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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전칠기심포지엄-통영나전칠기, 회고와전망-3

작성자바위|작성시간11.08.26|조회수248 목록 댓글 0

       나전칠기심포지엄-통영나전칠기, 회고와전망-3

                                                         발제자 발제 내용

우리 칠 예술의 소회

칠화칠장 양유전

1. 통영 나전칠기 맥에 대하여

김봉룡 선생님께서는 1902년 1월 30일 충무시 도천동에서 태어나셨으며, 송주완 선생님께서는 1901년 12월 16일 충무시 문화동에서 태어 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분 모두 박정수씨 문하에 입문하여 사사 받았으며, 전성규씨를 만난 것은 통영군립공업전습소에서 제자로 입문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두 분의 도안집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당초무늬는 김봉룡 선생님의 특기이며, 산수 끊음질은 송주완 선생님의 특기입니다.

특별한 것은 두 분 모두 화필에 의한 필법을 따랐기 때문에 화법을 모르면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작품들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이것은 전성규씨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송주완 성생님께서는 통영에 남아 가정에 헌신하시며 통영의 나전칠기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신 것으로 압니다. 선생님께서 만드신 작품은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도안집에서 본 도안은 산수화의 여백의 미를 뚜렷이 볼 수 있습니다. 그 동안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셨으며 돌아가실 때까지 큰 욕심 없이 작품 제작에 전념하셨다고 합니다.

김봉룡 선생님께서는 젊은 시절 통영에서 활동하시면서 경제적으로 많은 고생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끼니조차 해결할 수 없었던 시기로 봅니다.

1968년 원주 칠공예 주식회사의 초빙으로 공예부장에 취임하면서 원주로 가족과 함께 이주하게 됩니다. 원주에 오신지 1년 만에 칠공예 주식회사의 화재로 사임하게 되었으며 그 해 서라벌 예술대학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전통나전칠기 실습 강의를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원주에 계시면서 대학에 나전칠기 학과를 두어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뵌 것은 통영에 사시던 선생님 제자분의 주선으로 1974년 10월에 선생님 문하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선생님을 뵌 느낌은 한마디로 멋쟁이셨습니다. 하얀 수염에 흰 한복과 흰 고무신이 잘 어울리셨습니다. 어디를 가시든 한복 차림이었습니다. 정도 많으셨고요.

하지만 생활은 넉넉한 편은 아니셨습니다. 작품을 팔아서 제자들 월급대기에 급급하셨습니다.

다른 공방보다 월급이 많았습니다. 이것을 볼 때 돈에 대한 욕심이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가족들은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대신 일에 대한 욕심은 참 많으셨습니다. 하루도 도안을 하지 않는 날이 없었으니까요.

어느 취재진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의 특기는 무엇입니까?” “일” “그럼 취미는요?” “일” 이렇게 작품 제작에 몰두 하셨습니다. 칠순이 넘으신 할아버지께서 말입니다. 제자신도 그럴 수 있을지 의문스럽습니다.

당시 선생님께서는 국전 심사위원이셨는데 저 보고 작품 준비하라 하셔서 1977년에 손수 들고 가셨으며 출품료까지 내시고 낙선 시켜서 들고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너꺼 보다 좋은 것이 많드라.” 하셨지요. 무척 기분이 나빴습니다.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에 또, 3번을 낙선 시켰습니다. 당시에는 자존심도 상하고 화도 났습니다. 대신 오기가 생겼지요, 4번째에도 낙선하고 국전이 대한민국미술대전으로 바뀌면서 입선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제자에게 큰 교육을 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제자를 사랑하신 증거입니다.

그리고 1975년 숙제를 주셨지요, “낙랑칠기” 의 칠화를 해보라는 숙제였습니다. 아직도 그 숙제를 풀고 있는 중입니다. 언제나 다 풀 수 있을지 까마득 합니다. 공모전에 출품할 작품을 제작 할 때엔 항상 넉넉한 시간을 주셨습니다. 1980년 12월에 선생님 곁을 떠나 독립하면서 자주 뵐 수 없었습니다.

하얀 두루마기와 흰 고무신 그리고 흰 수염이 지금도 보고 십습니다.

 

2. 옻칠에 대하여

원주의 옻은 세계 최고의 수준입니다. 이것은 학자들의 분석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더군다나 원주산은 우로시올 즉 칠산의 함유량이 다른 나라의 칠보다 많기 때문에 더 맑은 칠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옻나무에서 빼낸 즙을 생칠이라 하는데 이 생칠도 채취하는 시기에 따라 종류가 달라집니다. 초칠, 성칠, 말칠, 지칠. 화칠로 5종류가 되는데 지금은 모두 합쳐서 그냥 생칠이라고 합니다.

초칠은 6월에 채취한 칠로서 수분의 함량이 많으며 건조가 매우 빨라 어둡게 보입니다. 주로 성칠과 혼합해서 사용하거나 말칠과 혼합하여 밑 바탕작업을 할 때 사용합니다.

초칠 채취가 끝나면 7월부터 9월까지 생산되는 칠이 성칠입니다. 이 칠은 수분함량이 적으며 칠산이 많아 맑은 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건조시간도 늦어집니다. 대개 성칠로 검정칠이나 맑은 칠로 정제를 합니다. 성칠 채취가 끝나면 10월부터 11월 초까지 말칠이 채집됩니다.

이 칠은 단백질이 많은 칠로서 초칠과 혼합하여 바탕작업을 할 때 주로 사용합니다. 베를 바르거나 숯가루를 바르고 사비를 갤 때 주로 사용하게 됩니다.

말칠이 끝나면 나무를 베어 가지를 잘라 물에 담가 두었다가 칠을 내는데 이 칠을 지칠이라고 합니다. 이 칠은 건조가 늦기 때문에 여름철 칠의 건조가 급격히 빨라질 때 성칠과 혼합해서 사용하면 건조가 늦어져 칠이 주름지거나 귀얄(기발) 자국을 많이 없앨 수 있습니다. 또 가지를 12월이 되면 물에 담가 두었다가 불 위에 얹어 그 액을 받는데 이 칠을 화칠이라 부릅니다. 지금 함양에서 칠을 내는데 우리 전통의 칠 채취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직 화칠은 사용해 보지를 못했습니다.

언젠가 사용해 봐야 겠지요.

이와 같은 생칠을, 특히 성칠을 적당한 열(45℃ 이하)을 가하면서 2~3시간 정도 교반 시키면 정제칠이 됩니다. 이것은 대개 수분을 휘발시켜서 얻어지는 칠이며 생칠보다 도막형성을 두껍게 할 수 있습니다. 또 철분을 넣어 교반 시키면 검정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칠흑 같이 어두운 밤이란 말이 있듯이 이 검정의 깊이는 알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생산되고 있는 정제칠은 맑은칠과 검정칠 두 종료입니다.

생칠의 성분은 칠산, 단백질, 고무질, 수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고무질속에 건조효소가 들어 있습니다. 이 고무질은 수용성이기 때문에 건조장에 습도를 높여 건조 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사용하고 있는 희석제는 테레핀입니다. 테레핀은 소나무에서 얻어지는 기름입니다. 옛날에는 동유(桐油)를 사용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기름인지 사용해 보지를 못했습니다.

옻칠은 수 천년 동안 사용되어 왔으며 모든 도료의 뿌리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문화는 다 바뀌어도 칠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생활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통영에선 나전을 위한 칠이 되어야 하며 원주에선 칠을 위한 나전이 되어야 합니다. 칠은 동양의 진주이며 나전은 한국의 진주라야 합니다. 칠을 보석처럼 만들고 싶은 게 제 생각입니다만 통영에선 나전을 보석으로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감동 받을 수 있는 명품을 생산하여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작품을 만들어 내어야 합니다. 명품이 없이는 모조품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이 모조품이 알고 보면 산업화의 길입니다. 이러한 명품을 만들 수 있도록 시에서는 조건 없는 투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장인들은 여러 가지 조건이 붙으면 귀찮아합니다. 더군다나 통영은 나전칠기의 본고장으로 통영을 알리고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이것을 외면 할 수 는 없습니다.

원주 옻칠을 특산화 시키기 위해서 15년을 시청에 들렸습니다. 관선시장이 세분, 민선시장 한분 이렇게 시장이 네번 바뀌면서 특산화의 뜻을 이루었습니다. 앞으로 원주는 칠기인들이 늘어날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느 곳이나 나전칠기를 이어가기가 참 어렵습니다.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선 가장 중요한 것이 작품을 팔아야 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지역에 계시는 분들이 작품을 사 주셔야 만드는 사람이 힘이 나는 법입니다. 몇 천 만 원짜리 차를 사는 것을 조금만 줄이면 통영에서 만들어진 나전칠기 작품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에서 조건 없이 지원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지역 주민들께서 힘을 주셔야 합니다.

힘이 생겨야 명품을 만들지 않겠습니까?

 

 

               통영 나전칠기의 역사

                                         통영향토역사관장 김일용

 

1. 조선후기 통제영공방(統制營工房)의 유래

예로부터 통영(統營)은 다양한 전통문화를 꽃피운 예향(藝鄕)으로 널리 알려진 고장이다. 특히 통영의 대표적 토산품이었던 ‘통영자개’․‘통영갓’․‘통영장롱’․‘통영장석’․‘통영대발’․‘통영소반’․‘통영부채’․‘통영동구리’․‘통영꽃신’ 등은 그 품질이 가장 우수하여 전래 수공예품 가운데 최상품으로 칭했다. 그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통영자개는 ‘나전장(螺鈿匠)’, 통영갓은 ‘갓일’, 통영장석은 ‘두석장(豆錫匠)’, 통영발은 ‘염장(簾匠)’ 등으로 각각 국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 계승되고 있다.

이러한 통영의 나전칠기를 비롯한 각종 전통공예는 조선후기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 즉 통제영(統制營)의 군영공방(軍營工房)에서, 그리고 통제영은 임진왜란 당시의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한산진(閑山陣)에서 유래되었음은 주지의 일이다.

 

1) 한산진(閑山陣)의 통제영 공방

원래 조선 초기 하삼도(下三道)의 수군제도는 경상좌도․경상우도․전라좌도․전라우도․충청도에 각각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水使)를 두어 관할해역을 지켰다. 그러다가 임진란이 발발하자 수군들이 연합함대를 결성하여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그러나 각도 수사(水使) 간의 지휘체계가 원활하지 못한 폐단이 있어, 이들을 통솔하는 상위직으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統制使)를 두게 되었다.

즉 선조 26년(1593) 8월 조정에서는 당시 한산도(閑山島)에 진을 설치하여 왜적을 방비하고 있던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전라좌도수군절도사겸 삼도수군통제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兼三道水軍統制使)를 제수한 것이 그 시초였다. 전라좌수영을 본영(本營)으로 삼았던 공(公)은 호남해역으로 서진(西進)하는 왜적을 맞아 한산도에 전진기지를 설치한 이래 통제사로 제수되어서도 줄곧 여기를 본거지로 삼아 그 통수권을 행사하였다. 이렇게 한산진(閑山陣)은 통제사의 본영인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영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한산진은 남해안의 요충인 견내량(見乃梁)을 지키는 외딴 변방이라 대부분의 군수품을 현지에서 자체적으로 조달해야만 했다. 전선(戰船)을 비롯한 총통․조총․활․화살․활집 등의 군기(軍器)는 물론, 부채․소금 굽는 가마솥․고기잡이 그물․종이 등의 각종 일상생활품까지도 현지에서 직접 생산하여 군수품으로 수급되었다.

이러한 군수품의 자체수급을 위하여 수군장령들과 현지민의 각종 기술 인력은 물론, 타지역에서 안전한 이 곳 한산진으로 유입된 수많은 피난민 중에서도 우수한 장인들이 동원되었다. 그리고 일부 군수품 및 그 원자재는 한산진 외의 관하 각 진영 및 고을에서도 각기 나누어 조달되었으며, 수군의 군수품 외에 때로는 조정의 진공품(進貢品)이나 중국 가는 사신들의 헌상품(獻上品)으로 소용되기도 했다. 이렇게 최초의 통제영공방(統制營工房)은 임진란 당시의 한산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丁酉再亂)의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수군이 패하자 한산진은 청야작전(淸野作戰)으로 소실되었으며, 통제영은 전라도 고하도(高下島)와 고금도(古今島) 등으로 옮겨 다니는 행영체제(行營體制)를 이루었다. 이와 같이 임란 당시는 물론 임란 직후 7년간의 통제영 또한 여수(麗水. 전라좌수영), 거제 오아포(烏兒浦. 경상우수영), 고성 춘원포(春元浦) 등으로 빈번하게 이진(移陣)됨으로써 통제영의 군영공방체제는 제대로 정착되지 못하였던 것으로 사료된다.

 

2) 통제영 공방(工房) 및 공고(工庫)

결국 선조 36년(1603) 제6대 이경준(李慶濬) 통제사가 통제영을 두룡포(頭龍浦. 현 통영시 시가지지역)로 다시 옮길 것을 조정에 장계하고, 그 이듬해(1604) 본영을 이건하여 새롭게 창건함으로써 그 후 고종 32년(1895) 7월 폐영될 때까지 약 300년간 통제영의 안정과 번영을 이루게 되었다.

새로운 통제영의 창건을 위한 대규모의 역사(役事)가 시작되자, 군영 6방(6房, 吏․戶․禮․兵․刑․工房) 가운데 교량과 도로, 건물의 건설 및 관리 보수, 도량형기, 배와 수레의 수리 및 개조, 각종 나무의 재배, 야철장, 땔나무, 광물산지, 장인 등의 제반 공전(工典)을 관장하는 공방(工房)의 역할도 한층 커지게 되었다. 그리고 통제영 공방에는 진공품(進貢品)과 군기(軍器)를 조성하는 공고(工庫)를 두어 각종 수공품의 원활한 생산 활동을 위한 그 기반시설이 더욱 확충되었다.

한편 조선 초기 각 관청에 예속되어 수공품을 생산하던 관급장인(官給匠人)들은 한양의 경공장(京工匠)과 각 지방의 외공장(外工匠)으로 나뉘었다. 당시 장인들은 30여개의 중앙관청 또는 8도의 감영(監營), 수영(水營)이나 각 지방 군현(郡縣)에 소속되었으며, 대부분의 관영수공업이 중앙에 집중되어 있었음에 비해 지방의 수공업은 아주 열악한 상태였다.

그러다가 조선중기 임진란이 발발하자 군수품 수급을 위한 각 지방 외공장의 비중이 한결 높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통제영은 삼남지방의 여러 읍진(邑鎭)을 관장하고 있어 풍부한 물산과 군선을 이용한 원자재의 편리한 수송, 그리고 각처의 장인과 관하 수군 및 연해 읍민들의 동원이 비교적 용이하여 각종 군기 및 다양한 수공품의 생산이 활발해졌다.

이러한 통제영 창건 초기의 공방관련 문헌은 거의 알려진 바가 없으며, 통제영 후기의 자료 또한 대부분 극히 단편적이어서 그 실체를 총체적으로 규명하기는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몇몇 토막자료들을 통해 유추하면 통제영의 공방체제는 그 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즉 17세기 초에는 관하 각 진영 및 소속 고을에서 주로 완제품 또는 반제품을 조달하였으며, 그 후 점차 안정된 군영체제를 갖추게 되면서부터 원자재와 반제품을 조달하여 더욱 많은 관급장인(官給匠人)과 장인의 부역인 공역(工役)을 통하여 이를 통제영 공방에서 직접 완제품으로 생산하는 체계로 발전한 것으로 사료된다.

그리고 18세기 초에 이르러 각 기능별 장인(匠人)들 중에서 그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는 수공품의 생산능률을 높이기 위하여 ‘야장방(冶匠房)’․‘동개방(筒箇房)’․‘선자방(扇子房)’․‘칠방(漆房)’․‘입자방(笠子房)’․‘동개방(筒箇房)’ 등의 독립된 작업장을 갖춘 각 개별 공방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나아가 18세기 후반 및 19세기 초에는 한층 분화되어 ‘12공방(工房)’ 및 ‘선자방(扇子房)’ 그리고 ‘각장(各匠)’ 등의 ‘통제영12공방’ 체계를 이루게 되었다.

2. 통제영12공방과 칠방(漆房) 및 패부방(貝付房)

1) 통제영12공방(統制營12工房)

19세기의 각종 문헌을 종합하면 통제영공방의 규모는 아래와 같이 정리된다.

공방(工房) : 통제영 6방(六房, 吏․戶․禮․兵․刑․工房) 가운데 하나로 제반 공전(工典)을 관장하는 관아였으며, 백화당(百和堂) 서쪽에 공감(工監)의 처소 인 공내소(內工所․內工軒)와 공록당(工綠堂)이 있었다.

공고(工庫) : 주로 진상품과 군기를 조성하는 통제영 공방에 속한 관창(官倉)으 로 통제영 이건과 함께 설치되었으며, 외감(外監) 1원(員, 無料), 색리(色吏) 2 인(各 錢4兩5戔 租1石), 고직(庫直) 2명(該廳受料)이 있었다.

12공방(十二工房)

○칠방(漆房) : 각종 수공품에 칠을 했으며 공방규모는 건물 9칸에 장인의 수는 편수(片首) 1명(錢1兩5戔 租1石12斗5刀), 선칠편(扇漆片) 1명(錢1兩5戔 租1石 12斗5刀), 공(工) 21명, 채문장(綵文匠) 4명의 총 27명이었다. 초기의 ‘칠방(漆 房)’에서 ‘상칠방(上漆房)’과 ‘하칠방(下漆房)’으로 분방되었다가 후에 다시 ‘상 하칠방(上下漆房)’ 및 ‘칠방(漆房)’ 또는 ‘칠장방(漆匠房)’이라 칭했다.

○화원방(畫員房) : 각종 지도(地圖)와 수군조련도(水操圖) 등 군사적 목적의 그 림과 의장용 장식화를 그렸으며, 공방규모는 8칸에 편수 1명(錢1兩5戔 租1石 12斗5刀), 도화공(圖畫工) 1명, 공 19명, 각옥장(角玉匠) 2명의 총 23명이었다.

○야장방(冶匠房) : 쇠를 녹여 각종 철물의 주조 및 연마를 했으며 공방규모는 7 칸에 편수 1명(錢1兩5戔租 1石12斗5刀), 연편(鍊片) 1명(錢1兩5戔 租1石12斗5 刀), 도편(刀片) 1명(錢1兩5戔 租1石12斗5刀), 공 12명의 총 15명이었다. 19세 기 초까지는 연마장(鍊磨匠), 도자장(刀子匠) 등으로 구성된 ‘연마방(鍊磨房)’ 이 별도로 있었다.

○입자방(笠子房) : 갓(黑笠)을 비롯하여 삿갓․방갓․전립(벙거지)․패랭이․초 립 등의 각종 모자를 제작했으며, 초기에는 주로 군사들의 전립 및 패랭이 등을 만들었다. 공방규모는 6칸에 편수 1명(錢1兩5戔 租1石12斗5刀), 공 26명 의 총 27명이었다.

○총방(驄房) : 말총을 엮어 갓․망건․탕건․유건 등을 만들었으며, 생산품 각 2 벌씩을 3월에 진공했다. 공방규모는 4칸에 편수 1명(錢1兩5戔 租1石12斗5 刀), 공 12명의 총 13명이었다.

○소목방(小木房) : 나무를 다루어 문방구 및 가구 등의 제반 생활용품을 만들었 으며, 공방규모는 5칸에 편수 1명(錢1兩5戔 租1石12斗5刀), 공 9명의 총 10명 이었다.

○주석방(周錫房) : 주석(朱錫)․백동(白銅)․시우쇠 등으로 각종 장석을 만들었 으며 공방규모는 4칸에 편수 1명(錢1兩5戔 租1石12斗5刀), 석사왕편수(錫沙王 片首) 1명(錢1兩5戔 租1石12斗5刀), 공 19명의 총 21명이었다. ‘주석방(周錫房 ․朱錫房)’․‘석장방(錫匠房)’․‘석방(錫房)’ 등으로 칭했으며, 그 장인을 일명 ‘두석장(豆錫匠)’이라 했다.

○상자방(箱子房) : 버들가지․싸리․대오리 등을 엮어서 옷가지나 음식을 담는 고리(箱子)를 만들었으며, 공방규모는 3칸에 편수 1명(租1石12斗5), 공 15명의 총 16명이었다. 특히 진상전복을 담는 상자는 ‘각장방(各匠房)’에 진상생열복 죽농장(進上生熱鰒竹蘢匠) 4명을 두어 별도로 제작했다.

○은방(銀房) : 금․은을 세공하여 각종 장신구를 만들었으며, 공방규모는 3칸에 편수 1명(錢1兩5戔 租1石12斗5刀), 공 1명의 총 2명이다.

○화자방(靴子房) : 각종 신발을 만들었으며 공방규모는 3칸이었다. 원래 화자(靴 子)는 벼슬아치들이 관복 아래에 신는 검은 색 가죽으로 만든 긴 장화 모양 의 신을 칭했으며, 19세기 중반에 폐방(廢房)되었다.

○동개방(筒箇房) : 작은 활과 화살을 함께 꽂아 넣어 등에 지는 가죽주머니인 동개(筒箇)와 활을 허리에 꽂는 궁대(弓帒)를 만들었으며 공방규모는 2칸이었 다. 여기서 생산된 동개 및 작은 궁대는 임금의 탄신일에 각 2벌, 동지절(冬 至節) 11월에 각 2벌 그리고 임금에게 정월 새해 문안으로 12월에 각 2벌씩 을 진공했으며, 19세기 중반에 폐방(廢房)되었다.

○안자방(鞍子房) : 말안장을 만들었으며 공방규모는 2칸이었다. 녹피(鹿皮)와 우 피(牛皮) 및 어피(魚皮) 등의 가죽에 갖가지 장석으로 치장하기도 했으며, 19 세기 중반에 폐방(廢房)되었다.

패부방(貝付房) : 각종 나전칠기를 만들었으며 장인의 수는 편수 1명(租2石5 斗), 공 4명의 총 5명이었다. 통제영 나전제품의 우수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그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는 19세기 중반에 독립된 공방으로 신설되었다.

미선방(尾扇房) : 주로 새나 물고기의 꼬리형상을 닮은 둥근 모양의 미선(尾 扇)과 단선(團扇․圓扇)을 생산했으며, 장인의 수는 편수 1명(錢2兩 租1石), 공 4명의 총 5명이었다. 19세기 중반에 선자방(扇子房)에서 분화되어 독립된 공방으로 신설되었다.

주피방(周皮房) : 각종 가죽을 다루었으며 장인의 수는 편수 2명(各 錢1兩5戔 租1石12斗5刀), 공 2명의 총 4명이었다. 정월 및 임금의 탄신일에 녹피(鹿皮) 각 1령(令)씩을 진공했으며, 각 공방의 생산품 및 생활용품에 가죽의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는 19세기 중반에 독립된 공방으로 신설되었다.

선자방(扇子房) : 부채를 만드는 공방이며 12공방 북쪽 뒷편에 15칸 1동의 독립 된 건물에 장인은 편수 1명(租1石12斗5刀), 서기 2명, 공 82명의 총 85명이었 다. 주로 단오절 임금이 조정의 신하에게 나누어 주던 단오절선(端午節扇)을 제작했으며 4월에 800자루(柄)를 진공했다. 19세기 중반 이곳 선자방에서 분화된 ‘미선방(尾扇房)’이 12공방에 신설되었다.

각장방(各匠房) : 수공품별로 독립된 공방을 갖추지 않은 각 장인들이 모여서 작업하는 공방이며, 소쿠리장(所告里匠․小古里匠), 유물장(油物匠) 1명(4石6 斗), 진상요도조장(進上腰刀造匠) 5명(20石10斗), 진상어립장(進上御笠匠) 20명 (兩次44石2斗), 진상생열복죽롱장(進上生熱鰒竹蘢匠) 4명(5次 9石7斗), 그리고 각양 편수(各樣片手)등이 있었다.

 

이러한 통제영 공방 및 공고는 비장(裨將)들의 관아였던 백화당(百和堂) 서남쪽에 위치하였으며, 공감(工監)의 처소인 내공소(內工所․內工軒)와 공록당(工綠堂) 등의 관아와 인접하여 ‘12공방(工房)’․‘선자방(扇子房)’․‘각장방(各匠房)’ 등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건물의 총 규모는 대략 10~12동(棟)에 12공방 56칸, 선자방 15칸, 기타 각장(各匠) 및 관아를 모두 합하여 대략 90여 칸(間)에 이르렀다. 한편 장인의 총수는 1850년경에 529명이었으며 그 후 1890년경에는 다소 줄어 12공방 174명, 선자방 83명, 그리고 각장(各匠)을 합하여 총 300여명이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이는 조선후기 사장(私匠)이 급격히 증가하는 반면 관급장인(官給匠人)이 감소해 가는 시대적 추세와도 일치하고 있다.

이와 같이 초기 통제영 공고(工庫)는 주로 군기(軍器)와 진공품(進貢品)을 조성하는 관창(官倉)으로 시작되었으며, 점차 그 수요가 증가하면서 19세기 초반 각 기능별 장인으로 구성된 여러 독립된 공방이 상호 분업과 협업을 이루는 ‘12공방’의 수공업생산체제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생산품 또한 초기의 군수품과 진공품 위주에서 다양한 생활용품의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는 19세기 중반에는 ‘동개방(筒箇房)’, ‘안자방(鞍子房)’, ‘화자방(靴子房)’이 폐방되는 대신 ‘패부방(貝付房)’, ‘미선방(尾扇房)’, ‘주피방(周皮房)’ 등이 신설 대체되는 변화가 있었다.

 

2) 통제영 칠방(漆房) 및 패부방(貝付房)

조선시대의 나전칠기는 17세기까지만 해도 궁중의 제물(祭物)이나, 왕실 가례 때의 혼물(婚物) 및 진상품(進上品) 또는 하사품(下賜品), 그리고 중국에 진헌하는 방물(方物) 등의 목적으로 제작되었던 진귀한 고급품이었다. 이처럼 특수층에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던 나전칠기가 18세기를 전후하여 상공업의 발전과 함께 일반 사대부의 기호품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세기에 이르러 반상(盤床), 연상(硯床), 장롱(欌籠), 자(尺), 실패, 베갯모, 반짇고리, 함지 등 일상생활용품에까지 확대되면서 그 수요가 평민 부유층에 까지 폭넓게 확산되었다.

즉 조선후기 민간수공업이 발전하면서 점차 관청수공업의 붕괴와 함께 한양의 경공장(京工匠)에서만 소수 제작되었던 나전칠기 또한 지방의 외공장(外工匠)에서도 생산되는 지방분권화가 시작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통제영12공방(統制營12工房)’의 칠방(漆房)과 패부방(貝付房)이라 하겠다.

19세기 통제영 칠방은 공방건물 9칸 크기에 편수(片首) 1명, 선칠편(扇漆片) 1명, 공(工) 21명, 채문장(綵文匠) 4명의 총 27명으로 통제영12공방 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큰 공방 가운데 하나였다. 한때 ‘하칠방(下漆房)’과 ‘상칠방(上漆房)’으로 나뉘기도 했던 칠방에서는 소목방에서 제작되는 목기를 비롯한 선자방의 부채, 화자방의 신발, 안자방의 말안장, 동개방의 동개 등 각종 가죽제품에 이르기까지 옻칠을 하는 등 다양한 수공품에 칠이 소용되었다. 이렇게 칠은 그 쓰임이 아주 많아 17세기 통제영공방이 설치된 직후부터 이미 독립된 칠방으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한편 조선후기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의『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통제영을 이곳에 둔 것은 군사를 길러 유사시를 대비하자는 것인데, 오로지 수많은 장인을 길러 한양의 권문세가가 구하는 것만을 만들고 있어 통제영 설치의 처음 뜻과 크게 위배되니 마땅히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는 “통영에서 만든 옻칠나전은 화초나 새와 짐승의 문양이 특히 아름답다.”고 했다.

이와 같이 19세기 초반에 통제영 공방에서 고급 수공예품이 다량으로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통영 나전칠기의 아름다움이 널리 칭송될 정도였다면, 통제사나 한양의 권문세가를 위한 고급 나전제품들은 이미 18세기부터 칠방(漆房)에서 제작되어졌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19세기 중반에 그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자 군수품과 관련한 ‘동개방’, ‘안자방’, ‘화자방’이 폐방되고 나전칠기제작을 전담하는 독립된 공방인 패부방(貝付房)을 비롯한 ‘미선방(尾扇房)’, ‘주피방(周皮房)’ 등이 신설 대체되었다. 당시 패부방의 관급장인(官給匠人)은 편수(片首) 1명(급료 租2石5斗), 공(工) 4명의 총 5명이었다. 이로써 남해안 통영근해의 질 좋은 소라와 전복껍질을 이용하여 통제영의 우수한 장인들에 의해 통영나전칠기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게 되었으며, 당시 조선의 가장 정교한 수공예품의 대명사로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통제영이 가장 번성했던 19세기의 ‘통제영12공방’은 통제영 공고(工庫) 안에 인접한 여러 공방들이 상호분업 및 협업으로 수공품을 생산하는 체제를 이루었다. 즉 전래 나전칠기제품의 제작과정을 예로 들면 ①소목방(小木房)에서 백골제작→ ②하칠방(下漆房)에서 밑칠(下漆)→ ③패부방(貝付房)에서 자개붙임→ ④상칠방(上漆房)에서 마감칠(上漆)→ ⑤주석방(周錫房)에서 장석제작 및 부착하는 등 일련의 과정을 거쳐 비로소 완성되는 바와 같이, 각 제작공정에 따른 여러 관련 장인 및 그 공방들이 서로 연계하여 그 능률과 완성도를 더욱 높이는 생산체계였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 초기의『경남통영군안내(慶南統營郡案內)』에는 조선후기의 통영 나전칠기에 대해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통영의 나전칠기는 1700년대 초기 통영에 살았던 고선오(高善五)라는 사람의 기술이 유명했는데, 그가 청패세공(靑貝細工)을 최초로 시작하여 이를 제조 판매하였기 때문에 점차 명성이 널리 알려져 전공하는 사람이 50여명에 달할 만큼 번창하였지만 그 후 저질품을 양산하여 쇠퇴하게 되었다. 그 후 1884년 통제영에서 진공품(進貢品) 제작을 위해 편수(片首) 1명을 통제영에서 급료를 주고 관공물(官公物) 제작에 종사시키는 한편 1887년 4월 서부동(西部洞, 현 문화동)에 청패공장을 설립하자 이 분야가 다소 장려되어 회복되는 듯 하였으나 곧 통제영이 폐영되어 다시 중단되었다.”라고 했다.

이러한 통제영공방(統制營工房)은 당시 지방 군현(郡縣)을 비롯한 각도 감영(監營)의 경우보다도 매우 커서 중앙의 경공장(京工匠)을 제외한 외공장(外工匠) 중에서 최대의 규모로 성장했다. 이는 통제영이 삼남지방의 여러 읍진(邑鎭)을 관장하며 각종 군수품과 진공품을 조달하는 영문(營門)으로써 풍부한 물산과 군선을 이용한 원자재의 수송과 각처 장인과 관하 수군 및 연해 읍민들의 동원이 매우 용이했으며, 대규모 공방의 관리와 그 체제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강력한 군영조직이 뒷받침되었던 것도 그 한 요인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리고 특히 19세기 통제영공방에서 칠기와 나전제품이 크게 발전한 것은 삼남지방 최대 규모의 군영공방과 관급장인들의 기반시설이 이미 잘 갖추어져 있었을 뿐 아니라, 경남 함양의 지리산(智異山) 일대와 거제 칠천도(漆川島) 등의 대표적인 옻 산지(産地)를 비롯하여 그 빛깔과 질이 가장 우수한 소라 및 전복이 주로 통영근해에 서식하는 등 원자재의 공급이 아주 원활하였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종2품 무관(從2品 武官)의 최고위직인 통제사를 비롯하여 그와 연계된 한양 권문세가의 지속적인 수요 또한 통영 수공예품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3.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1) 통영공업전습소(統營工業傳習所)

조선후기 고종 32년(1895) 7월 15일 삼도수군통제영의 폐영과 함께 통제영공방 은 폐방되었으며, 그 다음해(1896) 신식군대로 재편된 고성지방대(固城地方隊)가 주둔했다. 옛 통제영의 객사 세병관(洗兵館)과 백화당(百和堂) 건물은 그 관사로 수용되었으며, 그리고 옛 통제영 지역은 1900년 고성군(固城郡)에서 분군(分郡)되어 진남군(鎭南郡)이라 칭했다.

그리고 1903년 5월 일본 마산영사(馬山領事)의 원조를 얻어 개교하였던 일어학교(日語學校)의 일본인 교사 와타나베(渡邊直躬)가 통영의 중요한 공예품인 ‘통영갓’의 생산이 쇠퇴하는 것을 보고 이를 대체할 공업교육을 시키기 위하여 군수(郡守) 및 유지들과 상의하여 공업전습소(工業傳習所)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시기가 맞지 않아 단지 보조학과로만 가르치다가 1908년 6월 진남공립보통학교(鎭南公立普通學校, 현 통영초등학교 전신)가 개교됨에 따라 유년생은 그대로 넘겨주고 남은 청년 10명으로 ‘진남공업전습소(鎭南工業傳習所)’라 칭하고 목공(木工)과 철공(鐵工) 실습을 시작하였다. 목공은 녹로(轆轤. 속칭 로꾸로)와 세공을 주로하고 철공은 이에 필요한 기구를 제작하였다.

1911년에는 통영인과 일본인으로 구성된 10명의 설립추진위원을 위촉하고 기존의 기본금과 유지들의 기부금으로 시설을 확장하고 군립(郡立)으로 허가를 받아 당시 동충동(東忠洞, 현 항남동)에 있던 옛 통제영 포수청(砲手廳)과 사공청(沙工廳) 건물을 수리하여 그 교사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해 12월 전태흥(全泰興) 군수를 소장으로하고 실무는 교사 와타나베(渡邊直躬)가 맡아 군립 ‘용남공업전습소(龍南工業傳習所)’를 개소하였다. 당국으로부터 연간 800원의 보조비를 받았으며, 전습생은 10명, 수료기간은 2년 4개월이었다. 당시 공업을 천시하는 풍조 때문에 입학생 모집에 많은 애로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다가 1913년에 일제의 조선총독 테라우찌(寺內)가 통영의 나전칠기에 관심을 갖고 당시 이 업을 어렵게 운영해 오던 박정수(朴貞洙)에게 장려금 100원을 내려주고, 또 지방비에서 박정수와 박목수(朴穆壽)의 2명에게 제자양성비로 각각 100원씩을 매년 보조하기로 했다. 한편 일본인들은 서울 인사동의 ‘이왕직미술품제작소(李王直美術品製作所)’에서 한국의 나전칠기를 제작하여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그 본거지인 통영에서 많은 장인들을 데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업전습소(工業傳習所)는 1914년 2월 처음으로 제1회 졸업생 8명을 배출하였으며, 그 해 10월 부산에서 개최된 경남공진회(慶南共進會)에서 전습생들의 작품이 1등 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 후 이 전습소는 연간 1,200원의 보조금을 받게 되었으며 신학기의 전습생은 금공과(金工科) 5명, 녹로과(轆轤科) 8명, 지물과(指物科) 5명의 총 18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1915년 4월부터 칠공과(漆工科)를 증설하고 일본인 칠공교사를 초빙하여 그를 중심으로 기술원 4명을 더 채용하여 군청부속건물(郡廳附屬建物, 현 문화동 110~113번지)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당시 20여명의 장인들이 이곳 칠공부에 와서 자기 작품을 제작하는 한편 일본인 칠공교사의 지도를 받기도 했다. 통영의 특산품인 나전칠기의 개량을 목적으로 한 통영공업전습소(統營工業傳習所)는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우리의 전통 나전칠기공예가 왜색이 짙어지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다시 나전칠기 생산이 사업성을 보이기 시작하자 과거 서울로 이거해 갔던 사람들이 다시 통영으로 귀향하였다. 1914년의 칠기제작 호수는 14호, 연간 생산량은 3,295개, 총생산액은 2,677원이었으며, 1915년의 청패세공업은 3호에 종사자 9명, 그리고 양성중인 기능공을 합치면 모두 25명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1932년에는 급격히 증가하여 통영의 칠기 총생산액은 무려 66,000원에 달하게 된다.

 

 

가죽신

목기

칠기

부채

유기

금은

백동

戶數

70호

22호

74호

14호

13호

4호

3호

5호

數量

22,300개

3,385개

5,204개

3,295개

15,540개

1,830개

30개

50개

金額

37,994원

5,048원

4,798원

2,677원

1,640원

495원

180원

55원

일제강점초기 통영군의 대표적 공산품별 생산현황(1914년)

한편 1917년경에는 ‘통영공업전습소’에 ‘조선칠공회(朝鮮漆工會)’를 발족하여 전통적인 나전칠기의 기술개발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시도되기도 했다. 그리고 1920년 통영에서 ‘통영칠기주식회사’를 경영하던 일본인 사장 키무라(木村天紅)의 초청으로 공장장 전성규(全成圭)와 그의 제자 김봉룡(金奉龍), 송주안(宋周安)이 함께 일본칠기의 명산지인 다카오카시(高岡市)의 조선나전사(朝鮮螺鈿社)에 가서 약 2년간 체류하게 된다.

일본 체류기간 동안 전성규(全成圭)는 자신의 독창적 기법인 끊음질 산수무늬를 중심으로 십장생(十長生) 등이 정교하게 시문된 문양들을 패각 자체의 영롱한 빛깔과 어우러지게 수놓아 일본인들에게 대단한 선풍을 일으켰다. 그리고 전성규와 김봉룡은 금․은 세공에 쓰는 일본의 실톱을 국내에 들여와 자개를 자르는 데 채용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전래 주름질은 자개를 식초에 담가 연질이 되게 한 후 가위나 송곳 등으로 하나씩 문양을 오려냈으나, 이러한 실톱의 사용으로 보다 섬세한 문양을 쉽게 오려내거나 자개를 여러 장 포개어 한 번에 동일한 문양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공업용 실톱의 이용은 종래의 주름질을 새로운 기법으로 혁신시키는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이어서 1925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장식공예품박람회(萬國裝飾工藝品博覽會)’에 일본 상공성에 의해 우리나라의 나전칠기, 고려자기, 완초, 편물 등이 출품된 가운데 김봉룡(金奉龍)의 ‘나전화병(螺鈿花甁)’이 은상(銀賞) 그리고 전성규(全成圭)의 ‘나전수상(螺鈿手箱)’과 ‘나전연초합(螺鈿煙草盒)’이 동상(銅賞)을 각각 수상됨으로써 한국 나전칠기의 우수성을 세계에 널리 알렸다.

 

2) 통영칠기제작소(統營漆器製作所)

1932년 일본인 하시다(橋田助太郞)가 ‘통영칠기제작소(統營漆器製作所, 현 문화동 113번지)’를 설립하여 당시 한국은 물론 일본에까지도 통영나전칠기의 판로를 넓혔으며, 사업이 날로 번창하여 1940년에는 기능공 50명, 연 생산액 7만원에 이르는 한국의 대표적인 나전칠기공방으로 발돋움했다.

그러다가 결국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전시체제로 돌입하게 되자 옻칠의 공급이 배급제로 전환되고 나전칠기의 원자재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게 되자 다시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자 통영의 칠기업자들은 1940년 2월 ‘통영칠기공예조합(統營漆器工藝組合)’을 창립하고 그해 3월에 ‘나전칠기 원자재의 공동구입에 관한 진정’을, 그리고 5월에는 ‘옻나무(漆樹) 재배에 관한 청원’을 당국에 내는 등 자구책을 강구해 보지만 전시체제는 계속 이어져 결국 일제는 패망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초기 일본인들이 통영나전칠기에 매료되어 큰 관심을 보였으며, 이를 산업화시키면 고급 수요자가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투자하기 시작했었다. 그들은 기능공 양성을 위한 공업전습소를 설립하여 많은 후진을 양성하고, 통영의 나전칠기산업 부흥에 크게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론 의장과 조형 및 문양 그리고 제작기술에 이르기까지 일제식민지정책에 의한 일본화 경향을 보이는 등 전통양식의 심각한 왜곡과 변질을 초래하게 되었음도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으로 사료된다.

 

4. 광복이후

1) 경상남도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慶尙南道螺鈿漆器技術員養成所)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으며, 그 다음해(1946년)에 나전칠기가 상공부의 수출장려품으로 지정되어 정부의 지원을 받아 제 자리를 잡는 듯 했다. 그러다가 1950년 6․25동란이 발발하여 모든 생산 활동이 중단되자 다시 위기를 맞게 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일부 인사들은 통영이 나전칠기의 주산지이고 전쟁의 피해가 없는 안정지역이므로 힘을 모아 나전칠기 산업을 되살려보자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일제치하에서 변질된 나전칠기를 다시 민족적 전통공예로 계승발전 시키기 위한 기술교육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그리하여 1951년 8월 10일 통영군(統營郡)에서 나전칠기산업의 지속적인 육성과 기능인 양성을 위한 ‘나전칠기강습소(螺鈿漆器講習所)’를 설립하였다. 수강생 정원은 40명, 수업기간은 2년, 교과목과 그 강사진은 나전칠기에 김봉룡(金奉龍), 도안 및 설계제도에 유강열(劉康烈), 옻칠기법에 안용호, 소묘 및 데상에 장윤성, 그리고 건칠 특강에 강창규(姜昌奎) 등이었다.

그 후 1년 만인 1952년 12월 도립 ‘경상남도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慶尙南道 螺鈿漆器技術員養成所)’로 개칭하였으며, 1955년에는 연구부(硏究部)를 신설하여 2년 수료 후 희망자는 다시 연구생으로 입학하여 나전부(螺鈿部)와 칠부(漆部)로 나누어 1년의 심화과정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추가 강사진은 끊음질에 심부길(沈富吉), 연구부의 나전부에 구복조(具福祚), 칠부에 임성춘(林成春)이 담당했다. 그리고 1956년 김봉룡(金奉龍) 선생이 기술원양성소 부소장겸 나전칠기 담당강사로 취임하고 김성수(金聖洙) 선생이 나전칠기 강사를 맡았으며, 1960년부터는 수료과정을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였다.

 

1962년 8월 도립 ‘경상남도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의 운영권을 충무시(忠武市)로 이관하여 시립 ‘충무공예학원(忠武工藝學院)’으로 개칭하고 옛 ‘통영청년단회관(統營靑年團會館)’ 건물로 이전 개원하였다. 이어서 충무시의 나전칠기공예육성 사업이 다시 추진되기 시작하여 1965년 7월 28일 ‘경남공예협동조합(慶南工藝協同組合)’(가입업체 93개)을 설립하고 그해 9월 25일에는 동호동(東湖洞) 남망산공원(南望山公園) 내에 건평 200평 규모의 현대식 ‘충무공예학원’ 교사를 신축 준공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기능공 양성 위주의 실업계 학생수가 급격히 줄어 결국 1971년 ‘충무공예학원’은 ‘충무시공예연구소(忠武市工藝硏究所)’로 개칭되었다가 1975년에 연구소를 닫고 그 관리권은 ‘경남공예협동조합’으로 이관되고 말았다.

한편 1960년대 이후의 근세 통영나전칠기산업을 간략히 살펴보면, 1964년 나전칠기업체 4개(총종업원 21명), 1965년 나전칠기업체 10개(162명) 및 섭패공장 3개(15명) 그리고 1969년에는 나전칠기업체 17개(414명, 총생산액 118,074,000원) 및 섭패공장 7개(56명, 총생산액30,479,000원)로 그해 나전칠기 관련 산업의 총생산액은 148,553,000원(약 1억 5천만원)이었다. 그 후 1973년 통영상공회의소(統營商工會議所)에 등록된 나전칠기업체 수는 총 42개소였으며, 가장 번창했던 1970년대 후반에는 나전칠기 관련 소규모 공방까지 합하여 총 150여개 업체, 그리고 1980년대 초에는 약 200여개 업체, 장인 약 2천명, 가족수 약 1만명에 이르는 규모로 성업하게 된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하여 1994년 33개 업체, 1996년 23개 업체, 1998년 13개 업체, 1999년 11개 업체, 2003년 8개 업체가 남아 겨우 그 명맥만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2011년 현재에는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 기능보유자 송방웅(宋芳雄), 이형만(李亨萬) 및 통영옻칠미술관 관장 김성수(金聖洙) 선생 외에 대략 10여명의 장인이 통영지역에서 나전칠기 및 칠기공예가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현재 나전칠기 관련 공공시설물로는 통영공예전수교육관(統營工藝專授敎育館), 통영전통공예관(統營傳統工藝館), 통영옻칠미술관(統營옻漆美術館) 등이 있다.

이렇게 통영나전칠기는 광복 직후 정부로부터 수출 장려품으로 지정되어 국빈 증답용(贈答用) 및 수출품으로 ‘자개화병(螺鈿花甁)’이 큰 비중을 차지했으며, 1970․80년대에는 ‘자개상(螺鈿床)’, ‘자개장농(螺鈿欌籠)’ 등이 부유층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누리면서 수요가 대폭 증가하여 크게 성업하였다. 그러다가 1990년대를 기점으로 급격히 쇠퇴하여 지금은 한정된 수요층으로부터 제작 의뢰 받은 고급품이나 소품류의 문화관광상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실정이라 하겠다.

 

 

원주 옻(漆) 공예의 특징과 육성시책

 

 

원주역사박물관장 박 종 수

1. 머리말

전통공예, 전통음식, 전통산업 등 전통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문화의 산물은 특정 지역에서 오랜 시간 동안 이어져 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전통문화는 한 국가의 정체성으로 표현되며, 국가의 역할 보다 도시의 역할이 커진 글로벌 시대인 지금은 도시 정체성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특정 지역에서 전통공예가 발전하여 도시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으려면, 첫째는 재료의 질이 뛰어나고 생산량이 충분하여야 한다. 둘째는 재료를 다루어 생산하는 사람 곧 장인이 있어야 하며, 셋째 수요자(소비처)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전주는 오랫동안 종이의 고장으로, 담양은 죽세공품, 통영은 나전칠기의 본고장으로 알려져 왔다. 세 도시의 경우를 보더라도 재료와 장인이 전통공예 발전의 기본 조건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재료와, 장인, 수요자는 전통시대에는 필수조건 이었지만, 교통의 발달로 재료 수급과 작품(생산품)의 판매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수월해진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과거처럼 필수조건은 아니다. 오히려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도시(지자체 및 시민)의 노력에 따라 과거 특정 지역의 전통문화가 도시의 새로운 정체성으로 부각되는 사례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원주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의 자원조사 결과 원주산 칠의 품질이 우수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오랫동안 옻(漆)을 문화로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근래에 들어 지방자치제도가 시행되면서 옻(漆)에 대한 가치를 재인식하고 옻(漆) 공예를 도시의 정체성으로 부각하고 산업화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오늘 발표는 원주 옻(漆) 공예의 특징과 원주시의 옻 산업시책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2. 원주 옻(漆) 공예의 특징

 

1). 양질의 옻(漆) 산지 원주

전통공예는 양질의 재료 산지에서 오랜 세월 동안 대를 물려 전승되기 때문에 특정한 지역에서 발전하는

지역성을 가지고 있다. 원주에서 칠공예가 성행하게  것도 칠공예의 주재료인 칠(漆)의 성분이 우수하고

생산량이 많기 때문이다. 『동국여지승람』과 같은 지리지에서 원주의 주요 토산품으로 칠을 소개하고 있어일찍부터 원주산 칠의 품질이 우수하고 생산량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일제 강점기 때에는 우리나라 전 지역의 자원을 조사하였는데 원주의 칠은 평안북도 태천의 칠과 함께 가장 우수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인들은 원주에 많은 옻나무를 재배하고 칠을 채취하여 일본으로 공출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원주에서 칠 채취하는 사람들은 징용을 면제해 주었다.” 는 강원도무형문화재 제11호 칠정제장 박원동의 증언을 보아도 원주 칠의 품질과 생산량이 다른 지역보다 우수하고 많았음을 알 수 있다.

2). 원주 옻(漆) 공예 전통과 특징

원주에서 발견된 칠기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부론면 법천리의 4세기에서 5세기 무렵 백제무덤에서 출토된 톱니무늬(鋸齒文)가 그려진 컵 형태의 칠화칠기 유물이다. 고려와 조선시대 때 원주의 칠공예에 대하여는 전하는 기록과 유물이 없어 알 수 없지만, 1970년대 까지 태장동 가메기 마을에 칠소반을 만드는 공방이 밀집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고대의 칠공예 전통이 현대까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예로 볼 때 원주의 칠공예는 목심칠기와 칠화칠기의 전통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주의 칠공예가 목심칠기 중심에서 나전칠기와 칠화칠기로 확대된 것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 일사 김봉룡(一沙 金鳳龍, 19031994)의 영향 때문이다. 통영에서 태어나 조선후기 칠공예의 대가인 김성규로 부터 나전칠공예 기능을 전수받은 김봉룡은 1968년 설립된 원주칠공예주식회사의 공예부장으로 취임하면서 원주는 현대 칠공예의 중심지가 되었다.

현대 원주 칠공예의 특징은 고려 시대에 들어서면서 나전칠기의 성행에 비하여 전승의 맥이 단절될 위기에 있던 고대의 칠화칠 기능을 되살린 것이다. 이것은 원주가 양질의 칠산지로서 칠이 주재료인 칠화칠기의 적지였을 뿐만 아니라 칠화칠 기법에 관심이 많았던 일사 김봉룡의 영향 때문이다. 일사 김봉룡은 조선후기 화가인 심전 안중식으로 부터 한국화를 배웠고, 그 결과 일사 김봉룡의 작품에는 다른 나전장과 달리 회화적인 요소와 칠화칠기 제작 기법을 혼용한 작품이 많이 있다. 중요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인 이형만에 의하면 “선생님은 나에게 나전칠 기법은 전수하였고, 양유전에게는 평양의 채칠총에서 발견된 낙랑칠기(칠화칠기)를 재현하게 하였다”고 한다. 스승으로부터 기초적인 칠화칠기 제작 기능을 이어 받은 양유전은 스승의 유훈에 따라 40여 년 동안 고대 칠화칠 기법의 온전한 재현을 위하여 힘쓰고 있다. 양질의 칠과 일사 김봉룡의 영향으로 나전을 사용하지 않는 칠화칠, 전칠, 조칠 기법의 옻칠공예는 원주의 옻칠공예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3. 원주시의 옻(漆 ) 공예 육성 시책

일제 강점기 일본인에 의하여 과학적으로 알려진 원주 옻칠의 우수성과 자원을 바탕으로 원주시에서는 1995년 지방자치제도 시행이후 본격적으로 옻 관련 산업을 도시의 정체성으로 인식하고 옻 관련 산업 육성 시책을 펼치고 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옻(漆) 자원 基盤造成

가. 옻나무 재배단지 조성

조성연도

위 치

면적

(ha)

수량

(본)

수령

(년)

비고

 

15

48,000

 

 

93/99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 35

2

6,000

12-18

 

2001

원주시 태장 35(구 쓰레기매립장)

2

6,000

10

 

2008

원주 흥업면 대안리 산 166

1

3,000

3

 

2009

원주 흥업면 대안리 산 168

7

21,000

2

 

2010

원주시 흥업면 산 168번지

3

9,000

1

 

나. 농가 옻나무 식재사업 지원 : 매년 40,000본 ~ 70,000본 식재지원

연도

농가지원수

면적(ha)

본수(본)

비 고

193

44.9

126,440

 

2010

84

21.1

49,440

 

2011

109

23.8

77,000

 

◦ 식재방법 : 농가로부터 신청을 받아 무상으로 옻나무 묘목 보급

◦ 사후관리 : 식재년 부터 3년간 풀베기 작업비 지원 (ha당 약 365천원)

2). 인적자원 (기능전승자) 발굴 육성

가. 무형문화재 지정

․ 이형만 :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

․ 김상수 : 강원도무형문화재 제12호 (칠장)

․ 박귀래 : 강원도무형문화재 제13호 (나전칠기장)

․ 이돈호 : 강원도무형문화재 제17호 (생칠장)

․ 박원동 : 강원도무형문화재 제11호 (칠정제장)

․ 양유전 : 중요무형문화재 채화칠장 지정심의 중

 

나. 전통기능 전승자 지정

◦ 지 정 인 : 흥업면 대안리 거주 안영배 외1인 (신지식인 선정)

◦ 지정분야 : ‘98. 칠 재배 및 채취 기능전승자

◦ 주관단체 : 노동부, 한국산업인력공단

 

3). 옻 칠기공예관 건립 운영

- 원주옻영농조합의 자립기반 구축을 도모

- 원주지역의 전통문화산업인 옻 산업을 육성하고, 지역 문화산업으로서의 정체성 확보

◦ 위 치 : 소초면 학곡리 710-18

◦ 건축규모 : 지상 2층 599.43㎡ (181평)

- 1층 : 상설 판매장, 전시실, 관리실 등

- 2층 : 공방, 칠 마감실, 건조실, 교육장, 사무실 등

◦ 건축기간 : 2000. 5 2000. 12

◦ 사 업 비 : 10억원 (국비 250, 도비 250, 시비 500)

◦ 개 관 : 2001. 4. 18

◦ 운 영 : 원주옻 영농조합법인에 위탁 운영

◦ 운영비지원 : 30 백만원 (인건비, 공과금, 시설유지비 등)

 

※ 5년간 판매수익 현황

(단위 : 천원)

연도

2006

2007

2008

2009

2010

비고

판매수수료

24,580

13,468

19,296

18,130

4,919

매출액의

20%~30%

 

 

4). 옻 산업 보육센터 운영

◦ 목 적

구 입암분교를 옻산업 보육센터로 조성하여 옻칠기공예인의 작업공간으로 활용 및 육성 도모

◦ 위 치 : 호저면 고산리 149-4

ㅇ 규모 및 용도

- 부지 면적 2,479㎡, 건물 면적 : 394.59㎡

- 전시실 43㎡, 공방 168㎡, 복도 58㎡, 방․주방 55㎡, 창고 55㎡, 기타15㎡

ㅇ 조성비용 : 8천만원 (도비 3천만원, 시비 5천만원)

ㅇ 운영기간 : 2002. 5 2009

ㅇ 운 영 자 : 양유전

- 사용목적 : 채화칠기 작품 재현 및 후계자 양성

 

5). 전통(옻․한지) 산업진흥센터 건립

- 원주권역을 중심으로 한 전통산업인 옻과 한지를 지원하기 위한 관련 기술 및 비즈니스 서비스 산업등에 대한 지원

- 지역산업의 활성화와 경제기반 확립으로 전통산업의 발전 도모

위 치 : 원주시 우산동 648-9번지 일원 (상지영서대학 내)

사 업 량 : 부지면적 - 12,723㎡, 건축면적 - 4,470㎡

◦ 사 업 비 : 73.5억원

◦ 운영내용 : 연구시설 및 벤처창업보육센터 운영

◦ 사업기간 : 2007년 ~ 2009년

 

6). 원주 옻 문화센터 운영

◦ 목 적

관내에 산재하여 접근성 및 각 산업별 연계성이 매우 취약한 원주옻과 관련된 테마를 한 곳으로 집중시켜 세계적으로 우수한 원주옻산업의 랜드마크화 실현옻산업의 활성화

ㅇ 위 치 : 원주시 봉산동 1124-2외 6필지

ㅇ 규 모 : 부지 - 2,738.24㎡, 건물 : 2,898.96㎡(지하1층 지상3층)

ㅇ 조성비용 : 14억원 (리모델링 10억원, 장비구입 4억원)

ㅇ 사용용도 : 공방 6개소, 전시장․판매장, 공예교실, 옻 정제시설 등

- 공예분야 8명, 정제분야 1명 입주

ㅇ 개 관 : 2009. 10. 1

ㅇ 운 영 : (사)원주옻칠문화진흥회 위탁운영

ㅇ 운 영 비 : 년간 100백만원 (시비 지원)

7). 옻 산업 육성 법인 설립 및 자립기반 구축

가. 원주 옻 영농조합법인 설립

◦ 설립일자 : 1999. 3. 10

◦ 조합원수 : 19명

◦ 출 자 금 : 1,900천원 (1인당 100천원)

◦ 조합의 기능

- 옻나무 육종, 재배 및 무육, 생칠 채취기술 보급사업

- 생칠의 수매 및 정제옻 가공, 유통에 관한 사업

- 옻관련 상품의 생산, 판매, 유통 사업

◦ 자립기반 구축을 위한 운영비 보조 : 년간 20,000천원

 

나. 옻칠공예인을 위한 법인설립

◦ 설립일자 : 2008. 10

◦ 회원수 : 15명

◦ 출 자 금 : 3,000천원 (1인당 200천원)

◦ 추진사업

- 전통옻칠공예산업 육성

- 옻칠공예인 지원사업 추진

- 옻칠공예대전 개최 주관

- 원주옻산업 홍보를 위한 각종 행사 추진

- 원주옻칠문화센터 운영

 

다. 원주 옻(漆) 구입비 지원

◦ 지원대상 : 시 관내 옻칠공예인

◦ 사 업 비 : 20백만원(보조금 10백만원, 자부담 10백만원)

◦ 지원방법 : 원주에서 생산된 옻칠액 구입비의 50% 지원

구입량 : 옻칠액 40㎏ (㎏당 단가 : 500천원)

◦ 구 입 처 : 원주 옻 영농조합

◦ 지원조건 : 50만원 이하의 컵, 그릇, 수저 등 중저가 생활용 옻칠 공예품 제작 에 반드시 원주 옻을 사용하여 판매토록 함

◦ 구입일정 : 매년 10월중(옻칠채취기간 종료 후)

 

8). 원주 옻의 권리화

가. “원주참옻” 상표권 출원

◦ 출 원 : 2000. 12. 23 (출원공고 결정일 : 2001. 12. 5)

◦ 출원품목 : 생옻, 정제옻, 흑색옻 및 관련 제품

◦ 상 품 류 : 제2류 (흑색옻)

 

나. “원주옻” 지리적표시단체표장 등록 출원

◦ 출원 : 2007. 1. 24.

◦ 출원품목 :『정제옻, 생칠옻, 흑색옻, 니스용옻』에 대한 도료부문

 

다. “원주옻” BI 개발 및 상표권 등록

◦ 개 발 일 : 2008. 5. 13.

◦ 출원시기 : 2008. 10

 

 

9). 옻 관련 학술연구 사업

가. 국내외 학술세미나 개최

◦ 옻관련 산업기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 개최시기 : 1999. 3. 10

- 개최장소 : 상지대 (주최 상지대, 후원 원주시)

◦ 한일 국제심포지움(옻의 과학적 이해와 산업적 응용)

- 개최시기 : 2000. 8. 4

- 개최장소 : 상지대 (주최 상지대, 후원 원주시)

◦ 전통 옻칠공예 학술발표회

- 개최시기 : 2000. 12. 1

- 개최장소 : 상지대 (주최 문화재청, 주관 원주시, 후원 강원도)

 

10). 한국옻칠 공예대전 개최

◦ 개최시기 : 2001년도부터 매년 9월 개최

◦ 작품시상 : 대상(국무총리상) 외 5종 12점

◦ 주 관 : 원주시

◦ 사 업 비 : 년 139,000천원 (시상금 99,000천원 행사비 40,000천원)

 

11). 원주 옻 산업 명품화 사업

○ 농촌의 향토자원을 1․2․3차 산업이 융․복합된 지역 핵심산업으로 중점 육성 (농림수산식품부 주관)

○ 사업기간 : 2012년 ~ 2014년 (3년)

○ 사 업 비 : 30억(국비 15억 / 지방비 9억 / 민간부담 6억)

○ 사용용도 : 향토자원 개발을 위한 S/W, H/W분야 포괄

○ 참여기관 : 원주옻영농조합 등 9개 기관

○ 주요사업내용

- 옻나무 품질관리 및 생산이력시스템 구축

- 전시문화 교류사업 및 홍보마케팅․정보화사업

- 유통네트워크 구축 및 운영 / 건강기능성 연구 및 제품개발

- 옻산업 종사자 마인드 향상 교육 / 통합컨설팅

- 가공유통시설 지원 및 현대화사업

 

12). 원주 옻칠 공예 담당 행정조직

○ 조 직 : 경제문화국 지식산업과 옻한지산업 담당

○ 분장업무

직위(급)

성 명

직위(급)

담 당 업 무

현부서

(현업무)

전화

번호

옻․한지산업담당

행정6급

∘ 옻․한지산업 업무 총괄

∘ 한지산업 발굴 및 육성

∘ 한지테마파크 운영 및 관리

∘ 한지산업단지 조성 및 관리

∘ 원주한지 활성화사업(RIS) 사업 추진

∘ 한지산업 시설물 운영 및 지원

 

 

 

행정8급

∘ 옻산업 발굴 및 육성

∘ 옻산업 시설물 운영 및 지원

∘ 옻나무 재배단지 관리

∘ 원주시 한국옻칠공예대전 운영

∘ 옻칠 공예교실 운영

∘ 원주옻․한지산업 특구운영 및 관리

∘ 옻칠액 채취 기능인 육성 및 지원

∘ 향토산업 육성사업 추진

∘ 기타 옻 산업 일반

 

 

기능7급

∘ 한지문화제 및 한지대전 지원

∘ 전통한지체험센터 및 한지공예관

운영 및 관리

∘ 한지공예학교 운영

∘ 닥나무 재배사업 관리 및 지원

∘ 한지임대공장 신축

∘ 한지산업 시설물 관리

∘ 기타 한지산업 일반

 

 

 

 

4. 마치며

통영은 우리나라 옻칠 공예의 본 고장이다. 현대 원주의 옻(漆) 공예는 통영으로 부터 비롯된다. 전통공예는 양질의 재료 산지에서 오랜 세월 동안 대를 물려 전승되는 지역성을 가지고 있다. 통영의 옻칠공예 전통은 나전을 기반으로 하는 나전칠기이고, 원주의 칠공예는 우수한 옻(漆)을 기반으로 하는 칠화칠기와 전칠, 조칠, 목칠 등 나전을 사용하지 않은 옻칠공예 이다. 따라서 통영과 원주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옻칠공예 도시이다. 앞으로 우리나라 옻칠공예 발전을 위하여 통영과 원주의 상호 교류와 협력이 필요하다. 앞에서 원주의 옻 칠공예 육성을 위한 시책을 소개하였지만 여전히 미흡한 점이 있으며,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이 있다. 그 중 가장 기초적이고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는 옻칠 공예 장인들의 작업 결과물인 작품(생산품)의 수요처와 일감을 확대하는 일이다. 이 것은 장인들의 생계와 직결되는 것으로 생산품의 수요처가 없다면 옻칠공예 육성을 위한 모든 시책들이 빛을 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옻칠 공예 장인들의 생계를 위하여 기존의 공예 작품 제작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감이 필요하다. 통영과 원주의 경우 공공 건축물의 일부 공간을 옻칠 공예로 마감한다면 도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미술 작품으로 활용할 수도 있고, 옻칠 공예인 들에게 새로운 일감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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