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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A.D." Adrian Dantley를 말한다

작성자Doctor J|작성시간08.04.09|조회수1,908 목록 댓글 27

 

 

2008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애드리안 댄틀리’, 그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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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47. 농구 레전드, 하킴 올라주원과 패트릭 유잉, 명장 팻 라일리 감독, ESPN 농구 해설가 딕 비테일 씨, Immaculata 대학 감독 캐씨 러쉬 씨,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의 구단주 빌 데이비슨 씨와 함께 농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애드리안 댄틀리 (Adrian Dantley). 7개의 농구 구단에 몸 담으며 15 시즌의 NBA 커리어를 보낸 레전드 스몰포워드였습니다.

 

별명이 A.D.였던 댄틀리는 노트르댐 대학 시절부터 전국적으로 각광을 받았던 공격수였는데, 공식 신장은 195cm라고 나오지만 실제 신장은 193cm정도였습니다. 대학 3, 4학년 때는 평균 30점의 득점력에 매경기 10개씩의 리바운드를 잡아내며 만장일치로 All-American Team에 뽑혔고, 4학년이던 1976년에는 대학 최우수선수 상을 받았던 선수입니다. 1973년에는 신입생의 신분으로 팀을 이끌며, 당시 연승가도를 달리던 존 우든 감독과 빌 월튼의 UCLA를 업셋하는 큰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작은 신장에 비해 많이 나가는 몸무게(110kg)로 놀림도 많이 받았습니다. 댄틀리의 대학 시절의 몸 움직임은 마치 점프력없는 찰스 바클리를 보는 것과 같았습니다.

 

댄틀리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때, 미국 대표팀의 에이스이자 주장으로서 올림픽 토너먼트 7게임에서 평균 19.3점을 기록했고, 유고슬라비아와의 결승전에서는 32점을 득점하며 조국에 금메달도 안겼습니다. 댄틀리는 당시 일약 최고의 농구스타로 떠올랐고, 드래프트 전체순위 6번으로 버펄로 브레이브즈 ( L.A. 클리퍼스의 전신)에 의해 프로에 입문했습니다. 신인으로서 20.2점에 52%의 야투율을 기록한 그는 만장일치로 최우수 신인상도 거머 쥡니다.

 

하지만 당시 버펄로 구단주였던 존 브라운 씨가 팀의 구성원을 ABA 출신으로 채워 넣으려 한 전대미문의 희한한 정책을 펼치면서, 댄틀리는 인디애나로 잠시 트레이드 됐다가, 곧바로 압둘자바가 버티고 있던 레이커스에 새둥지를 트게 됩니다. 1977년부터 1979년까지, 댄틀리와 올스타 포워드 자말 윌크스, 그리고 뛰어난 포인트가드 놈 닉슨거기에 MVP 압둘자바까지 버티고 있던 레이커스의 위용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그 호화진용의 틈새에서도 댄틀리는 꾸준히 20점 이상 씩을 득점해 줬습니다.

 

1979, 매직 존슨을 드래프트하기로 작정하고 있던 레이커스는 댄틀리의 하프코트 오펜스가 팀의 칼라에 적합하지 못 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댄틀리는 또 다시 트레이드 되어야만 했지요. 대학 최고의 스타로서 조국에 올림픽 금메달을 안겼고, 매 시즌 20점 씩을 득점해 주던 댄틀리는 프로 첫 4시즌 동안에 팀을 4번이나 바꿔야 했던 팔자가 기구한 사나이였습니다. 하지만 80년 시즌을 앞두고 트레이드 된 유타에서부터 그의 진면목이 만천하에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1986년까지 유타에서 7시즌을 보낸 댄틀리는 6시즌 동안 올스타게임에 출전을 했고, 81년과 84년에는 득점왕의 자리에도 오릅니다. 81년부터 84년까지는 연속으로 평균득점 30점을 기록했던 득점기계였습니다. All-NBA Second Team에도 두 차례 이름을 올렸지요. 동포지션 역대 최고 1, 2위에 이름을 올리는 래리 버드와 줄리어스 어빙이 동시대에 활약을 하는 바람에 All-NBA First Team에는 들어가 보지를 못했습니다. 팀의 에이스로서, 그리고 정신적인 지주로서, 댄틀리는 허접한 팀이었던 유타 재즈를 승률 5할 이상의 팀으로 만들었고, 플레이오프에도 꾸준히 진출시켰습니다.

 

이 전성기 시절의 댄틀리의 공격옵션은 다양했습니다. 풋워크가 워낙에 뛰어났고, 퍼스트스탭의 타이밍이 빨랐어서 페이크 동작에 이은 페네트레이션을 주 공격 옵션으로 사용했습니다. 상체의 강인함 또한 대단해 웬만한 센터들과의 몸싸움에서도 우위를 점하곤 했습니다. 외곽슛까지 뛰어 났어서 그를 수비하는 선수들은 그를 거리를 두고 수비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신장에 비해 팔다리가 길어서 수비에 조금의 틈만 보이면 성큼성큼 보폭을 늘여 양 손을 모두 이용한 훅슛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했습니다.

 

이러다 보니 수비수로서는 댄틀리가 페인트존에 들어오면 무조건 파울을 해야만 했고, 댄틀리는 자유투 제조기로서의 명성도 떨치게 되지요. 자유투 시도 회수에서도 6번이나 리그 수위를 차지했던 선수가 바로 댄틀리입니다. 자유투를 만들어 내는 기술에 있어서도, 당시에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모제스 말론의 기술과 자웅을 다투던 선수였습니다. 지금 현역 선수들 중에는 많은 부분에서 폴 피어스가 가장 흡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빈 자리를 찾아 삐집고 들어가 레이업이나 훅슛, 또는 자유투를 만들어 내는 능력은 마누 지노빌리와 비슷한데.... 만약 피어스가 더 저돌적으로 안으로 치고 들어가며 파울까지 자주 만들어 낸다면, 당시의 댄틀리와 상당히 비슷한 포스를 뿜어낼 것 같습니다 

 

댄틀리가 전성기를 한창 구가할 즈음에, 그는 또 다시 트레이드 물망에 오릅니다. 칼 말론과 존 스탁턴을 주축으로 새롭게 팀을 리빌딩하려던 유타 구단 정책의 희생양이 된 것이죠. 말론과 활동공간이 많이 겹쳤기 때문에 유타 측에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영입한 팀은 서서히 Bad Boys로서의 악명을 높이기 시작하던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였습니다. 당시 피스톤스는 아이재야 토마스와 조 듀마스, 비니 존슨의 외곽공격과 철저한 팀 수비를 통해 최정상 팀인 버드의 보스턴 셀틱스를 끌어 내리려 하던 신흥강호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센터였던 레임비어마저도 주 공격옵션이 3점슛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인사이드에서 비벼대며 공격의 물꼬를 틀어줄 선수가 필요했던 것이죠. 댄틀리는 그들에게 있어서 안성맞춤인 스몰포워드였습니다.

 

댄틀리의 영입은 피스톤스를 당장에 챔피언 컨텐더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인사이드에서 꾸준히 20점 이상을 득점해주는 댄틀리 효과로 인해 피스톤스는 87년에 컨퍼런스 파이널, 그리고 88년에는 NBA 파이널까지 진출합니다. 비록 87년에는 5차전 막판의 래리 버드의 스틸에 분루을 삼켰고, 88년에는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매직 존슨의 레이커스에 우승컵을 내주었으나, 이 두 포스트시즌에서의 댄틀리의 활약은 엄청났었습니다. 그리고 피스톤스는 그 여세를 몰아 89년과 90년에 백투백 우승을 합니다. 하지만 그 백투백 우승팀에는 댄틀리가 빠져 있었죠. 서서히 노쇠화를 보이기 시작한 그가 1989년 시즌 도중에 댈러스의 마크 어과이어와 트레이드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댄틀리는 79년에 트레이드되면서 80년 레이커스 우승팀 스쿼드에서 빠졌고, 88년에 트레이드되면서 89년 피스톤스 우승팀 스쿼드에서 빠진 것입니다. 기가 막힐 정도로 그는 우승을 비껴 다녔습니다.

 

16년을 NBA에서 뛰면서 7개의 팀을 전전했던 언더사이즈 스몰포워드, 에드리안 댄틀리. 그의 커리어 평균은 24.3점, 5.7리바운드고, 야투율은 54%, 그리고 자유투 성공률은 81.8%입니다. 그의 커리어 야투율은 NBA 역대 16위에 랭크되어 있습니다. 자유투 시도에 있어서도 리그 1위를 6회나 차지했던 댄틀리는 체임벌린과 함께 한 게임 자유투 성공 공동 1위 기록 (28)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매 경기 8.7개의 자유투를 유도해냈고, 그 중 7.2개를 성공시켰습니다.

 

그의 #4 져지는 2007 4 11일에 유타 구단에 영구결번 처리가 됐지요.

 

그리고 일년이 지난 2008 4 7 - 은퇴를 하고 무려 16년이 지난 후, 드디어 그의 이름이 명예의 전당에 오른 것입니다. 참 오래도 걸렸습니다. 만약 1988~89 시즌 중간에 있었던 트레이드가 없었다면, 그래서 댄틀리가 피스톤스 백투백 우승의 주역으로 남았었다면, 이러한 기다림의 시간은 많이 줄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안 해 볼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평생소원이 세 가지 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던 댄틀리. 그의 세 가지 소원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것.

2. NBA 매니저나 감독이 되어서 자기만의 색깔의 팀을 구성해 보는 것.

3. 100살까지 사는 것. 

이제 1번은 이뤘고, 2번도 머지 않아 이뤄질 것 같습니다. 현재 덴버 너겟츠의 수석코치죠. 3번은 모르겠고... 선수시절에 하도 많이 얻어 맞았던 선수였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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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신장에도 불구하고, 탄탄한 기본기와 거침없이 파고드는 배짱을 바탕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터프가이, 애드리안 댄틀리. 당신의 명예의 전당 입성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글: Doctor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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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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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Doctor J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8.04.11 위에 좋은 댓글들을 달아주신 모든 회원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들 같이 글쓴이에 대해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는 마음이 따뜻한 분들이 계셔서, 저도 없는 시간을 쪼개어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작성자bin96 | 작성시간 08.04.12 항상 즐겁게 잘 보고 있습니다.
  • 작성자FOREVER AIR JORDAN | 작성시간 08.04.12 닥터 J님 정말 감사합니다 많은 좋은 글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이클 조던의 명예의 전당행이 기다려지네요^^ 아이재아 토마스의 입김이 엄청 셌네요 피스톤스.. 요즘 선수들 보면 기본기 보다는 하이라이트를 만들려고 하는거 같네요. 댄틀리 선수 정말 대단하네요 그키에 20-10을 대학때 찍었다고 하니 말이 안나오네요. 닥터 J님 역시 이 카페의 Hall of Famer And NBA Master 이시네요 닥터 J님 제 개인적인 표현인데요 NBA Master of Master And King of King이십니다. 최고!!
  • 작성자폴[烈] | 작성시간 08.04.23 80년대 말에 댄틀리의 활약상이 갑자기 막 떠오르네요. 좋은 글 감사 합니다.
  • 작성자nirvana | 작성시간 08.05.08 좋은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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