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 77
세상에 들러
잠시 마음 들뜨는
섣달그믐날(소도)
市(いち)に 入(い)りて しばし 心(こころ)を 師走(しはす) かな
(이치니 이리테 시바시 코코로오 시하스 카나)
素堂
市 (いち, 이치): 장터, 시장을 뜻한다.
여기서는 은둔지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북적이는 '속세'나 '세상'을 은유한다.
入りて (いりて, 이리테): 현대어 '入って(하잇테, 들어가서)'의 고어 표현.
しばし (시바시): '잠시, 잠깐'을 뜻하는 부사.
師走 (しはす/しわす, 시하스): 음력 12월을 뜻하는 고유 어휘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섣달그믐'의 계절감을 나타내는 여름/겨울의 계어(季語)다.
소도 하이쿠의 특징은 생략에 있다.
눈에는 푸른 잎, 산에는 두견새, 첫 가다랑어
目(め)には 青葉(あおば) やまほととぎす 初(はつ) 鰹(がつお)
(메니하 아오바 야마호토토기스 하츠가츠오)
青葉 (あおば, 아오바): 초여름의 '푸른 잎(신록)'을 뜻하며 눈으로 즐기는 시각적 요소다.
やまほととぎす (야마호토토기스): '산두견새'를 뜻하며, 귀로 듣는 청각적 요소다.
初鰹 (はつがつお, 하츠가츠오): 초여름에 처음 잡히는 '첫 가다랑어'로,
입으로 맛보는 미각적 요소이자 초여름을 대표하는 유명한 계어(季語)다.
대표적인 이 하이쿠에서도 '눈에는'에 대응하는 '귀에는'과 '입에는'을 생략하고 있다.
다 말해 버리면 시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세상을 떠나 살다가 연말에 사람들 오가는 거리에 내려오니 마음이 들뜰 수밖에 없다.
산중 거처로 돌아가며 쓴 또 한 편의 하이쿠가 있다. 소도의 마지막 하이쿠다.
지면에 떨어진 그림자를 주인 삼아 몸이 그림자를 따라가는 감성이 돋보인다.
나를 데리고 내 그림자 돌아오는 달 밝은 밤
われ つれて 我影(わがかげ) 帰(かえ)る 月夜(つきよ) かな
(와레 츠레테 와가카게 카에루 츠키요 카나)
われつれて (와레 츠레테): '나를 데리고'. 동사 つれる(데리다, 동반하다)의 연결형(~て).
보통은 '내가 그림자를 데리고' 간다고 표현하지만, 여기서는 도리어 '그림자가 나를 데리고'
돌아간다고 주객을 전도해 표현했다.
我影 (わがかげ, 와가카게): '나의 그림자'를 뜻한다.
달빛이 얼마나 밝은지 그림자가 또렷하게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지는 대목이다.
かな (카나): 문장 끝에 붙어 깊은 여운과 감탄(~이로구나!)을 남기는 대표적인 키레지(切れ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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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으면
반딧불이도 한낱
벌레일 뿐(아온)
夜(よ)が 明(あ)けて 虫(むし)に なりたる 蛍(ほたる) かな
(요가 아케테 무시니 나리타루 호타루 카나)
阿言
夜が明けて (よがあけて, 요가 아케테): '날이 밝아서, 밤이 새고'.
'夜が明ける(날이 밝다)'의 연결형(~て).
虫になりたる (むしになりたる, 무시니 나리타루): '벌레가 된, 벌레가 되어버린'.
명사 뒤에 붙는 조사 'に(~로)'와 동사 'なる(되다)', 그리고 과거·완료를 나타내는 문어체 조동사
'たり(타리)'의 연체형인 'たる(타루)'가 결합하여 뒤의 명사를 수식.
かな (카나): 문장 끝에 붙어 깊은 여운과 감탄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키레지(切れ字)다.
수백 년이 흘러도 이름이 기억되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한두 편의 시만 전할 뿐
생몰 연대조차 알 수 없는 시인도 많다.아온(阿言)도 그중 한 사람이다.
현대 일본을 대표하는 유명한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谷川俊太郎)는 무명에 대한 동경을 말하며
“『만엽집(万葉集_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시집)』에도 작자 미상의 시가 많다.
그런 식으로 작품을 남기는 것이 가장 좋다.”라고 토로했다.
현대 하이쿠 시인 니시노 후미요(西野文代)의 하이쿠가 있다.
아이가 반딧불이와 숨을 맞추고 있다
ほうたる(ほたる)と 息(いき)を 合(あ)はせてゐる(あわせている) 子(こ) かな
(호-타루토 이키오 아와세테이루 코 카나)
ほうたる (호-타루): '반딧불이(ほたる)'의 방언적이거나 예스러운 아담한 표기 방식.
合はせてゐる (あわせている, 아와세테이루): '맞추고 있다'. 현대어 표기로는
'合わせている'라고 쓰지만, 이 시에서는 역사적 가나 표기법을 활용하여
'は'를 'わ'로, 'ゐ'를 'い'로 읽습니다. 동사 '合わせる(맞추다)'와 상태·진행을 나타내는
'~ている(~하고 있다)'의 고어 형태이다.
子 (こ, 코): '아이'를 뜻하는 명사다.
어디선가 반딧불이를 바라보고 있는 아이가 반딧불이의 깜박이는 빛에 맞추어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쉰다.두 생명이 그렇게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