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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던과 스카티가 쿠코치를 수비로 압살했던 1992년 그 여름날

작성자Doctor J|작성시간21.08.22|조회수1,704 목록 댓글 15

바로 1992년 7월 27일, 바르셀로나 올림픽 조별리그 미국 대 크로아시아 경기가 벌어진 날입니다.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을 해 처음으로 올림픽에 출전한 크로아시아 농구팀과 원조 드림팀 간의 경기였죠. 

 

크로아시아는 이미 NBA에서 수퍼스타로 자리매김을 시작한 드라전 페트로비치, 당시 유럽 최고의 파워포워드 디노 라쟈, 그리고 시카고 불스의 제리 크라우스 GM이 80년대부터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토니 쿠코치, 이 빅 3가 이끌던 팀입니다.

 

스카티와 동 포지션에서 뛰는 쿠코치를 영입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던 제리 크라우스에 대한 반발로 스카티는 이 대결을 오랫동안 이를 갈며 기다려왔습니다. 쿠코치를 완전히 셧다운시켜서 쿠코치의 사기도 떨어뜨리고 제리 크라우스 매니저에게도 한 방 먹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스카티는 드림팀 팀원들에게도 공공연히 얘길 해왔습니다. 기회만 오면 자기가 쿠코치를 완전히 묵사발 내버리겠다고... 경기 직전의 스카티를 본 칼 말론이 회고를 했죠. "스카티의 눈이 빨갛게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장난 아니더군요. 쿠코치를 죽일지도 모르겠다는 섬뜩함까지 느껴졌습니다."

 

스카티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는 승리에도, 크로아시아 팀에도 관심이 없었어요. 제 목표는 오로지 쿠코치를 셧다운시켜서 NBA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를 그에게 알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경기에서의 제 목표는 오로지 하나, 쿠코치 압살이었습니다."

 

 

경기 시작하자마자 스카티는 쿠코치에게 숨쉴 틈 조차 허락하질 않았습니다. 마치 NBA 파이널에서 상대팀 에이스를 수비하듯, 아니 그보다 더 강렬하고 숨막히는 수비를 쿠코치 한 선수에게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쿠코치가 아예 공을 못잡도록 디나이 수비를 했고, 공을 잡아도 절대 슛을 못하도록 원천봉쇄를 했습니다.

 

 

이런 수비를 경험해보지 못한 쿠코치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죠. 크로아시아 팀의 플레이메이커가 이렇게 꽁꽁 묶여버리니 크로아시아는 자신들의 전력을 펼쳐보일 수가 없었고, 페트로비치와 라쟈의 개인능력에 의존한 득점으로 간간히 경기를 진행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스카티의 활활 타오르는 적개심에 조던도 함께했습니다. 조던도 제리 크라우스 매니저에게 그리 좋은 감정을 갖고 있던 터는 아니었기에, 동료인 스카티를 도와 함께 쿠코치 타파에 동참을 한 것이죠.

 

조던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들의 쿠코치 압살이 딱히 나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쿠코치가 불스에 영입된다고 하니, 그가 과연 불스의 전력에 플러스가 될 지 시험은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우리 둘의 수비를 뚫고 자기 게임을 펼칠 수 있는 기량과 배짱이 있다면 서로간에 '윈윈'이 되는 것이고요. 그러질 못하는 수준의 선수라면 어차피 NBA 와도 스스로 도태될 테니까요."

     

 

조던은 쿠코치의 패스를 스틸로 차단해 멋진 속공덩크를 꽂는가 하면, 쿠코치가 헤지테이션 무브로 돌파해 들어가며 올린 슛마저도 블락으로 쳐내버렸습니다. 쿠코치가 코트에 있는 동안엔 이 두 선수 중 하나는 반드시 코트에 남아 쿠코치를 철저하게 대인방어 했습니다. 정말로 No Mercy...

 

토니 쿠코치는 이 경기에서 34분을 뛰며 11개의 슛시도단 두 개만을 성공시켰고, 리바운드 1개, 어시스트 5개, 그리고 무려 7개의 턴오버를 기록하며 처참함을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쿠코치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오늘 그 둘이 저를 테스트 한 건 너무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런 강렬한 수비는 유럽에서 경험한 적이 없었기때문에 제가 적응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다시 한 번 그들과 붙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때는 제가 오늘같지 않을 겁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쿠코치의 각오는 크로아시아가 그의 활약에 힘입어 결승전까지 오름으로써 현실이 될 수 있었습니다. 특히 8강전에서 호주팀을 갖고 놀았던 그의 무서운 경기력과 준결승에서 Unified Team(소련)을 상대로 보여준 그의 클러치타임 활약상은 밤새고 생중계로 지켜본 저에게도 결승전에 대한 큰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결승전에서 드림팀을 만난 쿠코치는 완전히 달라져있었습니다.

 

 

스카티와 조던의 강렬한 수비는 결승전에서도 계속됐었지만, 쿠코치는 자신의 경기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며, 그들의 수비를 뚫고 전광석화와 같은 어시스트, 그리고 기습 3점슛, 스카티를 1대1로 뚫으며 돌파 플로터까지 성공시켰습니다. 쿠코치가 살아나자 페트로비치(24점)라쟈(23점)도 살아났고, 크로아시아는 대회 참가한 국가들 중 처음으로 드림팀에게 경기다운 경기력을 선보인 팀이 되었습니다. 전반전까지 막상막하였으니까요.  

 

 

쿠코치의 풋백 덩크와 라쟈에게 넣어주는 저 그림같이 아름다운 속공패스를 보십시오.

 

쿠코치는 드림팀과의 첫 만남에서 받았던 모욕감을 완전히 되갚아주며 완벽하게 부활했습니다. 결승전에서 쿠코치는 3점슛 3개 포함 16득점, 9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자신이 왜 유럽 최고의 선수인지를 스스로 증명해냈습니다. 

 

 

시상식 때 조던이 그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죠. "Welcome to the NBA."

 

쿠코치가 조던과 스카티의 테스트에 합격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셋은 함께 쓰리핏을 일궈냈습니다. 

 

 

여담이지만, 사실 제리 크라우스는 쿠코치를 데려옴으로써 자기와 사이가 안 좋던 스카티를 밀어내거나 어떤 파워싸움을 하려던 게 아니었습니다. 불스의 트라이앵글 시스템에서는 공을 소유한 플레이메이커로서의 포인트가드가 큰 의미가 없었기에, 크라우스는 쿠코치를 장신 포인트가드에 기용하길 원했던 겁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필 잭슨 감독과 충돌이 일어났고, 결국 쿠코치는 식스맨으로서 기용이 되어야만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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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Doctor J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8.24 본인이 받은 압박이 엄청났을텐데 그걸 이겨내더군요. 강심장이란 얘기죠. 그리고 첫 경기에서 셧다운 당했고, 또 결승전에서 본인의 슛감이 좋았으니, 자존심 만회를 위해서라도 30점 가량 막 때려박고 싶었을지 모르는데, 플레이메이커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잊지 않고 팀원들 전체를 살려주는 플레이를 했습니다. 평정심도 대단한 거죠.
  • 작성자kobe_hj | 작성시간 21.08.23 90년대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분위기가 아니라 현재 같은 분위기였다면 한 단계는 더 평가가 올라갔을 선수라고 봅니다.
  • 답댓글 작성자Doctor J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8.23 두세 단계는 더 올라갔을 거예요. 당시엔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유럽에서 온 선수들은 무조건 벤치에서 나오게 하는 분위기였으니까요. 모든 차별을 극복하고 최고로 잘해봐야 베스트 식스맨...
  • 작성자Larry Legend | 작성시간 21.08.27 크로아시아와의 결승전을 보면 비슷하게 나가다가 조던, 피픈이 도베르만 모드로 수비강도를 올리며 속공으로 점수를 벌려나갔었죠.
    근데 형님, 쿠코치가 유럽에서 최고선수가 되기 시작한게 90년대 초반인가요?
    88년 올림픽에서도 그렇고 보스턴 셀틱스와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이 붙었던 88년 맥도날드 오픈에선 출전은 하지만 게임을 좌지우지할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88년~89년 즈음의 유고의 리그는 자르코 파스팔, 블라디 디바치의 파르티잔과 쿠코치와 라자의 주고플라스티카 간의 라이벌리가 치열했었죠.
    https://www.youtube.com/watch?v=pgMrUxulqgI&t=571s
    88년~89년 유고슬라비아의 농구선수 순위는 어떻게 보는게 정확할까요?
    첨부된 유튜브 동영상 동영상
  • 답댓글 작성자Doctor J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8.27 88, 89년 까지는 드라전 페트로비치를 유럽 최고로 보는게 정확하겠죠.

    쿠코치는 유고플라스티카 팀을 89년부터 91년까지 그 불가능하다던 유로리그 쓰리핏을 이뤄낸 걸로 화제의 중심이 됐고요. 물론, 파이널 4 MVP도 쿠코치가 쓸어갔고요.

    그리고 90년 세계선수권에서 유고가 미국과 소련을 꺾으며 우승, 91년 유럽선수권에서 유고가 또 우승, 그 두 대회에서도 쿠코치가 토너먼트 MVP에 선정.

    91년에 베네통으로 이적한 뒤, 유로리그와 별 관련이 없었던 이 팀을 93년 준우승으로 이끄는 괴력을 보여주기도 했고요. 준우승을 했지만 유로리그 파이널 4 MVP는 쿠코치가 받았습니다.

    1990년부터 1993년까지 4~5년 동안은 쿠코치가 명실상부한 유럽 최고의 선수였습니다.

    88~89년에 한해선 유고슬라비아 농구선수 순위를... 1. 페트로비치, 2. 쿠코치, 3. 파스팔, 4. 디바치, 5. 라쟈 순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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