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5 節希臘 文明의 衰頹(쇠퇴)와 變貌
펠로폰네소스 戰爭
破滅的인 펠로폰네소스戰爭 (西紀前 431 ~ 404 )이 낳은 단 하나의 一流級 人士는 그 戰爭의 歷史를 쓴 투큐디데스였다. 투큐디데스가 最初의 重要한 희랍의 歷史家인 것은 아니다. 그보다 한 世代 앞서서 페리클레스時代의 아테네에서 헤로도토스가 아주 믿을 만한 것은 못되지만 재미있는世界史를 엮었으며, 이는 그 當時의 알려진 世界-- 희랍과 아울러 페르샤. 이집트 및 메소포타미아의 이야기 였다. 그러나 투큐디데스는 部分的으로 스스로 直接 觀察한 바에 依據하여 最初의 客觀的 歷史의 주요 著作을 썼던 것이다. 그 자신 이 아테네人이었지마는 그의 <펠로폰네소스戰爭史 >는 대체로 良心的이며 正確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투큐디데스는 히포크라테스가 病에 대하여 한 바를 社會에 대하여 하려고, 다시 말하면 人間行爲의 診斷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투큐디데스는 그 戰爭의 主要原因을 하여 말하기를,
…. 아테네人은 그 帝國을 더욱 확고히 支配하게 되었거니와, 그 都市는 一大 強國이 되었다.
라케다이몬人 ( 스파르타人 )은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았으나, 그동안 대개 無爲로
보내고 거의 干涉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지못한 경우가 아니면 戰爭을 서두는 성미가
아니었거니와, 가까이 있는 敵들 때문에 얼마간 妨害되었다. 그러나 아테네人은 看過 할 수
없을 만큼 強大 해지고 그들의 同盟國에 손을 뻔히고 있었다. 그들 (스파르타人 )은 더 참을 수
없게 되고, 全力을 다하여 武力으로 아테네의 勢力을 打倒 하기로 決心 하였다. 그래서 그 때문에
그들은 펠로폰네소스 戰爭을 시작한 것이었다.
아테네 帝國, 이 野心的이고 獨裁的이고 侵略的인 帝國은 勢力均衡을 뒤집어 놓았다. 희랍의 다른 都市國家들은 커져가는 憂慮와 함께 아테네의 手中으로 희랍의 貿易이 점점 集中 되어가고, 아테네가 그 商業 및 政治上의 競爭國들에 더욱더 모진 壓力을 加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서 431 年에 그들은 侵略者를 누르기 위하여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同盟에 加擔 하였던 것이다.
아테네의 敵國들이 戰爭의 끝장을 내는 데는 오랜 時日이 걸렸다. 海軍國인 아테네와 陸軍國인 스파르타가 서로 攻擊 하기도 어려웠거니와, 그중의 하나가 決定的인 打擊을 加하기는 더욱더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는 처음에 軍隊를 해마다 아티카로 보내서 올리브 나무들을 베어 넘기고 農作物을 없앰으로써 아테네를 굶주리게 하려 하였다. 이에 대하여 아테네人은 아티카의 全住民들을 市壁 안에 모아 들이고 아테네 海軍이 지키는 海路로 食糧을 輸入 함으로써 응수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아테네는 뒤이은 災難 중의 첫 災難을 겪었다. 430年에 무서운 傳染病이 일어나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든 都市의 극히 非衛生的인 條件 때문에 병은 퍼졌다. 그 病은 아마 住民의 4 分의 1을 앗아갔을 것이며, 429年에 죽은 페리클레스도 그 犧牲者의 하나였다. 페리클레스가 죽은 뒤로 아테네의 黨派 사이에 오랜 紛爭이 일어났고 前보다 훨씬 熾烈 하였다. 戰爭의 나머지 期間 동안, 어떤 代價를 치르더라도 講和 하기를 바라는 貴族派와, 어떤 犧牲을 무릅쓰더라도 戰爭을 續行하려는 民主派 사이에 權力이 왔다 갔다 하였다. 410年代에 民主派는 그 새로운 指導者 로서 페리클레스의 조카요 소크라테스의 愛弟子인 알키비아데스를 가졌다. 그는 잘 생긴 훌륭한 젊은이여서, 後日 그가 背反하게 된 民衆에 의하여 偶像化 되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시실리島의 强力한 희랍 都市요 스파르타와 同盟할 가망이 있는 都市인 시라쿠사를 攻擊하는 無謀한 戰略을 提案하였다. 시라쿠사 攻擊은 失敗하고 아테네의 遠征軍은 全滅하였다 (413). 그동안에 알키비아데스는 反對派의 貴族 들에 依하여 아테네에서 쫓겨나 스파르타로 달아났고, 거기서 攻圍中의 시라쿠사를 원조하는 제일 좋은 방도에 관하여 훌륭한 助言을 하였다. 아테네에 派爭이 새로 激化함으로써 알키비아데스는 다시 指導的 地位를 차지하게 되었다 (411 ~ 406 ). 그러나 그때까지는 第三勢力-- 살라미스와 플라타이아의 戰鬪 뒤로 잃은 이오니아 地方을 回復하려는 생각을 아직 가지고 있던 페르샤가 바야흐로 介入해 왔다. 페르샤의 援助를 받아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海上支配에 끝장을 내릴 만한 艦隊를 마련했다. 食糧의 海上輸送이 끊어지고 스파르타의 攻圍를 받아 굶주린 아테네는 404 年에 屈伏하고 말았다.
戰爭 뒤에 온 것
펠로폰네소스 戰爭은 勝利도 平和도 가져오지 않았다. 명색 勝利國인 스파르타는 페르샤의 援助金을 받는 대신에 페르샤에게 넘겨준 이오니아의 都市들을 도로 찾으려 하다가 失敗하였다. 스파르타는 그전의 아테네衛星國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였으나 그 苛酷한 帝國主義的 支配 때문에 오히려 사이가 멀어졌다. 勢力均衡을 무너뜨리려는 이 새로운 威脅으로 말미암아 아테네와 펠로폰네소스 戰爭時 일찌기 스파르타의 同盟國이었던 약간의 나라는 防衛同盟을 맺게 되었다. 게다가 스파르타市民이 死傷者 때문에 아주 줄어들었으므로, 하나의 帝國을 다스리고 지킬 만한 充分한 人力이 없었다. 西紀前 371 年에, 여태껏 不敗라고 생각되던 스파르타軍이 아티카의 北西쪽, 보이오티아의 肥沃한 平野의 가장자리에 자리잡은 都市인 테에베에게 敗北 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테에베의 覇權은 10年도 繼續하지 않았다.
펠로폰네소스戰爭에 뒤이은 半世紀 동안은 轉變하는 同盟들이며 散發하는 戰爭들로 가득찼지마는 衰退一路의 時代는 아니었다. 플라톤이 著述하고 教授하고 있었거니와, 아테네가 그 帝國을 빼앗기기는 했으나 곧 民主 政體를 再立하고 지난날의 商業的 覇權을 回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海外植民의 時代에 희랍人을 移住하게 하였던 것과 동일한 經濟的 壓力이 戰後의 再調整의 時代에도 作用하고 있었다. 401年에 1萬名의 희랍人이, 그중엔 歷戰의 勇士들도 많이 끼었는데, 反亂을 일으킨 페르샤왕의 同生을 미는 傭兵으로서 從軍하였다. 反亂은 失敗로 돌아갔으나, 1萬名은 北部 메소포타미아의 깊숙한 곳에서 거치른 山岳 地帶를 거쳐 安全한 黑海沿岸으로 가는 歷史的인 行軍을 하였다. 그 行程은 参與者의 한 사람인 크세노폰 (西紀前 430頃 ~ 345 )에 依하여 < 아나바시스 > 속에 記錄 되어 後世에 남겨졌다.
傭兵들, 다시 말하면 大義名分을 위해서라기보다는 報酬를 받고 싸우는 職業軍人들이 희랍 本土에서 움직일 수 없는 存在가 되었으니, 이것도 衰退하는 人力과 道德의 또 하나의 徵兆였다. 희랍의 國家들은 더 이상 싸움을 계속할 수 없게끔 되었으나 서로 平和롭게 같이 사는 길은 도무지 생각해 내지 않았다. 그들은 帝國主義的 支配를 떠난 都市國家相互間의 同盟이나 聯邦을 만드는데 있어서 前途有望한 첫걸음을 몇 발 내디디었으나, 이 모든 實驗도 마침내 失敗하고 말았다. 희랍人은 그 數 많은 都市國家들을 「하나의 희랍」으로 만들지 못한 罰을 받고 있었다. 마케도니아의 征服이 이루어질 舞臺가 마련된 것이었다.
마케도니아의 興起
희랍의 北쪽 에게海의 위쪽에 마케도니아가 있으니, 그때도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人種的 文化的要素들의 合流地였다. 古代의 마케도니아人은 희랍的인 特性과 더 原始的인 特性을 兼備하고 있었다. 西紀前 4世紀까지도 마케도니아는 政治的으로 보잘것없는 存在였으며, 支配層인 貴族의 門閥 사이의 紛爭으로 弱化되어 있었다.
그때 西紀前 359年에서 336年까지 왕이었던 위대한 野心家 필립이 마케도니아를 興起시켰다. 貴族들을 누름으로써 필립이 그 나라의 主人이 되었다. 그는 풍부한 森林과 金鑛을 開發하였다. 軍隊를 增强하고 쉴 새 없이 訓練시켰고, 步兵과 騎兵의 周到한 混用과 같은 最新의 희랍戰術을 模倣하였다. 그는 마케도니아의 에게해 沿岸의 희랍 都市들을 占領함으로써 바다에의 出口를 獲得하였다.
희랍은 이제 1世紀 前 페르샤의 遠征 以後로 가장 무서운 外侵의 威脅에 부딪쳤다. 弱하고 分裂된 都市國家들이 필립을 당해 낼 리 만무하였다. 그는 그들의 對立을 利用하고, 不滿을 품은 자를 買收하고, 그 싸움에 介入하였다. 뒤늦게야 아테네와 테에베는 희랍의 獨立에 대한 威脅임을 깨닫고, 聯合軍을 出擊시켰다. 그러나 마라톤과 살라미스의 世紀는 이미 지나갔다. 西紀前 338年에 테에베와 델포이 사이에 있는 카이로네이아에서 마케도니아軍은 희랍軍을 敗北시켰다. 필립은 正式으로 모든 都市國家를 併合하지는 않았지마는, 그들을 그의 支配下의 한 同盟으로 組織하고, 그들에게 이름뿐인 自治 以上을 許容하지 않았다.
알렉산더 大王
西紀前 336年에 필립은, 그의 딸의 結婚 祝賀宴에서 暗殺되었다는데, 이는 아마 그와 사이가 나빴던 王妃의 선동이었던 것 같다. 歷史上 가장 劇的인 人物의 하나인 그 아들 알렉산더가 그의 뒤를 이었다. 西紀前 336年에서 323年까지 統治하였던 알렉산더는 平凡한 敎育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先生이었던 것이다. 그의 關心과 才能은 戰爭과 政治・運動 · 大酒 · 文學(그는 호메로스 와 핀다로스를 특히 찬양하였다) · 醫學 및 科學에 걸쳤다. 그의 軍隊는 醫務隊와 生物學者 및 그 밖의 科學者와 宣傳者, 요즘 말로는 「公報擔當 專門家」 들을 帶同 하였다.
알렉산더는 父王의 版圖를 물려받았을 때 그 나이가 갓 스물이었다. 12年 안으로 그는 그때까지의 歷史上 最大의 陸上 帝國이오, 아케메네스朝의 페르샤帝國 ( 第 1章 參照)보다 더 큰 帝國을 이룩하였다. 실상 페르샤人은 알렉산더의 軍隊에 거듭 敗北당하였다. 그들의 帝國은 이미 그 全盛期를 지난지 오래고, 크세노폰의 1萬名이 참여한 바와 같은 王室의 內紛으로 弱해지고 있었다. 필립은 페르샤攻擊을 計劃하였었고, 그가 죽자 페르샤人은 몇몇 희랍都市들을 買收하고 그 새로운 上典에게 反亂을 일으키게 함으로써 알렉산더를 混亂시키려 하였다. 混亂은 오래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알렉산더는 反亂의 主動者인 테에베를 완전히 파괴함으로써 희랍人에게 强烈한 教訓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알렉산더는 이오니아의 희랍 都市와 小아시아의 나머지를 페르샤의 支配에서 빼앗았다. 그는 南下하여 시리아 · 팔레스티나 및 이집트에서 페르샤人을 내쫓았다. 그는 나일의 델타地帶의 西端에 東地中海의 主要 港口로서 새로운 都市를 세우고, 그의 이름을 따서 알렉산드리아라고 命名하였는데, 이 都市는 곧 東地中海의 主要 港口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 以上으로 發展하였다. 다음에 알렉산더는 바빌론을 占領하고, 東進하여 페르샤의 核心部를 占領하고 더욱 東進하여 오늘날도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아프가니스탄이나 露領 中央아시아 같은 地方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서 그의 軍隊는 南下하여 얼어붙은 山길을 넘어 인더스 流域까지 내려갔다. 여기 인도大陸 北西部의 한 모퉁이에 이르니 알렉산더는 마침내 갈데까지 갔고, 더 갈 可望은 그의 軍隊의 反抗으로 없어졌다. 軍隊는 힘드는 戰鬪와, 메마른 더위와 雨季의 氾濫이 交替하는 가혹한 氣候 때문에 기진맥진하였던 것이다. 그 不撓不屈의 生活은 알렉산더 자신의 훌륭한 肉體마저 衰弱시킨 듯하였다. 인도에서 바빌론으로 돌아온 뒤 곧 그는 病에 걸렸다. 그는 西紀 323年에 서른세 살로 죽었다.
알렉산더의 夭折은 아마 幸運의 선물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短時日에 이룩된 帝國을 다스린다는 難關에 부딪치기 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征服한다는 것도 重要한 일이지마는, 統一的인 要因이 아주 不足한 廣大한 판도에 恒久的이고 實際的인 制度를 마련한다는 것은 이와 딴판인 일인 것이다. 알렉산더가 生前에 생각해낸 政策들은, 그가 그 問題를 두 가지 方法으로 解決하려고 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첫째로, 그는 地方마다 그 固有에 傳統에 따라 통치하였다. 희랍에서는 폴리스를 통하여 統治하였고, 이집트 에서는 파라오들이 그랬듯이 神으로서 崇拜되고, 페르샤에서는 地方總督의 制度를 살리고, 더 東쪽에서 보다 原始的인 社會를 다루는데 있어서는 部族들의 上典으로서 行勢하였던 것이다. 둘째로, 그는 희랍文化를 帝國의 共通한 基盤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이미 繁榮하고 있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외에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10餘 都市를 建設하였다. 그 都市들은 각기 희랍 移住民들이 定住하여, 희랍의 經濟的 文化的 成果가 거기서 그 周邊 地域에 뻗혀 나가는 희랍化의 中心이 되도록 마련되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歷史家들은 알렉산더가 그 當時의 알려진 世界를 融合하려고 하였던 計劃의 眞價에 관하여 日可日否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實行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主張하고, 그가 죽은 뒤 帝國이 실제로 崩壞하였다는 事實을 지적한다. 이에 反對하는 이들은 이집트와 아시아를, 적어도 그 社會의 上流 階級을 희랍化하려는 政策이 주효하였다고 主張한다. 그들은 또한 나중에 로마人이 알렉산더와 아주 흡사한 政策을 좇음으로써, 물론 몇 世紀 동안 걸리기는 했지마는 그 廣大한 帝國을 組織 하는데 成功 하였다(第 3章 參照)는 것을 指摘 한다. 그러므로 알렉산더를 찬양하는 이들은 그에게서 「四海同胞」의 理念의 最初의 實踐的인 투사를, 사람들 사이의 差別을 덜고 그들을 結合하는 要因들을 뒷받침하는 투사를 보는 것이다.
실상 이 마지막 主張은, 刮目 할 만한 軍司令官이었고 想像力이 풍부하고 無慈悲한 政治家였으나, 위대한 理念의 主唱者에게 期待할 수 있는 精神的 불길과 깊은 確信이 없었던 듯싶은 人物에 대하여는, 지나친 主張이다. 아마 그 事實들이 確認돠는 일은 영 없을 터이지마는, 알렉산더를 超人으로 그린 傳說들은 오랫동안 西洋 遺産의 一部를 이룩해 왔다. 그 한 이야기엔, 그의 첫 出戰의 前夜에 詩人 오르페우스의 木造 彫像이 땀을 쏟았는데, 이는 그의 놀라운 功續들을 記錄하는데 詩人들이 정말 땀을 흘리게 되리라는 뜻으로 해석되었다는 것이다. 알렉산더는 얼마 뒤 小 아시아에서 그때까지 사람들이 머리를 짜도 어찌할 수 없었던 고르디오스의 매듭에 부딪쳤다. 이 엉킨 매듭을 푸는 사람이 아시아를 支配하리라는 것이었다. 알렉산더는 그의 劒으로 그 매듭을 一刀兩斷하였다. 그러니 제일 엉터리인 전설이 알렉산더大王 을 하나의 世界라는 理想을 품은 最初의 人物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헬레니즘國家
알렉산더의 죽음은 헬레니즘時代라는 時期의 始點을 그었다. 이 말은 헬라스에서 나온 것인데, 「희랍的」 이라는 뜻이며, 알렉산더의 帝國에서 形成된 國家들이 西紀前 323 年에서 西紀前 2.1 世紀의 로마의 東地中海 征服까지 가졌던 制度와 文明을 말하는데 쓰인다. 政治的으로 헬레니즘 世界는 하나의 世界가 아니었다. 알렉산더가 죽은 뒤 對立하는 將軍들이 帝國을 지배하려고 싸우다가 마침내 3 世紀初까지엔 각기 알렉산더의 將軍의 한 사람이 세운 왕조의 支配를 받는 三大國 이 나타났다. 그 하나는 마케도니아였고, 여전히 싱숭생숭하고 싸움을 좋아하는 희랍 本土의 나라들의 宗國 이었다. 둘째는 헬레니즘世界의 제일 크고 제일 富하고 제일 훌륭한 都市인 알렉산드리아를 首都로 하는 프톨레마이오스王朝에 支配된 이집트였다. 세째는 그 建國者 셀레우코스의 이름을 딴 셀레우코스帝國이었으며, 新月의 沃土가 地中海岸에서 內陸으로 굽으러지는 시리아 北西部의 오론토스江가에 자리잡은 안티오키아를 首都로 삼았다. 셀레우코스 帝國의 版圖는 자주 달라졌으나, 알렉산더가 領有한 아시아 地方, 특히 시리아. 小 아시아 및 메소포타미아를 매양 包含하고 있었다. 나중에 西紀前 3世紀末에 두 小國이 큰 勢力을 가지게 되었으니, 이들은 小아시아 西部의 페르가몬王國과 小아시아 南西端 앞바다의 繁昌한 商業 中心地였던 로도스島였다.
三大 헬레니즘 國家는 戰爭에서 태어나 戰爭에 살다가 戰爭으로 亡하였다. 그 主要한 鬪爭目標는 古來의 희랍 都市國家들과 東地中海 肥沃한 沿岸地帶 支配였다. 그 終末은 다음章에서 보는 바와 같이, 로마의 干涉의 增大와 로마 覇權의 確立이었다. 이 서로 거세게 다투는 政治的 風土에서 희랍의 오래된 自由로운 制度는 近東의 훨씬 더 오랜 絕對主義制度라는 무서운 敵과 겨루어야 하였다. 이집트에서는 近東의 傳統이 이겼다. 프톨레마이오스朝는 複雜한 官僚制의 도움을 얻어 이집트를 專制的으로 支配하였다. 그들은 土地나 商業을 완전히 所有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管理하고 農民에 重稅를 과하였다. 좀 증거에 의하면, 셀레우코스朝는 프톨레마이오스朝나 아시아의 그전의 支配者인 페르샤王들에 못지않게 獨裁的 支配를 원하였으나 그 領土가 광대하고 그 國境이 不 안정하고 그 領內에 여러 文化가 뒤섞여 있었기 때문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한 듯하다. 그들은 東과 西의 配合, 다시 말하면 總督制와 폴리스의 配合을 꾀하였다. 때로는 페르샤式의 地方總督을 쓰기도 하고, 때로는 폴리스의 自治的인 市民生活을 一部 남기고 있는 희랍의 植民市를 세우기 도 하였다. 서로 다른 두 傳統을 融合하려는 이 재미있는 實驗은 政治的으로 좋은 成果를 올리지 못한 듯하다. 그러나 희랍의 移民은 희랍 문화의 傳受者로서 이바지하였다.
政治에서와 마찬가지로 經濟에서도, 헬레니즘 시대의 생활의 中心은 안티오키아와 알렉산드리아의 東쪽과 南쪽으로 옮겨졌다. 희랍의 都市들은 아직도 商業的인 活力을 얼마간 가지고 있었으나, 새로 나타난 무서운 競爭者인 都市들에게 아주 눌렸고, 이 都市들은 희랍의 가장 企業心이 많은 사람들을 移民으로 끌어들이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아테네는 헬레니즘時代에 學校들로서 有名하였으나, 船舶이나 市場으로 알려진 것은 아니다. 이와 反對로 알렉산드리아는 古代世界 最大의 首都 서 급속도로 發達하였고, 西紀前 1世紀까지엔 人口가 100萬에 이른 것으로 推定되어 있다. 그 港口에서 수지맞는 輸出商品들이 나갔는데, 더러는 아라비아와 아프리카의 熱帶地方에서 들어와서 다시 실어 내는 것들이었고, 더러는 파피루스와 穀食같이 그 地方에서 생산된 것들이었다( 古代의 北아프리카는 오늘날과 달라서 수출할 穀食의 餘力이 있었다). 안티오키아는 알렉산드리아에 미치지는 않지마는 그다음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都市였다. 이 都市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의 골짜기를 거쳐서 陸路로 인도와 페르샤灣의 商品을 사들이고, 西쪽 地中海 世界로 보내었다.
헬레니즘 時代의 膨脹하는 經濟는 높은 生活 水準을 가능하게 하였다. 實業家・高級官吏 및 大地主들은 안락한 生活을 하였다. 이를테면, 안마당을 中心으로 하여 세워진 그들의 住宅은 바람이 잘 통하는 널찍한 것이었고, 희랍의 住宅建築보다 현저한 進步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社會 全般으로서는 進步가 없었다. 헬레니즘의 大都市들은, 貧民에게 政府 가 廉價로 食糧을 分配 해줌으로써 다소 緩和되기는 했으나, 貧民窟과 失業이라는 大都市 問題로 病들고 있었다. 勞賃은 低廉하고, 勞動者는 곧잘 酷使'되고, 重稅에 시달렸다. 지난날의 희랍에서와 같이, 가장 慘酷한 搾取가 이루어진 것은 鑛山에서 일하는 奴隷 들에 대해서였다.
헬레니즘 文化
그러니 貧富의 差가 심한 헬레니즘社會는 희랍의 民主制에서의 衰退를 意味하였다. 그러나 藝術과 科學에서는 희랍의 傳統이 많이 헬레니즘世界에 줄곧 살아 있어서 盛行하였다. 教養있는 사람들은, 비록 희랍系의 사람들이 아닐지라도 희랍語를 말하였다. 익숙한 學者들이 管理하는 圖書館들은 희랍作家의 著作들을 간직하였는데, 프톨레마이오스朝가 알렉산드리아에 세운 古代世界 最大의 圖書館은 50萬卷의 파피루스의 두루말이, 다시 말하면 오늘날의 數萬卷의 册에 匹敵하는 藏書를 갖추고 있었다.
헬레니즘時代의 建築이나 彫刻은 희랍의 본을 따랐지마는, 그 主題는 더 劇的이고 더 情的인 方式으로 다루었다. 알렉산드리아의 燈臺는 헬레니즘 時代의 趣味의 雄大한 한 예이거니와, 그 높이가 400 피트여서 「古代世界的 七 驚異」 의 하나였다. 또 하나의 예는 西紀前 1世紀에 로도스島에서 만들어 낸 有名한 라오코온群像인데, 이는 뱀에 휘 감겨 꼼짝 못 하는 트로이의 司祭와 그 아들들을 나타낸 것이었다. 헬레니즘 時代의 彫刻家들은, 또한 술취한 老婆나 장 보고 오는 할머니의 彫像에서 보는 바와 같이, 日常生活 속의 일반 사람들의 寫實的인 描寫인 이른바 風俗藝術에 대한 趣味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最下의 경우 模做的이고 誇張的이지마는, 最上의 경우에는 밀로의 비너스像이나 날개돋힌 勝利 의 女神像과 같은 世界的으로 有名한 彫像들을 내놓았다.
헬레니즘時代는 文學의 一流作品을 얼마 낳지 않았다. 이것은 희랍 文學의「白銀時代」요 그 活力과 獨創力이 衰退한 時代였으나, 반드시 5世紀의 「黃金時代」보다 못한 것은 아니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古喜劇」과 아주 다른 「新喜劇」을 그 例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新喜劇의 代表的 作家인 메난드로스 (342 ~ 291 )는 오늘날 風俗이라고 하는 따위의 戲曲들을 썼는데, 敎養있고 점잖게 비꼬는 것이어서 아리스토파네스의 豬突的인 攻擊과 좋은 對照를 이루고 있다.
헬레니즘 時代의 科學은 프톨레마이오스朝의 保護有成과, 메소포타미아의 天文學과 數學의 傳統에 힘입어 隆盛해졌다. 3 世紀의 天文學者 아리스타르쿠스는 다음과 같은 假說을 提示 하였다.
恒星과 太陽은 停止하고 있으나, 地球가 太陽의 둘레를 圓을 그리며 도는데
太陽이 그 軌道의 中心이다.
이것은 太陽中心說인데, 이 說이 일반적으로 認定된 것은 2000年 後의 일이었다(第15章 參照). 아리스타르쿠스의 젊은 同時代人인 에라토스테네스는 地球는 둥글고 납작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 둘레의 크기를 推定하였는데 오늘날 計算한 바에 꽤 가까운 것이었다.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는 3世紀에 알렉산드리아에서 學校를 세우고, 희랍人이 일찌기 내놓은 幾何學的 定理를 體系的으로 모아 整理 하였다. 유클리드의 學校에서 배운 아르키메데스( 西紀前 287頃 ~212) 는 그 스승의 幾何學的 硏究를 계속하여, 새로운 物理學的 法則들을 定하고, 또 技術者로서 卓越한 名聲을 얻었다. 그는 鑛山이나 灌漑水路에서 물을 빼올리는 奴隷들이 사용할 機具들을 考案하였다( 이집트의 農民들은 아직도 水路에서 밭으로 물을 을리는데 「아르키메데스의 스크류」라는 손으로 움직이는 간단한 機具를 쓰고 있다). 滑車와 지렛대의 힘을 誇示하면서 그는 짐을 실은 배를 물에서 陸地로 한 손으로 끌어올려 보였다. 여기서 아르키메데스의 有名한 자랑이 나온 것이다. 『내게 그만큼 긴 지렛대와 지렛목을 다오, 그러면 世界를 움직이리라.』
헬레니즘時代의 宗敎와 哲學은 人間의 끊임없는 满足의 追求에 깊은 關心을 가졌다. 올림퍼스의 神들이 아직도 崇拜者 들을 모으고 있었으며, 西紀前 2世紀에 페르가몬에 헬레니즘 美術의 가장 虛飾的인 소산의 하나인 大祭壇을 세움으로써 제우스에 대한 尊崇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희랍의 多神敎는 사실 時代에 뒤떨어졌다. 活氣를 띤 宗教는 祕教들이었는데 이들은 지난날의 엘레우시스의 秘儀처럼 救濟와 永生을 約束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第4章에서 初期 基督敎의 敵手들을 考察할 때에 가장 중요한 祕教중의 둘—— 아시아의 미트라敎와 이집트의 이시스 崇拜 ——檢討하기로 한다.
헬레니즘 哲學에서는 특히 두 學派가 길이 影響을 남기게 되었으니, 그들은 에피쿠로스派와 스토아派였다. 에피쿠로스學派는 快樂을 幸福의 열쇠로 보았으나, 오늘날 「에피큐리언」이라는 말과 結付된 술과 계집과 노래의 生活을 특히 권한 것은 아니었다. 그와 反對로 그 學派의 創始者인 에피쿠로스(西紀前 341 ~270 )는 「苦痛의 缺如」라고 消極的으로 定義 하였던 것이다. 그는 肉體的 欲望을 抑制하지 말고 적당히 만족시켜야 한다고 권했지마는, 精神의 快樂을 肉體의 快樂보다 위에 두었다. 節制와 良識을 권하는 에피쿠로스의 規範은 典型的으로 희랍的인 槪念인 中庸을 다시 主張한 것이었으며, 중요한 信奉者들을 특히 로마人 사이에서 끌었던 것이다.
스토아 學派 (그들이 처음에 가르친 아테네의 「스토아] 곧 柱廊에서 그 이름이 나왔다)는 生의 肉體的인 面의 抑制를 勸하였다. 그들이 볼 때 幸福에의 길은 肉體에 대한 精神, 感情에 대한 理性의 勝利에 있었다. 스토아派에는 肉體的인 괴로움을 克服 할 수 없음을 알고 그 자신의 哲學의 論理에 이끌려 自殺하고 만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論理는 또한 그들을 이끌어 희랍 民主主義의 理想을 全人類에 擴大하게 하였다. 오로지 內的인 人間만이 참으로 重要하고, 外 的인 差異는 肉體的인 것이든지 社會的인 것이든지 또는 經的인 것이든지 간에 조금도 상관없었다. 그래서 스토아派는 모든 人間이 同胞라고 굳게 믿고, 奴隷와 그 밖의 社會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擁護하였다. 四海同胞를 강조하고 우리가 禁欲的이라고 생각하는 德들을 치켜듦으로써 스토아哲學은 基督敎의 道德的 敎說의 앞장을 섰던 것이다.
헬레니즘의 스타일
헬레니즘世界의 스타일은 따라서 뚜렷이 二元的인 性格, 다시 말하면 일종의 分裂된 性格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秘 敎들과 스토아 哲學에서처럼 단순히 肉體的인 것을 超越하려 하였거니와, 동시에 自然的世界에서 最大의 可能性을 끌어내려 하였던 것이다. 헬레니즘의 世俗性의 象徵은 높이 솟은 燈臺와 넓은 거리들, 호화스러운 宮殿과 훌륭한 圖書館, 그리고 科學者와 官吏와 商人들을 가진 大都市 알렉산드리아였다. 헬레니즘時代의 生活의 二元性은 두 개의 오랜 文化——희랍 文化와 近東文化를 融合하려는 데서 일어났다. 희랍의 影響이 强하였으나 全面的인 것은 아니었고, 헬레니즘 世界에서 희랍語의 使用이 住民 중의 소수 有識層 외엔 퍼지지 않았다. 희랍化된 堂堂하게 보이는 表面 뒤에 헬레니즘 國家들은 神的인 왕에 대한 政治的 絕對服從이나 神秘한 神들에 대한 精神的 絕對服從 같은 따위의 뿌리 깊은 東方의 制度들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넓디넓은 地域에서 희랍 文明은, 비록 희미해지고 質的으로 低下하긴 했지마는, 새로운 征服을 많이 하였다. 뿐만 아니라 필립 • 알렉산더 및 그 後繼者들은 희랍을 破滅시킨 問題 ——政治的 分裂과 熱狂的인 愛鄕心과 內亂 등의 諸 요인을 어떻게 누르느냐 ——를 解決 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都市國家보다 크지만 엄청나게 크지는 않은 政治的 單位를 사용하고 中央集權的인 絕對主義를 地方自治로써 늦춤으로써 中庸의 길을 찾았다. 그 實驗은 아주 국한된 成果 밖에 올리지는 못했으나, 헬레니즘 世界의 相續者인 로마를 偉大하게 그리고 長久한 生命을 누리도록 만든 制度의 싹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