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Early Entry'의 선구자 - 'Spencer Haywood' 이야기

작성자Doctor J|작성시간08.09.20|조회수2,082 목록 댓글 25

 

NBA 최초의 대학 중퇴생 '스펜서 헤이우드'

 

 

글: Doctor J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ABA 리그는 시작할 때부터 NBA와 비교해서 가능하면 다른 스타일의 체제와 전통으로 경기운영을 할 것을 모토로 삼았던 프로리그였습니다. --건 스타일, 팬들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점프하고 덩크하는 농구, 거기에 작전타임 때마다 등장하는 비키니 차림의 치어걸들, 그리고 알록달록한 색깔있는 농구공에 3점 라인까지..... ABA는 자금이 넉넉한 리그는 아니었지만 유능한 선수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고, 창단된 지 오래되지는 않았어도 많은 수의 고정 농구팬들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ABA 리그가 NBA와의 차별화를 선언하고 난 후에, 가장 큰 화제를 몰고 왔던 이슈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대학 중퇴생들도 프로 드래프트에 참가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게 한 것이죠.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대학 졸업생들만이 NBA 드래프트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운동선수가 프로가 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 당시의 사회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ABA는 이 규정과 고정관념을 깨버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마도 신생 프로리그로서, 대학 졸업생들을 놓고 NBA 리그와 줄다리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중과부적인 싸움이라 생각되어 그랬을 수도 있겠지요. 아무튼 이 규정은 실행이 되었고, 이러한 결과로 ABA는 대학 3년만 마치고 조금 일찍 프로에 뛰어들고 싶어했던 줄리어스 어빙과 같은 거물을 NBA에 빼앗기지 않고 데려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Spencer Haywood는 이러한 두 프로리그간의 알력 사이에서 혜택도 받았고, 또한 큰 손해를 입기도 했던 레전드 빅맨이었습니다. 오늘 이 헤이우드 선수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헤이우드는 1949년생으로 신장 206cm(6-9)의 파워 포워드 겸 센터였습니다. 대학 1년생일 때 이미 시즌 평균 28.2, 22.1리바운드를 기록했던 괴물 헤이우드는, 1학년을 마친 뒤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 출전할 미국 국가대표팀에 뽑히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19세의 나이로 미국에게 금메달을 안겨주며 올림픽 토너먼트의 최고선수가 됩니다. 미국팀 내에서는 평균 16.1점으로 최다 득점자였고, 또한 올림픽에 참가한 모든 농구선수들 중에서 리바운드와 야투율 1위를 석권하기도 했지요. 그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몰랐습니다. 1968, 헤이우드는 디트로이트 대학으로 편입을 했고, 그곳에서도 그는 시즌 평균 32.1, 21.5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화제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세의 나이로 올림픽 금메달을 따내면서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시절

 

대학 첫 2년 동안에 평균 30점에 20리바운드를 기록한 이 괴물을 프로 구단들이 가만 놔둘 리가 없었지요. 그의 졸업년도인 1971년에 맞춰서 NBA의 버펄로 브레이브즈 구단이 그를 미리 드래프트 해버립니다. 헤이우드가 졸업하려면 2년을 더 기다려야 했는데도, 이 선수를 다른 팀에서 데려가게 놔두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헤이우드는 대학 2년을 마친 1969년에 ABA 리그의 Denver Rockets와 보기좋게 계약을 체결해 버립니다. 이런 것이 NBA ABA를 싫어하고 경멸했던 이유 중 하나가 되는 것이죠.

 

그는 프로리그 데뷔 첫시즌에 폭풍처럼 리그를 강타합니다. 평균 30.0점에 19.5리바운드로 두 부문 모두 리그 정상에 올랐고, 야투율도 1, 거기에 신인왕, 리그 MVP, 올스타게임 MVP까지, 상이란 상은 모조리 싹쓸이 해버리지요. NBA의 두 기둥, 빌 러셀과 체임벌린 중, 러셀은 이미 은퇴를 했고, 체임벌린은 무릎부상의 여파로 노쇠화 기미가 보이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헤이우드의 현란한 빅맨 플레이는 이런 지배적인 센터를 그리워하던 NBA 팬들까지 ABA 리그로 끌어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 때였습니다. 문제가 터진 것은.

 

ABA에서 성공적인 첫시즌을 마친 헤이우드를 NBA 산하의 시애틀 수퍼소닉스가 접근을 해 계약을 맺은 것입니다. 이 계약과정에서 많은 편법이 적용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아무튼 기본적으로 시애틀 수퍼소닉스 구단은 리그의 중요한 규정 하나를 깨뜨려 버렸지요. 바로 대학 중퇴생은 NBA에서 뛸 수가 없다는 규정 말입니다. 시애틀 구단의 이러한 이기적이고 괘씸한(?) 행동에 대해 NBA 사무국은 헤이우드까지 싸잡아 소송을 걸었습니다.

 

이 소송과정은 길고도 험난했습니다. 헤이우드는 더이상 운동에 전념할 수가 없었고, 시애틀 구단 홀로 거대한 NBA 리그를 상대로 싸우기엔 너무나도 벅찼습니다. 이 때, 헤이우드의 변호인들 측에서, “헤이우드는 가족의 생계를 혼자 짊어진 사람이니 재판장의 선처를 바란다는 요청을 넣었습니다 (여담이지만, 가족부양의 중요성을 외치던 라트렐 스프리웰이 오버랩 되는군요). 놀랍게도 이 요청은 받아들여졌고, 헤이우드와 시애틀 구단은 NBA를 상대로 승소할 수가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기적이 일어난 것이죠.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대법원에서의 승소 후, 변호인단과 함께

 

이렇게 해서 길고 긴 우여곡절 끝에 스펜서 헤이우드는 역사상 최초의 대학 중퇴생 출신 NBA 선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험난한 인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도 장기화됐던 법정싸움 때문에 그의 첫 NBA 시즌은 코트에 발도 못 붙여본 채 거의 다 종료되고 있었고, 경기장이든, 길거리이든, 그가 가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나 그는 심한 야유와 욕설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시애틀에서 뛴 네 시즌동안, 헤이우드는 게임당 평균 25~30, 12~14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이름값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NBA 사무국과 수많은 안티팬들의 텃세에도 불구하고, 그는 4년 연속으로 올스타에 뽑혔으며, 2회의 All-NBA 퍼스트팀, 2회의 All-NBA 세컨드팀에까지 뽑히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뛰어난 선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광고 하나가 들어오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올스타 게임 전에 선수들을 소개할때도 그의 이름이 호명되면 팬들은 일제히 야유를 보내곤 했지요.

 

 

헤이우드의 게임은 한마디로 호쾌했고 멋이 있었습니다. 좋은 신체 사이즈에 비해 작았던 두상, 긴 팔과 큰 손, 그리고 출중한 점프력을 이용해 페인트존을 힘차고도 우아하게 장악하던 그의 모습은 NBA에서도 최고의 인기를 끌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베이스라인에서 터지는 높은 타점의 폭발적인 그의 턴어라운드 페이더웨이 점퍼는 그 어느 수비수도 막을 수가 없었던 난공불략의 공격무기였습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들어야했던 심한 야유와 냉대는 그의 삶을 너무도 피곤하게 만들었고,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인 면에서 많이 지쳐버린 그는 30세가 되자 일찌감치 은퇴를 고려하게 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72년 올스타 게임에서의 스펜서 헤이우드

 

1979-80 시즌에 레이커스의 일원이자 압둘자바의 백업 요원으로서 신인인 매직 존슨과 함께 얻어낸 우승반지 한 개가 그에게 위안이라면 위안이었을까요? 잠깐... 그 매직 존슨, 그도 대학 중퇴자 아니던가요? 그렇지요. 매직 존슨은 미시간 주립대 2년 중퇴지요. 매직 존슨은 자기 자신이 NBA에 일찍 들어올 수 있도록 길을 닦아준 선구자가 바로 자기 팀의 백업 센터였음을 본인이 드래프트되던 당시에 알고 있었을까요?

 

스펜서 헤이우드의 기구한 농구인생이 NBA에 남겨놓은 소중한 유산이 바로 그것입니다. 헤이우드가 소송에서 이김으로써, NBA는 줄리어스 어빙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70년대 중반에는 대럴 도킨스, 모제스 말론과 같은 고교졸업생들까지 NBA 드래프트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매직 존슨, 아이재야 토마스, 하킴 올라주원, 마이클 조던, 샤킬 오닐도 이 헤이우드가 개척해 놓은 새로운 NBA 토양의 수혜자들입니다. 헤이우드가 없었다면, 케빈 가넷도, 코비 브라이언트도, 르브론 제임스도, 드와이트 하워드도, NBA에 들어온 시기가 4년 후로 지연됐을 겁니다.

 

 

최근에 제가 들은 그의 인터뷰에서 헤이우드는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NBA 사무국으로부터 저는 절대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뭐 저야 리그를 상대로 대법원까지 가서 법정싸움을 벌인 장본인 아닙니까? 그러니 그런 NBA 사무국의 결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같은 이유로 1997년에 선정된 역대 최고 50인에서도 빠질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20여년 전에 행했던 괘씸죄에 대한 벌을 철저히 받고 있는 느낌입니다. 사실 저를 기억하는 농구팬들이 몇이나 될까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벌은 충분히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 기억해 주십시오. 제가 악의를 가지고 행한 도전과 싸움이 아니었다는 것을. 당시에 쇠퇴기로 들어가던 NBA는 참신한 변화가 필요했고, 젊고 유능한 선수들이 수혈되야만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 자신이 총대를 맸던 것 뿐이죠.”

 

 

스펜서 헤이우드.... 이제 NBA 사무국에서도 그를 부활시켜줬으면 좋겠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올림픽 금메달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최근의 모습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Doctor J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4.07 오늘, 당신의 명예의 전당 헌액이 결정됐네요.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난나야~ | 작성시간 15.04.07 박사님께서 더 기뻐하시네요~ ㅎㅎ
  • 답댓글 작성자키드가 되고싶어요~~^^;; | 작성시간 15.04.07 이런 사연을 알고 나서 헌액자 명단을 보니 느낌이 다르네요 박사님께서는 특히나 감회가 남다를것 같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Doctor J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4.07 글쎄 이게 뭐라고.... 감동이네요.
  • 작성자위긴스 | 작성시간 15.09.19 한 명의 희생으로 많은 후배 선수들이 덕을 보네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