 없는 화려한 패스와

 

폭발적인 득점력으로 흥행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개인 스텟도 레전드라 불리기 부족함이 없었는데 특히

 

76-77시즌에는 31.1점으로 득점왕을 차지하는등 엄청난 활약을 보여줬습니다. 당시 마라비치가 뛰던 시절엔 3점슛이

 

없었는데 마라비치는 3점거리에서 슛성공률이 높았던 선수였습니다. 만약 3점슛이 있었다면 그의 평득과 스텟은 더욱

 

치솟았을겁니다. 하지만 마라비치의 이러한 선전과 활약에도 불구하고 재즈는 약체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우승권은커녕 플레이오프도 한번도 진출하지 못했죠. 엄청난 활약을 펼친 마라비치도 결국 1978년에 부상으로

 

쓰러졌고 이후 구단이 Utah로 주를 옮긴뒤 80년 1월에 그는 팀을 떠나게 됩니다.

 

짧지만 굵고 엄청난 임팩트를 남긴 마라비치의 활약을 기려 재즈는 그의 등번호를 영구결번시킵니다.(7번)

 

마라비치의 활약에 감탄하며 몰린 팬들의 열기과 호응도 팀이 계속 하위권에 맴돌자 점점 식기 시작했고

 

이는 재즈 구단을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빠지게 했습니다.

 

결국 구단은 연고지 이적이라는 칼을 뽑아들고 새로운 시작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1979년 유타주의 솔트레이크 시티로 이적함으로서 팀의 이름도 Utah Jazz로 바뀌었으며 우리가 아는 재즈의 역사가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연고지 이적후 바꾼 재즈의 로고로 1995년까지 사용되었던 로고입니다. 위의 뉴올리언스 시절과 비교해보면 아시겠지만

 

이름만 바꿨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_-)a

 

뉴올리언스에서 유타로 이적한 재즈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팀의 중심이 될 슈퍼스타를 물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재즈의 레이더망에 걸렸던 선수는 당시 레이커스에서 뛰고 있었던 풋풋한 애드리언 댄틀리였습니다.

 

 

 

애드리언 댄틀리, 감히 재즈 역대 최고의 스코어러중 1명이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2M도 안되는 작은 신장이었지만 탄탄한 몸과 뛰어난 쌘스를 지니고 있었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뛰어난 포스트업 플레이와 준수한 자유투능력등을 가지고 있었던 전형적인 공격형 포워드였던 선수였습니다.

 

댄틀리를 데려오기 위해 재즈는 스팬서 헤이우드라는 좋은 선수를 LA레이커스에게 넘겨야 했습니다.

 

스팬서 헤이우드는 그렇게 작은 댓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훌륭한 선수였습니다.

 

1968년 미국대표팀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당당히 가졌던 선수였으며 70년에는 ABA에서 30득점 19.5리바운드를 기록한

 

괴물같은 기록을 가진 선수였습니다. 4년연속 올스타에 뽑혔으며 퍼스트팀도 뽑혔던 선수가 바로 이 헤이우드였습니다.

 

물론 재즈에 온 이후 점점 하락세였던 선수였지만 그래도 훌륭한 선수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반면 댄틀리는 뛰어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잦은 이적으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던 선수였습니다.

 

재즈는 댄틀리에게 미래를 걸고 스팬서 헤이우드를 보내고 그를 영입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댄틀리를 새로운 팀의 중심으로 만든건 대성공이었습니다.

 

첫 해에 28.0 득점 7.6 리바운드를 기록하더니 다음 해에 42.7 분 뛰면서 30.7 득점 6.4 리바운드를 기록하는등 대활약을 했고

 

다음 해에도 81경기 출장해 30.3 득점 6.3 리바운드로 엄청난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올스타전에도 무려 6번이나 뽑혔으며

 

득점왕까지 차지하는등 개인 커리어를 화려하게 이어나갔습니다.

 

이런 댄틀리의 활약과 더불어 재즈 역대 최고의 덩커이자 훌륭한 스코어러였던 데럴 그리피스, 뛰어난 스틸능력과 센스를 갖춘

 

가드 릭키 그린과 재즈 역사상 최고의 수비형 센터 마크 이튼과 명장 프랭크 레이든 감독의 절묘한 조화로

 

재즈는 83-84시즌 프랜차이져 최초로 플레이오프 진출을 성공하는 기쁨을 맛봅니다.

 

80년대 초중반의 재즈를 이끈 주역들입니다.

 

 

-대학시절 최고의 덩커였고 댄틀리와 함께 유타의 원투펀치였던 데럴 그리피스, 재즈에 영구결번되었습니다.(35번)

 

 

 

 

 

-비록 기동성이 안좋고 가로수비가 떨어지긴 했지만 높이를 이용한 최고의 세로수비로 재즈의 골밑을 지켰던

 

 마크 이튼입니다. 그의 든든한 수비적인 활약에 재즈에서는 그를 영구결번시켰습니다.(53번)

 

 

사진을 구할수 없는 관계로 올리지 못했지만 프랭크 레이든 감독 역시 재즈를 플레이오프로 진출시키는등

 

퇴임전까지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후 프랭크 레이든 감독도 재즈에 영구결번되었습니다.(1번)

 

영구결번을 받지 못했지만 릭키 그린 역시 재즈에서 댄틀리,그리피스와 더불어 빅3로 활약하는등 좋은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80년대는 재즈 역사상 가장 많은 영구결번된 선수들이 나온 해였습니다. 그만큼 특색있고 뛰어난 능력을 갖춘 선수들이

 

많이 나왔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즈는 우승권과는 늘 거리가 멀었습니다.

 

당시 서부를 주름잡고 있었던 레이커스와 휴스턴등 강호들의 기세가 워낙 대단했기 때문이었죠.

 

역대 최고의 드레프트의 해였다는 84년 드레프트...

 

하지만 유타에 지명된 선수는 하킴 올라주원도, 마이클 조던도, 찰스 바클리도, 샘 퍼킨스도, 그 누구도 아니었습니다.

 

평범해 보이는 백인 포인트가드가 유타 재즈에 지명이 되었습니다. 당시 이 포인트가드가 지명되었을때

 

재즈 팬들의 야유와 비난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선수가 유타 재즈 역대 최고의 포인트가드이자

 

역대 올타임 포인트가드 TOP5에 거론되는 커리어를 쌓을꺼라곤  누가 알았을까요?

 

85년 드레프트에는 84년에 지명된 백인 포인트가드와는 달리 많은 기대를 받으며 당당히 유타재즈에

 

한 흑인 빅맨이 지명되었습니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요? 이 선수가 역대 TOP3에 드는 파워포워드로 평가받는 선수가

 

될것이며 통산 2위의 득점을 찍은 위대한 업적을 남기며 20-10의 상징적인 선수가 될것이라고 누가 알았을까요?

 

이 84,85년 드레프트때 유타 재즈에 지명받은 선수들은 이후 팀의 중심이 되며 재즈의 황금시대를 여는

 

역대 최고의 콤비인 존 스탁턴과 칼 말론이었습니다.

 

 

 

-두 레전드의 뒷모습, 그 어떠한 선수들보다 위엄있고 멋져 보입니다.

 

 

 

 

80년대 후반으로 점점 가면서 첫 플레이오프를 이끌던 맴버들이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기존의 팀의 중심이었던 댄틀리도 결국 팀과의 불화, 기대주 말론과의 동선이 겹치는등의 문제로 결국

 

구단에서는 댄틀리를 디트로이트로 트레이드시킴으로서 댄틀리 시대를 끝냈습니다.

 

하지만 재즈는 끄덕없이 플레이오프에 꾸준히 진출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스탁턴과 말론이 있었습니다.

 

재즈에 지명된 이후 한동안에도 홈팬들에게 야유를 받았던 스탁턴이었지만 그는 묵묵히 자신의 실력을 보여줌으로서

 

점점 재즈팬들의 사랑을 받는 포인트가드로 변했고 지명되었을때부터 기대주였던 칼 말론은 역시나 기대이상의 활약으로

 

20-10을 꾸준히 쌓아줌으로서 팀의 중심으로서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철저한 정석 포인트가드였던 스탁턴과 팀의 스코어러이자 중심이었던 말론의 픽앤롤은 알면서도 막을수없는 재즈의

 

최고의 공격전술이었고 이는 재즈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공격 전술이 되었습니다.

 

88년 프랭크 레이든 감독이 퇴임한후 한 흰머리의 꼰대같이 생긴 아저씨가 재즈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존심이 불처럼 강하였고 엄청난 카리스마와 포스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과거 시카고 불스의 선수로 뛰었으며

 

영구결번까지 된 레전드이자 코트 위의 전사였던 남자 제리 슬로언이었습니다.

 

 

 

-코트 안에서는 전사의 심장을 가지고 뛰었던 남자, 벤치에서는 냉정하고 카리스마로 선수들을 휘어잡은 제리 슬로언 감독.

 

 

제리 슬로언 감독은 지휘봉을 잡기 무섭게 팀을 자신의 색깔로 개편하기 시작했습니다.

 

재즈팬들이 알고 있던 철저한 조직력과 확실한 역할 분담의 슬로언식 조직농구는 이때부터 재즈에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칼 말론과 존 스탁턴이라는 최고의 2:2 콤비,그리고 제리 슬로언이라는 명장의 지휘하에 유타 재즈는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FA시장에서 워낙 인기가 없는 팀이라 좋은 선수들을 수급하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슬로언은 B~D급 선수들을 자신의 시스템에 맞춰서 최대한의 효율성과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농구를 함으로서

 

팀을 꾸준히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습니다.  하지만 재즈는 우승권에는 뭔가 부족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콤비와 훌륭한 감독이 있더라도 훌륭한 소스가 될 선수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94시즌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휴스턴에게 패배한 것을 계기로 참다못한 칼 말론이 팀에 좋은 선수를 데려와달라는

 

요구를 했고 이에 재즈 구단에서는 1994년 2월 24일에 동네 백인아저씨(?) 가드를 데려왔습니다.

 

제프말론,1995년 1라운드 지명권을 식서스에게 주고 션 그린과 함께 데려온 이 선수는 얼굴로만 따지면

 

세계에서 가장 농구를 못할것같이 생긴 선수였습니다. 신장도 호리호리하고 보잘것 없어 보이는 선수였지만

 

그 누구보다 승부욕이 강했고 뛰어난 3점슛과 높은 BQ를 가지고 있던 선수, 바로 제프 호나섹이었습니다.

 

90년대 재즈의 빅3중 한명인 호나섹은 훗날 재즈에 영구결번이 되었습니다.(14번)

 

 

 

-지구상에서 가장 농구를 못하게 생긴 제프 호나섹, 그러나 그가 온 뒤 재즈는 막강한 우승후보로 도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를 데려온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호나섹은 그 어려운 슬로언식 수비와 모션 오팬스에 적응해버렸고 외각에서 뛰어난 3점슛으로 팀의 공격에

 

활력을 불어 넣어줬습니다. 

 

호나섹을 영입한뒤 94-95 유타 재즈는 분명히 서부 강호중 한 팀이었고 우승후보에 꼽히기에 손색이 없었던 팀이었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 1차전에서 휴스턴 로켓츠에게 고배를 마십니다.

 

유타 재즈 팬 입장에서는 가장 안타까운 해기도 했습니다. 마이클 조던이 없었고 서부 상위시드를 획득했던 재즈였기에

 

더욱 아쉬움이 컸던 시리즈였습니다. 이후 95-96 시즌에는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시애틀에게 패배의 쓴맛을 봄으로서

 

꿈의 무대에는 진출하지 못했지만 어느덧 유타재즈는 몇년사이에 컨퍼런스 파이널을 2번이나 진출하는등 당당한

 

우승후보로 떠올랐습니다. 

 

96-97 시즌 마침내 재즈의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재즈는 64승을 거둠으로서 서부 컨퍼런스 1위,정규시즌 2위라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며 팀의 중심이었던 칼 말론은

 

정규시즌 MVP가 됩니다. 물이 오른 말론과 더욱 노련해진 존 스탁턴 콤비와 뛰어난 슈터 제프 호나섹, 그리고

 

브라이언 러셀,오스터텍,앤트완 카,하워드 아이즐리,앤더슨,제프 포스터등 그들을 뒷받침한 롤플레이어들까지 갖춰져

 

우승을 향한 여정을 달릴 준비가 끝났습니다. 서부의 강적들을 물리치고 재즈는 서부 챔피언의 왕좌를 두고

 

하킴-드랙슬러-바클리의 빅3가 이끄는 휴스턴 로켓츠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혈전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수차례 재즈의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던 휴스턴이었지만 이번에는 그때와 상황이 틀렸습니다.

 

말론과 스탁턴은 픽앤롤 플레이로 정신없이 휴스턴을 공략했고 막강한 재즈의 조직수비는

 

하킴,바클리,드랙슬러를 괴롭히는데 성공해 결국 3:2까지 리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휴스턴의 저항은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바클리-올라주원-드랙슬러를 중심으로 휴스턴은 반격을 시도했고

 

그 결과 16점차까지 리드하며 7차전까지 가는 분위기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욱 우승에 굶주려 있던 스탁턴은 결국 5분을 남겨놓고 놀라운 활약을 보이며 경기를 뒤집기 시작했습니다.

 

평소에 공격적이지 않았던 스탁턴이었지만 이 경기만큼은 마크 프라이스처럼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했습니다.

 

당황한 휴스턴 선수들이 스탁턴을 막으려 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오히려 스탁턴은 자신에게 몰린 수비를 이용해

 

빈 곳에 날카로운 패스를 찔러줬는데 이때 러셀의 3점이 터지면서 추격의 실마리를 잡았고

 

결국 재즈는 15점차를 줄이는데 성공했습니다. 마지막 공격권을 쥔 재즈, 결국 스탁턴은

 

우승을 향한 바클리의 마지막 꿈을 끊어버리는 빅샷을 바클리 앞에서 꽂아버리고 역전하는데 성공합니다.

 

성공하기 무섭게 스탁턴은 단 한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함박웃음과 날뛰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말론과 호나섹등 동료들은 기뻐하며 스탁턴에게 달려가 안기며 파이널 진출을 자축했습니다.

 

늘 포커페이스로 앉아있던 슬로언 감독 역시 기뻐서 환호성을 지르며 코트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재즈 역사상 최고의 명장면이었던 유타 재즈의 파이널 진출장면, 결국 스탁턴과 말론이 이끈 재즈는 파이널 진출에 성공했습니다.

 

결국 유타재즈는 서부 컨퍼런스의 챔피언이 되었고 파이널에 진출했습니다.

 

스탁턴과 말론은 우승까지 이제 한 걸음만 남았습니다. 한 걸음만...

 

그러나 파이널에서 기다리고 있던건 역대 최강이 팀이었던 시카고 불스와 끝판왕 마이클 조던이었습니다.

 

 

 

-90년대를 지배한 악마, 정말 답이 없었던 역대 최고의 선수였던 마이클 조던이 바로 마지막 벽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만난 팀들보다 더욱 강적이었던 불스는 마이클조던-피펜-로드맨이라는 3인방을 중심으로

 

토니 쿠코치,룩 롱리,론 하퍼,스티브 커등등 쏠쏠한 선수들이 뭉쳐  지옥의 수비농구를 보여주며

 

 상대방을 압살시켰던 최강의 디팬딩 챔피언팀이었습니다.

 

최고의 조직력을 바탕으로 한 유타재즈와 디팬딩 챔피언인 시카고의 97년 파이널 대결은

 

결국 풍부한 파이널 경험과 지구 최고의 병기였던 마이클 조던을 중심으로한 불스의 승리로 결국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칼 말론과 존 스탁턴이 아니었습니다. 97년 파이널의 아픔을 기억하며 그들은 더욱 강해진 모습으로

 

97-98 시즌에 나타났습니다. 결국 또다시 서부 컨퍼런스 챔피언이 되었고 98 파이널에서 불스와 리벤지 매치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유타 재즈가 더욱 유리했습니다. 파이널의 경험을 쌓음으로서 더욱 노련해졌고

 

무엇보다 홈코트 어드벤티지가 재즈에게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치열한 접전끝에 3:2로 불스의 리드로 대망의 6차전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6차전을 지면 재즈는 끝이었습니다.

 

반대로 불스는 이 6차전을 지게 되면 7차전에서 또다시 델타센터에서 경기를 치뤄야했기에 불리했습니다.

 

더군다나 피펜이 부상으로 사실상 쓸모없어진 상황이 되어버렸기에 더욱 어깨가 무거워진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어드벤티지를 잘 활용한 유타재즈는 후반 스탁턴의 3점포를 계기로 승리를 눈앞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믿을수 없는 일이 펼쳐집니다. 조던은 순식간에 득점을 성공시키고 1점차로 좁혀버렸습니다.

 

하지만 남은 시간은 30초도 안남은 상황에 공격권은 재즈에게 있었습니다. 델타 센터의 팬들은 한 마음으로

 

LETS GO GAME 7을 외쳤습니다.

 

그러나 이 남은 순간이 재즈 팬들에게 잊을수없는 장면이 되었습니다.

 

칼말론에게 투입된 공을 조던은 기습적으로 뺏아버리는데 성공하였고 결국 역대 최고의 역전샷을 보여줍니다.

 

 

-가끔 꿈속에서 나오면 놀라서 잠이 달아나버렸던 장면, 유타팬으로서 가장 악몽같은 기억이었습니다.

 

 

결국 마지막 타임아웃을 불고 스탁턴의 3점슛으로 역전을 하려고 한 재즈였으나 결국 실패로 끝나면서 또다시 왕좌의 자리에

 

오르는데 실패하고 맙니다. 이후 스탁턴과 말론의 시대는 끝났고 유타 재즈도 점점 하락세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말론과 스탁턴을 중심으로한 재즈는 이후 꾸준히 플레이오프에 올랐고 우승을 향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신흥강호인 포틀랜드,LA레이커스,댈러스,스퍼스등에게 밀려나 결국 2003년 스탁턴의 은퇴와 함께

 

재즈의 황금시대는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후 말론은 LA레이커스로 이적해 우승을 노렸지만

 

파이널에서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게 가로막혀 우승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은퇴하고 말았습니다.

 

비록 우승하지 못했지만 꾸준히 재즈를 강호로 이끌었고 무수한 업적을 남겼던 두 선수를 재즈는 영구결번했습니다.(12번,32번)

 

 

-비록 우승은 실패했으나 그들은 유타 재즈 역사상 가장 훌륭한 선수들이었습니다. 이들의 플레이를 볼수 있었다는게

 

 재즈팬으로서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2003년 스탁턴의 은퇴를 계기로 황금시대를 끝낸 재즈는 리빌딩에 들어갔습니다.

 

다행히 팀의 중심이 될 선수로 유망주였던 안드레이 키렐렌코가 있었기에 팀의 리빌딩은 비교적 수월해보였습니다.

 

러시아 출신의 키렐렌코는 뛰어난 운동능력과 다재다능함을 지니고 있었는데 특히 수비에 특출함을 보였던 유망주였습니다.

 

 

 

-다재다능하고 특히 블락과 수비에 일가견이 있었던 안드레이 키렐렌코, 그는 스탁턴,말론시대가 끝난 유타의 희망이었습니다.

 

 

하지만 리빌딩되는 팀의 사령탑이 될 포인트가드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라울 로페즈,카를로스 아로요등으로 스탁턴이

 

떠난 자리를 매우려고 애를 썼던 재즈지만 될 턱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재즈는 포인트가드 천운이 따라주는 팀이었습니다. 2005년 드레프트에 향후 10년을 책임질수있는 최고의

 

포인트가드 3인방이 드레프트에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크리스폴,데런윌리엄스,레이먼트 펠튼이 그들이었습니다.

 

결국 트레이드를 통해 재즈는 1라운드 3픽을 얻어왔고 이를 이용해 데런윌리엄스를 지명했고 이를 계기로 재즈는

 

다시 서부 컨퍼런스 강호로 부상할 초석을 다질수 있었습니다.

 

 

-존스탁턴, 칼말론 이후 재즈 최고의 슈퍼스타였던 데런 윌리엄스

 

 

 

처음 팀에 왔을때 데런 윌리엄스는 철저한 원칙주의자인 슬로언과의 마찰로 한동안 벤치를 지킨적도 있는등

 

라이벌 폴에 비해서 두각을 들어내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자신을 중심으로가 아닌 키렐렌코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문제점도 있었죠. 그러나 점점 슬로언 시스템에 적응하면서도 자신의 기량을 늘렸고

 

이후 FA로 클리블랜드에서 영입된 카를로스 부저와 더불어 제2의 스탁턴과 말론이라 극찬받으며 환상적인

 

픽앤롤 콤비를 이루면서 재즈는 다시 서부강호로 떠오를수 있었습니다.

 

 

 

-데런 윌리엄스와 함께 최고의 픽앤롤을 선보였던 파워포워드 카를로스 부저

 

 

2006-2007시즌은 재즈가 리빌딩한 이후 최고의 성적을 보여준 해였습니다. 팀은 당당히 서부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진출하는 저력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팀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데런윌리엄스와 픽앤롤 파트너 카롤로스 부저,골밑을 지키는 쓸만한 빅맨인 오쿠어, 팀의 수비의 핵인

 

안드레이 키렐렌코까지 완벽한 조화를 이룬 해였습니다. 우승의 가능성을 본 해기도 했습니다.

 

댈러스가 1라운드에서 골스한테 떨어졌고 피닉스 선즈가 스퍼스에게 패해 떨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동부 최강호인 디트로이트가 르브론 제임스의 클리블랜드에게 떨어지는 대이변이 벌어지는 바람에

 

파이널만 진출할수 있다면 유타재즈로서는 충분히 우승할 가능성이 있었던 해였습니다.

 

하지만 서부 컨퍼런스의 상대는 2000년대 최강의 팀이었던 수비왕성 샌안토니오 스퍼스였습니다.

 

 

-팀의 중심이자 넘버원 파워포워드였던 팀던컨을 중심으로 에이스로 성장한 지노빌리,파커 빅3가 이끌던 서부 최강의 팀 스퍼스.

 

 

데런 윌리엄스의 유타는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스퍼스의 노련함과 막강한 수비력은 결국 유타재즈의 파이널 진출을

 

가로막고 말았습니다. 정말 아쉬웠던 해였습니다. 스퍼스만 어떻게든 꺾었다면 사실상 클리블랜드한테는 충분히 이길수 있었던

 

재즈였기 때문입니다. 닥돌밖에 없었던 르브론을 가장 잘막는 AK도 있었고 나머지 포지션에서는 압도적으로 재즈가 우위였기

 

때문에 더욱 아쉬웠던 시리즈였습니다.

 

이후 유타재즈는 조금씩 약해지고 삐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작은 잔부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키렐렌코는 원래 잔부상이 꽤 있던 선수였는데 결국 길게 들어눕기 시작했고 메잇 오쿠어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카를로스 부저조차 잔부상으로 신음하는등 주축들이 부상으로 점점 신음하면서 팀의 전력이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치세가 부담스러워짐으로서 팀의 알토란 같은 역할을 해줬던  로니 브루어, 매튜스, 카일 코버등 쏠쏠한 맴버들을

 

떠나보내면서 로스터가 점점 얕아지는등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데런 윌리엄스는 에이스로서 팀을 꾸준히 플레이오프에 이끌었고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2009-2010 시즌에는 거의 혼자의 힘으로 팀을 서부 5위로 이끌었으며 18.7점 10.5어시스트라는 좋은 스텟을 보였으며

 

 멜로가 이끄는 막강 덴버를 주축들이 부상으로 신음하는 팀을 이끌고도 승리하는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주면서

 

폴과 쌍벽을 이루는 넘버원 포인트가드임을 증명했습니다.

 

그러나 그 혼자만으로는 점점 약해지는 팀을 돌릴수는 없었습니다.

 

자존심강한 데런으로서는 점점 팀에 불신과 불만이 가득해져갔고 구단 역시 이를 부담스러워했습니다.

 

결국 2010-2011 시즌도중 슬로언 감독이 데런 윌리엄스와의 불화로 사퇴한것을 계기로 구단은 결국 팀의 알파이자 오메가였던

 

데런 윌리엄스를 뉴저지 네츠로 트레이드하고 맙니다. 2010년 시즌을 끝나고 시카고로 떠난 부저를 시작으로

 

오쿠어도 안드레이 키렐렌코도 모두 팀을 떠남으로서 제2의 황금기를 맞이했던 데런 윌리엄스 시대는 끝나고 말았습니다.

 

더불어서 2010-2011년 초중반기에 잘 나가고 있었던 유타재즈는 순식간에 성적이 바닥을 쳐 결국 플레이오프 진출을

 

실패하고 맙니다.

 

이후 재즈는 초보 감독인 코빈을 사령탑으로 세워 팀을 이끌게 하였고

 

 알 제퍼슨을 중심으로 밀샙,칸터,페이버스등 빅맨 물량을 이용해 플레이오프를 노렸고 결국 2011-2012년에는

 

플레이오프 막차를 타고 진출하는데 성공합니다.

 

 

-부저가 떠난후 그의 공백을 매우려고 데려온 알 제퍼슨, 데런이 떠난후 그는 팀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중간한 플레이오프권의 팀이라는게 문제였습니다. 플옵에서의 승리는

 

별로 상관이 없었고 그냥 생계를 위해 플레이오프에만 나가면 된다는 식의 운영이었습니다.

 

안그래도 생계형 구단이라고 불리는 재즈인데 팬들 입장에서는 더욱 실망스러운 해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어중간한  상황도

 

결국 2012-2013년에는 레이커스에게 밀려 플레이오프 막차조차 타는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더이상 이팀에게는 우리가 떠올리던 재즈의 색깔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유타하면 떠올랐던 픽앤롤도 사라진지 오래였고

 

끈끈한 조직력과 수비력, 유기적인 공격을 이끄는 모션 오팬스도 사라졌습니다. 수십년간 쌓아온 재즈의 컬러는 이렇게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정말 이때 답이 없어보였습니다.

 

 

-기대이상으로 잘 성장해줘서 팀의 활력소가 되어준 최후의 프랜차이져 스타 폴밀샙도 결국 팀을 떠났습니다.

 

 

 

 

2012-2013년 플레이오프 진출을 실패를 계기로 재즈 구단은 리빌딩으로 방향을 확 틀었습니다.

 

알 재퍼슨과 팀의 최후의 프랜차이져 스타였던 밀샙을 떠나보내고 유망주 빅맨인 칸터와 페이버스에게 기회를 주는 방향으로

 

잡았으며 2장의 1라운드 지명권을 이용해 트레이 버크라는 유망주 포인트가드를 데려옴으로서

 

칸터,페이버스,헤이워드,벅스,버크라는 라인을 유망주 라인을 갖추었으며 이들에게 출장시간을 부여해 성장할 기회를

 

주며 탱킹을 하여 황금의 드레프트로 불리는 2014년 드레프트의 TOP3 픽을 노리고 있습니다.

 

스퍼스 출신인 데니스 린지 단장은 확실히 좋은 수완으로 드레프트 픽과 유망주들을 모으고 필요없는 선수들을 정리해줌으로서

 

리빌딩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현재로서는 밝은 미래가 기대되는 상황입니다.

 

 

지금까지 유타재즈의 역사를 간단히 둘러봤습니다.

 

스몰마켓이 살아남는 방법은 확실한 슈퍼스타를 중심으로 롤플레이어들을 적절히 영입해 강팀으로 거듭나는게

 

답이라는걸 잘 알고 실천한 구단이었으며 이는 무관의 명가 재즈를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제가 재즈경기를 처음 접해 멋도 모르고 삼촌따라 응원한건 어린애였던 95년부터였는데...

 

어느덧 1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살면서 많은 친구들도 사겼고 그중에서도 NBA를 좋아하는 농구친구들과도

 

사귀고 있는데 유독 저는 별나게도 인기없고 작은 스몰마켓팀인 유타재즈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그렇고 미국에서도 그렇고 심지어 군대에서도 NBA를 좋아하는 분들께 들은 질문이 꼭 있습니다.

 

 

"대체 왜 유타를 응원하냐?"

 

 

이렇게 질문 던지신 분들은 대부분 빅마켓에 우승도 해보고 흔히 말하는 잘 나가는(?) 팀들을 응원하는 분들입니다.

 

LA레이커스,마이애미 히트,빅3로 한참 잘나갔던 보스턴 셀틱스,로즈의 시카고 불스...

 

이런 팀들에 비하면 화려하지도 않고 작고 보잘것 없는 시장을 가진 팀이 바로 유타 재즈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랫동안 꾸준히 성적을 내주고 역대 최강의 팀이었던 시카고 불스와  맞서서 파이널에서 2번이나

 

대등하게 싸웠던 스탁턴과 말론이 있었던 유타재즈 한 팀만을 18년간 응원한 자신에 대해서 늘 당당합니다.

 

생계형 구단이라고 욕하고 우승 못한다고 저평가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다른 재즈 팬분들도 마찬가질겁니다. 지금이야 비록 다시 리빌딩을 하는 밑바닥 과정을 밟고 있지만

 

언젠가는 우리가 우승할 날이 올꺼라는걸 의심한적이 없습니다. 반드시 그 때가 올겁니다.

 

저는 그날이 왔을때 포럼분들과 함께 정모를 가지면서 우승을 축하하면서 시원한 소주를 마시는 날을 올거라 믿습니다.

 

부족한 필력에 얕은 지식으로 쓴 글이었지만 봐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추가정보-

 

역대 재즈의 홈경기장

 

- 뉴올리언스 뮤니시펄 오디토리엄(1974년~1975년,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
- 로욜라 필드 하우스(1974년~1975년,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
- 루이지애나 슈퍼돔(1975년~1979년,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
- 솔트 팰리스(1979년~1991년, 유타 주 솔트 레이크 시티)
- 에너지솔루션 아레나(1991년~현재, 유타 주 솔트 레이크 시티)

 

역대 영구결번된 Jazz의 인물들

- 1 프랭크 레이든
- 4 애드리안 댄틀리
- 7 피트 마라비치 (사망)
- 9 래리 밀러 (전 구단주, 사망)
-12 존 스탁턴
-14 제프 호나섹
-32 칼 말론
-35 대럴 그리피스
-53 마크 이튼

-1223 제리 슬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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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pistons power | 작성시간 13.09.04 엄청난 글이네요..멀리서온 피닉스팬이지만 정말 재밌게 잘읽었습니다~
  • 작성자데런2AK | 작성시간 15.03.20 공지를 꺼놔서 이런 엄청난 글이 있는지도 몰랐네요 >_<
    업데이트 부탁드려도 될까요 'ㅁ'?
  • 답댓글 작성자Jerry Sloan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3.21 시간 나면 종종 업데이트 하도록 하겠습니다 ㅎㅎ
  • 작성자헤파이스토스 | 작성시간 15.10.29 이제서야 보는데 정말 감동적이네요. 특히 슬로언 감독님 부분에서 최고였어요ㅠ
  • 작성자killer | 작성시간 16.09.08 유타팬이진않지만 감명깊게 잘 읽었어요 좋은글감사합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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