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2년 그러니까 정확히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이다. 그때 이후로 나는 그녀의 소식을 듣지 못하였고, 그러므로 우리는 피차가 잊은 채 살아왔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그런데 며칠 전 느닷없이 그녀가 생각 났고, 곰곰 생각 끝에 나는 그녀의 남편이 경영하는 병원으로 전화를 걸어 자택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기어코 그녀와 통화를 시도하게 되었다.
또박또박 나는 전화버튼을 눌렀고, 신호가 가는가 싶더니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젊은이의 목소리도, 그렇다고 아주 나이 많은 노인의 음성도 아니었다. 아니, 듣는 내가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거기 鄭권사님 댁인가요?」
「그런데요, 어디시죠?」
「혹시 鄭권사님이세요?」
시간대로 봐서 젊은이들은 아무래도 집에 있을 턱이 없겠고 하여 이 시간에 전화를 받는 여자 분이라면 아무래도 鄭권사님이 아니겠나 싶어서 되물어본 말이었다.
「예, 그래요. 근데 누구시죠?」
「하두 오래 돼서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으실 겁니다. 누군지 모르시겠죠?」
「누군지는 이름을 대야 알 수 있죠. 누구십니까?」
「鄭계장님 시청에 근무하실 때 옆방에 있었던 金○○입니다.」
「오우, 그래요? 반갑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요즘 뭐 하세요? 목사 되셨나요?」
「예 반갑습니다. 건강하시죠? 목사는 요…. 능력이 됩니까? 백수로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관계를 간략히 요약하면 대략 이렇다.
1970년대 말과 1982년 말에 이르기까지 그녀와 나는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는 동료 신분일 뿐이었으나 내게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사건으로 뇌리에 깊이 각인된 각별한 사이로 기억되고 있는 분이다. 보건사회국(保健社會局)이라는 직제에서 그녀는 보건과(保健課) 소속 가족계획계장(家族計劃係長)이라는 신분이었고 나는 그 바로 옆 사무실 사회과(社會課)의 말단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더랬다. 직속 상사는 아니었어도 직급이나 연령으로도 한참 윗길이었던 이 분과 가깝게 된 사연이 좀 묘했는데, 뭐냐면 이 鄭계장은 누구든 얼굴이 좀 익숙해졌다 싶으면 서슴없이 가까이 다가가 「예수 믿으세요!」라며 전도하기에 여념이 없는 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나는 나이 갓 삼십이 넘은 때로 내가 크리스찬이라거나 아니라거나 전혀 타인에게 내색을 하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나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었던 무렵이었다.
어쩌다 현관이나 사무실을 오가며 마주치기라도 하면 鄭계장은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김주사(金主事), 예수 믿으세요!」라고 전도하는 것이 습관이자 사명이 된 분으로 믿어졌다.
그런 중 직장내에서 鄭계장을 비롯한 몇 몇 기독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신우회(信友會)를 조직키로 뜻을 모았었다. 우선 직장 내에 근무하는 기독교인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를 파악하기 위하여 인사과에 부탁하여 인사기록카드 종교란에 기독교로 적힌 사람을 모두 추려냈었는데 거기에 내 이름도 있더라며 어찌 사람이 그리도 시침을 뚝 따고 있을 수 있느냐며 따지듯이 물어 한바탕 웃음으로 받아넘겨야 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로 우리는 나이와 직급을 초월하여 더욱 친근한 인간관계로 발전했었다. 물론 신앙적인 면으로도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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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나는 무척 가까워진 그녀로부터 들은 가족사를 간단하게나마 소개할 필요를 느낀다.
그녀가 크리스찬이 된 데는 우여곡절과 적지 않은 사연이 있었다. 부모님이 예수를 믿었던 건 아니었고, 어릴 때 친구 따라 여름성경학교에 끌려 다니며 교회풍속을 익히다 보니, 커서는 그대로 생활의 일부가 되면서 가문에서 유일하게 그녀만이 기독교 신앙이 싹텄다고 했다.
그녀는 사회생활을 간호사로 출발한 듯 했고, 결혼은 의사와 하게 되었음을 이야기 중에서 쉽게 알아 깨달을 수 있었다. 미안하고 송구스런 표현이지만 그녀는 미인과는 거리가 먼 얼굴이었다. 그녀의 이런 저런 신상에 얽힌 얘기를 호기심 깊게 들으면서 나는 속으로 「어떻게 이 못난 여자가 의사를 남편으로 맞이했을꼬? ㅋㅋ」라는 의문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으나 직접적으로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그녀의 남편은 신경외과의(神經外科醫)로는 부산에서 권위로 인정받고 있는 분임을 나중 알게된다.)
시가(媤家)쪽은 아예 불교 집안이었다. 다행인지 하나님의 섭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남편이 그다지 교회출석을 금하는 편은 아니어서 혼자만이라도 교회는 열심히 다닐 수 있었으나 안방에서 성경책이 눈에 띄기라도 하면 남편은 당장 치우라고 호통이 떨어지곤 하였다 한다.
그녀가 더욱 신앙생활에 몰두하게 되고, 열심 있는 전도자로 변신한 데는 죽음의 경계에까지 도달했다 회생한 남다른 체험이 있어서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하면 그녀는 죽어도 수십 번 죽었을 암환자였다고 했다. 열 가지 병-그것도 암으로 앓았다고 하는데 과장이 좀 섞여있기야 하겠지만 거짓말은 아닌 것으로 나는 믿어졌다. 그녀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병에서 다시 살아난 데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도무지 설명하거나 믿을 수 없는 절박하고도 처절했던 영적 체험이 있었음에 비롯됐다.
그녀는 간호사였으므로 그녀가 사경을 헤맬 때 장기려(張起呂) 박사를 만났다는 것은 거짓말 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병은 아이러니하게도 병원 치료를 통해서 치료된 것이 아니고 성령(聖靈)을 받아 방언과 방언통역과 신유(神癒)의 은사(恩賜)까지 겸한 어느 권사(勸士)님의 안수기도를 받고 병고침을 얻었다고 그녀는 서슴없이 고백했다. 그녀의 병을 고친 이는 이름만 대면 누구도 알 수 있는 서울의 전통있는 C교회의 Y권사님이었다.(필자도 아는 분이시다). 이 교회는 김영삼(金泳三) 전대통령이 장로로 시무하던 교회로 기억하고 있다.

아무튼 그녀가 병마에서 놓임을 얻고부터는 누구도 못 말리는 열렬한 전도자가 되었음을 그녀는 내게 거리낌 없이 털어놓았으며, 내가 그녀의 전도의 표적이 된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노릇이었다.
그 뒤로 나도 변화를 받아 한동안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게 됐으며, 신비하고도 놀라운 영적 체험과 기적을 경험한 얘기는 다음 기회로 미룰까 한다.
나도 그녀의 추천과 소개로 예의 그 Y권사님에게 안수를 받아 고질적인 위장병을 치료받았고, 부지런히 교회에 봉사하는 가운데 천국을 구경하는 기이하고도 감동적인 체험도 하였지만, Y권사님의 권유에 따른 신학공부는 끝내 하지 않고서 현재에 이르렀음을 부끄러워해야 할지 어쩔지 자신도 확연한 분간이 서질 않는다. 앞에서 鄭계장과 통화하는 가운데 「목사 되셨어요?」하고 질문을 받은 것도 캐보면 이런 사연이 있어서였다.

▲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張起呂 박사.
일언이폐지하고, 오늘은 그녀의 남편에 얽힌 얘기를 하고자 함에 본래의 뜻이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세상에는 이런 속담이 있는 걸 우리는 안다.
점쟁이 자기 점(占) 못 치고,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마찬가지로 의사가 자기 병을 못 고친다는 말도 말이 되는지 모르겠다.
정확히 鄭계장의 부군(夫君), 宋박사가 어느 날 뇌일혈을 일으켜 대학병원에 실려가게 됐던 것이다. 원래 그 분야의 권위자신데, 자신의 발병에는 속수무책이었던 모양이다. 宋박사는 당시 국립인 ○○병원의 원장으로 재직하고 계셨는데, 행인지 불행인지 출혈이 코로 터져 나와 아무리해도 지혈(止血)이 되지 않는다며 대학병원으로 응급 후송이 되었으며 다음은 宋박사가 입원한 뒤의 에피소드다.
입원한 宋박사를 장기려(張起呂) 박사가 문병을 하였다고 한다. 자신의 병원에 근무했던 간호사의 남편이 입원했다는데 무심할 수 없기도 하려니와 의료계의 대선배이자 같은 유명 외과의(外科醫)로서 후배의 병실을 찾아보는 것이 도리이기도 하였으리라고 충분히 짐작된다.
장기려 박사는 독실한 크리스찬으로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던 분이니 새삼스런 소개는 필요없을 터이다.
크리스찬들이 문병을 하면 환자를 위한 간절한 기도와 정겨운 담소가 전부임은 알만한 사람은 안다.
그때 병석에 누운 宋박사가 진지하게 대선배인 張박사께 이렇게 여쭤봤다고 한다.
「박사님은 제가 뵐 때마다 어떻게 한번도 「예수 믿으라」는 말을 안하십니까?」
아마 마누라의 극성스런 전도사역의 행태를 잘 아는지라 어쩌면 조금은 호기심으로, 조금은 의아한 뜻으로 물었는지 모르겠다. 그러자 張박사는 만면에 평안을 띈 얼굴로 웃으며,
「허허, 천하의 宋박사님이 제가 예수 믿으란다고 믿을 분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있으면 언젠가는 품에 거두어 들일테지요. 신경 쓰지 마세요. 우선 건강이나 회복하셔야지…」
의사라면 누가 뭐래도 최고의 지식과 지성을 갖췄으며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을 하는 분으로 인정하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런 만남이 있은 뒤 宋박사는 퇴원을 하게 됐고, 건강상 이유도 있고 하여 국립○○병원장 자리를 내놓고는 작은 건물 하나를 세 얻어 신경과의원을 개원하였다고 했다, 그런 어느 날 宋박사는 기적같이 아내의 이끌림에 못 이긴 척 교회로 출석하게 되면서 우리의 鄭계장은 정말이지 기쁘기 한량없는 목소리로 어떻게나 무한감사와 찬송의 열변을 쏟아내던지 그 모습이 아직도 나의 눈에 선하다. 일생을 걸고 기도한 것에 하나님이 응답하셨다고 하면서.
거기에다, 1980년대 초, 무력으로 권력을 찬탈한 군부정권은 언론의 목을 죄고 있었으며, 기독교방송은 광고 없이 순수 복음으로만 방송을 하여야 했다. 새벽에 일어나 설교를 듣기 위하여 라디오를 켜면 기독교방송은 심각한 경영난을 호소하며 선교헌금을 내줄 것과 헌금한 신자들의 이름을 한 사람 한 사람씩 불러주었다. 거기에 우리의 宋박사 이름도 들어 있음을 나는 놀라운 가운데 새겨듣고 있었다. 전세살이 의원을 경영하면서 선교헌금을 일백 만원이나! 나는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그 당시 내가 받는 월급이 십여 만원이지 싶은데.
오 주여, 이 놀라우신 구원의 역사를 내가 보는 도다. 아멘!

나는 그 무렵 鄭계장과 함께 몸담았던 직장을 떠나 다른 길을 걷고 있었으며, 그랬지만 그 뒤로도 宋박사의 발자취는 간간이 들어서 알 수 있었다.
宋박사의 발자취야말로 성경말씀대로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케 되었으니, 세 든 건물에서 작은 의원으로 출발하였지만 마침내는 부지를 마련하여 5층 건물의 병원급으로 키웠으니 그야말로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넘쳐났음을 알 수가 있다.
듣고 보니 일흔을 훌쩍 넘긴 지금도 진료를 담당하고 계시며, 장로직에서는 은퇴하였으나 새벽기도도 다니신다고 鄭권사님은 자랑이 미어지는 눈치다.

8月의 끝자락에서 들려온 반갑고 기쁜 소식.
탈레반측이 인질로 삼은 우리의 봉사단원들을 모두 풀어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일부는 벌써 석방되었다는 보도를 이 글을 쓰면서 접한다.
고귀한 생명들이 인질로 납치되면서 원인제공을 한 기독교계의 선교행태가 비판의 도마에 올라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킨 경험을 되돌아보면 아무래도 앞으로는 보다 지혜롭고 바람직한 수단을 통한 선교방법이 전개되지 않을까 기대를 가져보는 터다.
길거리 전도사역도 마찬가지다.
신실한 크리스찬이 「나는 아직도 스님이 되고 싶다」고 고백이라도 할라치면 당장에 돌팔매가 날아오는 것이 우리의 신앙현실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배교(背敎)하여 개종을 하거나 그럴 마음도 따지고 보면 없지만 일부 개신교도들이 벌이는 행태를 보건대 과연 저래야 되는가 하는 의문과 회의가 듦을 간과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최인호는 인기 있는 소설가이자 가톨릭 작가다. 그러면서도 불교 관련 소설을 여러 권 펴냈다.
그는 「정신의 아버지를 가톨릭으로 삼고 영혼의 어머니를 불교로 삼는 작가」다.
『당신은 아버지와 어머니 중 누구를 더 좋아하냐면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내가 생을 받은 것은 부처로 나아가는 또 한번의 기회를 받은 것에 불과하니 <아직도 스님이 되고 싶다>.』
개신교인들이 들으면 기겁을 하고 뒤로 나자빠질 말을 그는 태연스레 하고 있음이 나로 하여금 흐뭇한 미소를 머금게 하는 것이다.
이런 분에게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피켓을 들고 머리를 쥐어흔들며 「회개하라!」고 다그친다면 어떤 반응이 있을지 정녕 궁금하지 않을까. 너나 예수 잘 믿고 구원 받으세요!
문득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張起呂) 박사님에 대한 일화가 기억나는 것도 무리가 아닌 듯 싶어 소회를 적어보았다. 그는 일생 누구더러 「예수 믿으세요」라는 말을 한 적이 없지만 그로 인하여 깨침 받고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음을 나는 알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한 사람의 열정과 헌신과 진실, 백만 신도가 이룩하지 못한 기적을 그 한 분은 소리 소문없이 이룩하고도 늘 겸손의 미소를 잃지 않으셨던 분임을 나는 아는 것이다. 그 분은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사람을 배척하거나 기피한 적이 없으며 가난하고 병든 이를 위하여 평생을 희생 봉사하였지만 부자를 증오하거나 타도할 대상으로 여기지도 않았음은, 항상 그의 곁에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을 막론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사람들로 친구같이 들끓었음이 이를 증언해주고 있다. 전도(傳道)란 튀는 행동이나 말이 아닌 참된 사랑의 실천과 화해의 도모로 더욱 크게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