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우리 수도원을 방문 중인 한 수도원장이 수도회 총회에서 관상적인 삶은
수련기에 가졌던 생각에 있는 힘을 다해 매달리는 것이라고 언명했다.
믿을 수 없는 주장이다. 내 말은 그러한 주장이 그런 사람에 의해
그런 자리에서 진지하게 제창될 수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주장에 대해 이상하다고 느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노력이라는 단순한 개념이 모든 것을 정당화한다.
전력을 다해(하마터면 죽기 살기로'라고 쓸 뻔했다) 관상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면
당신이 무엇을 하든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43
Audite et intelligite traditiones quas Deus dedi vobis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전통들을 듣고 이해하도록 하라). 하느님께서 주신 전통이 있다.
그것은 이른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기억이며 우리는 그것 속으로 태어난다.
그것은 의미· 표상· 징표의 저장소다.
묻혀 있던 위대한 징표들이 나타나자마자 우리 안에 그것들을 이해하는 타고난 능력이 생긴다.
사회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그 징표들의 확실한 표시다. 만일 사회가 자신의 '기억'을 잃어버리면,
전승의 표상인 그 사회의 언어를 잊어버리면,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은 신경과민이 된다.
설명되지 않고 사용되지 않는 의미들 때문에 그들 자신의 기억이 부패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전통 자체가 죽은 인습에 지나지 않게 되며, 그보다 더 나쁘게는 강박관념이 되고
집단적 신경증이 된다. 아무리 새롭다 해도, 일련의 인습을 다른 것으로 대체한다면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삶의 의의를 회복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의 현황이다.
=====================
비노바 바베의 글(3-33항)에서 지적했듯,
영성마저도 나의 열심과 노력으로 성취해 내려는 '영적 야망(욕구)'으로 변질될 때,
그것은 진정한 관상이 아니라 자아를 살찌우는 졸렬한 모조품이 될 뿐이라는 일갈이다.
그러면서 신부는 자주 방향 감각을 상실하는 우리들이 돌아보고 느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이 주신 기억, 전통(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영혼에 새겨진 하느님의 의미와 징표의 저장소)
이며, 낡은 규칙을 단순히 새로운 규칙(인습)으로 바꾼다고 해서 삶의 참된 의의가 회복되지는
않으며, 정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껍데기의 교체가 아니라, 묻혀 있던 위대한 영적 기억을
깨우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풍성한 말의 향연에 취해서 잠시 방향을 잃은 자신을 곧추세워 다시 한번 정리해 본다.
자주 초심을 잃고 부패하고 방향 감각을 상실하는 인식에 대한 부단한 성찰로 읽었다.
포도나무에 포도가 열림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열매 맺지 못함을 쉽게도 '열심히 하지 않음'으로 만 예단하고 살지는 않았는지...
보통의 사람은 자기가 아는 만큼만 해낼 수 있지만, 현인은 무엇이나 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이유로 성찰과 의지의 관계가 눈과 손의 관계인 것처럼,
이런 참다운 용기가 없는 알량한 지식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말씀을 기억하며...
꽃과 열매를 보려거든 먼저 흙과 뿌리를 보살펴주어야 한다는...
(2026-06-10 無逸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