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3章 로 마
第1節 序 言
호메로스가 읊은 희랍人과 트로이人의 戰爭에서 트로이의 王子와 女神 아프로티테의 아들인 위대한 戰士 아에네아스는 오직 헥토르에 다음가는 武功을 세웠다. 트로이 陷落後 아에네아스는 한 무리의 亡命者들을 이끌고 긴 旅行길을 떠나 地中海를 거쳐 카르타고로, 그리고 마침내 中部 이탈리아로 갔다. 거기 티베르江邊에 아에네아스가 거느리고 온 사람들의 後孫들이 한 都市를 세웠고, 이 都市 西洋世界의 「久遠의 都市」가 되었던 것이다.
로마의 勢力이 絕頂에 이르려고 할 무렵에, 詩人 베르길리우스가 지은 <아에네이드>가 말하는 傳說的인 로마建设譚의 줄거리는 그렇게 되어 있다. 그 이야기는 歷史的 事實에 확고한 土臺를 둔 것이 아니지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실제의 歷史에 알맞는 序言이 된다. 베르길리우스가 <아에네이드>를 호메로스의 大敘事詩를 본떠서 만들었듯이, 로마는 희랍과 近東의 오래된 文明에서 많은 것을 빌려왔다. 아에네아스는 아마 로마의 땅에 발을 디디지 않았을 것이나, 많은 희랍과 東方人은 마침내 그랬던 것이다. 그들의 思想과 信仰과 制度가 아주 많이 移植되었으므로, 歷史家들은 로마文明에 있어서의 광범한 희랍---東方的 또는 헬레니즘的 要素를 云謂한다. 사실 로마가 그 앞선 文明들에게서 힘입은 바가 많으므로, 단 하나의 희랍-로마的 文明 밖에 없다는 結論을 내리는 歷史家들도 더러 있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는 빌려오거나 빼앗아 온 文化的 밑천에 손질함으로써만 偉大하게 된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로마人은 아주 實際的인 性格을 보였다. 로마人은 軍事的. 政治的 組織에서 뿐만 아니라 土木工事나 그 밖의 應用科學의 實際的인 일에 있어서도 그에 못지 않은 刮目할 만한 能力을 가지고 있었다. 조그마한 都市國家로 하여금 擴大를 거듭하여 마침내 古代의 「하나의 世界」를 이룩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무엇보다도 이 實際性이었다.
獨立國으로서의 로마의 行路는, 西紀前 500年頃에 그 市民들이 外國의 왕의 지배를 물리치고 共和國을 세웠을 때에 시작하였다. 西紀前 1世紀中葉까지 존속한 로마共和國은 먼저 그 이웃들을 征服하고나서 이탈리아의 나머지를 征服하고 마침내 地中海의 다른 地方들을 征服하였다. 共和國의 뒤를 이은 로마帝國은 西紀 1.2世紀에 그 절정에 이르렀고, 그때 알려진 世界를 「팍스 로마나」 다시 말하면 로마의 平和 속에 포섭하였던 것이다.
環 境
地利的 條件은 로마의 귀중한 資産이었다. 티베르江을 내려다보는 유명한 일곱 언덕 위에 세워졌으니, 그 都市는 손쉽게 防備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이탈리아半島의 한복판 西海岸에서 15마일 가량 되는 곳에 자리잡았으니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것은 地中海의 商業活動에 참여할 수 있을 만큼 바다에 가까왔다.
이탈리아半島는 대체로 그 氣候와 土地가 地中海性이었거니와, 그 大部分이 그다지 풍부한 經濟的 資源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희랍에 비하면 古代 이탈리아는 곧잘 自然의 惠澤을 받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山脈들은 희랍의 山脈들처럼 陸上交通이나 政治的 統一을 가로막는 장벽을 이루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平野들은 희랍의 平野들보다 더 넓고 더 肥沃하였다. 그 중 가장 넓은 라티움平野는 로마의 바로 南쪽에 있어, 西쪽의 바다에서 半島의 脊梁(척량: 등마루)을 이루는 亰쪽의 아페닌山脈까지 뻗히고 있었다. 라티움平野의 集約農耕은 排水와 灌漑의 水路를 파낸 뒤에야 可能해졌다. 가까이 있는 언덕들은 좋은 牧場과 훌륭한 森林을 마련해주고 있었다. 이렇듯 初期의 로마를 먹여 살리는 넉넉한 食糧과 燃料를 쉽사리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탈리아에는 獨立한 로마共和國이 나타나기 몇千年 前부터 사람들이 定着해서 살고 있었다. 西紀前 500年頃에 로마와 그 인접한 平野에 살고 있던 라틴族은 이들 先史時代의 이탈리아住民의 後裔들인 듯하다. 로마는 最初의 强力한 이탈리아 原住民 國家를 이룩하게 되었으나, 로마가 나타나기 前 海外에서 들어온 두 文明이 半島에 굳게 뿌리를 박고 있었다. 그들은 희랍人과 에트루리아人이었다. 前章에서 본 바와 같이 西紀前 600年까지엔 희랍 植民市들이 이탈리아 南部와 시실리의 海岸에 點在하고 있었거니와, 「막나 그레키아」는 희랍文化의 主要中心地가 되어 있었다.
에트루리아人
에트루리아人은 풀리지 않은 歷史的 難問의 매혹적인 一例이다. 그들은 몇 百이나 되는 墳墓들을 남겼고 그 中의 약간은 희랍 文字로 씌어진 그러나 인도-유럽 語族에 속하지 않는 말로 되어 있는 碑文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흩어진 낱말들이 飜譯되었으나 에트루리아語를 푸는 全般的인 열쇠는 아직도 發見되지 않았고, 로제타碑石이나 벤트리스의 線文字B 解讀에 비길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 墳墓. 武器. 陶器 및 그밖의 遺物들은 에트루리아人이 아마 小아시아에서 왔다고 생각되는 外來侵略者들이었고, 그들에게서 아에네아스傳說이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에트루리아人은 이탈리아에서 海賊行爲를 하다가, 西紀前 800과 700年 사이에 티베르江과 라티움平野 바로 北쪽의 地域을 征服하였다. 거기에 그들은 原住民을 支配하는 소수 外來民으로서 定着하였던 것이다.
에트루리아文明은 그 美術과 工藝가 더러 희랍의 뚜렷한 影響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나, 그 자신의 獨特한 스타일을 지니고 있었던 듯하다. 에트루리아人은 農夫와 鑛夫로 익숙한 솜씨를 보였으며, 미케네의 城壁처럼 巨石을 쌓아올린 城壁으로 그 都市들을 防備하였다. 그 공들여 만든 墳墓의 돌로 判斷하건대, 그들은 이집트人과 비슷한 來世의 信仰을 가진 듯하다. 그들은 또한 占ㅏ을 하였으니, 이를테면 새가 날아가는 모양이나 祭物로 죽인 짐승의 內臟의 配列에서 未來를 豫言한 것이었다. 墳墓의 벽화에서 判斷하건대, 에트루리아人은 다른 古代文化에 통례인 것보다는 높은 지위를 女子에게 주었으며, 社會全體가 魅力的인 타고난 快活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에트루리아의 스타일에 관한 우리의 證據가 斷片的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西紀前 7世紀 동안에 에트루리아人은 이탈리아의 西海岸을 따라 南쪽으로 그 版圖를 넓혔다. 처음에 그들은 로마를 그냥 두었으나 西紀前 600年 直後에 征服하였다. 에트루리아의 王들에 支配되면서 로마는 繁榮하였고, 이웃한 라틴族들을 犧牲하고 擴大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라틴族 住民은 外國人의 支配에 反抗하고, 다른 라틴族들과 合勢하여 一大反亂을 일으켰으며, 6世紀末——傳說에 依하면 西紀前 509年——에 에트루리아의 마지막 임금인 타르키니우스란 傲慢王을 내쫓았다. 그리하여 獨立한 라틴族의 都市國家 로마의 歷史的 行路가 시작되였던 것이다.
第2節 共和國의 興起
타르키니우스를 내쫓고 난 로마는 아주 작은 나라로, 그때 威勢의 絶頂에 다가서고 있던 아테네나 스파르타에 비하면 훨씬 작았다. 西紀前 5世紀의 로마는 라틴族의 여러 都市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고, 이 都市들은 새로 에트루리아人의 支配에서 벗어나 라티움平野를 나눠 支配하고 있었던 것이다. 北쪽의 敵인 에트루리아人과 東쪽과 南쪽 山岳의 掠奪的인 部族들이 항상 그 生存을 威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威脅과 對決하는데 있어 로마는 좋은 防衛的 地點을 가진 외에 한 두 개의 利點을 가졌으니, 그 政府와 軍隊가 그것이었다.
軍隊
로마 最初의 軍隊의 基本單位는 方陣部隊였고, 이는 약 8000名의 步兵으로 構成된 것으로, 數列로 긴 隊列을 이루고 進擊하였다. 方陣部隊는 다시 百人隊로 細分되었고 百人隊는 名目上으로 각각 100名을 거느리도록 되어 있었다. 百人隊 중의 若干名만이 前列에 필요한 값비싼 武具와 武器를 장만할 수 있었으니, 이들이 方陣의 第一列을 이루었다. 다른 百人隊들은 더 가벼운 武裝을 하고 뒷 列을 맡았다.
로마人은 初期의 戰爭經驗으로 그 軍隊의 組織과 戰術을 고쳤다. 3600名으로 된 軍團이 그보다 큰 方陣部隊를 대신하게 되었다. 軍團은 마니플루스(「한줌」이라는 뜻)라는 60名 또는 120名의 中隊로 構成되어 있었다. 方陣部隊의 傳統的인 武裝인 투구와 방패 및 槍과 劒에다가 軍團은 멀리서 敵에 던지는 效果的 攻擊武器인 쇠촉의 投槍을 보태었다. 새로운 組織으로써 戰場에서 훨씬 伸縮性있게 되었다. 方陣部隊는 다루기 힘들고 움직이기 어려웠지마는, 軍團의 中隊들은 재빨리 機動할 수 있고 더 손쉽게 機先을 制할 수 있었다.
共和國의 始初부터 로마의 거의 모든 市民들이 軍隊에 服務해야 하였다. 많은 희랍都市國家들은 市民兵이 이래라 저래라 命令받는 것을 불쾌히 여기며 따라서 訓練하기가 거의 不可能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共和國의 軍隊는 이 난관을 克服하고 鋼鐵같은 紀律을 시행하는데 成功하였다. 西紀前 2世紀의 희랍의 歷史家인 폴리비오스는 步哨 서다가 잠든 兵士를 다루는 로마의 規律을 다음과 같이 썼다.
司令官 全員으로 構成되는 軍法會가 그를 審判하기 위하여 열리고,
만일 그가 有罪임이 判明되면 그는 다음과 같이 處罰된다. 司令官이 곤봉을 들고 그
罪囚에 대기만 하면 그 陣營의 전원이 그를 치고 돌을 던져서 대개는 바로 그 陣營에서
해치운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달아난 사람들이라도 그것으로써 살아난 것은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집으로 돌아갈 수 없거니와 家族들도 그런 사람을
집안으로 敢히 들여놓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번 이런 불운을 당하면
그 사람은 완전히 破滅이다....... 이렇듯 그 罰은 극히 가혹하고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로마軍의 不寢番은 아주 착실히 지켜지는 것이다.
(폴리비오스, '歷史' 第6卷 37장)
로마軍의 優秀性은 무자비한 處罰과 아울러 또한 厚한 論功行賞에 基因함을 풀리비오스는 알게 되었다.
그들은 또한 젊은 兵士들로 하여금 危險을 무릅쓰도록 북돋는 훌륭한 方法을 가지고 있다.
그 중의 몇 사람이 눈에 띄는 활약을 한 전투가 끝난 뒤 司令官은 전군을 소집하고
뛰어나게 勇猛을 떨쳤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앞에 내세우고 먼저 각자의 勇敢한 行動을
찬양하고나서... 다음과 같이 論功行賞한다. 敵兵을 부상시킨 사람에겐 槍, 敵兵을 죽이고
갑옷을 빼앗은 사람에겐 盞을 준다....都市를 攻擊할 때 城壁에 제일 먼저 오른 사람에겐
金冠을 준다. ......이런 꾀임으로 그 자리에서 그 말을 들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고향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조차 戰場에서 서로 지지 않으려고 겨루도록 奮發시키는 것이다.
(폴리비오스, <歷史》 第8卷 39章)
政府
나이 어린 共和國은 날래고 복종 잘하는 軍隊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效果的인 政治制度도 확립하였다. 타르키니우스 傲慢王의 추방 後 로마는 住民이 두 階級, 다시 말하면 파트리키와 플레브스로 나뉜 것에 立脚하는 寡頭制的 共和國이 되었다. 부유한 家門의 貴族들이 파트리키階級(라틴語의 「파트레스」, 곧 아버지들에서 나온 말이다)을 이루었고, 그들만이 完全市民이었다. 파트리키의 地位는 에트루리아時代에 이미 定해진 부유한 家門에만 局限되어 있었다. 파트리키가 반드시 閑暇한 生活을 하는 「鄕紳」인 것은 아니었다. 由緖있는 이야기의 하나에 의하면, 그들의 軍事的 英雄인 킨키나투스는 西紀前 5世紀에 밭 갈던 쟁기를 던지고 軍隊를 이끌어 두번이나 大勝하였던 것이다.
住民의 大多數 ---아마 그 9割---는 地位가 낮은 플레브스階級(大衆이라는 뜻의 라틴語)에 속하였다. 商人・勞動者・小農民(그 大部分이 조그만 땅조각을 가는 小農이었다) 그리고 에트루리아人 추방에 뒤이어 온 經濟的 變動으로 생긴 債務者의 무리---이들이 모두 플레브스였다. 플레브스는 完全한 参政權이 허용되지 않았고, 특히 政府의 요직에 앉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財産을 모을 수가 있었고, 사실 富者가 된 사람들도 있었다. 富裕한 플레브스는 그 階級의 政治的 解放을 위한 오랜 鬪爭을 領導하게 마련이었다. 5世紀 로마의 社會的 • 政治的 事情은 뚜렷한 階級的 差別을 지닌 채 그 1世紀前의 民住的 改革 前夜의 아테네의 事情과 분명히 비슷한 바가 있었다.
로마共和國의 初期에 파트리키는 政府의 가장 중요한 두 개의 制度--콘술職과 元老院을 支配하였다. 파트리키階級에서 選出되는 2名의 콘술은 1年 任期의 最高行政官이었고, 게다가 라틴語로 政治的 最高權이라는 뜻인 임페리움이 完全히 賦與되었다. 理論上으로는, 콘술이 에트루리아 시대의 王에 匹敵하는 共和國의 職位였으나 實際로는 그 權力이 制限을 받고 있었다. 이를테면, 각 콘술은 자기 同僚에 대하여 拒否權을 가지고 있었으니, 重要政策은 두 콘술의 贊同을 얻어야 하였다. 콘술이 으레 軍隊를 指揮하는 법이었으나, 戰時에는 元老院의 권고가 있으면 길어서 6個月 동안 어느 한 사람에게 그 權限을 넘겨주는 일이 많았다. 이 사람이 獨裁官인데, 近代의 獨裁者와 다른 것은 正常的인 憲法的 절차를 통하여 그 職位를 얻거니와, 미리 定해진 짧은 동안만 그 職를 가진다는 點이다.
게다가 平常의 콘술은 日常의 國務를 處理하는데 있어서 元老院의 뜻을 받들었다. 元老院은 主로 파트리키에서 선출된 300名 가량의 議員을 가지고 있었으며, 콘술은 그 任期가 끝나면 元老院 議員이 되었거니와 在任中에는 다른 議員들을 임명하였다. 理論上으로는 元老院의 직분이 諮問과 監督에 그쳤으나 실제로는 위세가 당당하고 共和國에 큰 세력을 미쳤다. 元老院은 가장 有名한 로마의 政治制度이며, 로마의 國章 (Senatus Populusque Romanus-로마의 元老院 과 人民 )의 첫머리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로마의 人民--- 실제로는 플레브스---은 다른 모임, 곧 兵員會에서 發言할 수 있었다. 이 集合은 그 이름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軍의 最小單位인 百人隊에 토대를 둔 것으로서, 여러 百人隊들이 모여서 軍事的인 문제와 아울러 공공의 문제를 決定할 따름이었다. 兵員會는 市民兵의 總會같은 것인 듯하지마는 실제로 얼마나 民主的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파트리키와 플레브스가 다 같이 軍隊에 百人隊를 보내고 있었으나, 어떤 史料가 시사하는 바로는 파트리키의 百人隊들이 兵員會를 左右하였다는 것이다. 아뭏든 兵員會는 法律상 元老院 보다 많은 特權을 가졌으나 실제의 權力은 그보다 못했던 듯하다. 原則的으로는 兵員會가 콘술과 그 밖의 官吏들을 選出하고, 콘술과 元老院이 제출한 法律을 可決 또는 否決하기로 되어있었다.
支配階級인 파트리키는 그 政治的 책임의 重大함을 깨닫고 있었으며, 아무도 다른 職位에서 見習期를 치르지 않고서는 콘술의 要職에 오르지 못하였다. 下級 官吏로서 출발한 파트리키는 마침내 共和國의 職制에서 콘술 다음의 地位인 프레토르 (앞에 가는 사람이라는 뜻)가 되기도 하였다. 共和國이 커 감에 따라 프레토르의 人員이 한 사람에서 여덟 사람으로늘고 그 職務도 많아졌다. 그들은 裁判官으로서 일하는 일이 제일 많았고, 軍司令官이 되기도 하고, 海外의 領土를 획득한 뒤로는 屬州의 知事가 되었다. 콘술 不在시에는 프레토르가 代身하기도 하였다. 프레토르는 콘술과 마찬가지로 民會에서 선출되었고 그 任期는 1年 이었다. 프레토르나 콘술에 選出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쵸오크로 희게 칠한 겉옷 (즉 toga candida, 여기서 candidate: 候補者라는 말이 나왔다)을 걸쳤다.
政府의 늘어가는 業務, 특히 땅의 定員力을 維持할 必要는 또 하나의 政府高官인 켄소르란 職의 創設을 가져왔다. 人員이 2名이고 任期가 18個月인 켄소르는 콘술 歷任者들이 되었다. 그들은 人口調査를 하고 兵役該當者들을 決定하였다. 켄소르는 또한 公有地와 土木工事를 監督하고 元老院 議員으로 指名된 사람들의 品行審査를 하여, 腐敗하였거나 지나치게 奢侈하다고 判定된 사람들을 제외하기도 하였다. 公職에 대한 適否를 査定하고 不適當한 사람들을 除外하는 이런 權限에서 censor (檢閱官)와 censorship(檢閱)이라는 말들의 近代的인 含蓄이 나온 것이다.
要컨대 初期의 로마共和國은 國家의 主要業務인 防衛와 戰爭을 行하도록 잘 마련된 貴族制的 政體를 가지고 있었다. 獨裁官. 켄소르. 兵員會, 이들 모두가 로마의 軍事的 주력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파트리키出身의 콘술 및 元老院에 依한 最高權의 行使는 上流階級의 支配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要職에의 자격으로서 파트리키의 身分 외에 能力경험 밎 廉潔(염결)한 品行이 모두 考慮되었으므로 政府는 그중 가장 훌륭한 貴族의 人材들을 登用하였다. 물론 이 모든 일이 파트리키의 獨占을 싫어하고 그 政治的 權利의 擴大를 要求하는 플레브스의 불만을 풀어주지는 않았다. 이에 대하여 파트리키는 로마의 유다른 適應性을 보여주는 일련의 讓步를 하였으며 이로써 共和國의 政體는 民主化되었다.
共和國의 自由化
플레브스가 이런 讓步를 얻기 위해서는 鬪爭해야 했다. 아주 일찌기 490年代에 그들은 分離, 다시 말하면 로마에서 아주 脫退해서 근처에 새로운 都市 國家를 건설한다는 威脅이 하나의 武器임을 알아차렸다. 이 武器가 强力하다는 것이 判明되어, 플레브스는 西紀前 5.4 世紀에 여러 번 사용하고 큰 成果를 거두게 되었다. 맨 처음 그 威脅의 武器를 사용한 結果, 第二의 效果的 武器인 護民官이라는 플레브스 만의 官職이 창설되었다. 本來,護民官은 두 사람이었고 그들은 파트리키官吏들의 지나치게 苛酷하고 差別的인 法律 運用에 대하여 플레브스를 보호하는 것을 根本任務로 삼았다. 마침내 護民官은 그 數가 10名으로 늘었고, 더 많은 讓步를 얻으려는 운동의 先鋒을 서게 되었으니 그 分職도 많아졌다.
護民官이 창설 뒤로 , 플레브스는 法律을 이루고 있는 慣習이나 因襲이 成文化 되어 있지 않아 파트리키의 裁判官에 의해 階級的, 偏派的으로 다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자기네는 아직도 온당한 法律的 보호를 받고 있지 않다고 不平하였다. 이 불만을 풀어주기 위하여 콘술들은 열 두개의 法文을 木板에 새겨서 公會場에 公示하였다. 이것이 十二表法으로, 西紀前 449年에 定해졌다. 그 重要性은 흔히 원시적인 刑罰을 定하고 있는 그 特有한 規定에 있느니보다 그것이 存在하였고 「公表」 되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十二表法과 함께 로마의 획기적인 歷史가 시작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플레브스는 區民會라고 하는 그들 자신의 議會를 發展시켰고, 그런 이름으로 알려진 것은 플레브스 市民들이 區라는 地理的 區域別로 區分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區民會는 護民官을 選出하였고 새로운 法律을 制定하는 權利를 얻었다. 區民會의 權限은 이렇듯 그전의 兵員會의 그것과 비등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威望과 勢力에 있어서는 아직 元老院이 으뜸이었다.
플레브스는 西紀前 5.4 世紀에 다른 중요한 權利들을 讓步받았다. 그들은 프레토르 . 켄소르, 심지어는 콘술과 元老院 議員의 자리를 차지하는 權利를 얻었다. 그들은 파트리키와도 婚姻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두 계급의 장벽을 움직일 수 없게 하려고 작정한 貴族들이 처음에는 그들에게 許容하지 않았던 特權이었다. 그들은 負債와 土地문제를 처리하는 법령들 서둘렀다. 이 問題들은 희랍에서와 매한가지로, 初期의 로마共和國에서도 지독하고 고질화된 것이었다. 플레브스 農民들은 그 土地를 많이 잃었고 빚을 갚지 못하기 때문에 奴隷의 地位로 떨어졌다. 富者의 손에 더 많은 土地가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共和國은 한 사람이 가져도 좋은 土地의 크기를 制限하였다. 빚에 시달리는 플레브스의 數를 줄이기 위하여 債務者에 대한 가장 심한 罰들, 특히 奴隷化를 없애고 새로 획득한 領土를 내놓아 土地 없는 農民들을 植民시키도록 하였다.
이 法令들로 農民과 債務者의 問題가 완화되기는 하였으나 解決되지는 않았고, 이 問題들은 共和國을 그 마지막 날까지 괴롭히게 되었다. 플레브스의 政治的 解放도 名門과 富者의 정치的 支配를 끝맺지는 못했다. 부유한 플레브스는 바야흐로 오랜 貴族階級의 社會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이루어진 두 階級의 融合은 노빌레스라는 새로운 上流階級을 가져왔다. 파트리키가 初期의 共和國을 支配하였듯이, 노빌레스는 後期의 共和國을 支配하였다. 여러 改革은 로마에 民主制가 아니라 단지 自由化된 寡頭制를 가져왔을 뿐이었다.
共和制下의 로마의 制度를 스파르타의 制度와 비교해 보면, 啓發하는 바가 있다. 스파르타처럼 로마도 政治的. 軍事的 主導權을 파트리키 階級에 국한시켰고, 로마의 軍隊도 스파르타처럼 엄격히 훈련과 고도로 組織된 것이었다. 로마에서의 教育의 主要目的은 勇敢하고 服從잘하는 軍隊의 養成이었다. 그러나 스파르타와 달라서 로마의 少年들은 집을 떠날 필요가 없었거니와, 로마의 온 體制는 스파르타보다 덜 엄격한 것이었다. 헤일로타이나 페리오이코이와는 달라서 플레브스는 上流階級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플레브스에 대하여 충분한 權利가 讓步되었으므로, 그들은 스파르타의 헤일로타이처럼 언제나 反亂을 일으킬 態勢를 갖추고 있지도 않았다. 로마는 領土的 擴大의 成功的인 行路에 나설 軍事力과 政治的 장점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의 擴大
擴大의 첫 段階는 西紀前 265年에 끝나고, 로마는 이탈리아 半島에 君臨하는 勢力이 되었다. 로마는 오랜 연달은 戰爭을 통하여 다른 라틴 都市들과 에트루리아 都市들, 및 中部 아페닌山脈의 半開化部族들에 대한 支配를 확립하였다. 南쪽의 「 막나 그레키아」의 쇠퇴하던 都市들은 로마의 前進을 막으려고 北西部 회랍 에피루스의 왕인 무서운 戰士 피루스를 불러들였다. 西紀前 281年과 275年 사이의 전투에서 피루스는 로마軍을 두 번이나 이겼으나, 그 자신의 損失이 너무 많아 마침내 敗戰하고 말았다 (그래서 보람없는 勝利를「피루스의 勝利」라고 한다). 南部 이탈리아는 이렇듯 로마의 지배하에 들었다. 그동안에 로마는 半島 北端에서 갈리아人의 확대를 막았는데, 이들은 알프스를 넘고 侵入한 켈트人으로서 우리가 지금 롬바르디아平野라고 부르는 포江 流域에 定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갈리아人이 아직도 征服되지 않았으므로, 西紀前 255年以後 로마版圖의 國境은 롬바르디아의 北端을 흐르는 루비콘江에 沿해 있었다.
로마의 擴大는 部分的으로는 自衛를 위한 處事였다. 갈리아人과 山岳地帶의 부족들은 거듭 로마를 공격하였으니 그 都市의 파괴를 노렸음이 분명하였다. 로마는 敵을 征服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征服당하느냐, 兩者擇一을 해야 하였다. 그러나 때로 로마의 出戰의 目的은 防衛보다는 영토獲得에 있었다. 라티움平野의 薄土는 地力을 잃고 있었고, 로마에 가까운 언덕은 나무가 없어졌으므로 새로운 農土와 森林이 필요했다. 로마는 또한 土地에 굶주린 플레브스를 植民할 領土를 求하기도 하였다. 이런 理由로, 그리고 또 非로마人의 政治的 忠誠을 確保할 目的으로 로마의 移民이 새로 획득된 土地에 植民되는 일도 때로 있었다.
대체로 로마는 이탈리아의 다른 民族들에 대하여 寬仁한 政策을 택했고, 그들을 高度로 中央集權化된 帝國보다는 고삐를 늦추어 다스리는 同盟으로 組織하였다. 弱小國을 强大國에 잡아 매는 유대는 대개 同盟의 유대로 絕對的 隸屬은 아니었다. 征服된 民族들은 대개 적어도 얼마간의 自治權이 許容되었고, 더러는 母國에서 폴리스의 전통을 들여온 「막나 그레키아」의 都市國家들처럼 상당한 自治를 누렸던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특히 로마의 鄰接民의 경우처럼 被征服民은 마침내 完全한 로마市民權을 가지게 되었으나, 로마法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民會에 參席하거나 投票하는 權利가 없는 不完全한 市民이 되는 일이 더 흔하였다.
이미 로마人은 지나친 地方主義와 지나친 中央集權이라는 兩極이 훌륭히 均衡잡힌 複雜한 政治組織을 만들어내는 能力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政治的 手腕이 非凡한 政策을 마련하는 智慧는 카르타고와의 長期戰을 통하여 提示되었다. 그때 이탈리아人의 大部分은, 로마가 거의 틀림없는 敗北에 直面하고 있었지마는 로마에 忠誠을 지켰던 것이다.
로마와 카르타고
南이탈리아의 희랍都市들이 로마의 支配圈으로 들어가자 로마와 카르타고는 衝突하기로 마련이었다. 北아프리카의 이 푀니키아의 大植民市는 그 植民地的 地位를 벗어나서 發展한지 이미 오래였고, 헬레니즘的 東方世界 밖의 最强勢力이 되었다. 그것은 商業的 과두정치로 지배되는 獨立國이었다. 西地中海의 貿易을 獨占하다시피 하였거니와, 北아프리카의 기다란 沿岸지대에다가 스페인의 一部와 西地中海의 島嶼를 支配하고 있었다. 카르타고人은 또한 시실리 西部도 支配하였으며 전체 섬을 支配하려 하였다. 그들이 시실리 東部의 희랍 都市들을 攻略하기 시작하자, 시실리의 희랍人은 로마에 保護를 청하였다. 로마는 이에 應하고 第一次 포에니戰爭(라틴語로 푀니키아人을 포에니라고 하므로 이 이름이 붙었다.)을 시작하였다(西紀前 264~241).
로마는 勝利하였다. 수지맞는 貿易을 한 일이 드물었거니와, 海軍의 경험이나 전통은 없다시피 하고 主로 農業國이었던 로마의 市民 戰士들은 몇 世紀에 걸쳐서 主要한 商業國이오 海軍國이었던 나라를 敗北시킨 것이다. 로마가 成功한 것은 一部는 카르타고의 여러 실책 때문이오, 무엇보다도 재빨리 大艦隊를 만들어 바다에서 敵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戰爭을 끝마치는 講和에서 카르타고는 시실리 東部의 모든 權利를 포기하고 시실리西部의 領土를 양도하였다. 이렇듯 로마는 이탈리아 本土 외에 첫 屬州를 장만하고, 이탈리아의 地方勢力이라기보다는 地中海의 한 勢力으로發展하였던 것이다.
카르타고人은 그 敗北로 屈辱을 당하자 이탈리아人에 육로로 侵入하는 기지로서 스페인의 支配를 강화하였다. 그 侵入으로 第二次 포에니戰爭(西紀前 218~201)이 시작되었다. 카르타고의 司令官은 歷史上 가장 有名한 將軍의 한 사람인 한니발이었다. 한니발은 軍隊를 이끌고 피레네 山脈의 南端을 돌고, 갈리아 南部를 거쳐서 알프스를 넘어 포江 流域으로 쳐들어갔다. 희랍의 歷史家 폴리비오스는 가을의 惡天候를 무릅쓰고 알프스를 넘은 그 進擊의 자세한 이야기를 남겼다. 오름길에서는 敵意를 품은 부족들이 遠征軍을 攻擊하였다. 이탈리아로 내려가는 길에서 한니발은 또다시 난관에 부딪쳤다.
이 동안, 그는 숨어 다니는 匪賊들을 더러 만난 외에 敵에 부딪치지는 않았으나,
땅과 눈의 惡條件 때문에 올라올 때에 못지 않은 損失을 당하였다. 내려가는 길은
매우 좁고 가파로웠으며, 사람이나 짐승이 다 같이 눈 때문에 무엇을 밟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길을 헛디디거나 넘어지면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졌다.
…그들은 마침내 길이 아주 좁아서 코끼리나 짐 실은 짐승들이 지나갈 수 없는 곳에
다다랐다. ....지난 겨울부터 남아 있는 묵은 눈 위에 내린 새 눈은 푹석 푹석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새 눈을 푹푹 밟고 그 밑의 얼어 붙은 눈이 닿으면, 더 이상 그 속에는
빠지지 않고 두 발이 다 미끄러졌으니, 마치 땅 위를 진흙 묻은 발로 걷는 것 같았다.
…짐승들은 넘어지면 일어서려고 발버둥치다가 밑의 눈 속으로 파고들어서, 그 무거운
짐과 얼어붙은 묵은 눈 때문에 짐을 실은 채 얼어붙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폴리비 오스, 歷史) 第3章 54~55節)
짐을 운반하는 데 쓰인 육중하게 움직이는 코끼리들은 알프스行軍에서 살아났으나, 그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北이탈리아에 이르자 한니발은 步兵의 損失을 갈리아人의 新兵으로 補充하였는데, 이들은 최근에 로마에 敗北하고 復讐를 꾀하였다. 南進하며 한니발은 연달아 싸움에서 이겼다. 칸느네에서는(西紀前 216) 그는 일부러 弱하게 한 中央部를 로마人이 攻擊하도록 計略을 꾸미고 그들을 골탕먹였다. 마치 巨大한 족집게와도 같은 强大한 兩翼部隊들로 그들을 包圍하였다. 로마軍 8分의 7이 殲滅되었다 한다.
로마는 戰鬪에서 졌으나 戰爭에 지지는 않았다. 한니발은 로마의 防備가 튼튼하기 때문에 그 都市를 점령하지 못했거니와, 로마와 同盟한 都市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기도했으나 그리 成果를 올리지 못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로마人도 그 危機를 훌륭히 對하였다. 그들의 총명하고 참을성 있는 將軍 파비우스 쿤크타토르(느림보)는 새로 徵募한 軍團으로 하여금 第2 칸네느의 危險을 무릅쓰게 하기를 꺼렸다. 그는 한니발軍과의 큰 戰鬪를 피하면서 敵의 보급과 巡察을 끊임없이 攻擊함으로써 그들을 괴롭혔다. 敵의 힘을 조금씩 消耗시키는 이 파비우스의 戰術은 카르타고軍을 지칠대로 지치게 하였다. 한니발은 로마의 制海權 때문에 本國으로부터 補給도 增援도 받을 수가 없었다. 그가 헛되이 이탈리아를 服屬시키려 하고 있던 西紀前 204年, 스키피오가 거느린 로마軍은 北아프리카에 侵入하였다. 한니발은 카르타고를 지키기 위해 召還되었다. 그러나 스키피오가 勝利하였고, 나중에 그의 勝利를 찬양하는 「아프리카누스」라는 존칭을 받았다.
獨立 大國으로서의 카르타고의 勢力은 西紀前 201年에 一方的인 강화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끝났다. 카르타고는 스페인의 領土를 넘겨주었고, 막대한 賠償金을 물었으며, 外交政策에 있어 로마의 後見을 받기로 동의하였다. 그러나 로마人 가운데엔 카르타고가 그대로 남아 있고, 특히 카르타고의 商業이 재빨리 回復한 것을 크게 걱정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다시 포에니戰爭을 일으키려는 運動이 好戰的인 켄소르요 元老院 議員인 카토(西紀前 234~149)의 領導下에 크게 일어났는데, 그는 언젠가 元老院 議員들 앞에서 北아프리카의 훌륭한 無花果 송이를 내두르면서 카르타고의 繁榮을 그들이 깨닫게 하였고, 또 그 연설마다 「카르타고 打倒」라는 무참한 후렴으로 끝내었다고 한다. 카르타고는 打倒되었다. 第三次 포에니戰爭(西紀前 149~146)에서 그 建物들은 全燒하고, 남아 있는 領土는 로마로 넘어갔던 것이다.
로마와 헬레니즘世界
西紀前 146年 로마擴大의 歷史에 있어서 紀念할 만한 해였다. 이 해는 카르타고의 打倒 뿐만 아니라 헬레니즘世界에 대한 로마의 霸權수립에 있어서 중요한 段階를 標識하는 것이었다. 第二次 포에니戰爭으로 말미암아 로마는, 野心祧한 마케도니아王이 그 戰爭에서 카르타고를 支援했기 때문에 헬레니즘 國家들의 끊임없는 政治鬪爭(第2章 參照)에 휩쓸러 들어갔다. 西紀前 201年, 카르타고와 講和하자 로마는 희랍에 대한 마케도니아의 霸權에 끝장을 내고 그럼으로써 로마의 안전에 대한 잠재적인 마케도니아의 위협을 덜기 위하여 마케도니아에 대한 豫防戰爭을 일으켰다. 이 目的은 西紀前197年에 이루어졌으나, 얼마 안가서 희랍에 대한 새로운 위협이 시리아의 셀레우코스帝國에서 왔다. 그때 카르타고에 亡命해 있던 한니발의 使嗾(사주)를 받은 셀레우코스王이 아시아와 유럽의 에게海 연안의 희랍國家들을 위협하였던 것이다. 또다시 로마는 防衞戰爭을 일으키고 西紀前 188年에 성공리에 끝냈다.
여기에 이르는 동안에 로마의 干涉은 오래고 오랜 조그만 紛爭에 아직도 골몰하고 있는 희랍國家들의 援助 요청으로 뒷받침되어 習慣化되어 버렸다. 얼마 동안 로마의 元老院은 단지 헬레니즘 世界의 調停者로서만 움직이고, 로마의 이해가 문제되는 外交政策에 관한 일만 제외하고 여러 나라에 自治를 許容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그렇게 잘 되어 나간 이 政策이, 로마의 指示에 대한 反抗이 거의 고질화 되어버린 마케도니아와 희랍에서는 잘 되지 않았다. 그 結果는 「이럭저럭 병합하게 되는」 과정이었다. 西紀前 146年, 로마는 걷잡을 수 없는 同盟國들을 재래의 방도로는 다루지 못하겠으므로 마케도니아를 로마의 知事가 다스리는 屬州로 하고, 희랍의 都市 國家들을 그 監督下에 두었다. 一部는 그들 사이의 끊임없는 다툼 때문에, 또 一部는 漸高하는 로마의 帝國主義 때문에 헬레니즘 세계의 여러 민족의 독립은 사라져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