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감독 걸작선> 6. 버닝 - 원인을 찾지 못한 분노가 원인을 만들 때

작성자로더리고|작성시간26.10.21|조회수226 목록 댓글 2

택배 알바로 생계를 잇는 소설가 지망생 앞에, 어느 날 한 남자가 자기 취미는 남의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일이라고 털어놓습니다. 그 직후 한 여자가 사라집니다. 청년은 단서를 모으기 시작합니다. 시계, 고양이, 비닐하우스. 그런데 이 단서들 가운데 증거가 되는 것은 하나라도 있는가. 범인이 있기는 한 것인가.

 

 


버닝을 '사라진 여자를 찾는 스릴러'로만 읽으면 절반만 보는 셈입니다.

 

이창동은 인터뷰에서 포크너의 소설에는 세상의 고통에 분노한 아버지가 남의 헛간을 태우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아버지의 분노가 아들의 분노로 옮겨가는 이야기가 이 시대 젊은이들의 이야기와 가깝다고 봤다고 말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감정은 세상은 점점 좋아지는데 나는 미래가 없는 것 같다는 것이고, 그들에게는 이 세계 자체가 미스터리일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분노는 있는데 그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점이 과거와 다른 문제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영화의 진짜 미스터리가 해미가 어디 있는가가 아니라, 원인을 알 수 없는 분노가 어디에 붙는가라고 읽습니다.

 

 


경기도 파주에 홀로 사는 종수(유아인)는 대학을 졸업하고 군 복무도 마쳤지만, 소설을 쓰겠다며 유통회사 알바생으로 생계를 잇습니다. 축산업을 하던 아버지는 공무원을 폭행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 중이고, 어머니는 오래전 집을 나갔습니다. 배달을 갔다가 어릴 적 같은 동네에 살던 해미(전종서)를 만난 종수는, 내레이터 모델 아르바이트를 하는 해미가 아프리카 여행을 떠나는 동안 고양이 보일을 돌봐 주기로 합니다. 하지만 보일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밥과 물만 줄어듭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해미는 공항에서 아프리카에서 만났다는 벤(스티븐 연)을 소개합니다. 고급 주택에 살며 포르셰를 모는 벤은 특별한 직업이 없습니다. 어느 날 종수의 파주 집에서 대마초를 피우던 벤은 자기 취미가 두 달에 한 번씩 남의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일이라고 털어놓고, 그 뒤 해미가 사라집니다. 종수는 동네의 비닐하우스를 찾아 뛰어다니고 벤을 뒤쫓다가, 벤의 집에서 해미의 것으로 보이는 손목시계를 보고 보일이라는 이름에 반응하는 낯선 고양이를 봅니다. 영화는 종수가 벤을 죽이고 불태우는 것으로 끝납니다.

 

 

 

버닝은 시 이후 8년 만의 이창동 신작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가 원작이고, 같은 제목의 윌리엄 포크너 단편의 영향이 더해졌습니다. 이창동은 이 영화를 하루키의 세계에 사는 젊은 포크너의 이야기로 요약한 적이 있다고 전해집니다.

 

제71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한국 영화로는 유일하게 경쟁 부문에 초청됐고, 5월 16일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됐습니다. 영화 전문 매체 스크린 데일리의 평점 집계에서 10개 매체 중 8곳이 만점을 주며 3.8점으로 역대 최고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전 최고점은 2016년 토니 에드만의 3.7점이었습니다. 그러나 본상은 받지 못하고 국제비평가연맹(FIPRESCI)상을 받았습니다. 황금종려상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이 가져갔습니다. 이창동은 칸에서는 호불호가 갈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다들 좋아했고, 국내외 온도 차가 예상보다 커서 그 의미를 생각하게 됐다고 했습니다.

 

이후 로스앤젤레스영화평론가협회와 토론토영화평론가협회에서 외국어영화상을 받았고, 스티븐 연은 남우조연상을 받았습니다. 2018년 12월에는 한국 영화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예비후보 9편에 올랐습니다. 해미 역의 전종서는 영화 출연 경험이 없는 신인으로, 수개월에 걸친 오디션으로 뽑혔습니다. 이창동은 속을 알 수 없는 모습에서 이 사람밖에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했고, 스티븐 연에 대해서는 신비한 매력이 벤과 묘하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종수가 모으는 단서는 모두 흔적일 뿐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벤이 비닐하우스 이야기를 한 직후에 해미가 사라졌다는 시간적 일치, 벤의 집에서 본 시계, 보일이라는 이름에 반응하는 고양이가 그렇습니다. 씨네21의 한 평론이 짚듯, 이 단서들과 종수의 해석 사이에는 괴리가 있습니다. 해미가 어릴 때 빠졌다가 종수가 구해 줬다는 우물도 종수는 기억하지 못하고, 보일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밥만 줄어듭니다. 이 영화에서 종수가 붙드는 것은 하나같이 직접 확인하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종수 곁의 두 사람은 비어 있음을 다루는 방식이 다릅니다. 해미는 팬터마임으로 없다는 것을 잊으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고, 같은 평론은 이를 해미가 삶의 의미에 굶주린 그레이트 헝거를 꿈꾸기 위해 결핍된 현실을 잊는 방식으로 읽습니다. 벤은 없다는 걸 잊는 사람이 아니라,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깨끗이 태운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종수가 열어 보는 비닐하우스들은 모두 텅 비어 있고, 비어 있음을 잊지도 즐기지도 못하는 사람이 종수입니다. 나무위키의 해석 항목은 종수가 비닐하우스와 진실을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고 무관심했다면 아무 일도 없었겠지만, 실체를 계속 찾았기에 집착과 분노가 생겼다고 읽습니다. 저는 이 영화에서 분노가 비어 있음을 견디지 못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봅니다.

 

그 분노가 향하는 곳이 벤입니다. 같은 평론은 이 전환을 면접장 장면에서 읽습니다. 대마초를 피운 밤 종수는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황홀하게 바라보는 꿈을 꾸지만, 이어지는 면접장에서 자신의 처지에 어울리는 것은 불태우는 쪽의 재미가 아니라 쓸모없고 불필요해져 버려지는 비닐하우스임을 깨닫고, 그 직후부터 벤과 자신을 대립 관계에 놓는다는 것입니다. 이 평론은 벤에게 책임을 묻는 일이 분노의 폭발을 합리화하는 알리바이일 수 있다고 읽고, 나무위키 해석 항목은 벤을 쫓다 끝내 죽이는 것을 실체를 아는 사람이 없는 세상에서 종수가 자기 결론을 내리는 일로 읽습니다. 파주에 홀로 사는 알바생 종수와 고급 주택에 살며 포르셰를 모는 벤은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종수가 이름과 얼굴을 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가진 쪽'입니다.

 

반대 읽기도 있습니다. 한 결말 해설은 벤이 해미를 해쳤다고 읽으면 이 결말은 복수이고, 벤이 해미의 실종과 무관하다고 읽으면 아버지의 분노를 물려받은 종수의 섣부른 판단이 저지른 범죄라고 정리합니다. 저는 어느 쪽이 맞는지보다, 영화가 어느 쪽도 확정해 주지 않는다는 점이 이 영화의 구조라고 읽습니다. 확정되지 않기에 종수는 원인을 모르는 분노에 벤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고, 관객은 그 이름이 맞는지를 끝내 확인하지 못합니다.

 

종수는 소설가 지망생입니다. 한 리뷰는 해미의 텅 빈 방에서 종수가 소설을 쓰기 시작하고, 이어지는 장면이 종수가 쓰는 소설처럼 보인다고 읽습니다. 나무위키의 해석 항목은 종수가 소설을 쓰는 것을 자신이 써야 할 것을 찾았고 분노의 원인을 스스로 진단했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결말이 실제 살인이었는지 소설 속 장면이었는지를 열어 두는 읽기도 있고, 저는 이 열림이 이 영화의 정직함이라고 봅니다. 시의 미자에게 쓰는 일은 외면하고 싶은 것을 받아 적는 일이었고, 버닝의 종수에게 쓰는 일은 원인을 만들어 내는 일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은 뒤 소설을 쓰기 시작한 종수는 마지막에 칼 수집가인 아버지의 칼로 벤을 찌르고 불태웁니다. 같은 평론은 이 결말에서 아버지가 자신의 분노를 실현해 줄 아들을 얻는다고 읽고, 나무위키의 해석 항목도 이 칼을 부모 세대의 분노가 자녀 세대로 이어지는 상징으로 봅니다. 이창동이 말한 포크너의 구도, 곧 아버지의 분노가 아들의 분노로 옮겨가는 이야기가 화면에서는 칼로 닫히는 셈입니다.

 

연기는 표현을 덜어내는 쪽으로 설계돼 있습니다. 이창동은 유아인이 지금까지 감정을 드러내는 연기를 주로 했는데 이 영화에서는 감정이 대부분 보이지 않는다고 했고, 종수는 퍼포먼스 자체가 없는 인물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유아인도 이전에는 너무 외향적이었는데 이번에는 거기서 벗어났고, 감독이 느낌 위주로 있는 그대로 하라고 했다고 말했습니다. 해미의 노을 속 춤은 촬영감독 홍경표의 인터뷰에 따르면 촬영 전날 딱 한 번 해 봤고, 감독은 전종서에게 느끼는 대로 춤을 추라고 주문했습니다. 윗옷을 벗고 노을을 배경으로 새처럼 춤추던 해미는 흐느끼는 것으로 춤을 끝냅니다. 해미는 속을 알 수 없는 인물로 뽑혔고 벤은 신비한 매력으로 캐스팅됐으니, 두 사람의 설명되지 않음은 종수의 의심을 키웁니다. 종수 자신의 설명되지 않음은 반대로 관객이 그의 분노를 미리 읽지 못하게 합니다.

 

시대의 좌표도 이 구도 안에 있습니다. 이창동은 종수나 해미 같은 처지의 청년 이야기가 벤의 세계에 가까운 칸 영화제의 붉은 카펫에서 공개된 것이 아이러니하다고 했고, 국내 극장에서는 슈퍼히어로가 세상을 구원해 주는 마블 영화와 맞붙어 처절하게 졌다고도 했습니다. 종수 같은 사람의 이야기가 벤의 세계에서는 전시되고 대중의 극장에서는 밀려난 셈으로 읽힙니다.

 

 


초록물고기의 막동은 사라진 개울을, 박하사탕의 영호는 짓밟힌 순수를, 오아시스의 종두와 공주는 벽에 걸린 그림을, 밀양의 신애는 빼앗긴 용서를 붙잡으려 했고, 시의 미자는 먼저 떠난 희진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앞선 영화들의 인물에게는 대체로 가리킬 수 있는 대상이 있었습니다. 종수는 보일도 우물도 해미의 행방도 직접 확인하지 못한 채 아버지의 칼로 벤을 찌르고 불태웁니다. 저는 버닝이 앞선 영화들과 달리, 분노가 붙을 이름을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인물을 그린 영화라고 읽습니다. 비어 있는 것을 태우는 일이 분노를 끝낼 수 있는가. 영화는 그 불이 꺼진 뒤에도 답을 주지 않습니다.

 

 

 

 

 

작성자 로더리고

 

사진 및 움짤 출처 구글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SenesQ | 작성시간 26.10.22 잘 읽었습니다. 뭐지 아리송하네 했던 느낌 그대로네요.
  • 작성자Shaq34 | 작성시간 26.10.23 new 원인을 알수없는 분노라는 부분에 특히 공감합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