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던가
친하지는 않았지만 자주보던 사람이 눈에 띄지 않으면 신경이 쓰이기 마련이다.
요즘 습관처럼 거의 매일 가게되는 집근처 공원이 있다.
난 조용하고 한적한 이 공원을 매우 좋아한다.
햇살 따뜻한 시간에 광합성 섭취도 하고
아메리카노 한잔과 두어시간 독서하는 시간이 하루 일과중 내가 제일 아끼는 시간이다.
주말을 제외하면 평일엔 아주 한적하고 조용한 공원이다.
한쪽 정자마루 그늘 아래서 어르신 서너분들이 모여 장기를 두신다.
가끔 공원옆에 자리잡은 유치원 꼬맹이들이 공원 잔디밭에서 체육수업을 구경하는건 덤으로 재밌다.
꼬맹이들의 세상 걱정없는 까르르 웃음 소리는 듣기만 해도 힐링이 되는거 같다.
요즘엔 '잔디 보호구역 출입금지'라는 한심한 행정은 없는가 보다.
이 공원에 내가 지정석인 마냥 늘 앉는 자리가 있다.
공원을 관리하시는 아주머니를 공원 초입에서 만나면 내 자리가 비였는지 아닌지 알려주실 때도 있다.
작년 어느때 부터인지 기억은 잘 안나지만 늘 공원에서 뵈었던 할머니가 계신다.
휠체어를 지팡이 삼아 걷기 운동을 하시는 모양이다.
뒤에서 일정 간격을 두고 따라다니는 아주머니가 따님인줄 알았는데 후에 알고보니 요양보호사였다.
모녀지간으로 오해 할 만큼 항상 다정한 모습이었다.
난 낯선 어르신들과의 대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젊은 사람들과 달리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항상 비슷한 패턴의 대화로 시작된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이 질문으로 시작된다.
장애를 얻은지 11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장소 불문하고 수십번 이상을 설명해야 했던거 같다.
측은지심에 좋은 마음으로 묻는다는 건 물론 나도 잘 안다.
하지만 교통사고 당시를 다시 회상해야 하는건 고역이다.
이제는 좀 덤덤해졌다고 쿨한척하지만 아마도 살아있는 동안에 쿨해지기는 힘들거 같다.
치과부터 방광검사 이것저것 몰아서 검사를 받느라 한 일주일만에 공원에 나가 늘 그렇듯 내 지정석(?)에 자리를 잡았다.
얼마지나지 않아 이 할머니께서 휠체어를 미시며 내 앞에 서셨다.
내 활동보조인 아저씨께 말을 거시는건지 나에게 말을 거신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왜 한동안 공원에 안나왔냐고 물으신다.
다행히 활동보조 아저씨께서 대답을 하신다.
활동보조 아저씨와는 몇번 대화를 나누어 보신듯 하다.
이미 내가 어떻게 다쳐 전신마비 장애인이 되었는지 활보 아저씨께서 설명하신거 같다.
그런데 갑자기 할머니께서 "에고 ~ 우짜노....우짜노...저리 총기있게 잘난 사람을....우짜노...." 하시며 눈물을 보이신다.
내 큰고모님을 보는 느낌이다.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만날때마다 똑같은 레퍼토리로 눈물을 흘리신다.
"괜찮습니다." 하며 애써 미소를 보내 드리는 길 밖에 없다.
옆에서 활보 아저씨도 거들며 할머니를 진정 시킨다.
할머니의 요양보호사가 "어머니 한바퀴만 더 돌고 들어갑시다." 하며 모셔갔다.
그 후로는 뵐때마다 가볍게 인사만 나누었다.
4월말경 어느날 할머니께서 내 자리로 오시더니 요양보호사 아주머니께서 휠체어에서 비닐에 덮인 접시를 내미신다.
"이것 좀 자셔봐. 늙은이가 해서 맛은 없을진데 그래도 한번 자셔봐"
요양보호사 아주머니께서 공원 앞 샛강둑에서 뜯은 쑥으로 만든 '쑥개떡과 쑥버무리'였다.
사실 난 쑥개떡과 쑥버무리를 안먹어 봐서 맛을 잘 모른다.
맛이야 알던 모르던 암튼 고향의 맛 아니던가?
쑥 향이 그윽한게 맛있었다.
난 한약 냄새같은 숙향도 좋아한다.
어머니께도 조금 남겨다 드렸더니 맛있게 잘 만드셨단다.
다음날 어머니께서 할머니 드리라고 만두를 싸주셨다.
만두를 드리니 한층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원치 않은 결과였다.)
할머니께서 걷기 운동을 멈추시고 활동보조 아저씨 옆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본격 자식 자랑을 시작하신다.
큰아들은 대학교수이고 작은아들은 미국에서 크게 사업을 하고 있고
큰딸은....작은딸은....큰손주는....작은손주는....며느리는......
"어머니 한바퀴만 더 돌고 오늘은 들어가요"
요양보호사 아주머니께서 모셔 가신다.
할머니는 19평 임대아파트에 혼자 사신다고 한다.
'자식자랑은 외로움의 또 다른 표현이다.' 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이 난다.
며칠째 할머니가 안보이신다.
할머니 근황을 어디에도 물어 볼 수가 없다.
신경이 쓰인다.
조금 귀찮게 하셔도 좋으니 전과 같은 모습으로라도 다시 뵈었으면 좋겠다.
다시 뵙게되면 살갑게 인사를 드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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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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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Hope 작성시간 15.06.02 따뜻한 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
작성자Alonzo33 작성시간 15.06.02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글이네요.
잘 봤습니다..^^ -
작성자lylacstudio 작성시간 15.06.02 늘해랑님이 바라보는 시선이 정말 따뜻하고 좋아요. 가끔 소소한 얘기 올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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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NO.1ACE 작성시간 15.06.03 시크하면서 따뜻한 느낌이 나는 글이네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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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준쌤 작성시간 15.06.03 글 참 잘 쓰시네요~~ 저도 글 잘 쓰고 싶은데..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