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고인입니다.
얼마전 어떤 책 광고를 통해서
루마니아의 독재자였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에 대한 것을 알게 되었죠.
20여년간 루마니아를 자기 맘대로 주무르면서
경제파탄, 자기우상화, 언론통제 및 국민감시, 권력독점 및 족벌정치 등 막장짓은 다 하는 독재자였죠.
실제로 북한의 김일성과 절친으로, 북한의 주체사상에 감명받아 그것을 제대로 써먹었습니다.
가족들도 막장이라, 부인 엘레나는 말년에 건강이 악화된 남편을 대신해 열심히 일했고
아들 니쿠도 당시 체조본좌인 코마네치에게 찝적대서, 그녀가 미국으로 망명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죠.
하지만 참다못한 국민들에 의해 1989년 12월 루마니아 혁명이 발생하면서 실각하고
도주하다가 잡혀서 즉결재판 후 TV생중계까지 되는 공개처형을 당했습니다.
당시 공개처형할 병사를 모집하는데 수십명이 지원을 해서, 부부가 100여발의 총알세례를 받았죠.
아마도 제가 본 가장 비참한 독재권력자의 최후인것 같습니다.
여러모로 북한과 닮은 점이 많았던 당시의 루마니아였는데...
하지만 지금의 북한은 이제 이정도로는 손 쓰기 힘들 정도로 상태가 안좋죠...
그리고... 북한 말고 우리 가까운 누군가가 오버랩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가 잡혀서 공개처형 된 TV영상입니다. 후반부는 혐오자료가 될 수도 있으니 주의하세요]
아래는 다음 백과에 나온 그의 일대기에 대한 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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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활동
루마니아 왕국 남부 스코르니체슈티에서 부농의 아들(빈민농가 출신이라는 견해도 있음)로 태어난 차우셰스쿠는 11세에 부쿠레슈티로 이주하여 구두 수선공의 견습생이 되었다. 1932년 당시 불법정당이었던 루마니아 공산당에 가입하여 지역 당서기를 역임하는 활약하였으며 위험한 공산주의 선동가로 낙인찍혀 1936년 2년간 투옥되었다. 1939년에는 섬유공장 노동자출신의 엘레나 페트레스쿠를 만났고, 1946년 결혼하였다.
1940년 다시 투옥된 차우셰스쿠는 1943년 티르구지우(Târgu Jiu) 강제수용소로 옮겨져 철도원출신의 공산주의 운동가인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Gheorghe Gheorghiu-Dej,1901년-1965년)와 같은 감방을 쓰게 되어 그의 심복이 되었으며, 그의 죽음이후에는 대통령 신분으로 정권을 차지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 루마니아가 소비에트 연방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되던 시기에 차우셰스쿠는 공산청년연합 서기관을 지냈다(1944년~1945년).
1947년 루마니아 공산당이 정치권력을 차지하여, 1949년 공산주의 국가인 루마니아 인민 공화국이 수립된 이래,차우셰스쿠는 정적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정적제거사실은 정부의 언론통제로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의 스탈린주의 정권하에서 여러 요직을 맡았다. 나중에는 루마니아 공산당에서 서열 2위의 인물이 되었다.
루마니아의 국가원수
1965년 3월 게오르기 우데지의 사망 후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 공산당의 지도자직을 계승하고 1967년에는 국가평의회의 의장이 되어 루마니아 인민 공화국의 국가원수가 되었다. 차우셰스쿠는 집권 초기 소련의 공산권 지배에 당당히 맞서는 독자 노선으로 서방국가들과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바르샤바 조약기구 활동을 사실상 중단시켰으며(형식상 참여했지만), 1968년 바르샤바 조약국들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참여하지 않고 공개 비난하였다.
1974년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의 대통령직을 자신의 직분에 추가하여 루마니아 사회주의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차우셰스쿠는 외교 정책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옛 소비에트 연방 중 어느 한 편에 가담하지 않는 독자 노선을 걸으면서도,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정치 개혁에는 저항하였다. 그는 민중들의 표현의 자유와 언론을 통제하고, 반대 세력을 용납하지 않는 독재정치를 하였다.
1971년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한 차우셰스쿠는 김일성의 주체사상과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에 감명을 받았다. 루마니아로 돌아온 그는 김일성 주석을 민족의 태양으로 우상화하여, 독재체제를 유지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모방하기 시작하였으며, 주체사상에 관한 서적은 루마니아어로 번역되어 보급되었다. 또한 문화대혁명으로 중화인민공화국 사회가 획일화된 모습에도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서방세계에도 접근하여, 1968년 소련을 공개 비난한 그 이듬해인 1969년, 동구권의 공산주의 국가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 닉슨을 초청하여 정상회담을 가지고, 미국과 서유럽 여러 나라의 경제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개인숭배
차우셰스쿠는 스스로 "지도자"(루마니아어: Conducător), "카르파티아 산맥의 천재"(루마니아어: Geniul din Carpaţi)로 일컬으며 자신을 개인숭배 대상으로 발달시켰는데, 이는 자신을 '어버이 수령', '민족의 태양'으로 인식시켜 대중들에게 존경받는 북한 김일성 주석의 독재방식을 모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권력 독점과 족벌 정치
차우셰스쿠는 비밀경찰 고위 관리 이온 미하이 파체파(Ion Mihai Pacepa)가 서방으로 망명한 이후 배반을 두려워하여 부인 엘레나를 비롯한 그의 일가족(3명의 아들과 며느리)은 물론 처가식구들까지 정부 요직에 앉히는 족벌정치를 하였다. 엘레나의 경우 루마니아 공산당에서 서열 2순위(공산당 간부 감독)였으며, 세 명의 아들도 정부요직을 맡았다. 장남 일리에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차남 안드루타는 비밀경찰 총책임자, 삼남 이온은 국가경제기획원부원장, 큰 아들 일리에는 권력후계자로 간주,황태자로 군림했다. 뿐만 아니라, 동생들은 경찰책임자, 국방차관, 당 기관지 편집장, 며느리를 학생 친위대 책임자로 앉히는 등 일가친척 40여명들을 정부와 루마니아 공산당 요직에 임명하는 족벌정치를 벌였다. 차우셰스쿠 자신도 루마니아 인민 공화국 대통령, 루마니아 공산당 서기장, 국가평의회 의장, 국군통수권자, 국방위원회 위원장, 공산당 이념위원회 위원장, 공산주의통일전선 위원장, 경제사회개발최고회의 의장을 역임할정도로 권력을 한손에 쥐고 있었다.
공포 정치
차우셰스쿠의 정치는 공포정치로, 도청을 통한 불만세력 색출을 통해 인민들을 통제하였다. 2000만 인구에 삼백만개의 도청기와 천여 개의 도청센터가 설치될 정도로 빈틈없는 감시때문에, 차우셰스쿠 치하의 루마니아 민중들은 집안에서도 자유롭게 말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어린이들의 동심(童心)을 국민감시에 악용하기까지 했는데, 초등학교 수업시간에 학부모가 한 이야기를 토론수업을 빙자하여 수집하기까지 하였다. 물론 수집된 이야기중에서 차우셰스쿠 정권에 대한 불평이나 불만이 담긴 내용은 상부에 보고되었으니 상당히 교묘한 감시방법이었다. 또한 세쿠리타테라고 불리는 친위조직을 두고 있었다. 세쿠리타테는 차우셰스쿠의 충복(忠僕)인데, 차우셰스쿠는 고아출신인 세쿠리타테 요원들을 어려서부터 훈련시켜 자신의 친위조직으로 만들었다. 세쿠리타테 요원들은 암살, 정보수집등의 임무를 맡고 있어서 차우셰스쿠의 독재정권이 유지되게 한 밑바탕 중 하나였으며 정규군 장성들 못지않은 권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세쿠리타테는 크게 비밀경찰과 보안군으로 구분되었으며, 이들중 비밀경찰은 첩보와 테러를 담당했다.
국가 부채
풍족한 농업국가였던 루마니아는 차우셰스쿠의 무리한 공업화로 인해서 경제가 파멸하여 1980년대에는 무려 111억 달러의 부채를 지게 되었다. 차우셰스쿠는 엄청나게 불어난 부채를 해결하기 위하여 농산물과 공산물을 대량으로 수출하도록 지시했으며, 수입을 규제하였다. 그리하여 차우셰스쿠 정권이 무너지기 얼마 전인 1989년 여름에 부채는 깨끗이 갚을 수 있었으나, 국내에서는 생필품이 부족하게 되어 식량은 배급되어야 했고 난방과 가스, 전기 공급이 수시로 중단되었으며,1980년에서 1989년 사이 인민들의 생활수준이 꾸준히 하락하였다.
1989년 차우셰스쿠는 자신의 경제정책 실패로 경제가 파탄난 현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였다. 국영 방송은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기보다는 차우셰스쿠가 식품으로 꽉 찬 가게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의 통치 아래 높아진 생활 수준을 찬양하는 내용을 보도하는 체제선전 보도를 하였으나, 식품가게의 진열장은 텅텅 비고 사람들은 식량 배급을 받기 위해 줄을 서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하지만 농산물 대량수출과 수입규제로 굶주리는 인민들의 삶과는 달리 차우셰스쿠는 일명 차우셰스쿠궁이라고 불리는 카펫은 1천5백장이나 된다는 화려한 건물을 세우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차우셰스쿠의 몰락
차우셰스쿠 정권은 1989년 12월 티미쇼아라와 부쿠레슈티에서 벌어진 일련의 유혈 사태를 거쳐 몰락했다. 티미쇼아라에서 차우셰스쿠 정권의 인권탄압과 소수민족차별에 반대, 민주화운동을 지도하던 개혁교회(Reformed Church)즉, 장로교회 목사인 라슬로 퇴케시(László Tőkés)목사를 체포한 사건에 대항해 1989년 12월 17일 헝가리 개신교 신자들이 시작한 시위는 루마니아 학생들이 시위에 가담하면서 더 포괄적인 반(反)정부 시위로 변했다. 당시 차우셰스쿠 정권은 군대가 시위대에 발포, 많은 사상자를 낸 국가폭력으로 인민들의 인권을 짓밞았다. 이란을 방문 중이던 차우셰스쿠는 급히 귀국하였다.
인민에 대한 철저하고 교묘한 감시로 인해 혁명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 차우셰스쿠는 티미쇼아라 사태가 외부 세력에 의해 주도되었다며 12월 21일 부쿠레슈티의 대학 광장(현 혁명 광장)에서 그를 지지하는 대회를 계획했다. 그러나 이른바 차우셰스쿠 지지 대회에 모인 군중들이 강력한 독재정치에 억눌려있던 불만이 폭발, 차우셰스쿠에게 야유와 욕설을 보내는 모습이 전국에 생중계되었으며, 차우셰스쿠 내외는 결국 중앙위원회 건물로 대피하였다. 광장에서는 군중들이 군경과 충돌, 수백 명이 체포되었다.
루마니아 민주화 시위는 루마니아 전역으로 번졌다. 극도의 혼란 속에 이튿날인 12월 22일, 정부군이 루마니아 인민들의 민주화시위에 가담하여 구국전선을 결성하였다. 구국전선은 방송국과 수도의 대부분을 장악했으며, 차우셰스쿠 친위대인 보안군과 시가전을 벌였다. 경찰과 세쿠리타테, 보안군은 시위대에 굴복, 중앙위원회 건물의 보호를 포기했다. 차우셰스쿠 부부는 건물 옥상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부쿠레슈티를 탈출하여 성난 군중을 일단 피했다. 당시 이들부부는 북한으로 도피할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농부의 밀고에 따라 12월 23일 경찰에 붙잡혔으며 군에 넘겨졌다. 그들은 12월 25일 구국전선의 군사 법정에서 사실상의 인민재판을 통해 반역과 살인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그날 17시 30분 터르고비슈테(Târgovişte)에서 총살되었는데, 총살형 집행자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은 수십명의 사병들이 총살형 집행을 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차우셰스쿠 부부는 무려 160여 발 총탄 세례를 받고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 차우셰스쿠 부부의 시신은 함께 묻히는 것도 허락되지 않아서 50m쯤 떨어진 각자의 무덤에 매장되었다. 또한 큰 아들 니쿠 차우셰스쿠도 공산체제 붕괴후 병으로 죽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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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K.J. 작성시간 10.04.14 [쥐] 때문에 머리아파 죽을 지경인데 20년 전에는 이런 놈도 있었군요. 이놈은 이름도 일일이 쓰기 아까운 놈입니다. 저는 이놈을 앞으로 [개]라고 부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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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K.J. 작성시간 10.04.14 아, 이건 좀 번외의 얘긴데요. 아들녀석 말이죠. 우리나라로 치면 [쥐]의 아들이 연아신을 건드린 격이네요. 참 아버지부터 자식까지 말종이네요. 루마니아 국민들의 기분이 어떠셨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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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고난과성장은비례 작성시간 10.04.14 가장 비참한 최후를 mb가 깼으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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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D@UaNvCiAdN 작성시간 10.04.14 비참함으로는 무솔리니가 최고 아닐까요, 애인과 함께 별다른 재판도 없이 교수형 당하고 시체가 길거리에 방치되었으니 말입니다, 그 광경에 히틀러가 쇼크 먹고 나중에 자살 후 꼭 자신의 시체를 태우라고 신신당부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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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황윤환 작성시간 10.04.14 "안녕하세요 고인입니다."에서 빵 터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