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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부산행이 단순한 좀비영화가 아닌 이유 (정치적분석, 스포있음) 이거보고 영화생각하면 달라보이네요 ㄷㄷㄷㄷ

작성자이미지|작성시간16.07.29|조회수3,027 목록 댓글 14

출저는 네이버 영화 리뷰입니다.

http://movie.naver.com/movie/board/review/read.nhn?page=1&st=userid&sword=jhong4918&nid=4322296



    포스터는 많은 걸 감춘다


1.카메라의 시선


-부산행은 지극히 정치적인 영화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영화가 정치적인 이유는 카메라가 관객에게 보여주는 모든 시선이 권력자의 시각이기 때문이다. 물론 감독이 계산한 의도된 시각이다. 좀비가 처음으로 등장하기 직전, KTX 미니모니터에 방송되는 뉴스는 '대규모 폭력시위'가 발발했다고 보도한다. 공유의 직장후배도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집단 시위가 일어났다고 알려준다. 그 직후에 첫 좀비가 영화에 등장한다. 우연일까. 정부는 전국에서 대규모 집단 폭력시위가 발생하고 있다고 발표하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건 좀비에 의한 혼란이다. 정부가 일부러 사태를 왜곡해 발표했을까? 그렇지 않다. 정부가 발표한 내용은 사실이다. 즉 대규모 폭력시위는 실제로 일어났고, 영화에서 카메라가 비추는 좀비들은 시위대를 바라보는 권력자의 시선이다. 폭력시위가 번지고 있어 군대를 통해 이를 제압해야만 한다고 국민에게 폭력의 정당성을 호소한다. 결국 정부의 입장에서 폭력 시위는 곧 좀비들의 난동이다. 폭력 시위를 하는 사람들을 좀비로 간주하는 정부의 시각이 극 처음부터 끝까지 카메라를 통해 드러난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왜곡된 권력자의 시선이며, 따라서 우리는 좀비를 폭력시위대로 간주하고 영화를 정치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카메라의 시선은 곧 권력자의 시각이다


2.시위대와 좀비, 어떻게 같을까


-좀비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영화의 성격은 완전히 달라진다. 좀비를 바이오회사에 의해 감염된 돌연변이 개체로 본다면 영화는 아주 흥미로운 좀비영화가 된다. 반면 좀비를 정부가 인식하는 폭력시위대와 일치시킨다면 영화는 아주 정치적으로 변한다. 정치적으로 해석한 내 입장에서, 바이오 회사를 들먹인 것은 감독이 설치한 하나의 맥거핀(영화적 속임수)에 불과해 보인다. 이 글에서는 좀비를 정치적으로 바라보도록 하자.


영화에서 좀비는 누구를 어떻게 감염시키는가. 좀비는 대상을 특정하지 않는다. 무차별적으로 주위에 있는 '정상인'을 깨문다. 정상인을 깨물어 같은 좀비로 감염시키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은 없어 보인다. 이미 감염된 개체들끼리는 깨물지 않는다. 좀비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 이들은 기차가 컴컴한 터널에 들어가 앞이 보이지 않으면 공격 대상을 찾을 수 없다. 단지 작은 불빛이나 시끄러운 소리에 반응해 맹목적으로 달려들 뿐이다. 영화에서 설정된 이러한 좀비들의 특성에서 시위대를 바라보는 정부의 아니꼬운 시각을 엿볼 수 있다. 다음은 위 사실을 바라본 권력자의 입장이다.


시위대는 무차별적으로 정상적인 시민을 선동한다. 시민이 정세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리고 있는 지는 중요하지 않다. 시위대에게 중요한 것은 시민들을 선동해 '같은 편'으로 만드는 것일 뿐이다. 같은 편이 되어 정부를 비판하면서 그들은 동질감을 느낀다. 같은 대상을 공격하고, 서로는 공격하지 않는다. 이 같은 선동과 현혹을 그들은 '연대'라고 포장한다. 이 과정에서 시위의 진정한 목적은 사라지고, 정부비판이라는 맹목적이고 허상뿐인 목표만 남는다. 지극히 정치적으로 변질된 이들을 다룰 수 있는 방법이 없진 않다. 시위대의 눈을 가리고, 귀를 혼란스럽게 만들면 된다. 정치에 대한 이들의 관심을 정치 환멸로 치환시켜야 한다. 지속적으로 고위층의 부도덕한 행동을 언론을 통해 퍼뜨려 정치를 바라보는 시선에 피로감을 주어야 한다. 또한 그들의 귀를 홀려야 한다. 연예인 스캔들과 국가적 스포츠행사는 그 중요한 수단이다. 뉴스 정치란 대신 연예란을 누르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리고 정치인 대신 국가를 대표한 스포츠선수들을 응원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시위대가 선동하기는 어려워지고, 정부가 시민을 다루기는 쉬워진다. '시민'이라는 고급진 단어를 썼지만, 사실 그들은 다루기 쉬운 우매한 개돼지들일 뿐이다.


터널 속 어둠에서 좀비들을 현혹시켰던 마동석 휴대폰의 벨소리가 무엇이었던가?


     감독에게 좀비는, 다만 수단일 뿐이다



3.낙인과 분열, 세 장면


     3-1  감염되는 낙인

-눈여겨봤던 장면들이 세 가지 정도 있다. 첫째는 마동석이 좀비들에 손을 물리고 스스로를 내던지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씬이다. 마동석은 맨주먹으로 수십 명의 좀비와 맞설 만큼 큰 힘을 가졌다. 관객은 그의 주먹에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런 그가 겨우 좁은 문에서 달려드는 좀비를 못 막아 죽을 수밖에 없었을까? 아내와 아내 뱃속의 아이를 뒤에 두고도? 마동석은 좀비에게 물리는 순간 알았던 게다. 자신이 아무리 앞에 있는 좀비를 다 해치우고 15호칸으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자신의 손에 찍힌 물린 상처가 모든 사람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자신이 직접 그들을 해치게 될 지도 모르고, 설령 자신이 감염되지 않는 항체를 지녔다 할지라도 15호칸 사람들에게 배재되고 차별받아 다시 위험에 내몰릴 수도 있다. 이까지를 마동석은 파악했던 게다. 그래서 그는 공유와 정유미를 안전한 곳에 보내고 스스로를 미끼로 내던진다. 공유가 마지막 열차에서 스스로 몸을 던진 것도 같은 이유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결국, 물린 이들은 결코 물리지 않은 상태, 즉 정상이었던 상태로 되돌아 갈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를 배제시키고 격리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다. 그러지 않으면 내 주위의 모든 이들을 위험에 빠뜨릴 테니까.


정부는 극렬한 정치 시위꾼들에게 이름을 부여한다. 종북, 빨갱이, 선동꾼 등이 매우 효과적이다. 이는 개인에 대한 낙인으로 작용한다. 개인에 대한 낙인은 좀비가 정상인을 감염시키듯 자신이 속한 집단 모두에게 전염된다. 빨갱이가 속한 집단은 빨갱이 집단, 종북인사가 속한 단체는 종북단체가 되어버리는 식이다. 그래서 권력으로부터 낙인찍힌 개인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스스로를 배제시키고 격리시켜 집단을 구할 것일가? 아니면 스스로 당당하다고 주장해 집단을 위험에 빠뜨릴 것인가? 우연히도, 우리 사회에는 이 선택들에 대한 대표적인 결과들이 존재한다. 전자를 선택했을 때, 결과는 2009년 5월 23일에 드러났다. 후자를 선택했을 때는, 2014년 12월 19일에 그 결과가 드러났다. 한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너무나 유명한 이틀인지라, 굳이 어떤 사건인지를 따로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마동석은 어째서 그렇게 갑자기 무력해졌나


     3-2  이이제이

둘째는 최우식(야구부원)이 좀비가 되어버린 친구를 만나는 씬이다. 그는 좀비가 되어버린 친구들을 차마 때릴 수 없다. 좀비이기 전에 친구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달려드는 좀비들에 의해 공유와 마동석이 위험에 빠지자 그는 어쩔 수 없이 배트를 휘두른다. 같은 야구부 져지를 입은 친구에게 그는 배트를 휘두를 수밖에 없다. 왜? 살아남기 위해서다. 정상인이 정상인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같은 옷을 입었다 할지라도 비정상이라면 그에게 폭력을 행해야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앞에 존재하는 '비정상'을 '좀비가 된 친구'가 아니라 '친구였던 좀비'로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스스로 정상임을 증명하기 위해 비정장과의 경계를 치고 그들을 경계 바깥으로 배제해야한다. 그 방법이 폭력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시위대를 무너뜨리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그들 스스로 갈라서게 하는 것이다. 시위대 안에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뒤섞여있다. 따라서 그들 중 대립될 수 있는 두 관점으로 그들을 분열시킨다면, 한 목소리를 내야하는 그들은 무력화될 것이다. 적을 통해 적을 잡는, 이른바 이이제이의 방식이다. 예컨대 남성과 여성, 보수와 진보, 저소득층과 고소득층, 영남과 호남, 청년과 노년 등으로 편을 가르면, 그들은 스스로 누구의 편도 되지 못하고 또 누구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하는 상황에 빠질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일베와 메갈, 무상급식과 선별적 복지, 담뱃값인상과 법인세인상, 교과서 국정화와 검정화, 세월호진상조사와 특혜논란 등 분열되어버린 논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갈라섰는지를 생각해본다면 이는 어렵지 않게 이해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실제 영화 속 15호칸에서 벌어지는 일은 영화 전체를 꿰뚫는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기업 상무라는 사람은 권력의 하수인으로서 열차 속 사람들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갈라놓는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모호하다. 상처가 없어도, 사람들을 구해왔어도 아래 칸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비정상이다. 비정상은 곧 악이다. 스스로를 정상으로 규정지은 15호칸 사람들은 아래 칸에서 올라온 비정상들을 내쫓는다.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내부적으로 분열된 것이다. 그래서, 정상으로 스스로 규정짓고 비정상을 쫓아낸 15호칸 사람들의 최후는 어땠는가? 감독이 시사하고자 하는 바는 여기서 드러난다.


  15호칸은, 영화가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고스란히 담고 달린다



     3-3  멸치대가리

셋째는 마지막 열차를 탄 공유가 뒤쪽으로 미친 듯이 달라붙는 좀비들을 떼어내는 장면이다. 부산으로 향하는 마지막 열차를 본 좀비들은 또다시 맹목적으로 달려든다. 부산으로 같이 가고 싶어서인지, 공유를 포함한 정상인들을 깨물고 싶어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의 추격은 무식하고 멍청해서 두렵기까지 하다. 선두에 선 좀비가 열차 난간을 붙잡고 뒤쪽 좀비들은 앞 좀비의 다리를 붙잡는 식으로 열차를 물고 늘어진다. 작은 열차 한 칸의 난간에 무시무시하게 많은 수의 좀비들이 매달려 끌려가는 장면은 징그럽고 기괴하다. 혹여 좀비가 더 달라붙으면 안 그래도 느린 열차가 멈추지나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하다. 이런 좀비를 떼어내는 방법은 사실 굉장히 간단하다. 공유는 열차 난간을 붙잡고 있는 선두 좀비의 손을 내리밟는다. 발길질에 좀비는 결국 난간에서 손을 떼게 되고 뒤따라 붙었던 모든 좀비들과 함께 선로로 내동댕이쳐진다. 선두에 있던 좀비만 해치우면 뒤에 있는 맹목적이고 멍청한 좀비들은 저절로 나가떨어진다.


시위꾼들을 보다 효과적이고 직접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앞장서 시위를 선동하는 선동꾼만 친다면, 그 아래 무분별하게 모여든 우매한 군중들은 자연스럽게 해산될 것이다. 그들이 내는 목소리 또한 선로에 내동댕이쳐질 것이다. 항상 대규모의 사람들이 모인 시위현장에는 그 시위를 선동하는 지도자가 있다. 지도자의 말과 행동은 종교와 같아서 그들의 선동대로 군중은 맹목적으로 뒤따른다. 그래서 지도자의 무력함과 부도덕함을 보여주는 것은 지도자를 따르는 군중을 해산시키는 데 있어 가장 직접적이고 치명적인 타격이 된다.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에게 5년형을 선고해 집어넣으면 그를 따르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자연히 잦아들 것이다. 서민 대통령을 자처했던 전직 대통령이 뇌물을 먹었다면? 그를 지지했던 모든 국민들은 자신이 서 있는 자리 자체에 환멸을 느낄 것이다. 선동하는 리더를 잃은 무지한 군중들은 다소 다루기 쉬워진다. 공유가 수완의 생일 전날에 집으로 들어오던 장면에서, 어머니는 멸치 대가리를 따고 있었다. 멸치에서 냄새가 나는 건 대가리 때문이다. 대가리만 똑 떼어내면 아무리 냄새나던 멸치라도 그럭저럭 먹을 만해진다.

   영화 장면 곳곳에 정치적 메시지가 숨어있다



4.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로하오에


-이처럼 영화는 권력자의 시각에서 시위대를 좀비로 상정해 철저히 부정적으로 그려낸다. 좀비는 사악하고 악한 존재들이고, 이들을 소탕하고 진압하는 권력자의 행위는 정당한 선으로 취급된다. 좀비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아니기에 죽어 마땅하며, 그래서 죽여 마땅하기도 하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카메라가 차용하는 권력자의 시선은 현시대 권력의 잔혹함과 비인간성에 대한 기가 막힌 반어법이다. 그리고 그 반어는 오히려 인간의 '존재성'과 민중의 연대에 대한 긍정으로 드러난다.


마지막 장면에서 수완과 정유미는 어두운 터널로 들어선다. 밝음과 어두움의 경계에 서 있는 그 때에 군인의 소총 조준선이 그들을 겨눈다. 경계에 서 있기 때문에 감염 여부를 판단할 수가 없다.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다는 말이다. 병사는 상부에 상황을 보고하고 지시를 기다린다. 상부는 사살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병사는 즉시 방아쇠를 당길 수 없다. 만약 감염되지 않았다면? 혹시나 하는 갈등이 병사의 뇌리를 스쳤을 것이다. 방아쇠를 당기려는 병사의 클로즈업된 검지가 애처롭게 떨린다. 조준선은 흔들린다. 당연하다. 정상적인 인간이든, 감염된 좀비든 간에 그 경계에 위치한 '존재'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정부의 지시를 받아 방아쇠에 검지를 올린 병사도 하나의 존재다. 존재가 존재를 총알 한 방으로 무너뜨리기란 결코 쉽지 않다. 방아쇠를 당기려던 그 순간 수완의 노랫소리가 어두운 터널을 뚫고 군인들에게 가 닿는다. '알로하오에'라는 노래다. 수완이 극 초반에 아버지에게 불러주고 싶었던 노래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아쉬움을 담은 하와이 민요다. 노래를 들은 군인들은 즉시 생존자라고 판단하고 어둠 속으로 뛰어든다. 어둠이 짙어지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다음은 결말에 대한 정치적 해석이다.


지옥 같았던 부산행 101열차. 그 열차에서 끝내 두 명만이 살아남았다. 정유미와 수완. 그 열차에서 누구보다 약하고 어렸던 임산부 정유미와 어린여아 수완만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아무리 짓밟히고 고통 받아도, 결국 희망은 가장 아래에서 희미하게나마 소리 내는 민중들에게 있다는 사실. 감독은 이런 것을 전하고 싶지 않았을까. 수완이 부르는 노래는 좀비와 인간이 사실은 같은 근원적 존재라는 점을 일깨워 주는 수단이다. "검은 구름 하늘을 가리고 이별의 날은 왔도다 / 다시 만날 날 기대하고 서로 작별하고 떠나가리 / 알로하오에 알로하오에 꽃피는 시절에 다시 만나리 / 알로하오에 알로하오에 다시 만날 날까지" 단순히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노래로 극을 끝내기에는 지나치게 신파적이다. 정치적 의미에서 해석해보자면 이 노래는 권력에 의해 분열된 민중을 슬퍼하는 노래다. 동시에 단결시키는 노래다. 스스로 어두움과 밝음의 경계에 서 있으면서 수완은 건너편의 군인들이게 노래를 띄운다. 자신이 그 곳에 '존재'한다고. '인간'일 수도, '좀비'일 수도 있지만 노래를 들은 군인은 즉시 어둠 속으로 뛰어든다. 카메라는 극이 시작할 때부터 줄곧 권력자의 시선을 통해 좀비를 악으로, 인간을 선으로 그려낸다. 하지만 과연 정말 그럴까. 수완의 노래에 군인은 권력에 대한 기계적 복종과 존재가 지닌 인간성 사이에서 고민한다. 군인은 후자를 택하고 터널로 뛰어든다. 이로써 공고했던 카메라의 시선 자체가 수완의 멜로디에 와르르 무너진다. 무너진 카메라의 시선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고 극은 마무리 된다. 어두움과 밝음, 좀비와 인간의 사이에 서 있던 수완의 노래로 인해서.


   그럼에도, 영화는 희망을 말한다. 가장 약한 이의 입을 빌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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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엑소더스 | 작성시간 16.07.29 월드워 z 한국버전(평택기지부터 한국에 퍼지는 과정)을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생각을
  • 답댓글 작성자이미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7.29 담달에 개봉하는 서울역에서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온다더군요
  • 작성자니케 | 작성시간 16.07.29 영화는 영화로.. 설령 이게 그런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해도 더 나은 영화가 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 작성자원싱이 | 작성시간 16.07.29 이런 해석도 재미있네요 ㅎㅎ
  • 작성자Golalg | 작성시간 16.07.30 저만 공감안가는게 아니었군요.. 곡성 해석 볼때는 와와 감탄하면서 봤는데.. 이 해석을 볼때는 전혀 공감이..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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