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좌파가 되었는가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결국 주위의 환경이 그렇게 만든게 아닌가 합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겪은 모든 일들을 짚는건 저 조차도 불가능한 일이고, 주요한 몇몇가지를 이야기 해보자면.
나의 선배라는 사람들이 좌파였습니다. 대학 생활을 처음 시작하고, 정치적인 견해라던지 사건에 대해 무지하던 시기에 저를 이끌어 주던 사람들이 싹 다 좌파였습니다. 제가 다니던 대학, 학과는 소위 운동권 성향이 매우 강했던 곳이다보니 그럴 수 밖에 없기도 했습니다. 되게 무거운 이야기인거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무겁진 않습니다. 예를들자면 이런겁니다, 저랑 제법 친하고 잘 챙겨주는데 예쁘기까지 하던 과대 누나가 어느날 와서 말을 겁니다. "너 뭐해? 누나랑 재미있는데 놀러가자" 해서 두 손 잡혀 끌려나가보면(!) 거기는 시위현장이였습니다ㅋ "오늘 금요일인데 수업 끝나고 한잔 해야지? 마치면 어디로 와" 해서 나가보면 운동권 집행부들이 잔뜩 모여있는 술자리였습니다. 보통 운동권들은 학교 주변에 상주하기 때문에, 할일 없고 심심한 날에 저랑 놀아주고 같이 술마셔주는것도 주로 그런 선배들이였습니다. 아마 저처럼 운동권을 체험하고 겪은 분들, 많을껄요?ㅋㅋ
반면에 제게 우파를 체험시켜주는 분들은 주로 저희 부모님, 그 세대의 삼촌들, 어른들이였죠. 경상도 지역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대화가 원할하지 않다는건 특별히 새로운 사실은 아닐껍니다. 아버지와 제 윗세대들은 저희를 무시하고 찍어눌렀죠. 니들이 뭘 아냐, 살아보면 알게 된다, 그냥 원래 그런거다 같은 꼰대질 난사로 누군가를 설득한다는건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우리 선배들은 달랐죠. 저의 눈높이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눈을 설명해줬고, 정치가 왜 중요한지, 어째서 보수가 나쁜지에 대해서 차근차근히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동등한 입장에서 설득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우파가 되는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였을 겁니다. 그렇게 저는 좌파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후 살면서 많은 일을 겪으며 조금 변화하기도 했지만, 일단은 제 정치적 베이스는 좌파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뭔 니 정치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하냐고요, 제 이 정치적 첫경험을 드라마틱하게 구성하면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되는 것 같거든요ㅋ
영화는 윌라가 자유주의 단체의 활동에 참여하는것으로 마무리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앞선 2시간 30분 간은 윌라가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보여주겠죠. 특히 제목과 연관해서 윌라의 앞에 펼쳐진 삶의 시작을 "원 배틀"로 받아들이고 지난 세대로 부터 물려받은 경험을 "애프터 어나더"로 생각하면 더더욱 그런 의미의 영화라고 해석됩니다.
영화는 표면적으로 보자면 기계적 중립처럼 좌파, 우파를 모두 신랄하게 까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급진적인 자유주의자 인척 하는 퍼피디아는 사실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입니다. 자유주의자라는 간판은 자신의 쾌락을 위한 가면에 불과하고 자기를 위해서는 자식도 버리고 동료도 버리고, 애초에 없었던 신념은 한푼의 값어치도 없는 사람입니다. 자유롭고 정의로운 정치사상가의 안티테제 같은 인물이죠.
반면에 록조는 어떻습니까. 겉으로는 남성적이고, 사회의 질서와 안녕을 수호하는 군인이기도 하고, 인종차별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하고, 자신의 사회적 안정과 성공을 추구하는 인물인것 같죠. 하지만 한꺼풀 벗겨보면 지배받는데서 지극한 쾌락을 얻는 변태성욕자이자 그 욕정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모든걸 집어던지는 천박한 인간입니다. 거기에다가 여기는 한 수 위인게, 자신의 사회적 성공을 위해 자신의 친딸을 살해하려고 하는 인면수심의 짐승에 불과합니다. 여기는 강인한 보수주의자의 안티테제 같은 인물이 되겠습니다.
팻 역시 취급이 좋지만은 않습니다. 자신이 책임져야할 자식이 생기자 신념을 접어둔 인물 같아 보입니다. 윌라의 학교에서 기득권들의 약점을 비웃는 장면을 보면, 그래도 정신은 살아있나? 싶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식을 위해 신념을 접었다는 인간이 약과 술에 쩔어서 히피 같은 비루한 삶을 연명하면서 옛날 영화나 뒤적거리고 있는게 실제 팻의 삶이죠. 영화내내 보여주는 모습은 또 어떻습니까, 뭐 하나 제대로 하는게 없어 관객들 속을 뒤집어 놓는 가장 큰 인물입니다. 기득권층의 어두운 부분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람 같지만, 실제 행동이나 실력으로 보여주는건 하나 없는, 그야말로 입만 나불거리는 인물의 전형 같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영화는 이순철도 혀를 내두를 모두까기 인형인척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딸을 죽여 없애려고 하고, 나치의 가스실을 연상케 하는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록조 보다는, 딸을 버리고 도망갔지만 그나마도 후회하는 편지를 남겨놓은 퍼피디아가 조금이라도 더 낫습니다. 진심으로 윌라를 아끼고 사랑하고 보호하려고 하는 팻, 본인의 위험을 무릅쓰고 한달음에 달려와 윌라를 구해준 디앤드라, 영화에서 가장 이상적인 캐릭터인 세르지오 센세, 어찌되었건 도피처를 제공해준 비버 자매회 등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캐릭터, 사건은 모두 좌파진영에만 포진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다음 세대를 상징하는 윌라가 보고 듣고 겪은 걸 곰곰히 되짚어보면, 윌라는 자유주의 진영을 선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치 어른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선배들에게 동조할 수 밖에 없었던 저처럼 말이죠.
좀 더 신랄하게 말하자면 둘 다 똥 같은 것들이긴 한데, 30일은 묵은 숙변이랑 갓난아기의 황금색 변 정도의 차이는 있다는게 결국 이 영화가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또 10대의 윌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를 일입니다. 누군가를 성적으로 학대하고 가난한 흑인을 총으로 쏴죽이는 제2의 퍼피디아가 될지, 입만 살아 나불거리고 자기가 가장 지키고 싶어하는 가정을 지킬 능력은 없는 팻이 될지, 숨겨져 있어 더더욱 커지기만 하는 자신의 비틀어진 욕망에 잡아먹히는 록조가 될지, 그런 더러운 것들을 보고 자랐기에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누군가가 될지, 어나더의 뒤에 서 있는 윌라의 전장은 온전히 열려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똥 같은 세상에서도 아직 희망을 가지고 살아나갈 수 있는거고요.
전 PTA가 모두까기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성향을 온전히 드러냈고, 미래는 미래세대에게 맡겨놓았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올해 본 모든 개봉영화 중의 최고의 작품은, 원 데이 애프터 어나더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