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李滉) 문묘 배향
선조의 벼슬 권유도 뿌리치고 낙향하다
자기 수양과 단련에 힘쓰다
교육에 관심을 기울이다
선조의 벼슬 권유도 뿌리치고 낙향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학자 두 사람을 꼽는다면 하나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요, 또 하나는 다산 정약용일 것이다. 이황은 성리학이 가장 크게 일어날 적에 이의 체계를 세우고 새로운 학설을 덧붙여 집대성했고, 정약용은 현실개혁의 논리로 사상, 제도 등을 여러모로 살펴보고 정리해 날카롭게 현실을 고발했다. 각기 시대가 처한 환경에 따라 학자,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나타냈다.
이황은 새재 너머 후미진 경상도 예안에서 진사를 지내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그저 그런 시골 양반 가문이었는데 어릴 적에 숙부 이우에게서 글을 배웠다. 그 뒤 거의 혼자서 독학을 하며 학문을 익혔다. 그는 향리에서 학문을 익히다가 20대 후반에 진사가 되고 30대 초반에 문과에 합격했는데, 그의 총명과 학문적 깊이로 따져보면 늦게 벼슬길에 들어선 셈이다.
그 뒤 아주 순탄하게 관직의 길을 걸었다. 비록 1545년 을사사화로 잠시 벼슬자리가 떨어지기는 했으나 곧 복직되어 조정에서 활동했다. 그는 두 차례나 지방의 수령으로 나가서 백성의 고통과 농촌의 현실을 보고 겪었다. 그리고 두 차례나 유학교육기관인 성균관의 책임자로 있었다. 그는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으면서 철저한 유학교육을 시켜 관리를 양성했는데 뒷날 이들은 여론형성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그의 벼슬길은 막힘이 없어 판서 등을 거쳐 학자 문사의 최고 영예인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었다. 마지막 벼슬인 대제학을 받은 그는 나이 일흔에 가까워 뜻을 학문에 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했다. 그러고는 거듭 출사(出仕)하라는 선조의 간곡한 권유를 뿌리치고 《성학십도(聖學十圖)》만을 바치고 다시 낙향했다.
이황이 고향에 돌아가려고 뚝섬에서 나룻배를 기다리고 있을 적에 그를 전송하기 위해 기대승 등 수백 명의 후배, 제자들이 몰려나와 눈물로 이별했다고 전한다. 그는 뒤를 돌아보면서 새로운 결의를 다졌다. 그의 움직임 하나, 말 한 마디가 제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온 그는 평생 소망하던 학자의 길, 학문탐구의 여가를 갖게 된다.
자기 수양과 단련에 힘쓰다
이황은 벼슬자리에 있으면서도 학문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찍부터 주자학을 깊이 연구해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확립시켜 끊임없이 수정 · 보완을 거듭했다. 이기론을 쉽게 설명하면, 인간은 본래 착한 바탕[理]이나, 태어나 살다 보면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한다[氣]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바탕으로 해 끊임없이 자기 수양이나 교육을 통해 연마해야 한다고 했다. 이 때문에 그를 주리론자(主理論者)라 단정한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쉴 새 없이 공부를 거듭했다. 하루 내내 꼿꼿이 앉아 책을 읽었고, 머리가 아프면 꽃을 보며 시를 지었으며, 해답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이런 나날을 보냈기 때문에 여느 사람들은 그를 아주 파리한 샌님쯤으로 여기거나 아니면 아주 근엄한 스승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실제 그가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든지, 술을 지나치게 마시지 않았다든지, 놀이에 지나치게 빠지지 않았다든지 하는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 결코 단조롭지 않았고 그렇다고 본능을 지나치게 억제하지도 않았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스무 살 장가를 들 때였다. 당시 그는 상당히 높은 학식을 지닌 청년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장모는 첫날밤이 여간 염려스럽지 않았다. 그런 도학군자에게 딸을 시집보냈으니 아내를 거들떠보지도 않을까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이튿날 장모는 신방에서 나오는 딸을 붙들고 은근히 물어보았다.
“신랑이 귀여워해주더냐?”
“말도 마시소. 개입디더.”
물론 이 이야기는 민간에서 우스개로 전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도학자인 체 본능을 억제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해준다. 그리고 아내가 옷을 제대로 지을 줄을 몰라 아주 볼품없이 만들어 주어도 개의치 않고 입고 다녔다 한다. 사람들이 이를 보고 그를 소탈하고 격식에 구애받지 않는 인물이라고 했다 한다. 이런 그였지만 학문에 몰두할 적에는 천둥이 치는지 벼락이 치는지 마당에 널어놓은 나락이 떠내려가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에게는 평생에 걸쳐 실천한 건강법이 있다. 하나는 아침에 변소에 가 있을 적에 이를 마주치는 일이었다. 그는 변소에 앉아서 아랫니와 윗니를 힘껏 부딪쳐서 턱에 힘을 주는 일을 적어도 50번 이상씩 반복했다. 이 운동은 이를 튼튼히 함은 물론 항문과 함께 전신운동이 된다. 예전에는 틀니도 치과전문의도 없었으니 노인에게는 치아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 운동을 반복한 그의 이가 늙어서도 건강하게 유지되었을 것임은 틀림없다. 그리고 단전호흡을 했는데, 그는 이것에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연달아 실험을 했다고 전해진다.
또 다른 하나는 투호놀이다. 이황 자신이 투호를 하기도 했지만 이를 제자들에게도 끊임없이 시켰다 한다. 투호란 살을 일정한 거리에 둔 병에 던져 넣는 놀이다. 투호를 통해서 그는 두 가지 효과를 거두었다. 투호는 온몸의 균형을 잡고 거리를 정확히 측정해야 적중률이 높다. 몸이 흐트러지면 결코 제대로 맞힐 수 없다. 그리고 정신력을 집중해야 한다. 무슨 일이든지 정신력의 집중이 중요하지만, 투호는 잡념이 생겨 정신이 산란해지면 결코 명중시킬 수 없다.
그는 건강을 다지면서 정신집중을 하기 위한 투호를 생활 속에 도입했다. 그리하여 글을 배우러 오는 사람에게 먼저 투호를 시켜보았다. 그리고 그 사람의 투호 솜씨를 보고 건강을 점쳐보고 학문을 할 수 있는 덕이나 집중력을 가졌는지를 가늠해 보았다. 그리고 그 바탕을 기초로 제자들에게 학문과 인생을 가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