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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의 성인들.
중세 사회가 붕괴하고, 성직자들의 부패와 수도 생활의 타락이 한창인 가운데
하느님께 철두철미하게 순명하던 평신도 남녀가 일어섰다. 이를테면 플루의 니콜라스와
잔 다르크다. 그들은 속심俗心과 편견, 잔인함과 절망과 탐욕의 한가운데 있는 모순을
드러내는 순수하고 솔직한 표시였다. 그들은 반역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온유하며 순종적인 하느님의 도구로서 주변의 부패한 기준에는 철저하게 반대하면서,
동시에 모든 사람과 모든 권력자 각각을 마땅한 태도로 대우해 주었다. 그들은 반역자가 아니라
하느님께 순명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분명히, 그리고 납득이 가도록 보여주었다.
그들의 순명은 사람들에게 자비의 징표요. 진리와 권능의 계시였다.
우리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하느님의 이러한 징표에 자연스럽게 이끌린다.
우리는 그들이 계속 하느님의 영광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안다.
만일 그들이 지금도 하느님 자비의 '징표'가 아니라면 하느님은 우리 마음이 그들에게 이 같은
사랑을 느끼도록 하시지는 않을 것이기에 우리는 당연히 그들을 신뢰하고 그들의 전구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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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엄청난 공포 속에서, 미미한 이의 표시를 제외하고 허용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포스터는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엘리엇의 초기 작품을 읽고 자기가 만족한 것에 대해 상세히 논하면서 그렇게 썼다.
그 먼 옛날, 비교적 개화된 전쟁인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군대를 동원하는 데 몇 주가 걸렸다.
게다가 이 전쟁에서는 아직 소이탄이나 핵폭탄 등으로 일어나는 화염폭풍과 티엔티TNT로
민간인을 전멸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전쟁은 진실로 '엄청난 공포'였다.
그 후 40년 동안 우리가 알게 된 그 공포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공포로,
제1차 세계대전이 매우 얌전한 말다툼처럼 보이게 했다.
'더욱 미미한 이의 표시' 이제 우리는 미미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경멸할 뿐이다.
실제로 이의는 범죄나 미친 짓, 또는 적어도 정부를 타도하기 위한 과격한 비밀 활동 같은 것이
되었다.
대다수 사람들과는 의견을 달리하기로 한 사람들조차 이제는 대규모 항의가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회적·정치적 운동의 규모가 커질수록 그것은 더욱 변조되고
조종되며 더 엄청난 거짓, 위장이 된다.
어떤 무자비한으로 후원을 받거나 보호되지 않으면 마치 항의 자체가 쓸모없는 것 같다.
진정한 이의 표시는 언제나 인간적인 척도를 지켜야 한다.
그것은 자유로워야 하고 자발적이어야 한다. 이의 표시가 미미할수록 종종 더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미리 계획된 것이 아니어서 사전에 선전자에 의해 변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잘 조직된 집단적 운동에 기대하기보다는 개인이나 지원을 받지 않는 작은 그룹에
효과적인 항의를 기대하는 것이 더 건전하고 고귀할 것이다. '더욱 미미한 이의 표시'가
유명 신문이나 호화 잡지의 기삿거리가 되지 않는 것은 좋은 일이다. 조종 받고 있는 큰 집단과
한패가 되지 않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홀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자신의 반대 의사를 말이나 성명서로, 태도나 상징적 의사 표시
등으로 제한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는 어쩌면 실행하지 못할지도, 의사 표시가 충분하지 않을지도, 의사 표시들이 너무 미약할지도 모른다.
이에 반해 대규모 '행동'처럼 보이는 것은 종종 정치적 촌극이나 계획된 재난일 뿐인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행동은 종종 터무니없는 거짓말, 행동 자체의 공허함 때문에 욕구불만과 파괴적인
분노라는 대변동으로 끝나는 과장되고 유치한 언행에 지나지 않는다.
내용 없고 저질인 거대한 집단적 시위의 설득력과는 달리 규모가 작고 진정한 생각을 가지며,
미미하지만 진지하고 정직한 항의는 용인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자발적이며 효과적이고 강력한 힘이 있는 미국 민권운동의 관점과 부합해야 한다.
미국 민권운동의 적들이 민권운동을 '공산주의를 위한 위장'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이야말로
민권운동과는 관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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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의 글은 잠시 사부 성 프란치스코의 작음(Minoritas) 대한 묵상으로 이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인간이 되신 신적 비하를 따르는, 세상의 힘을 탐하지 않는 자기 낮춤과
적대하는 존재에게도 마땅한 태도로 대하는 온유, 이런 순명은 나를 지우고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세상의 기준에서 볼 때는 미미하고 무력해 보일지라도 흔들리는 우리의 마음에 자비와
진리를 일깨우는 가장 강력한 '징표'가 된다는 것으로 읽었다.
아마도 신부의 뜻도 거대한 부패(44번)와 거대한 전쟁·집단주의(45번)라는 현대의 공포 속에서
신앙인이 살아가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 거대해지고 해결의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꺼이 작아지고, 어쩌면 하느님께 온전히 순명할 수밖에 없는 존재만으로도 충분한,
'순수한 표지'이자 '미미한 작은 이의 자발적인 저항(이의)'으로 남는 것이라는....
(2026-06-16 無逸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