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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사

[3장]로마 (3節)

작성자이안드레아|작성시간26.06.12|조회수4 목록 댓글 0

第3節 共和國의 危機 와 崩壞

西紀前 146 년 후로 로마共和國은 당시의 最大强國이었다. 로마는 이미 해외에 廣大한 帝國—시실리, 스페인, 마게도니아 및 가르다고 본토로 된 아프리카 속주(대략 지금의 튜니시아에 해당한다)를 건설하였다. 새로운 영토 획득이 그 뒤 4半世紀 동안에 이루어지게 되었으니, 갈리아 남부와 페르가몬의 마지막 임금이 로마에 유증(遺贈)한 왕국에 둔 아시아 屬州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영토가 줄곧 늘어남에 따라 다가오는 內憂外患의 징조도 많아졌다. 로마의 오래된 共和政이나 단순한 農業경제는 모두 그의 새로운 대제국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능률적으로 다룰 수는 없었다. 共和國은 얼마큼 자치를 허용한 몇몇 특혜도시를 제외하고, 海外屬州들을 관대히 취급하지 않았다. 새로 획득한 영토는 대개 屬州로 편성되고, 각기 로마元老院에서 任命한 전능한 知事가 다스렸다. 元老院 議員들은 屬州 행정의 복잡한 일들에 관하여는 경험도 적거니와 관심도 없으므로 屬州 知事들이 징병도 하고 세금과 곡물의 공물을 걷어 들이기만 하면 제멋대로 내버려두었다. 많은 지사들은 공화제의 가장 훌륭한 전통에 부끄럽지 않게 책임있게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두 번이나—한번은 로마의 국고를 위하여, 또 한번은 자기 개인의 재산을 채우기 위하여—그 속주의 등골을 빼먹는 지사들도 더러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에 이탈리아本土도 경제적.사회적인 복잡한 위기를 겪고 있었다. 한니발과의 대전쟁시

대개 충성을 지켰던 로마의 동맹국들이 점점 더 싱숭생숭해졌다. 그들은 확대가 그 수도에 가져온 새로운 財富와 위세를 같이하려는 마음에서 완전한 로마시민권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들 중의 가장 進取的인 사람들은 그처럼 많이 끌어들이는 로마의 磁性에 反撥하였고,

惡質的인 屬州 知事들의 본을 따른 듯한 一部 로마官吏들의 專斷的인 處事를 불평하였다.

게다가 만성적인 農地問題가 격화하였다. 地力의 枯渴과 第二次 포에니戰爭의 심한 피해로

말미암아 이탈리아의 많은 土地가 곡식을 경작하기에 알맞지 않게 되었다. 곡식은 아프리카에서 들어왔고, 이탈리아의 지난날의 곡식밭은 포도원.과수원 및 牧場으로 변하였다. 「라티푼디아」라는 大농장을 經營하는 사람들만 有利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넓은 土地를 장만하고, 과수를 가꾸고 가축을 치는데 필요한 대량의 奴隷노동을 공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屬州에 출정했다가 돌아온 軍人이나 退任한 屬州 知事들은 특히 有利하였다. 그들은 征服의

戰利品으로서 돈과 奴隷들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새로운 經濟的・社會的 분열이 일어났다. 로마史上 처음으로 아주 부유한 사람들의

계급이 나타났으니, 성공한 將軍과 知事들, 라디푼디아의 농업자본가, 商人과 實業家, 특히 國家에 도로를 건설하고 군대에 군량을 공급하는 청부업자 들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이 부유한 사람들의 大部分은 소수의 확립된 귀족 階級인 노빌레스 (152면 참조 )가 아니고, 에퀴테스 또는 騎士라는 새로운 계급에 속하였으니 그들은 군대의 제일 돈드는 부문인 기병대에 복무하기 위한 장비를 마련한 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웠다.

歷史上 모든 신흥부유층에 典型的인 일이지마는, 에퀴테스도 그 경제력에 어울리는 정치적 세력을 전연 행사하지 못했다. 포에니 전쟁 동안 로마의 실제적 政治的 권한은 거의 완전히 元老院에 넘어갔는데, 元老院은 成功的인 전쟁수행에 힙입어 보다 代議的인 會議인 兵員會나 區民會를 압도하였다. 또 元老院은 주요 元老院議員들뿐만 아니라 콘솔과 그 밖의 행정관들의 大部分들을 내는

소수의 貴族門閥에 支配되어 있었다. 버티는 元老院貴族階級과 새로운 財閥사이의 대립 긴장이 고조하였다. 이를테면 구식의 元老院議員인 카토는, 카르타고에 대해서 노발대발했듯이. 헬레니즘的 東方의 연약하고 사치하며 타락한 文化에 대한 부유층의 퇴폐적(頹廢的)인 趣味에 대하여 노발대발하였던 것이다.

훨씬 더 중요한 對立緊張이 社會的・經濟的 階級의 더 아래 層에서 커가고 있었다. 라티푼디아의 成長으로 小農들이 발붙일 곳이 거의 없게 됨으로써. 로마는 새 富者들과 함께 새로 몰락한 빈민들을 가졌다. 土地 없는 사람들의 數가 급작스레 늘고, 그 중의 많은 사람들이 로마市로 모여들어서 당장의 구호와 아울러 長期的인 개혁을 要求하였다. 小都市國家의 政治機構만으로는 全地中海的인 强大國의 이 多彩로운 문제들을 다룰 수가 없었다. 西紀前 2世紀의 經濟은 政治혁명에의 길을 닦고 있었던 것이다.

그라쿠스兄弟의 改革

政治혁명은 그라쿠스兄弟가 제의한 개혁들과 함께 시작하고, 共和國의 몰락과 함께 끝났다.

그라쿠스兄弟는 上流出身의 민중옹호자의 또 하나의 예를 내놓고 있다. 그들은 뛰어난 貴族家門 (그들의 어머니는 第二次 포에니전쟁의 英雄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딸이었다)의 胎生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빌레스의 희생을 무릅쓰고 빈민을 도우려고 작정했던 것이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西紀前 133年에 護民官으로서 일하였고, 그 아우인 가이우스는 123年에서 121年까지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兄弟는 다같이 元老院을 희생하고 護民官과 民衆的인 區民會의 政治的 중요성을 높이려고 하였다. 그들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연설의 다음 인용에서 보는 바와 같이, 非특권층의 편을 드는 감동적인 抗辯人들이었다.

이탈리아에 떠 돌아다니는 야수들도......자기의 굴을 가지고, 제각기 쉬고 몸을 의지할 곳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탈리아를 위해서 싸우고 죽은 사람들이 가진 것이란 空氣와 햇빛 밖에

없고, 집도 家庭도 없고, 처자들과 헤맨다. 그들의 사령관들이 전장에서 병사들에게 분묘와

신전을 적에게서 수호하도록 훈계할 때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 많은 로마인 중에

代代의 제단이나 조상의 분묘를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들은 남들의 재부와 사치를 수호하기 위하여 싸우고 죽는다. 그들은 世界의 主人들이라고

불리우지마는, 자기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한 뼘의 땅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다.

經濟的・社會的 改革으로서 그라쿠스兄弟는 첫째로, 라티푼디아가 비교적 소수의 농업자본가의 손으로 集中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한 사람이 가지는 土地의 크기를 制限할 것을 제안하였다. 둘째로, 土地를 잃은 農民들을 해외의 농업식민지나 그전에 농업자본가에게 貸與되었던 이탈리아의 국유지에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세째는, 로마시의 빈민들이 소매 시세 보다 아주 싼 價格으로 國家에서 곡식을 사게 함으로써 구호를 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元老院의 權力을 줄이고, 나아가서는 政治的 변동을 가져오기 위하여 그라쿠스兄弟는 에퀴테스에게 더 많은 責任을 주려고 하였다.

그들은 또한 完全한 로마市民權을 모든 라틴人과 그 밖의 이탈리아人의 一部까지 확대하는데 찬성하였다. 要컨대 그라쿠스兄弟는 共和國을 民主制로 빨리 이끌어가려고 하였던 것이다.

대체로 보아 그라쿠스兄弟는 失敗하였다. 그들의 經濟 계획중에서 곡식의 염가배급만 오래 採用

되었을 뿐이다. 그 뒤로 곡물가는 줄곧 내려서 마침내는 로마의 빈민들이 國家에서 빵을 無償으로 받기에 이르렀다. 빵 배급의 끊임없는 要求는 이주계획의 실패를 드러낸 것이다. 만일 土地에서 쫓겨난 농민들이 모두 새로 土地分配를 받았더라면 都市에서 빵의 염가배급을 要求하는 사람들의 數는 대폭 줄어들었을 것이다. 실상은 구호를 받는 수가 여전히 많았다. 農業資本家들은 그라쿠스兄弟 때문에 國家에서 代與받았던 土地의 一部를 내놓지 않으면 안되었던 뒤로, 곧 다시 그 保有地를 넓히고 있었다. 라티푼디아는 움직일 수 없게 되어 있었고, 로마人의 生活의 經濟的 토대로서의 小農業을 復活하기란 不可能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元老院을 공격하고 위협함으로써 그라쿠스兄弟는 깊은 원한을 샀다.

元老院은 에퀴테스의 政治的 權利의 확대를 싫어하였고, 신구의 특권계급 사이에 알력이 조성되었다. 元老院 議員들은 이탈리아에서의 로마 市民權의 擴大를 방해하였고, 카르타고 近傍의 신植民地 設計계획의 評判을 나쁘게 하기 위하여 民衆의 迷信을 악용하였다.

第三次 포에니戰爭에서 그 都市가 파괴된 뒤로 그곳이 呪咀받고 있다고 主張하면서, 시체를 먹는 하이에나라는 짐승이 카르타고人 농장의 境界標였던 돌들을 파낸다는 따위의 흉조 이야기로 植民 지망자들의 의욕을 꺾었다.

危機 속에서 共和國의 政治制度는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그라쿠스兄弟는 계획을 推進하기 위하여 合法性이 의심되는 方法들을 썼다. 티베리우스는 元老院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자기의 計劃을 방해하는 호민관을 내쫓는다는 前例없는 일을 하였다. 게다가 전례를 無視하고 兄弟가 다같이 호민관 再選에 立候補하였던 것이다. 元老院은 이 機會를 이용하여, 국헌을 무너뜨린다고 그라쿠스兄弟몰 非難하였음은 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元老院 議員들 스스로도 非合法的인 가장 暴力的인 手段——虐殺——썼다. 元老院 議員과 그 끄나풀의 한패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그 追從者 300명을 암살하였던 것이다. 12年 뒤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같은 運命에 닥치자 奴隷를 시켜 自殺하고 말았다.

오늘날 2000年 以上이나 지난 뒤에도 그라쿠스兄弟를 評價하는데 있어서 歷史家들의 의견은 갈라지고 있다. 自由主義者는「古代 로마의 뉴 딜」의 專斷的인 計劃으로 기성특권층과 맞부딪쳤던 그들을 自己와 비슷한 인물로 본다. 만일 元老院이 철저한 改革에 더 기꺼이 順應하기만 하였더라면 共和國은 살아났을 것이라 한다. 保守主義者는 그라쿠스兄弟의 성급함과 서투름과 또 社會的・經濟的 알력을 더하게 한 그 고압적인 방법들을 애석하게 여긴다.

만일 그들이 더 신중히 나아가기만 하였더라면, 共和國은 살아났을 것이라 한다.

公正한 歷史家는 이 相反하는 見解들 속에 많은 眞理를 깨달아야 할 터이지마는, 또한 이 '만일'들이 사실과 베치되는 조건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엄연한 사실은 그라쿠스兄弟의 改革주의와 元老院의 保守주의와의 交涉의 停頓(정체되어 멈춤)이 로마를 獨裁政治에의 길로 밀어 넣었다는 것이다.

獨裁政治의 길

共和國은 그라쿠스兄弟의 死後 安定을 回復하지 못하였다. 세 개의 대항하는 集團이 政治生活을 左右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더 많은 이득에의 欲心으로 海外領土의 끊임없는 擴大를 要求한 에퀴테스와, 그라쿠스兄弟의 改革에 反對한 保守的인 元老院 계급의 새로운 이름인 오프티마테스 곧「最善者들」과, 또 民主的 개혁의 옹호자들인 포풀라레스의 세 집단이었다.

이들 集團 사이의, 특히 포풀라레스와 에퀴테스의 편과 오프티마데스의 편 사이의 즐기찬 적대는 자못 紊亂(문란)하였다. 훨씬 더 破壞的이었던 것은 오프티마테스와 포풀라레스의 영도권이, 兩階級이 수호하려는 原則에 대한, 關心을 더욱 더 잃어가던 將軍들에게 넘어간 일이었다. 이 將軍들의 세력은 이제 살피게 되겠지마는 군대의 支配와 군사력의 무자비한 使用에 입각한 것이었다.

不安과 失政은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行政을 맡은 貪慾한 에퀴테스와 오프티마데스 때문에 말썽이 많던 주변의 屬州들도 어지럽게 하였다. 屬州의 악정에 대한 古典的인 고발장이 신진의 젊은 법률가 시세로의 손으로 되었으니, 그는 西紀前 7年에 시실리의 知事 베레스를 고소하였던 것이었다.

헤아릴 수 없는 金額이 새롭고 터무니없는 法規로 農民의 호주머니에서 搾取(착취)되었다.

우리의 가장 충실한 동맹자들은 마치 국가의 원수처럼 取扱되었다. 로마의 市民들이 奴隷같이

고문되고 處刑되었다. 가장 罪많은 犯人이 돈으로 석방되는가 하면, 가장 훌륭하고 正直한

사람들이 한마디의 변명도 못하고 단죄되고 추방되기가 일쑤였다. 굳게 防備된 港口들,

强力하고 잘 守備된 都市들도 海賊들의 攻擊에 束手無策이었다.

시실리의 兵士와 水夫들, 우리의 同盟자와 친구들은 굶어 죽었다. 굉장하게 장비된 훌륭한

艦隊들이 파괴되고 損失되어 우리의 國威를 떨어뜨렸다. 有名한 古代의 藝術品들, 그중 더러는

부유한 王들이 선사한 것들은 -- 다름 아닌 이 知事가 모조리 빼앗고 훔쳤다.

그가 그렇게 손대지 않은 공공의 立像이나 美術品은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가장 신성하고 崇尙되는 神殿도 掠奪당하였다. 사실 그는 시실리 사람들에게,

자기가 조금이라도 年代나 美術的 價値로 보아 普通 以上이 된다고 생각한 神像은 단 하나도

남겨 놓지 않았던 것이다. (〈베레스 彈劾演說 初入部〉第5章)

이런 사정은 屬州에서 중대한 反亂들이 일어나게 하였던 것이다.

屬州들을 괴롭힌 둘째 要因은 오랫동안 연달은 변경의 戰爭들이었다. 西紀 2世紀末에 게르만부족들이 로마人을 스페인과 갈리아 南部에서 내쫓고 이탈리아로 쳐들어오려 하였다. 西紀前 88年에는 小아시아와 흑해 沿岸에 넓은 領土를 차지한 동방의 강력한 왕인 미트리다테스가 로마의 아시아 屬州를 攻擊하였다. 로마의 착취에 분노한 原住民들이 미트리다테스와 합세하고 수천의 이탈리아 이주민들이 학살되었다. 결국엔 로마는 게르만族과 미트리다데스가 帝國에 가져온 중대한 危險을 막는데 成功하였다.

防衛만이 변경에서의 만성的인 戰爭의 唯一한 理由는 아니었다. 에퀴테스는 새로운 屬州의 獲得과 수지맞는 군대의 請負를 맡고, 奴隷들을 賣買하고 또 稅金과 貢物을 걷는 새로운 기회를 환영하였다. 邊境의 戰爭은 野心的인 將軍들에게, 큰 財産을 모으고 로마市에서 凱旋式을 올림으로써 政治的 進出을 북돋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사로잡은 포로와 빼앗아온 財物을 끌고 가는 勝利한 軍團들의 이 호사스러운 행진은 수도의 주민들을 현혹케 하였던 것이다. 마침내 장군들은 指揮權을 가지고 군대에 物質的 보수를 나눠줌으로써, 戰爭에서와 마찬가지로 政治에서도 그를 따르는 심복의 軍人의 무리를 만들었다. 政治的 成功에의 열쇠는 먼 屬州에서의 戰勝의 記錄이었다.

마리우스와 술라

共和國을 獨裁政治에의 길로 밀어넣은 최초의 將軍은 포풀라레스의 指導者인 마리우스였다.

그는 北아프리카에서의 反亂을 진압하고(西紀前 105) 侵入해온 게르만部族들을 물리침으로써

軍人으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마리우스는 政治的으로 두 개의 重要한 改革을 하였다. 前任의 콘술이 다시 콘술職에 選出되려면 10年이 되어야 한다는 法律을 無視하고, 마리우스는 103年에서 100年까지의 사이에 다섯 번 콘술로 再選되게 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는 세력있는 사람이 要職을 짧은 동안 차지하다가 그만두지 않고 거의 無限定으로 차지할 수도 있는 前例를 남긴 것이다. 둘째로, 마리우스는 그라쿠스兄弟가 계획하였으나 실행하지는 않았던 방침대로 군대의 징모방법을 革新하였다. 로마의 병사들은 그 裝備 스스로 마련해야 하였으므로, 一定한 最小의 財産을 가진 市民들만 군대에 복무할 수 있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마리우스는 처음으로 無産자들에게도 軍門을 열고 國家에서 그 裝備를 공급하도록 하였다. 그럼으로써 戰爭이 끝나면 正常的인 평시의 職業으로 돌아가던 市民들이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그 대신에 새로운 職業人들이 나타났으니, 이들은 군대를 一生의 業으로 삼고 그 司令官이오 보호자인 將軍들에게 극도로 忠實하였다.

마리우스는 西紀前 100年에 官職에서 은퇴하였거니와, 그 革命的인 政治的 변혁의 완전한 귀결은 그뒤 10年 동안 드러나지 않았다. 그가 은퇴한 뒤 오프티마테스는 元老院의 權力을 回復하였다. 이탈리아의 非로마系 住民들에게 市民權을 擴大하려는 지난날의 그라쿠스兄弟의 政策에 대한 元老院의 줄기찬 反對는 중대한 反亂을 일으키게 하였다 (西紀前 91~88). 로마市民權을 줌으로써 그 反亂을 가라앉히고, 로마에 대한 이탈리아인의 충성을 도로 찾고, 元老院이 아직도 必要할 때는 理性的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는 동안에 미트리다테스의 小아시아 침략은 로마의 새로운 軍事行動을 要求하였고 새로운 政治的 분규를 자아냈다. 마리우스는 은퇴하다가 나서서 小아시아에서 로마軍을 指揮할 權利를 당당히 要求하였다. 그러나 元老院은 더 젊은 將軍이오 元老院의 확고한 支持자인 술라를 司令官으로 任命하였다. 두 사람의 對立하는 將軍들과 병사와 심복들은 곧 로마의 정권을 애워싸고 싸우기 시작하였다. 술라의 편이 우세했다가 다시 마리우스가 우세해짐에 따라, 暴動과 모반과 유혈은 심해갔다. 마리우스는 西紀前 86年에 죽었고, 그 2年 뒤 술라는 미트리다테스를 공격하였다. 포풀라레스는 凱旋한 술라에 더 대항하지 못하니 피비린내 나는 內亂은 西紀前 82年에 끝장을 내렸다.

술라는 바야흐로 獨裁官 (148面 參照)의 자리를 차지하고 共和國의 정체를 수정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區民會와 護民官의 권한을 줄이고 元老院을 로마의 정치적 조정자라는 옛날의 地位로

돌아가도록 하려 하였다. 그러나 실상인즉 그는 獨裁政治에의 길을 또 한 걸음 크게 내디디었던

것이었다. 그는 마리우스의 支持자들을 없애버렸으며, 前例를 어겨서 在來의 6個月의 임기를

훨씬 넘는 기간을 줄곧 獨裁官으로 있었다. 로마의 진짜 支配는 元老院이 아니라 군대를 가진

술라였던 것이다.

폼페이우스와 시이저

술라의 은퇴(西紀前 80)後 얼마 안가서 元老院은 쇠퇴하는 共和國을 다스리는 能力이 없음을 드러내었고, 제멋대로 支配하는 方式으로 되돌아갔다. 로마를 對立하는 政治陣營으로 나눈 名目上의 쟁점은 元老院과 포풀라테스와의 오랜 투쟁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정치가나 장군들이 公言하는 政綱들은 이제 거의 無意味한 것이었다. 진짜 爭點은, 機會主義者들과 그 도당들이 로마의 絶對的인 支配權을 잡으려는 쇼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機會主義者들의 선두로 나선 人物은 술라의 군대에 從事하였던 젊은 軍人으로서, 元老院이 중요한 군사지휘를 맡긴 폼페이우스였다. 西紀前 70年에 폼페이우스는 강제로 元老院으로 하여금 술라의 政體를 폐지하고 護民官과 區民會의 권한을 그전대로 부활시키게 하였다. 그 다음 폼페이우스는 미트리다테스의 王國의 大部分과 쇠퇴한 셀레우코스帝國을 征服함으로써 (西紀前 66~62) 스스로는 새로운 榮光을 누리고 로마는 새로운 屬州들을 얻게 되었다. 이렇듯 로마는 西아시아를 支配하게 되었다. 그러나 元老院은 지난날의 部下였던 그의 성공에 완전히 놀라서 그의 勢力을 꺾으려고 하였다. 폼페이우스는 이에 對하여 西紀前 60年에 다른 두 將軍과 同盟함으로써 응수하였다. 로마는 바야흐로 三頭政治에 지배되었다.

그러나 三頭政治는 그들 중 한 사람의 最後 勝利에의 발판이 되었다. 그 한 사람이 폼페이우스가 아니라 로마의 將軍 중 가장 有能 한 野心家인 율리우스 시이저(케자르, 西紀前 102~44)였다. 元老院에 대한 포풀라레스의 大義의 옹호자로 자임 하였으나, 그는 두 진영에 다 발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叔母가 마리우스의 아내였으나, 그의 딸은 폼페이우스와 결혼하였고, 그 家族도 실상 대개 파트리키였던 것이다. 三頭政治에 가담한 直後, 시이저는 갈리아에서 군사적 영광을 얻으러 떠났다. 西紀前 58年서 50年까지의 사이에 그는 갈리아의 地中海岸의 오랜 로마 식민지와 영국 해협과 라인 강 사이의 지역을 모조리 征服하였다. 이 전투 중에 그는 갈리아인을 援助한 브리튼人을 응징하기 위해 브리튼島로 遠征하였다 (西紀前 55~54). 그러나 로마가 브리튼島의 永續的인 征服을 기도한 것은 다음 세기의 중엽에 이르러서였다. 시이저는 솔직하게 사실을 報告한 아주 效果的인 저술인 〈갈리아戰記〉를 씀으로써 빈틈없이 자기의 업적을 선전하였다.

갈리아에서 얻은 굉장한 威望과 歷戰의 충실한 軍團을 뒷받침으로 하여 시이저는 西前前 49年에 政權을 잡으려 하였다. 元老院이 그에게 그가 다스리는 갈리아 屬州에 머물도록 명령하자. 그는 元老院을 無視하여 군대를 이끌고 그의 屬州의 남쪽 경계인 루비콘강을 건넜다. 몇週 안으로 그는 이탈리아를 征服하였다. 그리고나서 그는 아드리아해를 건너 회랍北部로 가, 거기서 한때는 자기의 사위요 同僚였으나 近來에 와서는 그의 大敵인 폼페이우스를 敗北시켰다. 그는 이 새 內亂에서의 勝利를 굳건히 하기 위하여 地中海域을 돌아다녔다. 이집트에서 그는 프톨레마이오스朝의 젊은 女王 클레오파트라를 사랑하였고, 그녀는 그의 아들을 낳았다. 그는 小아시아에서 勝利를 祝賀하는 간결한 箴言"veni.vidi, vici"(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를 남겼다. 北아프리카와 스페인에서 더 많은 勝利를 거둔 뒤 시이저는 마침내 西紀前 45年에 로마에 개선하였다. 1年도 못되어 그는 44年 3月15日, 元老院의 反對派의 칼을 맞아 바로 元老院의 마루바닥에 폼페이우스의 彫像 앞에 쓰러져 죽었다.

그 勝利의 짧은 時日에 시이저는 그의 선구자들이 한 정도를 훨씬 넘어서 一人政治를 推進하였다. 이른바 시이저主義라는 制度는 공화국의 여러제도, 특히 여러가지의 민회와 행정관리들 사이의 상호억제의 제도를 무너뜨릴 必要가 있었다. 그는 스스로의 독재관의 자리를 차지하고, 보통은 콘술과 과 호민관과 폰디펙스 막시무스(大司祭——最高 宗教官)에 屬하는 많은 권한들을 가졌다. 그는 元老院 의원의 수를 늘여서 그의 지지자들을 들여놓고, 운명의 3月15日까지 원로원과 민회를 左右하였다. 그의 반대자들은 시이저가 王位에 오른 뒤 동방의 전제군주들이 더러 그랬듯이 神으로서 숭배받으려는 계획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완전히 確認된 일도 부인된 일도 없는 이런 비난은 시이저의 궁극적인 의도를 모호하게 하고 있다.

아뭏든 시이저는 開明(개명) 전제군주였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어떤 회랍 科學者의 發見을 채택해서 재래의 불편한 曆을 버리고 윤년에 하루 더 보태는 365日로 1年을 定하고, 舊曆의 第5月을 그의 이름을 따서 「율리우스](줄라이)라 고치도록 하였다. 이 율리우스曆 은 16世紀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에 의해 修正된 채 오늘날 그대로 쓰이고 있다. 시이저는 공화국의 根本的인 社會的・經濟的 어려운問題들. 특히 이탈리아의 人口 과잉과피폐를 해결하는데 상당히 成功하였다. 다른 군인정치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자기의 追從者들에게 土地을 주어서 보답하였는데, 특히 주변 屬州들의 土地를 주어서 老兵들의 새植民地가 自治를 발전시키도록 장려하였다. 포로로 데리고 온 奴隷들이 自由民을 失業게 하였으므로 그는 그의 노예의 수를 제한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자기 個人의 財産에서 로마市民에게 후한 선사를 하고나서, 그라쿠스兄弟가 처음 마련한 곡식배급을 받는 시민의 數를 급격히 즐였다. 이런 구호의 소멸은 失業者에게 새로운 일터를 만들어내야 하게 하였다. 죽을 무렵, 시이저는 티베르江의 홍수對備, 아페닌산맥 횡단도로 및 희랍의 코린토스地峽의 운하와 같은 일련의 거창한 토목공사들을 계획하고 있었다.

共和國의 終末

그러기 때문에 시이저主義는 3月15日에 죽지 않았다.

시이저가 죽은 뒤 그의 계획은 새로운 三頭政治에 이바지하였다.

이 三頭政治는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그 指導的인 두 멤버였다.

젊고 조숙한 옥타비아누스는 시이저의 從孫이오 양자요 또 後繼者였다.

안토니우스는 시이저가 제일 信任한 副官이오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옥타비아의 남편이었다.

새로 일어난 內亂에서 이 第二 三頭政治는 시이저를 암살한 한 사람인 브루투스가 이끄는

元老院계급 反對파를 소탕하였다. 그리고나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對立은 三頭政治를 깨뜨렸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를 버리고 이집트로, 또 아직도 魅力的이고 抱負를 가진 클레오파트라에게로 물러갔다. 그러나 그의 追從者들은 옥타비아누스에게로 달아나버렸다.

西紀前 30年에 옥타비아누스에 완패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自殺하였다.

이제 위대한 전환점에 이르렀으니, 이집트는 마침내 로마의 영토가 되고,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單獨支配者가 되어 그토록 오래 임종을 기다리던 共和國이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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