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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스포츠 게시판

53세에도 열정을 던진 상남자 '대성불패' 구대성

작성자로더리고|작성시간25.12.16|조회수2,019 목록 댓글 27

구대성

 

출생 1969년 8월 2일 (56세) 대전광역시 동구

 

신체 185cm, 84kg, A형

 

학력 대전신흥국민학교 (졸업) / 충남중학교 (졸업) / 대전고등학교 (졸업 / 68회) / 한양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관광학 / 학사)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 입단 1993년 1차 지명 (빙그레)

 

소속팀

빙그레-한화 이글스 (1993~2000)

오릭스 블루웨이브 (2001~2004)

뉴욕 메츠 (2005)

한화 이글스 (2006~2010)

시드니 블루삭스 (2010/11~2014/15) → 퍼스 히트 (2012)

질롱 코리아 (2018/19, 2022/23)

 

지도자

시드니 블루삭스 투수코치 (2016/17)

질롱 코리아 감독 (2018/19)

상하이 드래곤스 감독 (2026~)

호주 U-15 야구대표팀 감독 (2016)

 

해설위원

SBS Sports 야구 해설위원 (2024)

 

 

 

KBO 리그 최초 투수 4관왕

 

최초 9년 연속 두 자릿수 세이브

 

유일무이 마무리 투수 MVP

 

시즌 평균자책점 1위를 2번 이상 달성한 선수 5명 중 1명

 

다승왕-구원왕을 동시 석권 투수 3명 중 1명

 

7년 연속 세 자릿수 삼진

 

ABL 최초 세이브 1위

 

구대성의 통산 기록과 성적은 화려하고 압도적입니다.

한국 야구에서 구대성 선수만큼 명성과 서사가 동시에 강력한 투수는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이름을 들으면 많은 분이 ‘대성불패’, ‘쿠옹’, ‘일본킬러’를 떠올리지만, 정작 그의 커리어를 연도별로 천천히 따라가 보면 한 인간이 얼마나 치열하게 자신을 갈아 넣으며 살아왔는지 더 깊이 느끼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록과 이야기, 기술과 감정을 모두 담아봤습니다.

 

 

 

움막집 소년의 패기

 

구대성은 대전 뚝방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유년 시절을 겪었습니다.

 

대전 신흥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에 입문한 구대성은 학교에서 ‘딱지왕’으로 불렸습니다. 그 시절 어린이들의 가장 큰 유희였던 ‘딱지 놀이’에서 구대성을 당할 자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구대성이 강한 어깨와 손목 힘을 기를 수 있었던 것은 딱지 덕분이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고 뭘 하든 열심이었다는 걸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친형 구대진 역시 프로야구 선수로, 쌍방울 레이더스 소속 우완투수였습니다. 구대진은 1991년 7경기에 등판해 12⅔이닝을 소화하며 1패, 평균자책점 2.84를 기록했으나, 재계약에 실패해 단 1년 만에 은퇴했습니다.

 

구대성은 대전 신흥초등학교 3학년 때 형을 따라 야구부에 들어가며 본격적인 선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구대성은 충남중에 다닐 때 제주도에서 열린 소년체전에 참가해 이미 팀을 우승을 이끌었을 정도로 떡잎부터 남다른 선수였습니다.

 

이로 인해 고교 시절때 이미 주목받는 유망주가 되었습니다. 대전고등학교는 1953년 이후 우승이 없을 정도로 침체된 상황이었고, 학교는 폐부 위기 속에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스카웃비 1,000만 원을 지불하며 구대성을 영입했습니다.

 

입학 직후 치른 휘문고와의 첫 친선 경기에서, 구대성은 9회 마무리로 등판해 볼넷 3개로 만루를 만든 뒤 삼진 3개로 경기를 마무리했습니다. 신일고와의 연습 경기에서도 유사한 일이 있었는데 경기 후 이유를 묻자 “왜요? 재밌잖아요”라고 답했다는 일화는, 정말 만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이야기이자 그의 투수로서의 성향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대전고등학교 시절,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우수투수로 뽑혔고, 결승전에서 완투하는 등 총 5게임에서 5승을 챙겼으며 그와 조규철의 활약으로 대전고는 경남고를 꺾고 청룡기에서 우승을 일굽니다.

 

대전고 졸업반 때 고교 투수 랭킹 최상위에 오른 구대성이었지만 대전 천변 다리 밑의 움막집에 살았다고 합니다. 88년 겨울 당시 빙그레 쪽에서 졸업반 구대성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당시로선 엄청난 거액인 3000만 원을 들고 찾아갔지만 움막집 청년 구대성은 한 마디로 거절했고 팀원 전체의 진학을 조건으로 내걸고 한양대로 입단을 합니다. 이때부터 구대성 특유의 의리와 상남자스러움이 묻어납니다.

 

 

 

대학 야구 최고의 투수

 

당시 한양대는 몇년동안 우승전력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무관에 그쳤는데, 구대성은 입학과 동시에 학교의 최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이 당시 한 학년 위였던 정민태와 함께 '좌대성 우민태'로 불렸고 1989년 대학야구 3관왕(백호기, 춘계/추계 대학리그)을 석권하며 전성시대의 신호탄을 쏘게 됩니다.

 

1학년 구대성은 3개 대회 모두 최우수투수상을 수상하고 국가대표팀에 발탁되는 매우 뛰어난 활약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2학년 때(1990년)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며 이 해 한양대는 무관에 그칩니다. 3학년 때(1991년)는 89년에 이은 모교의 춘계리그와 추계리그 동시 석권에 일조하는 한편 대륙간컵 우수투수상을 수상하는 등의 활약을 펼치며 아마야구 MVP를 수상했습니다.

 

 4학년이 된 1992년에는 신입생 박찬호, 차명주 등과 함께 대통령기 우승에 힘을 보탰고 우수투수로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습니다.

 

 

 

프로 진출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한 이후에도 대학 시절 혹사의 후유증이 이어지면서, 구대성 선수는 루키 시즌을 거의 반쯤 날려먹다시피 했습니다. 훈련 부족으로 5월이 되어서야 데뷔전을 치렀고, 이후 두 경기 등판 후 다시 전력에서 이탈했습니다. 결국 시즌 막판인 9월에야 복귀해 2승을 거둔 것이 전부였습니다.

이듬해인 1994년, 선발투수로 시즌을 시작했으나 6월부터 구속 저하가 나타난 마무리 송진우 선수와 보직을 맞교환하며 마무리 투수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시즌 7승 8패 12세이브, 평균자책점 2.60을 기록했습니다.

 

1995년에는 마무리로 시즌을 시작했으나 8월부터 이상목 선수와 보직을 변경하며 선발투수로 전향했습니다. 성적은 4승 14패 18세이브, 평균자책점 3.54로 승운이 따르지 않아 다패왕을 기록했지만, 161탈삼진으로 리그 2위에 오르며 위력적인 구위를 보여주었습니다. 시즌 후에는 제2회 한일 슈퍼게임에 국가대표로 참가해 6경기 모두 등판했습니다.

 

 

 

최고의 전성기

 

1996년은 구대성 선수 커리어의 정점이었습니다. 이 시즌 그는 18승 3패 24세이브, 평균자책점 1.88의 성적으로 다승왕·구원왕·평균자책점 1위를 동시에 차지하며 시즌 MVP에 올랐습니다. 이 해 기록한 9이닝당 탈삼진 11.85개는 2025년 현재까지도 KBO 리그 단일 시즌 최고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선발 등판은 단 2경기에 불과했지만 139이닝을 소화했으며, 마무리 투수가 다승왕에 오른 유일한 사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한화는 선발투수가 5~6이닝을 막아주면 구대성 선수를 투입했고, 선발이 조기에 무너질 경우에도 구대성 선수를 올렸습니다.

 

구대성 선수가 등판하지 않는 날에는 정민철 선수나 송진우 선수가 완투를 하거나, 경기를 포기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이러한 운용이 가장 두드러졌던 시즌이 1999년으로, 정민철–송진우–이상목이 초반 이닝을 책임지고 남은 이닝을 구대성 선수가 막아내는 이른바 ‘3승 2패 전략’이 한국시리즈까지 이어졌습니다.

 

구대성은 한국시리즈 전 경기 등판, 1승 1패 3세이브를 기록하며 한화 이글스 창단 첫 우승과 함께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했습니다.

 

일본 진출 전 마지막 등판은 2000년 10월 12일 삼성전 선발 등판이었습니다. 당시 구대성 선수는 9월부터 송진우 선수와 보직을 바꿔 선발로 기용되고 있었으며, 올림픽을 앞두고 구대성 선수의 선발 기용 가능성을 점치는 기사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어 10월 3일 현대전에서는 선발로 등판해 통산 1000탈삼진을 기록했습니다.

 

 

 

혹사의 아이콘

 

구대성은 천재답게 마운드에서 투구하는걸 매우 즐기는 성향입니다. 본인의 투구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긴장을 거의 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위기 상황을 오히려 즐기는 성향입니다. 딱히 징크스나 루틴도 별로 없으며, 공을 던지며 상대 타자를 아웃(특히 헛스윙 삼진)시키는 것에 매우 큰 희열을 느낀다고. 혹사를 당했지만, 본인은 몸만 괜찮다면 언제든지 나가고 싶어했다고 합니다.

 

아마 시절부터 발군의 활약을 했고, 그로인해 일찍부터 잦은 등판에 동원되었습니다. 대전고 시절 청룡기에서 6경기 49이닝을 던졌고, 한양대 재학시절 에는 부상이 다 낫지 않은 상태로 조기복귀해서 춘계/추계리그 우승을 일궈내는 한편, 국가대표팀에도 어김없이 선발되었습니다. 국대에서도 미국전에서 완봉승을 거둔지 겨우 이틀 후에 다시 선발 등판해 일본전 완투승을 남기는(89년 IBA 대회) 등, 좋게 말해 맹활약이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상식 밖의 혹사에 동원되었습니다. 이 때 당한 부상 관리가 제대로 안 되며 프로 입단 첫 해에 부상이 재발해 신인으로서의 성적은 초라했습니다.

 

1990년대는 마무리 투수라는 개념은 자리 잡아가던 반면, 필승조나 셋업맨 개념은 거의 정착되지 않았던 시대였습니다. 그 결과 구대성 선수는 3~4이닝을 던지고 다음 날 또 등판하는 멀티이닝 중무리 역할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여기에 당시 한화의 열악한 불펜 사정까지 더해지면서 구대성 선수의 등판 부담은 더욱 커졌습니다.

 

이러한 운용 방식으로 인해 구대성 선수는 세이브 수에서 일정 부분 손해를 보았고, 흔한 오해와 달리 성구회 회원이 아닙니다. 투수 성구회의 가입 조건은 200승 또는 300세이브인데, 구대성 선수는 이를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2003년까지 구원 타이틀이 세이브와 구원승 합산 방식으로 집계되었던 제도 역시 불리하게 작용했습니다.

 

 

 

왜 ‘역대 최고의 좌완’ 중 하나인가

 

구대성은 상대 타자에게 등을 보인 채 와인드업 후 투구하는 독특한 폼으로 유명합니다.

 

사실 원래는 오른손잡이였으나 어렸을 때 놀다가 다쳐서 오른팔이 골절되어 입원했을 때 반강제로 왼손을 사용하다가 그게 익숙해져서 왼손잡이가 된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매우 와일드한 동작에, 몸을 크게 기울이는 크로스 파이어 폼을 사용하는 대표적인 좌완 투수입니다. 릴리즈까지 걸리는 시간이 극히 짧아 디셉션(Deception)이 탁월했고, 타자는 공을 인식할 수 있는 시간이 매우 짧아 구종 파악 자체가 어려웠습니다. 투구 습관(쿠세)을 중시하는 일본 야구에 특히 강했던 이유입니다.

 

여기에 뉴욕 메츠 시절 완성한 서클 체인지업이 더해지며 조합은 완성됐고, 이 체인지업은 훗날 류현진에게 전수돼 메이저리그에서도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일반적으로 투수는 나이가 들수록 폼을 간결하게 바꾸지만, 구대성은 반대로 더 많이 등을 돌렸습니다. 국내 복귀 이후에는 거의 2루를 보고 선 상태에서 던질 정도였습니다. 그는 “구속이 떨어지자 공을 최대한 숨기고 싶었다”고 밝혔고, 이 극단적인 폼은 결국 왼쪽 무릎 부상으로 이어져 KBO 은퇴의 직접적 원인이 됐습니다. 좌완이면서도 사이드암에 가까운 스리쿼터 투구폼을 지닌 데다, 극단적으로 꼬인 궤적까지 더해져 좌타자에게는 사실상 저승사자였습니다.

 

1. 구대성은 KBO를 대표하는 ‘닥터 K’입니다.

 

통산 K/9: 9.74 → 9이닝당 삼진 약 10개

 

통산 500이닝 이상 투수 중 KBO 역대 1위

 

1996년 K/9: 11.85 → 규정이닝 투수 기준 단일 시즌 KBO 역대 1위

 

전성기 구속은 평균 140km/h 초중반, 최고 149km/h에 달한 좌완 강속구 투수였습니다. 아마 시절부터 이어진 혹사로 구위는 점진적으로 하락했지만, 배짱·승부근성·투수 마인드는 끝까지 유지됐습니다.

 

2. 포지션을 초월한 가치

선발(에이스) → 중간 셋업맨 → 마무리(리그 최정상)

한 명이 세 역할을 모두 ‘리그 최고급’으로 수행한 사례는 매우 드뭅니다.

 


3. ERA·탈삼진·WHIP의 안정성

KBO 통산 ERA 2점대 후반, KBO 통산 탈삼진 1,200개 이상, 전성기 WHIP 0점대~1.1대
당시 좌완 투수 중 이 정도 볼끝과 탈삼진 능력은 사실상 독보적이었습니다.

 


4. 큰 경기 체질

한국시리즈 통산 ERA 1점대로 마운드에 강한 사람은 많지만, 큰 경기에서 더 강한 선수는 흔치 않습니다.

 

 

5. 역대급 수상

 

1996년 KBO 리그 역사상 단 세 명만이 해낸 투수 4관왕이라는 대기록을 최초로 세웠습니다. 이는 구대성, 윤석민, 폰세만 달성한 기록이며 선동열은 비공식 기록으로 취급되므로 구대성이 최초입니다.

 

1999년에는 한화 이글스에는 정민철, 송진우, 이상목, 구대성이 있었으며 타자는 장종훈, 데이비스, 로마이어, 송지만이 활약을 하면서 창단 첫 우승을 하게 됩니다. 당시 구대성은 한국시리즈에서 1승3세이브를 거두며 MVP에 뽑혔습니다.

 

최초 9년 연속 두 자릿수 세이브

 

유일무이 마무리 투수 MVP 

 

시즌 평균자책점 1위를 2번 이상 달성한 선수 5명 중 1명

 

다승왕-구원왕을 동시 석권 투수 3명 중 1명이며 당시 구원왕의 기준은 세이브수가 아닌 구원승+세이브수인 세이브 포인트로 구원왕을 가리는 제도였으며 당대 18승 중 절대 다수가 구원승이었기 때문에 중무리를 하면서 구원왕이 가능했습니다.

 

7년 연속 세 자릿수 삼진은 마무리 투수 중 유일합니다.

 

 

6. 커리어의 길이와 진화

20년이 넘는 현역 기간인 53세까지 실제 경기 출전함으로써 단순히 오래 한 것이 아니라, 매해 구종·운영법이 계속 바뀌며 ‘살아남는 기술’을 익힌 선수였습니다.

구대성 선수는 전성기 임팩트 + 빅게임 능력 + 변화구 완성도 + 포지션 다양성을 모두 더할 경우 한국 역대 좌완 투수 중 최정상권으로 평가받습니다.

 

 

7. 동시대 최고의 선수들의 평가

 

메이저리그 레전드 박찬호는 훗날 “대한민국 최고의 좌완 투수는 구대성 선수”라고 평가한 바 있습니다.

 

해태 타이거즈의 레전드 이종범은 구대성을 동기생 중 투수 1위로 꼽았고

 

삼성 라이온즈의 레전드 양준혁은 같은 시대에 상대했던 투수 중 유일하게 가장 까다로웠던 투수로 구대성 선수를 꼽았으며

 

한국 야구사 역대 최고의 슬러거 이승엽은 구대성을 상대로 51타수 6안타(1홈런)에 그쳤으며 “선수 생활 내내 대성이 형 공은 제대로 맞힌 적이 없다”고 회고했습니다.

 

 

 

 배짱 두둑한 진정한 승부사이자 국가대표 에이스

 

구대성 선수는 국제대회에서 특히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1989년에 대륙간컵 야구대회에서 일본전 선발로 나와서 연장10회까지 완투하고 3실점으로 완투패를 합니다. 이때 당시 상대투수가 바로 우리가 잘아는 노모히데오입니다. 노모는 박찬호를 처음봤을때보다 구대성이 더 인상깊었다라는 말을 하면서 당시 구대성은 일본팀의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말을 합니다.

 

이후 국제야구연맹(IBA) 대회에서 일본에 10이닝 1실점 완투승을 거두며 일본 킬러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비단 일본뿐이 아니라 IBA 대회에서는 미국을 상대로 완봉승을 거두고 91년 대륙간컵에서는 니카라과와 멕시코를 바르며 우수투수상을 타는 등 국제대회에서 고루고루 활약했으며, 그래서 이때는 일본 킬러라기보다는 국제용 투수라는 별명이 더 유명했습니다.

 

1995년 한일 슈퍼게임 6경기에 모두 등판했고, 1999년 한국시리즈 5경기 전 경기 등판이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1999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는 2000 시드니 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예선을 겸한 대회였습니다. 결승 일본전에서 한국이 4–3으로 앞선 7회, 구대성은 마무리로 등판해 후루타 아츠야를 포함한 일본 프로 중심 타선을 상대로 6타자 연속 탈삼진으로 경기를 끝냈습니다. 이 활약을 계기로 일본 구단들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좌완 자원 부족과 팀 사정 속에 마지막 경기 선발로 나섰습니다. 심한 담 증세에도 불구하고 등판해 155구 완투승을 기록하며 동메달을 확정지었습니다.

 

상대 투수는 마쓰자카 다이스케로, 마쓰자카 역시 160구 완투패를 기록한 경기였고 현재까지 국대 경기 사상 역대 최고의 투수전으로 기억됩니다. 이 경기 활약으로 구대성의 몸값은 급상승했고, MLB 신분조회 요청과 함께 NPB 러브콜이 이어졌습니다.

 

2006 WBC에서는 셋업맨으로 활약했습니다. 예선 대만전 2/3이닝 무실점, 일본전 2이닝 무안타 2탈삼진으로 조 1위를 이끌었고, 본선에서는 멕시코전 1⅓이닝 무실점, 미국전 3이닝 무실점, 일본전 1이닝 무실점(9회 피홈런 1점)을 기록했습니다. 대회 성적은 5경기 8이닝 1실점, 1승 3홀드, 평균자책점 1.13이었습니다.

 

메이저 국제대회(올림픽과 WBC) 통산 성적은 8경기 27.1이닝, 2승 무패 3홀드, 평균자책점 1.66입니다.

 

 

 

불굴의 도전

 

일본으로 건너간 구대성은 선동열 이후 일본에서 그나마 성공한 투수로 꼽힙니다.

 

NPB 오릭스 블루웨이브 시절

 

2001년, 국제대회에서 일본 킬러로 명성을 쌓은 구대성은 일본프로야구 오릭스 블루웨이브에 입단했습니다. 첫 해에는 불펜으로 시작해 시즌 도중 선발로 전향하며 7승 9패 10세이브, 평균자책점 4.06을 기록했고, NPB 올스타전에도 출전했습니다.

 

2002년부터는 선발투수로 완전히 정착해 규정이닝을 충족하고 평균자책점 2.52로 퍼시픽리그 2위에 올랐지만, 팀 타선 부진으로 5승에 그쳤습니다. 당시 오릭스의 팀 타율은 0.235, 경기당 평균 득점은 3.13점에 불과했습니다.

 

2003년과 2004년에도 선발로 등판해 각각 6승을 기록했으나 잔부상으로 규정이닝을 채우지 못했고 평균자책점은 4점대였습니다. 다만 이 시기의 퍼시픽리그는 리그 평균자책점이 2003년 4.65, 2004년 4.69에 달하는 NPB 역사상 최악 수준의 타고투저 환경이었으며, 이를 감안하면 구대성 선수의 성적은 평균 이상 선발투수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구대성은 NPB 4시즌 통산 평균자책점 3.88을 기록했으며, KBO 리그 출신 선수 중 유일하게 NPB에서 선발로 규정이닝을 채운 투수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특히 2002년 WAR 4.2는 KBO 출신 투수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수치입니다.

 

 

MLB 뉴욕 메츠 시절

 

 2005년, 구대성 선수는 36세의 나이로 뉴욕 메츠에 입단하며 당시 메츠 프랜차이즈 최고령 루키가 되었고 이상훈에 이어서 유일무이하게 한국,일본,메이저리그까지 밟아본 선수가 됩니다.

 

시범경기에서 확실한 활약을 펼치고 메이져리그 로스터에 합류한 그는 개막전에서 데뷔전에 당시 최고의 타자 켄그리피 주니어를 삼진으로잡으며 1이닝 2삼진 퍼펙트 경기를 펼치게 됩니다. 

 

내셔널리그에 지명타자 제도가 없던 규정상 구원투수임에도 타석에 섰고, 메이저리그 첫 타석에서 방망이를 들고 가만히 서 있다가 4구 삼진을 당했고, 두 번째 타석에서 랜디 존슨을 상대로 2루타를 기록했습니다.

 

이후 과감한 주루 플레이로 홈까지 파고들어 득점에 성공했으며, 이 장면을 계기로 마이크 피아자는 약속했던 100만 달러 기부를 실제로 이행했습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발생한 홈 슬라이딩 부상이 결국 메이저리그 생활을 단 한시즌으로 마무리하게 된 계기가 된 점은 상당히 아쉽습니다.

 

뉴욕 메츠에서 원포인트 릴리프로 기용되며 33경기 등판, 평균자책점 3.91, 6홀드를 기록했습니다.

 

한국에서 은퇴한 이후 2011년에 호주 야구 리그에 진출하여 최초로 한·미·일·호 프로 리그에서 모두 활동한 진기록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구대성이 평가하는 한/미/일 야구

 

미국에서 뛰다 한국에 오니 한국선수들이 피지컬적으로 왜소하게 느껴졌고, 본인 공을 못칠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처음에만 쉬웠고, 타자들이 익숙해지고 난 뒤에는 똑같이 힘들어졌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에서의 은퇴

 

2010년 8월 14일 은퇴를 선언했는데 무릎 부상이 은퇴의 결정적인 영향을 줬습니다.

 

9월 3일에 은퇴경기를 치렀는데 이날 선수단과 프런트 모두 대성불패라고 마킹된 유니폼을 입었고 조동찬을 상대로 중견수 플라이 아웃을 잡아 내고, 그렇게 마운드를 떠났습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프런트와의 마찰이 있었던걸로 보이는데 일단 영구결번 자체를 구대성 본인이 고사한걸로 유명하며 결국 영구결번이 되지않으면서 이후 구대성의 등번호인 15번은 2011년 전체 1지명으로 뽑은 유창식이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한화 구단 역대 최고 계약금(7억원)을 받고 입단했고 좌완이라는 공통점으로 물려받은 듯합니다.

 

 

 

53세까지 던져진 야구 열정

 

2010년 11월, 재창설된 호주 프로야구 리그(ABL)에서 리그 첫 세이브를 기록하며 데뷔했습니다.


이후 2011년 1월 14일까지 14경기, 1승 1패 10세이브, 평균자책점 1.37을 기록하며 원년 시즌 최고 구원투수상을 수상했습니다. 당시 6개 구단이 모두 영입을 시도했으나, 자녀의 학업 문제로 시드니 블루삭스를 선택했습니다.

 

2011년 11월까지 일부 경기에서 부진을 겪었지만, 시즌 성적은 3패 8세이브, 평균자책점 3.38으로 2년 연속 구원왕에 올랐고, 팀은 정규시즌 4위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습니다.

 

2012–13시즌에는 셋업맨으로 보직을 바꿨고, 2013–14시즌 다시 마무리를 맡아 1승 1패 11세이브로 리그 공동 세이브 1위를 기록했습니다. 이로써 ABL 통산 세 번째 세이브 1위, 해당 시즌 두 번째 최고 구원투수상을 수상했습니다.

 

2014년에는 만 44세(한국 나이 46세)로, 2014년 3월 20일 다저스–ABL 올스타 친선경기에서 7회 등판해 3자범퇴를 기록하며 최고령급 현역 투수의 존재감을 보여줬습니다.

 

2014–15시즌 성적은 평균자책점 2.12, 4세이브(리그 4위)였고, ABL 통산 100탈삼진을 달성했습니다.


이후 2016–17시즌에는 시드니 블루삭스 투수코치로 등록되며 사실상 현역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2018–19시즌 질롱 코리아에서 1이닝 무실점으로 깜짝 등판했고, 2022–23시즌에는 ABL 최고령 투수 기록을 경신하며 복귀해 3경기 2.1이닝 무자책점을 기록, 다시 한 번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마운드의 상남자

 

현역시절 구대성이 진갑용을 맞힌 빈볼 상황에서, 당시 한 성격으로 유명한 진갑용은 순간적으로 발끈했지만 마운드 위의 구대성을 바라본 뒤 더 이상 감정을 표출하지 못했던 일화가 있습니다. 구대성은 진갑용이 1루 베이스로 가자 사과가 아닌 오히려 압도적이고 단호한 표정을 통해서 바로 상황을 정리했고, 진갑용은 1루 베이스에서 고개를 숙인 채 아래를 바라봤습니다.

 

이 장면은 구대성의 매력이 기록이나 구속이 아니라, 불필요한 감정 없이 충돌을 감당할 수 있는 자신감과 존재감, 그리고 상대가 먼저 선을 넘지 못하게 만드는 엄청난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순간이었습니다.

 

 

2007년 한화 이글스와 두산 베어스의 플레이오프 경기 중 벤치 클리어링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한화 소속이던 구대성이 두산의 강타자 김동주와 대치하게 되었고 벤치 클리어링 상황에서 구대성이 김동주에게 손을 한 번 펴 보이는 제스처(일명 '붕어빵 5개' 제스처로도 불림)를 취하자, 격앙되어 있던 김동주가 별다른 충돌 없이 조용히 벤치로 돌아간 일화가 유명합니다.

 

 

2006년 WBC 예선 일본전을 앞두고, 당시 불펜에 있던 구대성은 농담처럼 배영수에게 “이따 올라가서 이치로 맞히면 1만 엔 준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배영수는 반신반의하며 “진짜 주는 겁니까?”라고 되물었고, 실제로 경기 중 스즈키 이치로에게 몸에 맞는 공이 나왔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1점 차의 팽팽한 상황에서 분위기가 크게 흔들릴 수 있었지만, 구대성은 배영수에게 “뒷처리는 내가 한다”고 말한 뒤 등판해 다음 타자들을 깔끔하게 처리하며 이닝을 정리했습니다. 벤치와 동료들은 물론 상대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긴 장면이었습니다.

 

 

 

여담

 

한국 야구계에서 손에 꼽히는 기인이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보통 썰들은 오랫동안 구전되어 오며 과장되거나, 심하면 아예 없었던 일까지 실제 있었던 것처럼 전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구대성의 일화들은 본인이 스톡킹에 출연하여 대부분 맞다고 인정했습니다.

 

구대성 선수의 성격은 마운드 밖에서도 독특했습니다. 여름에는 파카를 입고 몸을 풀고, 겨울에는 반팔 차림으로 워밍업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마운드 위 위기 상황에서도 “저녁 식사를 무엇으로 할지”를 생각하며 긴장을 풀었다고 했고, 오락실에서는 50원짜리 동전 하나로 오랜 시간 자리를 지켜 결국 주인이 500원을 쥐여주며 나가 달라고 했다는 일화도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느긋함은 오히려 경기 중에는 강한 멘탈로 이어졌습니다.

1969년생이지만 학창 시절 1년 유급으로 인해 1970년생, 89학번 선수들과 친구로 지냈습니다. 정민태 선수처럼 실제 나이는 어리지만 학번이 빠른 경우에도 여전히 ‘형’으로 대했고, 이상훈 선수처럼 1년 반이나 늦게 태어난 선수와도 친구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이러한 관계 설정은 한국 야구계에서도 상당히 이례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구대성은 개인적인 부나 명예에는 비교적 무심하셨지만, 의리와 책임감에서는 누구보다 화끈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IMF 시절 연봉 1억 원을 요구할 수 있는 위치였음에도 팀 사정을 고려해 동결을 자청하셨고, 선수협 창립 당시 1,000만 원을 기탁했습니다. 임수혁 선수를 돕기 위해 2,000만 원을 익명으로 송금했으며, 하와이 스프링캠프에서는 후배 선수들의 식비로 6,000만 원 이상을 지출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릭스 진출 전까지 대전의 13평 아파트에서 생활했습니다.

 

 

한화의 구단 역사에서 손꼽히는 레전드 스타이고 구단 역사상 유일한 한국시리즈 MVP이기에 의미 있는 경기가 되면 시구자로 자주 초청되는 편입니다.

 

2016년 4월 5일 한화의 정규 시즌 홈 개막전 시구자로 나섰다. 팀 유일의 우승이었던 1999년 유니폼을 입고 시구했고 시작 3시간 전에 시구 소식이 깜짝 공개되어 타지역 한화팬들이 몹시 안타까워했습니다. 

 

11년간 이어진 암흑기를 벗어나 2018년 한화가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자 2018년 10월 20일 준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시구를 하였습니다.

 

19년 만에 대전에서 열리는 한국시리즈 경기인 2025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 시구자로 나섰고 한화 시절 배터리를 이뤘던 조경택이 시구를 받아줬습니다. 공교롭게도 경기가 열린 2025년 10월 29일은 정확히 26년 전 한화 이글스가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던 날이고 구대성 본인이 한국시리즈 MVP 수상자로 결정된 날이기도 합니다.

 

 

2021년 1월에 자신의 야구 인생을 담은 에세이를 발간하였습니다.

 

 

스톡킹에서 정민철이 일담으론 송진우와 쌍용 무쏘와 현대 갤로퍼의 힘 대결을 펼쳤다고 합니다.

 

 

2022년에는 KBO 올타임레전드 40인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구대성이 뽑은 한국야구 드림팀

 

 

 

은퇴 후 커리어 정리

 

2016년: 호주 U-15 국가대표팀 감독

 

2016~2017년: 시드니 블루삭스 투수코치

 

2018년 7월: 호주 프로야구 질롱 코리아 초대 감독

 

2019년 1월 19일: 감독임에도 직접 등판, 1이닝 무실점

 

2019/20 시즌 전 감독직에서 1년 만에 하차 (사유 불명)

 

2024년: SBS Sports 야구 해설위원

 

2025년 한국시리즈 3차전 시구 참여 (한화 첫 승 경기)

 

2026시즌: 중국 신설 프로리그 중국야구 도시리그 ‘상하이 드래곤스’ 초대 감독 선임

 

 

 

글을 마무리하며...

 

영화 같은 서사를 지닌 그의 야구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구대성은 단순히 성적만 뛰어난 투수가 아니었습니다.


기록으로 증명했고, 배짱으로 각인됐으며, 태도로 존중받은 선수였습니다.


44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호주 프로리그 데뷔 첫해에 구원왕에 오르며, 그는 또 하나의 감동적인 장면을 써 내려갔습니다.

 

그 모든 시간을 관통하는 네 글자, '대성불패'는 그의 이름과 함께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작성자 로더리고

 

사진 및 움짤 출처

 

구글, 다음 카페 이종격투기 및 아이 러브 엔비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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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airtime3 | 작성시간 25.12.17 몸쪽 직구 간지
  • 작성자Dirk Werner Nowitzki | 작성시간 25.12.17 레전드 쿠옹!!
  • 작성자Andrew Wiggins | 작성시간 25.12.17 마이 히어로
  • 작성자아이언코브라 | 작성시간 25.12.17 몰랐는데 엄청 매력적이고 멋진 선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작성자10000 | 작성시간 25.12.17 이글스 원년 팬으로, 누가 뭐래도 대성불패가 최애 오브 최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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