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BA 스타들의 소소한 과거 이야기’ 5편 – 마 입니다.
* 평어체 양해 부탁 드립니다.
* 동영상은 유투브 펌
마 – 미드 메이저(Mid-Major)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전세계에서 가장 농구 잘하는 NBA에서도 슈퍼스타의 길을 걷고 있는 선수들 중 고등학교 때까지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메이저 컨퍼런스의 명문 대학교가 아닌 중소 규모의 미드 메이저 컨퍼런스 소속 학교로 진학한 선수들이 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최소 2시즌 이상은 여기서 갈고 닦으면서 주가를 서서히 끌어올리면서 NBA 무대까지 밟고 지금은 어떤 선수들보다 큰 돈을 만지는 빅스타가 되었다. 미드 메이저 출신 NBA 스타들은 누가 있을까.
(1) 스테판 커리(2006-2009, 데이비슨)
커리어 평균 기록 : 104경기 25.3점 4.5리바운드 3.7어시스트 야투 46.7% 3점 41.2%
주요 업적 : 2008년 NCAA 토너먼트 8강, Southern 컨퍼런스 플레이어 오브 더 이어 2회
NBA 역사상 미드 메이저 컨퍼런스 대학교 출신으로 MVP를 2회 이상 수상한 선수는 딱 3명 뿐이며 그 중 하나가 바로 스테판 커리이다.(나머지 2명 : 스티브 내쉬, 칼 말론)
NBA에서 16시즌 활약하면서 1994년에 식스맨상까지 수상한 델 커리의 아들인 스테판 커리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농구장에 드나들면서 자연스럽게 농구공을 잡고 선수의 길을 갔으나 너무나 왜소한 피지컬이 문제였다. 커리의 고등학교 시절 감독은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커리는 5-8(172.7cm)의 신장에 몸무게는 125파운드(56.7kg)에 불과했고 중학교 1학년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쯤 신장은 6-1(185cm), 몸무게는 160파운드(72.6kg)로 성장했으나 이 역시 메이저 대학교들이 보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피지컬이었다.
커리의 슈팅과 볼핸들링은 모두들 인정하는 분위기였으나 전미에서 괴물 같은 하드웨어와 운동능력을 지닌 선수들이 모이는 메이저 컨퍼런스에서 백코트 포지션이라고는 해도 커리의 이 피지컬로는 공격과 수비에서 모두 통하지 않는다고 봤고 결국 커리는 메이저 컨퍼런스 대학교의 오퍼는 전혀 받지 못하게 된다. 딱 한군데, 아버지인 델 커리의 모교인 ACC의 버지니아 테크가 오퍼를 하기는 했지만 장학금은 주지 못하는 조건이었고 결국 커리는 본인의 고향에서 불과 20마일 밖에 떨어지지 않은 데이비슨 대학교 입학을 결정한다.
이현중 선수가 3시즌 동안 몸담아서 한국 팬들에게도 친숙한 데이비슨의 감독, 밥 맥킬롭은 1989-90시즌부터 데이비슨에서만 감독직을 수행한 감독으로 지역 터줏대감이기도 했고 맥킬롭의 막내 아들인 브렌단 맥킬롭과 스테판 커리는 친구이기도 하다. 맥킬롭 감독은 커리가 10살 때 막내인 브렌단과 커리가 동네에서 야구를 하는 모습을 우연히 본 적이 있는데 이때부터 커리의 운동신경에 감탄했다고 하며 결국 이 인연이 약 10년 뒤, 커리의 리크루팅으로 이어지게 된다.
커리는 ‘친구 아빠’인 맥킬롭 감독의 무한 신뢰 속에 무럭무럭 성장한다. 커리는 대학 무대 데뷔전, 이스트 미시간과의 경기에서 15점 13턴오버로 최악의 데뷔전을 치렀지만 맥킬롭 감독은 주눅들지 말고 플레이를 맘껏 펼치라고 주문했고 결국 바로 다음 경기, 전통의 강호인 미시간 원정에서 커리는 32점 9리바운드로 대폭발하며 서서히 껍질을 깨기 시작한다.
그리고 대학농구 역사상 손에 꼽히는 원맨팀 하드캐리 8강(07-08시즌)에 이어 3학년인 08-09시즌에는 컨퍼런스 토너먼트에서 불의의 일격을 당하며 토너먼트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비약적인 어시스트 개수 증가(2.9개 → 5.6개)로 NBA에서 1번도 충분히 볼 수 있다는 것을 어필하며 결국 커리는 2009년 NBA 드래프트 전체 7번으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지명, NBA 역사에 길이 남을 레전드가 된다.
[스테판 커리 40점(3점 8개) vs 곤자가, 2008년 NCAA 토너먼트 1라운드]
(2) 데미안 릴라드(2008-2012, 위버 스테잇)
커리어 평균 기록 : 104경기 18.6점 4.3리바운드 3.5어시스트 야투 44.6% 3점 39.0%
주요 업적 : Big Sky 컨퍼런스 플레이어 오브 더 이어 2회
캘리포니아 주의 오클랜드 출신으로 오클랜드 고등학교를 다녔던 데미안 릴라드는 185cm에 75kg 정도로 왜소한 피지컬을 지닌 가드였고 ESPN, Rivals에서는 랭킹을 받지 못했고 247Sports에서만 가까스로 전미 214위를 받을 정도로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선수였다.
고교 졸업반 바로 전시즌인 고등학교 3학년(미국은 고등학교 4학년까지) 시즌에 릴라드는 리그에서 퍼스트 팀에 뽑히는 등 서서히 알을 깨기 시작하는데 이 무렵 당시 고등학교 감독이던 레이몬드 영이 본인과 절친하고 막 위버 스테잇 감독이 된 랜디 라헤 감독에게 한 통의 전화를 걸어서 이렇게 말한다. “너 팀에 포인트가드 필요하지 않아? 내가 아주 훌륭하고 그러면서 남들이 잘 모르는 가드 한 명 소개시켜 줄게.”
이 전화 한 통을 받고 조금 시간이 흐른 뒤 라헤 감독은 750마일이 넘는 거리를 날아가서 릴라드의 경기를 직관하고 그 경기가 끝나자마자 장학금 제의를 한다. 이는 릴라드 생애 첫 대학교 장학금 제의였다. 고교 졸업 시즌이 되면서 점점 더 물오른 기량의 릴라드는 미드 메이저 학교이기는 하지만 위버 스테잇에 비해 훨씬 더 인지도가 있는 명문이자 본인 고향에서 아주 가까운 세인트 메리를 포함해 산타 클라라, 보이지 스테잇 등에서도 오퍼를 받았지만 가장 처음 자신을 알아봐 준 위버 스테잇을 최종 선택한다.
참고로 위버 스테잇이 위치한 유타 주의 오그던이라는 도시는 거주민 구성 비율이 백인 60%, 히스패닉 30%에 흑인은 약 2%에 불과한 도시이며 몰몬교도의 성지로 불리는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즉, 자유분방한 캘리포니아 출신의 릴라드가 압도적인 백인 비율과 압도적인 몰몬교도들이 거주하고 있는 금욕의 도시, 오그던에서 생활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릴라드는 오그던에서의 4시즌은 나쁘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이는 릴라드의 성격에서 기인하는 바도 큰데 릴라드는 문화 충격, 흑인에 대한 편견 등은 본인이 그 도시에 온 것과 전혀 관련이 없었으며 본인은 오로지 농구만 하러 왔기 때문에 그 외의 것들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1학년 시즌, 평균 11.5점으로 예열을 마친 릴라드는 2학년 때 19.9점을 기록하며 본격적으로 알을 깨고 나왔다. 그러나 3학년 시즌, 불의의 발 부상으로 시즌 개막 후 한 달 만에 시즌아웃되는데 이 역경을 오히려 반등의 계기로 삼기도 한다. 릴라드는 라헤 감독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오히려 경기에 뛰지 못하는 이 때를 기회로 삼아 상체 웨이트에 집중해서 몸을 키우기 시작하며 휠체어에 앉아서 드리블 연습을 하면서 공을 몸에 붙이는 볼핸들링 향상의 계기로 삼는다. 4학년 시즌, 릴라드는 24.5점에 4.0어시스트, 3점 성공률 40.9%를 기록하며 2012년 드래프트에서 무려 6번 픽으로 포틀랜드에 지명받고 신인왕, 올스타 7회, All-NBA팀 7회 등 어느 메이저 컨퍼런스 출신 선수보다 화려한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다.
(3) 폴 조지(2008-2010, 프레즈노 스테잇)
커리어 평균 기록 : 63경기 15.5점 6.7리바운드 2.4어시스트 야투 44.7% 3점 39.6%
주요 업적 : -
NBA에서 무려 8번의 올스타와 6번의 All-NBA, 4번의 디펜시브팀까지 최고의 공수겸장 포워드이자 특유의 간결하고 멋드러진 슛폼까지 갖춘 인기스타, 폴 조지는 의외로 메이저 컨퍼런스 대학 출신이 아니다.
폴 조지를 고등학교 때 가장 먼저 리크루팅한 학교는 페퍼다인이었다. 페퍼다인은 여자 농구팀에서 이미 폴 조지의 누나가 활약하고 있었고 이 때의 인연으로 폴 조지 역시 페퍼다인의 제안을 받아들여 입학이 유력했으나 조지를 리크루팅한 감독이 갑자기 사임을 하였고 폴 조지는 페퍼다인에서 디커밋(입학을 취소하는 것)한다.
그리고 폴 조지는 그의 모든 고등학교 경기를 직관하러 왔던 프레즈노 스테잇의 코칭 스태프들을 떠올리게 된다. 프레즈노 스테잇으로 최종 행선지를 결정하기 전에 캠퍼스를 방문한 조지는 다른 어떤 것보다 집에서 가까워서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조지의 고향인 펌데일에서 프레즈노 스테잇까지는 약 200마일(서울-대구 정도 거리) 떨어져 있고 차로 3시간 정도면 올 수 있는 거리이기 때문에 부모님들이 경기를 보러 오기 편할 것 같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200마일을 코앞에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미국의 클라스..^^)
폴 조지의 당시 감독이던 스티브 클리블랜드는 폴 조지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농구적으로 엄청난 운동능력과 세련된 스킬 등 높은 실링을 지닌 선수가 폴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그를 빛나게 했던 건 워크에틱이었어요. 그는 놀랍도록 진지한 태도로 농구에 임했고 누구보다 좋은 동료였으며 리더였죠. 팀 내에서 가장 농구를 잘하는 에이스였음에도 이기적이거나 무리한 플레이를 하지 않는 선수였습니다.”
폴 조지가 뛴 2시즌 동안 프레즈노 스테잇은 모두 5할 승률에 미치지 못했고 당연하게도 토너먼트 역시 참가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 조지는 전체 10번 픽으로 Top 10 픽으로 NBA 무대를 밟았으며 프레즈노 스테잇은 조지의 24번을 영구결번했다. 프레즈노 스테잇 농구 역사상 2번째 영구결번이었이며 나머지 1명은 NCAA의 전설적인 감독이자 무려 1950년대에 선수생활을 한 제리 타캐니언.
[폴 조지 올해의 덩크 vs 세인트 메리]
* NCAA 데뷔 2경기 만에 터뜨린 이 덩크는 전미에 폴 조지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4) 카와이 레너드(2009-2011, 샌디에이고 스테잇)
커리어 평균 기록 : 70경기 14.1점 10.2리바운드 2.2어시스트 야투 44.9% 3점 25.0%
주요 업적 : MWC 플레이어 오브 더 이어(2010), 2011년 NCAA 토너먼트 16강
내구성은 많이 아쉽지만 샌안토니오와 토론토에서 각각 파이널 MVP와 우승을 거머쥐면서 코트에 나오기만 하면 그 누구보다 위력적인 포워드, 카와이 레너드는 남부 캘리포니아(LA 인근)에서 농구로 이름을 떨치던 마틴 루터 킹 고등학교에서 에이스로 활약했지만 Pac-12의 명문대(UCLA, USC, 애리조나, 애리조나 스테잇 등)들로부터 장학금 제의를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레너드가 고등학교에서 뛰던 시절만 해도 ‘트위너’라는 좋지 못한 뉘앙스의 단어로 비하받던 3.5번이기 때문이었으며 레너드는 6-6의 신장으로 4번으로 보기에는 신장이 작고 3번을 보기에는 퍼리미터에서의 공격 기술이 투박하다는 이유로 명문대들로부터 외면받았다.
지금 ‘빅 윙’이라고도 불리는 3.5번들이 각광받는 트렌드를 감안하면 10년만 늦게 태어났어도 레너드는 샌디에이고 스테잇이 아닌 UCLA나 USC에서 뛰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미래의 레전드가 될 카와이 레너드를 샌디에이고 스테잇의 당시 감독인 스티브 피셔와 코치였던 브라이언 도처(현 샌디에이고 스테잇 감독)는 정확히 알아봤다. 미시간에서 약 10년, 샌디에이고 스테잇에서는 약 20년, 도합 약 30년의 시간을 감독-코치로 호흡을 맞춘 이 둘은 레너드의 고교 시절 플레이를 보고 미시간이 배출한 스타, 크리스 웨버를 떠올렸다고 한다. 물론, 신장과 포지션에서 웨버와는 다른 레너드지만 그들은 본인들이 지도한 수많은 대학생들 중에서 웨버 이후 그렇게 ‘큰 손’을 가진 선수는 처음 봤다고 하며 농구라는 스포츠에서 큰 손이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점을 고려할 때 레너드는 충분히 대성할 수 있는 스타의 자질을 갖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레너드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 매우 과묵한 학생이었지만 똑똑하며 거친 언어도 거의 쓰지 않고 차분하게 연습에만 몰두하는 워크에틱 역시 피셔 감독과 도처 코치의 쏙 들었다고 한다. 결국 레너드는 2학년 시즌에 15.5점 10.6리바운드 2.5어시스트 1.4스틸이라는 공수에서 팀을 하드캐리했고 샌디에이고 스테잇은 이 시즌에 학교 역사상 가장 높은 시드인 2번 시드를 받으며 토너먼트에 진출한다. 이 2번 시드는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학교 역사상 가장 높은 시드이며 비록 16강에서 켐바 워커의 유콘에게 덜미를 잡히며 16강에서 토너먼트 행진은 막을 내렸지만 레너드는 이때의 활약을 바탕으로 NBA 드래프트 전체 15번으로 샌안토니오 유니폼을 입게 되고 3년차에 파이널 MVP까지 받는 5년차에 올스타에 선정, 올스타 5회, All-NBA팀 5회, DPOY 2회 등 화려한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다.
[켐바 워커 vs 카와이 레너드 듀얼 하이라이트, 2011년 NCAA 토너먼트 16강]
(5) 파스칼 시아캄(2014-2016, 뉴 멕시코 스테잇)
커리어 평균 기록 : 68경기 16.6점 9.7리바운드 1.5어시스트 야투 55.1%
주요 업적 : WAC 플레이어 오브 더 이어(2016)
카메룬 국적의 파스칼 시아캄은 3명의 형이 모두 NCAA 디비전 I에서 뛴 완전한 농구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이 형제들 중 유일하게 NBA 선수가 된 시아캄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어렸을 때는 형제 중 가장 농구에 흥미가 없었던 아이였다고 한다. 하지만 6-7의 형들과 달리 키가 6-9까지 크면서 NCAA, NBA 등 상위 레벨에서 4번으로 뛰기에 적절한 신장까지 자라면서 결국 유일한 NBA 리거이자 올스타가 되었다.
시아캄은 NBA에서 밀고 있는 ‘국경 없는 농구 캠프’에서 카메룬 출신이자 NBA 커리어 700경기 가까이 뛴 선배, 룩 음바 아무테에 의해서 발굴되었으며 시아캄은 그때만 해도 본인 스스로 축구 선수라고 생각했으며 농구는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점점 더 농구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결국 미국 땅까지 밟게 되었다고 회상하였다.
시아캄 4형제는 독특하게 모두 미국의 각각 다른 주에서 고등학교 유학 생활을 했고 대학교 역시 모두 다른 곳으로 갔다. 막내였던 파스칼 시아캄은 텍사스의 God’s Academy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했고 좋은 사이즈와 포텐셜은 있었지만 농구 구력이 너무 짧고 이로 인한 투박한 스킬로 명문 대학에서 큰 인기를 끌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비미국 출신을 대거 리크루팅하는 것으로 유명한 뉴 멕시코 스테잇 감독, 마빈 멘지스가 매의 눈으로 시아캄을 찾아냈고 시아캄은 뉴 멕시코 스테잇으로 입학하게 된다.
시아캄 형제의 고등학교 / 대학교
보리스 시아캄 : Caverna High School(켄터키 주) / 웨스턴 켄터키(켄터키 주)
크리스티안 시아캄 : Harmony Community(오하이오 주) / IUPUI(인디애나 주)
제임스 시아캄 : Brehm Prep(인디애나 주) / 반더빌트(테네시 주)
파스칼 시아캄 : God’s Academy(텍사스 주) / 뉴 멕시코 스테잇(뉴 멕시코 주)
시아캄이 뛸 당시 뉴 멕시코 스테잇 로스터는 오히려 미국 선수를 찾기가 힘들 정도로 카메룬, 캐나다, 프랑스, 멕시코, 콜롬비아 선수들이 포진한 다국적 군단이었으며 여기서 군계일학의 활약을 펼친 시아캄은 2016년 NBA 드래프트 전체 27번으로 토론토 랩터스에 지명받는다. 당시 시아캄을 지명한 NBA 최고의 단장 중 하나로 꼽히는 마사히 유지리 단장은 시아캄이 국경 없는 농구 캠프에 참가했을 당시에 현장에 있었던 인물이며 시아캄의 노력하는 자세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유지리는 드래프트 참가 당시만 해도 원석에 가까웠다고 평가받았던 시아캄을 과감하게 1라운드에서 지명하였고 이는 토론로 랩터스 프랜차이즈 역사상 첫 우승의 발판이 되는 대성공으로 이어진다.
(6) 자 모란트(2017-2019, 머레이 스테잇)
커리어 평균 기록 : 65경기 18.7점 6.1리바운드 8.2어시스트 야투 48.5% 3점 34.3%
주요 업적 : 2019년 NCAA 토너먼트 32강, OVC 플레이어 오브 더 이어(2019)
최근에는 좋은 쪽보다는 안 좋은 쪽 이슈가 많은 자 모란트는 그러나 3스타 선수로써 고교 졸업 당시에 거의 관심을 끌지 못하던 선수에서 NBA 드래프트 2번 픽 지명, 3년차에 첫 올스타 선정까지 드라마틱한 커리어를 밟아온 선수이다.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도 아주 작은 마을인 달젤에서 나고 자란 모란트는 스테픈 커리처럼 기술적으로는 흠잡을 데가 없는 선수였지만 왜소한 체격에 운동능력 역시 고등학교 때까지는 평범한 선수였다.(지금의 모란트를 보면 상상할 수 없겠지만 고교 졸업 시즌 때까지 덩크도 못했다고 한다.)
모란트가 머레이 스테잇으로 커밋한 이유는 조금은 단순하고 모란트다운 결정이기도 했다. 2016년 여름, 제임스 케인 머레이 스테잇 어시스턴트 코치가 다른 선수를 보기 위해서 방문한 체육관에서 우연히 자 모란트가 3대3 게임을 뛰고 있는 모습을 봤고 여기에 감명받은 케인 코치가 바로 맷 맥마흔 당시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그 즉시 장학금 제의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약 1개월 뒤인 2016년 9월 3일, 모란트는 머레이 스테잇을 방문했고 맥마흔 감독과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바로 입학을 결정한다.
모란트의 이 선택이 놀라웠던 이유는 모란트의 고향에 위치한 메이저 학교, 사우스 캐롤라이나 역시 모란트에게 장학금을 줄 의향이 있으며 학교 방문 요청을 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란트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에 비해 규모나 학생 수(머레이 스테잇의 전교생 수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1/5 수준이다.)에서 현저하게 작고 켄터키 주 내에서도 완전 시골에 위치했으며 본인 고향에서 600마일이나 떨어져 있어 차로 10시간은 가야 하는 머레이 스테잇을 선택한 것이다. 모란트는 그 이유에 대해 나를 가장 필요로 하는 학교이자 내 고향과 비슷하게 시골에 위치했으며 캠퍼스에 발을 딛는 순간 운명처럼 이 학교라는 것을 느꼈다는 다소 감성적인 인터뷰를 한 바 있다.
모란트의 그 이후 행보는 모두가 아는 그대로다. 1학년 시즌에 12.7점 6.3어시스트로 가능성을 보여준 모란트는 2학년 때 무려 24.5점 10.0어시스트로 대학 농구에서 정말 나오기 어려운 평균 20-10을 기록하면서 팀을 토너먼트에 올려놓았고 토너먼트 1라운드, 빅 이스트의 마켓과의 경기에서 17점 11리바운드 16어시스트로 트리플 더블을 기록하면서 12번 시드의 머레이 스테잇을 2라운드까지 올려놓는다.
NBA 드래프트에서 본인이 나온 머레이 스테잇과 불과 168마일 떨어진 멤피스 그리즐리스에 지명을 받으며 그쪽 출신은 아니지만 홈타운 보이를 방불케 하는 사랑을 받고 있는 자 모란트. 순박했던 초심을 되찾아서 이제 사고 좀 그만 치길..기원해 본다.
[자 모란트 17점 11리바운드 16어시스트 vs 마켓, 2019년 NCAA 토너먼트 1라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