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4節 로마帝國初의 2세기; 西紀前 27~西紀108년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 西紀前 27~西紀14년)
西紀前 27년에 옥타비아누스는 共和的 도시국가에서 광범한 제국의 요구에 더 잘 알맞는 제도로 로마의 정치체제 변형에 착수하였다. 그의 계획의 목표는 공화적 형태 유지하면서도 시이저주의의 본을 따라 정부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있었다. 따라서 「로마공화국의 재건자」를 자칭한 옥타비아누스는 실상인즉 로마제국의 건설자였던 것이다.
선량한 공화주의자로서 행세한 옥타비아누스는 일체의 허식을 삼가하였다. 로마의 그의 저택은 결코 제일 큰 집도 아니거니와 제일 호화스러운 집도 아니었다. 그는 그 자제들에게 간단한 가내업인 방직하는 법을 배우게 하였다. 그들이 그 재주를 실제로 이용하게 될 성싶지는 않았지 마는.
그는 공적인 연회에 나가면 아주 알맞게 먹어서, 천한 大食의 티를 보이지 않으려 하였다. 또 가시 없는 공화적인 「제일시민」(프린켑스)라는 칭호를 더 거치장스러운 칭호「존엄한 황제이고 신같은 시이저의 아드님」보다 좋아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뒤의 칭호에서, 황제라는 지위와 그 지위를 맨처음에 차지한 사람이 역사상 알려지게 된 칭호, 즉 군사령관을 뜻하는 임페라아토르 (imperator)에서 나온 「엠페러」(emperor =황제),「존엄한」의 뜻인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칭호가 생겼다.
아우구스투스가 세운 정체는 흔히 「兩頭정치」라고 불리운다. 이것은 두 최고권위 즉 그 자신과 원로원에 의한 지배이다. 그러나 실상은 이 양두정치는 아우구스투스의 군주정치에 가까와졌다. 그는 원로원을 개편하고 지난날의 권력을 죄다 지니도록하여 친구와 추종자들로 채웠다. 그는 정부요직을 채우는 서임권을 원로원에 주었지마는, 정치의 이대槓杆(공간:지렛대)인 군대와 징세권을 통제하는 권한은 빼앗았다. 아우구스투스의 정부를 황제와 원로원의 조합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마는, 황제는 지배적인 조합원이고 원로원은 보통 그 온순한 심부름꾼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공화국의 그밖의 오랜 제도들에 대하여 그렇게 상냥하지 않았다. 시이저처럼, 그도 바야흐로 지난날의 중요성을 잃은 직위인 콘술과 호민관의 권한을 많이 가졌다. 그는 兵員會와 區民會의 존속을 허용하긴 하였으나 무력한 회의체로서였다.
아우구스투스의 힘은 확고한 정권장악 뿐만 아니라 그의 재부와 군대지휘권에서도 나온 것이었다. 생활이 간소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로마 제일의 부자였다. 그는 시이저로부터 큰 유산을 받았고, 거기에, 원정의 전리품과, 로마의 부자들이 공공심의 다소 놀라운 발휘로서 그에게 유증한 재산들을 더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재산을 공공의 복지와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위하여 썼다. 그가 권력을 잡았을 때, 징세기구는 무너져 있었고 로마는 파산 직전에 있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군인의 연금과 로마의 빵 배급의 비용을 냈다. 그는 또한 로마 水道의 수리와 首都의 아름다운 새 공공건물의 건축의 자금을 내주고, 벽돌의 도시였던 것을 대리석의 도시로 남겼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군대에 일련의 중요한 개혁을 하였다. 그는 대립하는 제멋대로의 장군들이 임시의 군대를 징모하는, 불경제이고 정치적으로 위험한 관행을 그만두게 했다. 그는 전 로마군의 유일한 최고사령관으로서 장군들 가운데에 시이저같이 되려는 자가 있으면 재빨리 처벌할 수 있었다.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속주로 군대를 급파하는 재래의 관행을 버리고 군단을 영속적으로 변경의 속주에 주둔시켜서 언제나 그 공격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 그는 조그만 상비해군--일종의 해안경비대를 두어서 공화제 말기의 수십년간 지중해 상업을 마음대로 약탈하던 해적을 누르도록 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또한 행정에 있어서도 재래의 맹목적인 방법들을 폐지하였다. 정직하고 유능한 사람들이 공화국 쇠퇴기의 부패한 관리들과 대체되었다. 공직을 채우는데 있어 아우구스투스는 현명하게 원로원의 두둔을 받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에퀴데스에서도 임명함으로써, 마침내 이 중요한 실업가 계급에 당연한 정치적 권리를 주고 사회적 알력의 뿌리를 뽑아버렸다. 또한 세제를 개혁하고 통일하였다. 토지·소금·매매·수입 및 그밖의 10여 항목에 대하여 따로따로 과세되었지마는, 보통 사람의 총부담은 지나치게 무거운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일반농민은 통틀어 그가 생산한 농산물의 값의 1할 가량 되는 세금을 냈으리라고 추정되어 있다. 세금징수는 이제 국가의 임무이며, 사복을 채우는 강탈적인 징세업자의 사적인 사업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의 거의 모든 정책은 신민의 광범한 지지를 받았다. 1세기 뒤 그의 성공의 이유가 역사가 타키투스의 손으로 훌륭하게 요약되었는데, 그는 공화국의 소멸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아우구스투스에 대하여 비판적인 견해를 가진 비교적 소수의 로마인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먼저 사금賜金으로 군대를, 염가의 곡식으로 민중을, 또 평화의 즐거움으로 세계를
만족시키고나서 조금씩 득세하기 시작하고 한 몸에 원로원과 장관과 입법부의 직능을 모았다.
반대파는 하나도 없었다. 가장 용감한 사람들은 戰場에서 쓰리졌거나 公敵 명단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나머지의 귀족들은 예속을 기분좋게 수락하는 것이 재부와 관직을 얻는
제일 평탄한 길인 줄 깨닫고, 혁명 때 치부하였으므로 이젠 구제도와 모험보다
신제도와 안전을 택하였다. 속주의 사정도 인심을 잃고 있지는 않았는데, 거기서 원로원과
인민의 통치는 권세가들의 私鬪와 탐욕한 관리들 때문에 신용을 잃었었던 것이다.
(타키무스,〈연대기》제1권2)
타키투스가 귀족들에 관하여 말한 바는 대다수의 주민에도 해당된다. 로마인은 구제도와 모험보다 신제도와 안전을 택하였던 것이다. 안전을 얻기 위하여 그들은 오래된 공화국의 많은 제도를 기꺼이 희생하였다. 그 희생이 크기는 했지마는, 아우구스투스의 업적도 컸다. 본국에서는 내란이 없어졌다. 속주의 안전은 단지 변경에서 다소 일어나는 사건들로 깨뜨려졌을 뿐이다. 특히 아르미니우스가 거느리는 게르만人에게 로마 군단들이 서쪽으로 라인강까지 쫓기어 독일 북서부의 토이토부르크의 숲에서 패배하였을 때가 그러하였다. 이와같은 차질이 때로 있기는 했으나 아우구스투스의 업적을 심히 망쳐 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치세는 2세기간(서기전 27년부터 서기 180년까지) 지속된 「팍스 로마나」, 즉 로마의 평화의 시작을 의미하였다. 그것은 아마 우리 서양문명의 역사에 있어서 대전쟁 없이 지낸 제일인 긴 기간이었으리라.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들
—서기 180년까지
아우구스투스의 행정면의 혁명이 영속적인 성질의 것이었음은 그의 사후 반세기간에 일어난 사건들에 의해 뚜렷하게 증명되었다. 그의 뒤를 이은 네 황제는 아주 변변치 않은 후계자들이어서 거듭 위기를 자아내었다. 그러나 제국은 그 폭풍우를 헤치고 나갔으며, 공화제 말기의 1세기간에 일어난 그와 맞먹는 위기의 특징이었던 분열을 과히 경험하지 않고 넘겼다.
맨처음의 후계자인 티베리우스 (14~37)는 아우구스투스의 의붓아들이오 사위였는데, 인망을 잃는데 놀라운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마침내 카프리섬으로 물러나 로마와 그를 괴롭히는 적들에게서 피신하였다. 티베리우스의 종손인 칼리굴라 (37~41)는 미쳐서 암살되었다. 칼리쿨라 의 숙부인 클라우디우스 (41~54)는 패 유능한 황제였으나, 그의 야심 많은 아내가 독버섯을 먹이어, 前夫의 아들인 네로에게 제위를 넘기려고 구몄다. 자기 어머니와 아내와 동생을 죽인 네로(54~68)는 그중 제일 심란하였다. 로마가 불탈 때 네로가 견금경주을 켜고 있었다는 옛말에는 일말의 진리가 있는 것이다. 네로가 음악경주와 연극상연에 나가기를 고집한 일은 로마人의 비위에 거슬렀는데, 그들은 이 행동이 황제의 위신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널리 퍼진 말과는 달라서, 네로는 그 도시의 대부분을 폐허로 만든 불(64)을 붙인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자기에게서 돌리기 위하여 그는 기독교도들에게 죄를 씌워 수백명을 학살하였다.
이 熱病적인 수십 년 동안의 혼란은 처음엔 정부의 고위층에 미쳤을 뿐이고, 더 아래서는 행정기구가 아우구스투스에 의하여 잘 손질되어 있었기 때문에 줄곧 원활하게 움직이었다. 그러나 네로의 실정은 마침내 군대의 반란과 내란을 가져와 황제가 자살하기에 이르렀고 (68), 제위는 아우구스투스의 왕조에서 떠나게 되었다. 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 (69~79) 는 정력적인 군인이었는데, 곧 좋은 정부를 다시 세웠다. 그의 두 아들이 그 뒤를 이었고, 형제 중의 동생인 도미티아누스는 너무 잔인하게 지배하였기 때문에 암살되었다 (96). 이렇듯 왕조를 토대로 한 제위계승을 마련하려는 또 하나의 기도도 실패하고 말았다.
새 황제 네르바 (96~98)는 빈틈없는 老법률가였는데, 마침내 제위계승의 문제를 해결하고 유능한 황제들을 줄곧 마련하는 방식을 짜내었다. 그는 유능하고 충성스러움이 이미 알려진 사람을 양자로 삼았고, 그 양자는 자기가 황제가 되자 그 절차를 되풀이했던 것이다. 이 교묘한 양자제도는 제위에 오를 사람을 고르는데 있어서 세습보다도 능력을 결정적인 요소로 하였다. 가장 유능한 황제 중의 네 사람--트라야누스(98~117), 하드리아누스 (117~138), 안토니누스 피우스 (138~161) 및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161~180)--이 연달아 나타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티베리우스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이르기까지, 황제들은 아우구스투스 정부의 원리원칙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의 본을 따라 그들은 군대와 재정과 관료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중요한 새로운 관행인 황제숭배를 도입하였다. 이론상으로 이것은 재위중의 황제의 숭배가 아니라, 원로원에서 신화하기로 선정한 선제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원로원은 칼리굴라 . 네로 및 도미티아누스와 같은 제일 몹쓸 황제들만 제외하고는 모든 황제를 신화하였던 것이다. 황제와 신을 동일시하는 버릇에 오래 젖은 동방의 속주들에서는 아우구스투스와 그밖의 황제들이 생시에 숭배되었다. 또 로마 자체에서도 2세기까지엔 현 황제가 신적왕에 헌신하는 의례적인 동방인과 매한가지인 사람들에 둘러싸였던 것이다. 물론 황제숭배는 근본적으로 종교적이라기 보다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모든 로마인이 하게 마련인 엄숙한 애국적 행위로서, 마치 모든 미국인이 오늘날 국기에 경례하고 국가를 봉창하는 것과 같다.
제국의 속주들
이 황제숭배에 참여한 로마인은 광대한 제국의 방방곡곡에 살고 있었다. 제국의 확대는 아우구스투스의 시대와 1세기에 걸쳐 계속되었고, 다음 세기에 절정에 이르렀다. 이 영토들의 넓이와 다채로움을 생생하게 되살리는 좋은 방도는 로마제국이 한창이었던 2세기에 이탈리아의 외부에 있었던 속주들을 살펴보는 일이다.
서유럽의 켈트인 거주지역은 13개의 속주로 편성되어 있었다. 클라우디우스 때에 정복된 브리덴(브리타니아)에도 둘 있었는데, 로마의 세력은 오늘날의 잉글란드의 대부분에 뻗치고, 북쪽으로는 적대하는 스코트인의 침공에서 국경을 수비하기 위하여 하드리아누스와 안토니누스가 구축한 장성까지 미쳤다. 갈리아는 속주가 여섯이었는데, 북쪽과 동쪽은 라인강 까지 뻗치고 오늘날의 프랑스·벨기에 및 룩셈브르크 뿐만 아니라, 화란 남부 및 독일과 스위스의 일부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스페인 (히스피니아) 의 3속주는 이베리아반도 전부를 차지하였다. 또 알프스산맥의 속주들인 레티아와 노리쿰은 대강 오늘날의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에다가 독일 남단 지방을 합친 것이었다. 도나우강 남쪽의 남동유럽 전부가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다. 여덟 속주가 지금의 헝가리에 있던 파노니아에서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및 희랍까지 펼쳐져 있었다.
이렇듯 라인강과 도나우강은 이들을 잇대는 장성과 아울러 유럽의 로마 국경을 이루었다. 라인강 동쪽으로 진출하려던 로마의 기도는 서기 8년에 아르미니우스가 거느리는 게르만인에 의하여 저지되었다. 1세기후 트라야누스 때에 로마군은 도나우강 하류를 넘고 쳐들어가서 오늘날 루마니아의 땅에 다키아속주를 설립하였다.
아프리카에서 로마는 지중해 전 연안과 그 오지를 지배하였다. 서에서 동으로 가자면 마우레타니아(무어인의 땅, 모로코), 누미디아(오늘의 알제리아), 옛 카르타고와 지금의 튜니스주변의 아프리카 속주, 키레나이카(오늘의 리비아 동부) 및 이집트였다. 근동에서는 로마는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에 임시로 속주들을 두었고, 유프라테스강 상류와 아라비아 사막 북단에 이르는 지역을 영속적으로 편성하였다. 그 지역은 10여 속주로 구분되었는데, 에게해 동안의 아시아 속주로 시작하여 동쪽과 서쪽으로 나아가 비티니아. 갈라티아. 카파도키아. 킬리키아 및 그밖의 속주들을 거쳐서 시리아. 팔레스티나 및 홍해 북단으로 내민 아라비아 삼각지대의 속주에 이르렀다.
제국의 행정
이 광범한 제국은 이에 못지 않게 광범위한 인종과 문화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고도로 문명화된 희랍인과 이집트인을 비롯하여 브리덴섬 북부의 켈트인처럼 아직 몸을 파랗게 칠하는 야만인에 가까운 변경민에 이르기까지 가지각색이었다. 가지각색의 사람들에 죄다 맞는 한결같은 통치방식이란 있을 수 없으므로, 제국행정은 지방의 요구와 관습에 알맞는 정책을 썼다. 변경에서는 특히 게르만족과 그밖의 부족들이 노리는 라인강과 도나우강 변경에서 로마는 군정을 베풀었다. 군영 중에는 군인들이 결혼하고 정착함에 따라 영속적인 도읍이 된 곳도 더러 있었다. 그중 얼마는 로마제국 뒤에도 오래 남아서 콜로뉴와 비엔나 같은 대도시가 되었다.
제국의 동부지역에서는, 단 하나만을 예외로 하고는 황제들이 헤레니즘 국가에서 물려받은 행정부를 크게 고치는 일은 없었다. 전제적인 로마 지사들은 전제정치에 길든 이집트와 그밖의 속주들을 다스렸고, 희랍 도시국가들은 전래의 자치권을 더러 간직하였다. 북아프리카는 일부 자치적인 도시국가(그중 더러는 옛날의 페니키아의 중심지를 뒤이은 것들이었다)와, 황제나 로마의 부유한 자본가가 소유하는 광대한 농토로 나눠져 있었다. 그 단 하나의 예외는 팔레스티나였는데, 거기서 로마는 하나의 위성왕국을 유지하려다가 유태인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쳤다. 로마인이 유태인의 생활에 간섭할수록 유태인은 더욱더 반항하였고 그럴 때마다 양쪽에서 많은 피를 흘렸다. 마침내 70년에 로마는 4년간에 걸쳐 예루살렘을 공위한 끝에 명맥을 유지하던 옛 유태인국가를 없애버렸다. 그 결과 종교로서 유태교가 박해되고 유태인이 해외로 차차 이산하였던 것이다.
한편 갈리아. 스페인 및 그 나머지 서방의 속주들은 고대의 도시나 정치제도를 거의 가지지 않았으므로, 도시의 제도와 지방정부의 기구가 로마에서 옮겨졌다. 속주마다 지방적인 사무분야에서 상당한 자치를 누리는 소단위로 세분되었다. 이 소단위가 키비타스(라틴어로 도시국가의 뜻)였다. 초기의 로마공화국처럼 키비타스는 그 지역이 좁고, 지난 공화제시대의 원로원과 민회에 해당하는 지방적인 회의체에 의해 다스려졌다. 근방의 대지주들이 지배하는 참사회는 키비타스에 특유한 일들을 살폈다. 프랑스의 보르도와 리용 및 서독의 트리에르 같은 중요하고 근대도시들은 로마의 키비타스까지 그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국, 특히 서방의 넓은 지역들은 로마제정의 감시를 받는 부분적으로 자치적인 여러 도시국가로 된 하나의 연방을 이루고 있었다. 키비타스들은 로마의 중앙정부가 요구하는대로 세금을 바치고 징병을 하고 황제숭배의 의식을 지키는 한 그 특권을 누렸다. 만일 키비타스가 그 의무를 게을리하면, 속주의 지사나 황제가 몸소 개입하여 바로잡았다. 궁극적인 통치권은 항상 로마에 있었으나 분별있게 행사되었다. 중앙정부는 수백 또는 수천 마일 떨어진 데서 수없이 일어나는 많은 지방문제들을 모조리 수도에서 결정지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총명한 정책은 이를 다스리는 유능한 '관료의 육성 없이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국의 가장 위대한 업적의 하나는 그 유능한 관료제였거니와, 이젠 공화제 시대처럼 주로 로마에서 관료를 충당하는 일이 없어지고 전 제국, 특히 서방의 속주들에서 얻을 수 있는 제일 훌륭한 인재들을 등용하였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처음의 2세기간의 로마제국은 그 방대함과 벅참에서 오는 폐단을 일부 모면하였다. 제국은 중앙집권과 지방분산, 통일과 확산의 조화된 균형을 취하였다. 그것은 분명히 「로마」적인 동시에 세계적이고 이질적인 제국이었다. 그 속에는 갖가지의 정부형태가 움직이고, 가지각색의 종교와 문화가 성행하였다. 그것은 언제나 그 모든 신민들에게 만족을 준 것은 아니었다. 이집트인·유태인 및 다음 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기독교도가 반항하였다. 그러나 이런 반항은 예외이며 상례는 아니었다. 제국을 하나로 뭉친 요인은 제국관료, 황제숭배의 공통된 관행, 공통된 화폐, 공통된 언어——서방 속주들에서는 라틴어, 동방 속주들에서는 희랍어 ——및 로마 법과 「팍스 로마나의」혜택에 대한 공통된 관심 등이었다. 212년에 이 목록에 하나 더 보태진 것은, 최하계급을 제외하고 모든 속주민에게 카라칼라황제가 부여한 공통된 로마시민권이었다. 브리덴에서 이집트, 마우레타니아에서 판노니아에 이르기까지 「Civis Romanus sum」(나는 로마 시민이다)라고 하는 간단한 한 마디보다 더 자랑스러운 말은 없었다.
第5節 로마 文明
「나는 로마 시민이다」一이 말은 로마인의 「스타일]을 표식하는 실리적인 정치적 천품天稟의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로마인은 미술이나 연극 또는 철학의 분야에서 새로운 것을 기여한 바가 많지는 않다. 이런 분야에서 그들은 주로 희랍인의 업적을 배우고 본따고 보존하였다. 그러나 군사조직·정부·법률 및 토목공사에 있어서는 고대의 다른 민족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근대세계는 실용적인 기술에 있어서 로마의 전문가들에 힘입은 바가 큰 것이다. 그 힘입은 바를 고찰함에 있어 로마법으로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법 률
로마법은 신축성 있고 새로운 사정에 늘 적응한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서기전 5세기의 십이표법에 처음 성문화된 것은 확대하는 제국이 요구하는 바를 채우지 못했다. 십이표법 대신에 나타난 것은 역시 곧 폐물이 될 다른 정식법전이 아니라, 그 출처가 가지각색이고 더 복잡하게 쌓이고 쌓인 법규들이었다. 공화제 말기와 팍스 로마나시대에 이루어진 이 꾸준한 성장의 결과, 원로원과 민회의 결의, 프레토르와 그밖의 법관들의 결정, 스토아철학 및 법률전문가들의 의견이 기여하는 하나의 유동적인 법률을 가져왔다. 이들이 기여한 바 전부를 훌륭하게 정식으로 법전화 하는 일은 제국의 쇠퇴 후에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6세기의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법전이었다(제6장 참조).
법률전문가들은, 법률의 지식과 이해력이 뒤떨어지기가 일쑤였던 재판관들의 문의를 항상 받았다. 공화제에서는 이들 법률가가 민간인이었으나 제정하에서는 국가가 그들을 법률고문이라는 관리로 임명하였다. 3세기초의 위대한 법률고문인 울피아누스는 그의 직무 이상의 훌륭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렸다.
법률은 선과 공정의 術이다. 이 術에 관하여 우리는 사제라고 불리울 만하다.
우리는 정의를 받들고 선과 공정의 지식을 치켜들어 공정을 편협과 구분하고,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을 분간하고, 벌을 무서워해서 뿐만 아니라 보상에 자극되어
사람들이 착하게 되도록 하려 하고, 내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면 가짜가 아닌
진실한 철학을 감화시킨다.
법률고문들은 법률이 항상 특수한 경우의 특수한 요구에 응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선과 공정」에 유의함으로써 형평법, 다시 말하면 법률의 자의字義보다는 차라리 그 정신을 따라 사태를 판정하는 것을 장려하였다. 법률고문들의 관인하고 인도적인 권고는 스토아철학(제2장 참조)으로 강화되었다. 스토아학파는, 특정한 나라들이 만들어낸 법들 위에 더 높은 법 一이른바「자연법」—이 있는데 이는 신의를 받든 것으로, 인간인 바에는 모든 나라의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로마의 법률상의 관행은 단점도 가지고 있었다. 법관들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변변치 않은 훈련을 받았고, 횡폭한 황제들이 때로 자연법의 이상을 비웃고 잔인하고 변덕스러운 처벌을 하였고, 또 중세유럽에서 보는바와 같이 로마법이 개인 위에 국가의 권위를 치켜올리는데에 쓰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통틀어보면, 로마법의 좋은점은 그 결점을 덮고도 훨씬 남음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국가의 권위를 강조하지마는 또한 시민의 권리도 강조한다. (다른 모든 고대문명이 그렇듯이), 노예제도를 인정하지마는 또한 무자비한 상전의 지나친 착취에 대한 법률적 구제책을 노예들에게 마련해주고 있다. 제국의 예속민족들은 로마의 법률을 채택탐하도록 강요되지 않고 자기네의 법률적 전통을 지킬 수 있었다. 로마의 시민과 해외속주의 주민 사이의 사건에 관해서는 법관이 로마법의 적용을 강요하지 않았다. 로마법 이 마침내 다른 법률체계들을 물리치고 전체국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되었을 때, 그것은 주로 그 자체의 진가 때문에 승리하였던 것이다.
로마법은 후세의 여러 문명에 심각하고 영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마는 중세 가톨릭교회 교회법 대부분의 유럽국가의 법체계를 형성하였다. 그 영향이 특히 많은 데는 이단리아·프랑스·스페인 및 포르투갈 등의 라틴국가들과 라틴 아메리카 제국이었다. 북아메리카에서는 전에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던 루이지아나주와 퀘벡지방에 로마의 민법이 남아 있다. 영어사용국들의 법률이 로마법보다 주로 중세영국의 보통법에서 나왔음은 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이들도 로마가 물려준 형평법과 자연법의 불후의 이상을 분여받고 있는 것이다.
과학과 기술
로마인의 실용적경향은 특히 과학에서 뚜렷하였다. 그들은 새로운 과학적 발견은 그러하지 않았지마는, 타고난 탐구심과 아울러 과학적 발견을 유용하게 응용하려는 열의를 보였다. 지구가 평탄하다고 일반이 인정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둥글다고 주장한 로마인도 더러 있었다. 이 이론이 로마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서기 전 3세기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에라토스테네스에 의해 제출된 것이라는 점이 로마 과학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로마 과학자들이 이 가설을 입증하는 자연적 사실을 관찰했다는 점도 또한 그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다. 대플리니우스는 제정초의 1세기에, 배가 해안에 가까와지면 먼저 돛대 끝이, 다음에 돛이, 마지막으로 선체가 보인다는 것에 주목하였다. 플리니우스는 논하기를, 이는 지구가 둥근 표면을 가지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라는 것이었다. 플리니우스는 그 탐구심 때문에 죽었다. 그는 79년의 베수비우스화산의 대분화를 관찰하리고 불붙는 용암에 너무 가까이 갔던 것이다.
로마는 외과의술과 공중위생에 있어 많은 진보를 하였다. 외과의들은 정교한 핀셋 및 특수한 수술을 하는데 쓰는 그 밖의 기구들을 고안하였다. 그들은 갑상선종·편도선 및 결석을 적출하여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제왕절개술(Caesarean operation, 시이저가 낳았을 때 처음으로 했다고 전한다)로 그들은 정상적으로 낳을 수 없는 아이를 분만시키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외과의들이 정규적으로 로마의 군단에 배속되있고, 병원이 처음으로 로마의 상병군인의 치료시설로서 나타났다. 그 뒤 도시들이 민간인을 위한 병원을 세웠으니, 그런 공공시설로서는 유럽사상 초유의 것이었다.
로마인은 높은 위생수준, 19세기까지 유럽에서 알려진 참으로 최고의 수준을 유지하였다. 그들은 공중변소(때로는 대리석으로 된)를 설치하고 하수도와 배수구의 대규모의 시설을 하였다. 정부는 막대한 수고와 비용을 아끼지 않고 도시에 깨끗한 물을 풍부하게 공급하였다. 로마에는 샘물을 언덕에서 수도로 보내는 수도가 10여개나 있었다. 이런 시설은 로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속주의 저택에서도 훌륭한 수도관들이 발견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남아 있는 제일 인상깊은 수도는 프랑스의 「풍 듀 가르」로서, 가르강을 건너 니므시로 물을 대던, 길이 900피이트, 높이 160피이트의 아취형의 3층교량이다. 많은 속주 도시들은 굉장한 욕장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목욕하기에 열중한 로마인은 실내욕장의 더운 물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생과 의학에 있어서의 로마의 진보는 한결같지 않았다. 많은 병에 대해서 로마인은 고대 세계의 다른 민족들처럼 엉터리 의사의 쓸데없는 처방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카토 (156면 참조)는 탈구의 치료법을 둘 들고 있는데, 하나는 무의미한 문구를 외는 것이고, 또 하나는 캐비지를 쓰는 것이었다. 캐비지는 치질· 식체· 주체· 궤양 및 사마귀에 대한 카토의 만능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어리석은 짓이 성행한 반면에는 갈레노스 (131~201)의 위대한 업적이 있었다. 그는 소아시아 출신의 희랍 의사로서 역대의 황제를 모시고 방대한 의학백과사전을 편찬하였다. 이런 학술적 편찬물은 제국의 희랍어를 쓰는 속주들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일례만 들기로 하면, 갈레노스와 동시대인 알렉산드리아의 프롤레마이오스는 고대의 지리적· 천문학적 지식의 훌륭한 요람을 썼다. 물론 갈레노스와 프톨레마이오스는 다 같이 오류을 범하기도 하였으나 명망이 아주 대단하였기 때문에, 바로 근대초까지 사실상 틀림없는 권위로 간주 되었던 것이다.
로마인은 토목공사에서 이룩한 업적으로 훨씬 더 큰 명성을 누릴 만하다. 그들은 위생시설에 있어서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모래· 석회· 규토· 돌 및 물로 일종의 콘크리이트를 만드는 방식을 안출하였다. 그들은 콘크리이트와 큰 돌을 섞어 써서 도로와 다리를 건설하였다. 이들은 아주 잘 설계되고 구축되어 있어서 더러는 오늘날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 사실 로마의 도로는 18세기말엽에 쇄석과 그밖의 포장재료가 발달하기까지 이에 필적하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로마의 도로 중 제일 좋은 것은 돌로 포장된 전천후 도로로서, 넓이가 10내지 25피이트이며 수 피이트 깊이의 토대공사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제국의 방방곡곡에 이르고, 무엇보다도 군대와 보급의 수송을 빠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육로의 여행이 고대의 기준으로 보아서는 놀랍게 빨라지고 안전하고 용이하게 되었으니, 일부는 간단한 도표식의 도로지도를 마련하는 로마의 관습 때문이기도 하였다.
미 술
이 위대한 기술자들의 건축이 희랍인의 건축과 다른 것은 물론이다. 희랍인은 신전건축에 그 최고의 기능을 기울였지마는, 로마인은 흔히 더 세속적인 건물에 그것을 돌렸다. 희랍인은 원주를 건조의 기본요소로 삼았지마는, 로마인은 화려한 코린트식 원주를 쓰기는 했으나 아아취를 쓰는 일이 많았다. 에트루리아에게 배운 둥근 아아취는 로마의 어떤 유적에서든지 —다리·욕장·수도·원형투기장 및 전승한 황제들의 정복을 기념하는 개선문 —볼 수 있다. 아아취에서 로마인은 원천정을 만들어냈는데, 이는 실상 굴의 지붕같이 연달은 아아취이며 꽤 넓은 지면을 덮을 수 있었다. 로마인은 또한 둥근 지방(도옴)을 사용하는데 능숙하였다. 아우구스투스의 조상이라고 하는 신들을 모시기 위하여 로마에 건립되어 오늘날도 시의 중심부에 서 있는 판테온 신전을 덮은 둥근 지붕은 직경이 142피이트요 지상에서 142피이트 높이에 솟아 있는 것이다.
로마인은 본국에서나 해외에서나 규모가 큰 건축을 세웠다. 로마의 대원형투기장, 곧 콜로세움은 참으로 거대한 건물이며, 둘레가 4분의 1마일이오 검사의 투기에는 적어도 45,000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다. 카라칼라 황제가 건조한 욕장은 수천의 욕객을 들여놓았다(그 유적은 아직도 대규모의 가극을 상연할 때 사용된다). 아드리아해 동안에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가 세운 궁전은 아주 큰 것이어서, 그 유적이 유고슬라비아의 스플릿시의 도심을 둘러싸고 있다. 레바논의 깊숙한 골짜기에 있는 바알베크에는 쥬피터(유피테르) 신전의 거대한 원주 여섯이 지금도 서 있는데, 높이가 65피이트나 된다. 그 석재는 이집트에서 쏘아낸 것을 나일강과 지중해를 거쳐 수송하고 나서 레바논산의 높이 1마일의 산길까지, 아마 활주 대滑走臺에 기름을 치고 끌어올렸을 것이다. 중동의 먼 구석지에서 지금도 불 수 있는 유적보다 더 인상적이고 감명깊은 로마의 건축도 드물다. 보통의 지방도시에 지나지 않은 북요르단의 예라쉬에는 두 개의 극장, 아름다운 타원형의 시장 및 주랑을 가진 메인 스트리트가 남아 있어서 그 포도는 로마의 마차들의 왕래로 깊이 패인 채 그대로 있는 것이다. 시리아 사막의 한복판, 이라크로부터의 송유관에 잇닿은 송유소 근처에 로마시대의 팔미라시의 긴 주랑과 파괴된 신전들이 있다. 또 이란 남서부에는 페르샤 황제의 포로가 된 로마 군인들이 3세기에 건조한 카룬강 다리의 아아취들이 아직도 서 있다. 글자 그대로 로마인은 참으로 제국의 건설자였다.
조각에서 로마인은 고작 헬레니즘 세계에서 물려받은 사실주의의 전통을 밀고 나아갔다. 선전의 가치를 인식한 황제들은 로마의 여러 도시에 개선문 및 자기 자신의 흉상이나 입상을 세웠다. 조각가들은 때로 뛰어나게 사실주의적인 작품들을 내었으니, 그 속세적이고 군인다운 예지의 모습을 완전히 전하고 있는 베스파시아누스황제의 흉상에서 보는 바와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황제들을 멋없게 이상화하고 미화하는 일이 더 많았으니, 아우구스투스를 황제라기보다 의상의 모델처럼 보이게 하는 입상에서 보는 바와 같았다. 대체로 로마의 미술가들은 보통 공사의 건물의 마루를 장식하는데 쓰인 채색된 돌로 공들여 꾸민 모자이크에 더 익숙한 듯하였다. 모자이크는 흔히 그 화제가 음탕하고 수법이 조잡하였다. 그러나 그 중의 걸작은 매우 활기있고 매력적이어서, 같은 표현수단으로 이룩될 비잔티움의 극적인 성과에의 알맞은 서막을 이루고 있다.
종교와 철학
이에 비해서 종교와 철학에 있어 로마가 기여한 바는 하나의 시초가 아니라 하나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로마인의 모방적인 성질이 아주 뚜렷하였다. 그들은 희랍과 동방의 지적·정신적 유산을 취하고 전하였으나 자신의 것이라곤 거의 보태지 않았다. 초기의 로마인은 농민이 사는 소도시국가에 으례 있는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부적들을 소중히 하고, 집안을 다스리는 신령들 (라레스와 페나테스)이며, 시골에 있는 샘·들 및 그밖의 경계표를 다스리는 신령들을 숭배하였던 것이다. 로마 세계가 날로 부강해지고 복잡해지며 희랍인과의 접촉이 많아짐에 따라 변화가 야기되었다. 지방의 전원적인 신령들은 희랍의 올림퍼스신들과 동일시된 남녀의 신으로 진화하였다. 희랍의 제우스가 로마의 쥬피터로, 희랍의 헤라가 로마의 쥬노로, 포세이돈이 네프으로, 헤파이스투스가 벌컨으로, 아프로디테가 뷔너스로, 아테나가 미네르바로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식됨으로써 이 다신교는 생기를 잃었다. 로마는 자발성과 위엄과 대중참여라는 점에서 올림픽경기나 아테네의 연극제전을 비길 만한 종교적제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로마인은 개인적으로 숭배예식에 참여하는 일이 거의 없었으며, 폰티펙스 막시무스(대사제)가 거느리는 관료 사제계급에 맡겨버리고 이들이 희랍-로마의 신들의 숭배에 필요한 제식을 하였던 것이다.
공화국 말기와 제정시에는 헬레니즘 철학과 동방의 밀의종교가 낡은 다신교의 쇠퇴로 일어난 공백을 일부 메꾸었다. 로마의 지식인들은 알렉산드리아의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교설(제2장 참조)을 배웠다. 에피쿠로스의 으뜸가는 로마의 제자는 루크레티우스(서기전 95경~55)이며,
그의 장편 철학시〈만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간소하고 균형잡힌 에피쿠로스의 이상을 훌륭하게 그리고 있다.
그대는 이해하지 못하는가, 자연이
스스로 필요로 하는 것은 이것 뿐, 고통이
육체에서 사라지고, 정신이
걱정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관능의 유락愉樂을 즐기는 것 뿐인 것을, 이제 우리는
육체의 본성에
필요불가결한 것이란 소수의 것뿐,
고통을 쫓은 따위의 것 뿐임을 깨닫는다. 때로 사치가
우리를 만족하게 시리
많은 기쁨을 베풀건만, 자연 스스로는
아무런 부족을 느끼지 않으니, 이는
야연夜宴에 빛을 마련하기 위하여
오른 손에 불붙은 횃불을 든
젊은이의 황금상들이란 하나도 넓은 방들 곁에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열병은 그대의 육체률 결코 떠나지 않으리라,
그대가 팔 다리를
수 놓은 제왕의 다홍빛 요 밑에
들여 놓든, 그대가
가난뱅이의 이불 위에 드러눕든 간에, 또 그러니
우리 육체에는 쌓은 보물도
高貴한 家門도 帝王의 權力도 쓸데 없으므로,
우리는 또한 이 따위들은
매한가지로 우리의 精神에도 利롭지 않은 줄 알아야 한다.
루크레티우스는 에피쿠로스哲學이 快樂主義的인 방종放縱에 지나지 않는다는 잘못된 見解를 물리치는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人生의 철저한 唯物論的 解釋을 내놓았고, 이는 어떤 宗教的解釋과도 絕緣한 것이었다. 人間의 肉體와 精神은 宇宙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原子들의 一時的 結合에 依한 것이다. 죽음이 오면 原子들이 헤어지고 흩어지니, 육체와 精神은 分解될 뿐이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그는 結論짓기를, 죽음은 두려워할 것이 못되며 꿈 없는 끝 없는 잠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없어지면,
우리를 하나의 存在로 이루고 있는 육체와 精神이
서로 떼어지면,
무슨 일이든지
이미 없어진 우리에게 일어나거나
우리 感情을 움직일 리 만무하다. 만일 뭍과 바다
그리고 바다와 하늘이 무너져 뒤섞이는 한이 있더라도.
에피쿠로스派의 루크레티우스는 節制와 체념諦念을 강조하여, 로마의 스토아派와 共通된 點이 많았다. 그러나 두 哲學의 知的 土臺는 완전히 달랐다. 에피쿠로스派에게는 人間이란 宇宙의 다른 動物같이 流轉하는 物質이었으나, 스토아派에게는 人間이란 그 영혼에 깃든 神的인 要素에 부끄럽지 않게 되게시리 힘써야 하는 별개의 存在였던 것이다. 스토아哲學은 共和制 末期와 「팍스 로마나」時代에 로마의 知識人들의 氣質에 더 잘 맞는 것이 判明되었다. 그 有名한 代表者 중에는 法律家 시세로, 奴隷이기도 하였던 에픽테투스, 富裕한 劇作家요 政治家인 세네카 및 征途에서 그의 〈省察錄, 冥想錄〉을 희랍語로 갈겨쓴 皇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이 있었다. 특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일 개인으로서 有德하고 公務에 지칠 줄 모르는 生活을 함으로써 스토아의 理想을 忠實히 실행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언제나 그 義務를 다해야 한다고 主張하여 말하기를,
새벽에 일어나기 싫은 때 이런 생각을 네 가슴 속에 銘記하라.
『나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하러 일어난다』고. 그 일을 위하여 내가 태어났고 그 일 때문에
내가 世上에 나온 일을 하러 가는 것을 그래도 불평한단 말인가, 또는 이불 속에서 기분좋게 자고
몸을 따뜻하게 한다는 이 일을 위하여 내가 만들어졌단 말인가. 『그러나 이것이 더 즐겁다』고?
그러면 너는 快樂을 위하여 만들어졌단 말인가. 작은 植物, 작은 새, 개미, 거미, 꿀벌들이
모두 제각기 자기의 일을 부지런히 하고 秩序整然한 宇宙를 이루는데 자기 몫을 하고 있는
理致를 생각하라.
그래도 너는 사람으로서의 일을 하기 싫단 말인가.......『그러나 좀 쉬는 것도 必要하다』고?
나는 그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自然은 休息도 制限하고 飲食도 制限하고 있는 것이다.
거듭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기 自身과 자기 同僚에 대한 스토아的 態度를 천명闡明하였다.
……우선, 네가 어떤 사람의 背信과 忘恩을 나무랄 때는 네 자신에게 생각을 돌리라.......
왜냐하면 네가 親切을 베풀었을 때 너는 그 以上의 무엇을 바랐겠는가. 네가 네 본성대로 어떤 일을
했으면 그만이 아닌가. 그 일에 대한 報償을 바란단 말인가. 마치 눈이 보는 값을 달라 하고
다리가 걷는 값을 달라 하는 듯이 말이다. 이들은 자기의 特定한 일을 하도록 만들어진 것이고,
各者의 생김새대로 그 일을 함으로써 완전히 자기 本分을 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역시 本來 남을 위하도록 만들어졌으니, 一般의 福利를 위하는 恩人으로서 行動했다면
그 일을 위하여 자기가 마련된 바를 하고 자기의 本分을 지킨 것 뿐이다.
스토아哲學도 에피쿠로스哲學도 많은 民衆이 信奉한 것은 아니었다.
둘다 그 人生觀이 너무 知的이오 너무 哲學的이었기 때문이다. 普通 사람이 바란 것은 希望의 宗教고, 체념諦念의 宗教가 아니었다. 一般人은 이승에서가 아니더라도 저승에서나 人間의 條件을 고쳐줄 수 있는 神과 스스로를 合一시킬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基督教가 마침내 이 要求에 應하는데 가장 成功하였다. 그러나 基督教가 帝政末期에 로마 世界에서 優勢해지기까지는 다른 密儀宗教들과 겨루어야 했다. 이시스崇拜와 미트라崇拜에 대한 勝利는 次章에서 考察하기로 한다.
文 學
많은 로마의 作家들은 로마의 美術家나 哲學者처럼 희랍의 본을 받았고, 커다란 疑問에 대한 窮極的인 解答을 探求하도록 희랍인을 몰아쳤던 宗教的 또는 思辨的 强壓을 느낀 作家는 드물었다. 따라서 라틴文學은 희랍人의 創造的 앙양昂揚이 없고 雄大함도 얼마간 덜하거니와, 로마로 하여금 그만큼 實際的으로 成功하게 하였던 現實的인 性質을 나눠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라틴文學은 우리의 古典的 遺產의 中核에 不動한 地位를 차지하고 있다. 一部는 라틴語가 로마 가톨릭敎會의 公用語가 되었기 때문에, 一部는 그 말 자체가 西洋人에겐 희랍語보다 쉽기 때문에, 또 一部는 로마의 作家들이 아주 常識的이고 때론 아주 명료明瞭하기 때문에, 오랫동안에 걸친 라틴文學의 影響을 통틀면 희랍文學의 影響을 능가凌駕할 것이다.
라틴文學의 開花는 共和國 末期에 시세로와 시이저의 散文과 루크레티우스의 詩와 함께 시작하였다. 뒤이어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및 오비디우스의 時代인 「黃金時代」가 왔고, 첫 皇帝의 治世와 대략 一致하므로 「아우구스투스 時代」라고도 한다. 뒤이은 「白銀時代」는 2世紀初期에 벌어졌으며, 그 質이 좀 떨어지기는 했으나 유베날리우스· 타키투스· 大플리니우스 및 그 조카인 小플리니우스와 같은 刮目할만한 作家들을 거느렸다.
오늘날 시이저와 시세로의 著作은 라틴語를 배우는데서는 어디서나 敎材 속에 들어가는 것이 普通이다. 시이저는 報道員의 簡明率直한 文體를 썼다. 〈갈리아 戰記〉의 첫머리는 누구나 다 잘 안다——『온 갈리아는 세 部分으로 나뉜다』. 이것은 序論的인 허풍을 떨지 않고 讀者를 바로 主題로 끌고가는 시이저의 典型的인 方式의 例이다. 시세로(西紀前 106~43)는 더 華麗한 文體를 썼고, 本章에서 위에 引用된 文章이 그 좋은 一例이다 (164面參照). 哲學과 政治를 일생 研究하고 또한 實際 政治家인 시세로는 무엇보다도 成功한 法律家였고, 베레스에 對한 攻擊에서 보는 바와같이 또한 勇氣있는 法律家였다. 그의 尨大한 書翰·演說 및 論文들은 어떤 사건의 辯論을 聯想시키는 辯論的인 性質을 가지기 쉬웠으나 언제나 잘 짜여 있고 流暢하며 明晳하였다. 效果的인 散文體를 찾은 後世의 作家들은 시세로를 존중하여 그 본을 받았던 것이다.
아우구스투스時代의 가장 위대한 作家인 베르길리우스(西紀前 70~19)는 皇帝의 桂冠詩人으로서 지냈다. 그 直接의 保護者였던 메케나스는 富裕하고 敎養있는 사람으로서 아우구스투스의 벗이오, 말하자면 皇帝의 文化部 長官이었다. 그의 이름은 지금도 때로 富裕한 文藝愛護者를 말하는데 쓰인다. 베르길리우스는 메케나스와 아우구스투스의 關心에 가까운 主題들에 관하여 썼다. 그는 直接 얻은 農業의 知識을 살려서 〈農業詩〉를 썼는데, 이것은 牧畜·養蜂 및 農家의 다른 일들을 詩的으로 그린 것이었다. 農業을 찬양함으로써 그는 農民을 다시 한번 로마社會의 土臺로 하려는 아우구스투스의 運動에 合力하였던 것이다. 베르길리우스는 아에네아스의 後孫들 밑에서 그 새 都市가 榮光스러운 未來를 가지리라는 豫言으로서 그의 傑作 〈아에네이드〉를 裝飾하였는데, 그 後孫들 중 가장 위대한 人物이 아우구스투스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베르길리우스는 宣傳家라고 하기엔 너무나 偉大하며, 아마 로마의 호메로스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는 진실로 農業의 훌륭함과 로마의 政治的 使命을 믿고 있었다. 〈아에네이드〉 全篇에 흐르는 지극히 愛國적인 論調는, 그 敍事詩의 有名한 첫 句節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
내가 읊는 것은 전쟁과 사람, 그는 처음으로 트로이의 海邊에서
運命에 쫓기어 라비니움의 물가로,
이탈리아로 온 사람——그는 바다와 육지에서
쥬노의 앙심깊은 노여움 때문에 하늘의 神들의 힘으로 많은 苦楚를 겪고
싸움에 많이 시달리다 마침내 한 都市를 세워
그의 神들을 라티움으로 모셨나니, 여기서 라틴族이 일어나고
알바의 王室 또 로마의 높은 城壁이 이루어졌느니라.
호라티우스(西紀前 65~8)는 아우구스투스時代의 둘째가는 위대한 詩人으로서 역시 메케나스의 愛護를 받았으며, 메케나스는 그에게 편안한 시골의 土地를 주었다. 호라티우스도 아우구스투스가 좋아하는 主題인 節制와 簡素한 農村生活을 썼으며, 아름답게 조탁彫琢된 라틴 詩句로 그것을 表現하였다. 아우구스투스時代의 文人 중의 위대한 俗物은 오비디우스(西紀前 43~西紀17) 인데, 그는 快樂에 아주 대단한 關心을 가졌지마는 倫理에는 그리 介意치 않았다. 아우구스투스의 愛護를 못 받은 오비디우스는 皇帝의 孫女의 醜聞에 좀 관련되었기 때문에 마침내 로마에서 追放되고 말았다. 19世紀의 어떤 嚴格한 批評家는 오비디우스의 詩集 《戀愛術》을 가리켜 『아마 天才의 손으로 된 作品으로서 일찌기, 적어도 古代에 씌어진 것 중 제일 不道德하고 風俗을 문란紊亂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 批評家는 誇張하였지만, 誘惑의 技巧에 대한 오비디우스의 明朗한 助言이나 道德에 대한 無關心은 그를 베르길리우스나 호라티우스보다 훨씬 더 「異教的」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不滿과 幻滅,—로마가 盛期를 지났다는 意識이 아우구스투스 뒤의 「白銀時代」 文學의 두드러진 主題들이었다. 西紀 100年頃에 活躍한 詩人 유베날리우스는 그 〈諷刺詩〉에서 그의 時代의 缺陷을 攻擊하였다. 그의 箴言들은 冷笑하는 語調를 풍긴다.
財產家들에겐 常識이 있기 드물다.
女子 때문에 일어나지 않는 말썽이란 人生에 드물다.
목을 매다는 편이 더 쉬운데 왜 너는 結婚해야 한단 말인가.
아리스토파네스처럼, 실상 대개의 위대한 諷刺家들이 그랬듯이, 유베날리우스도 道德論者였고 古來의 美風이 사라짐을 슬퍼하였던 것이다. 意味深長하게도 그의 著作 중의 제일 有名한 한 줄이 『健全한 肉體에 健全한 精神』 (Mens sana in corpore sano) 인데, 이는 古典的 理想을 말한 것이었다. 道德的이고 愛國的인 憤慨는 로마 最大의 歷史家 타키투스 (55頃~117頃)의 著作에 훨씬 더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그의 有名한 〈게르마니아〉는 初期의 게르만人의 歷史라기보다 當代의 로마에 대한 攻擊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時代의 퇴폐頹廢한 惡風을 뚜렷하게 나타나게 하기 위하여 게르만人의 戰士다운 素朴함을 激讚하였기 때문이다. 타키투스는 무슨 題目을 이야기하든지 대개 共和制下의 로마의 美德과 帝國의 惡德에 관하여 說教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로마의 敎育의 衰退에 대한 그의 論評은 典型的인 것이다.
훌륭하였던 옛 時節에는, 누구나 嫡出의 아들을 낳으면 고용된 乳母의 房에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무릎에서 키웠다.……경건敬虔하게 또 극히 겸손하게 그녀는 아이들의 진지眞摯한
課業 뿐만 아니라 그들의 娛樂이나 競技도 보살폈다. 그라쿠스 兄弟의 어머니 코르넬리아가
그들의 교육을 指導한 것은 이런 精神에서였다고 한다.
한편 오늘날은, 우리는 어린애를 낳으면 어떤 어리석은 희랍人 下女에게 맡기고 아무나 그녀를
도와주는 男子奴隷—重大한 일을 하나도 감당할 수 없고 그 집에서 제일 無價値한 存在인 경우가
아주 많다—를 붙여준다. 아이들의 精神이 感化되기 쉽고 鍛鍊되어 있지 않을 때에 맨처음 영향을
받는 것은 이 따위 사람들의 어리석은 雜談에서거니와, 아직 혀 짧은 말 밖에 못하는 그 어린 上典
앞에서 하는 자기 言行을 조금이라도 조심하는 사람이라곤 온 집안에 하나도 없는 것이다.......
우리의 이 首都 特有의 特徵的인 惡德들, 거의 어머니 뱃속에서 물려받았으리라 생각되는 惡德들이 있으니, 이는 演劇俳優에 대한 熱中과 검투 및 競馬에 대한 熱狂이다. 精神이 이따위 일에
熱中하게되면 더 훌륭한 일을 돌볼 餘地가 있을까. 집안에서 하는 이야기들이 이 따위가 아닌
話題에 미치는 사람을 몇이나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가 젊은이들의 敎室에 들어갈 때마다
그들이 딴 이야기를 하는 것을 엿듣는 일이 있을까. 또 敎師들도 똑같이 나쁘다.
그들 역시 다른 것보다 이런 話題를 學生들과 이야기하는 이야기거리로 삼는 수가 더 많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學生을 모으는 것은 嚴格한 敎育을 하거나 자기의 가르치는 能力을 보임으로써가 아니라, 아첨阿諂이라는 비열卑劣한 手段으로 耳目을 끌게 함으로써인 것이다.
분노하고 편파적偏頗的이고 說教調인 타키투스는 冷靜한 투키디데스의 歷史 敍述과 아주 색다르긴 하지마는, 그런대로 이에 못지 않게 배우는 바가 많은 일종의 歷史敍述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生活水準
타키투스라 할지라도 로마가 적어도 아름다운 都市라는데에는 同意했을 것이다. 여기 아우구스투스時代의 그 首都에 對한 忠實한 記述이 있다.
初期의 로마인은 다른 더 크고 더 急한 일에 골몰하였기 때문에 로마의 아름다움에는
그다지 留意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뒤의 로마人, 또 특히 요즘 사람들은…… 都市를
많은 아름다운 建物들로 가득히 하였다.......
「마르스의 廣場」에 그 大部分이 서 있다. 크기는 굉장하다. 한꺼번에 또 서로 엇갈림 없이,
戰車競走와 그밖의 온갖 騎馬訓練을 할 수 있을 뿐더러 球技와 바퀴 돌리기와 레슬링을
練習하는 많은 사람들을 收容할 수 있을만큼 넓은 것이다. 또 온갖 美術品들이 마르스의 廣場을
둘러싸고 있거니와, 1年中 풀이 덮여 있는 그 마당이며 또 江건너 江가 까지 뻗친 언덕의
꼭대기들이 舞台의 背景처럼 눈에 비치니, 이 모든 것이 참으로 거기서 돌아서기 어려운 光景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廣場 가까이, 많은 柱廊으로 에워싸인 또 하나의 廣場, 聖域들,
세 劇場, 圓形競技場 및 매우 값진 神殿들이 연달아 다가서 있으니, 이들이 말하자면 그 都市의
나머지를 단지 附屬物에 지나지 않는다고 뻐기는 듯한 느낌을 가진다. ……게다가 古市場으로
가면, 이에 연달아 다른 市場들, 會堂들 및 神殿들이 줄지었으니...... 外部의 다른 모든 것을
쉽사리 잊게 마련이다. 로마는 이렇다.
(스트라본, 〈地理書〉 第5卷 407, 409面)
그 200年後 皇帝들이 10餘개의 새로운 宮殿·神殿·浴場 및 競技場을 建設하고 났을 때 로마는 훨씬 더 壯觀이었다. 首都 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 및 帝國의 다른 大都市들도 壯麗한 外見을 갖추고 있었다.
로마의 華麗함이란 外見 뿐이었는가, 또는 그 表面 뒤도 그랬는가. 이 의문에 笞하려면 로마의 生活기준을 이루는 구성요소들의 약간 —富의 分配・ 住宅・ 飲食・ 教育・一般 男女의 權利와 特典—을 간단히 살펴봐야 한다. 帝政初의 2世紀 동안 로마는 번영하였다. 믿을 만한 統計가 모자라므로 一般化하기가 힘들지만, 人類史上 일찌기 못보던 가장 繁榮한 時期였음은 거의 틀림없다. 「팍스 로마나」의 안전, 유달리 좋은 交通, 사실상 制約이 없는 貿易, 愉入되는 食料品.사치품 및 그밖의 商品에 대한 로마와 이탈리아의 꾸준한 수요—이 모두가 활발한 商業活動을 촉진하였다. 그러나 그 活動에서 나온 利潤은 아주 不公平하게 分配되었다. 헬레니즘 世界와 마찬가지로 빈부의 현격한 차이를 드러냈던 것이다.
그러나 로마는 近代의 민주주의자의 눈에 古代의 가장 나쁜 社會的 결함의 약간을 시정하고 또 시정하려고 나선 榮譽를 지닌다. 로마人은 奴隷들을 상당히 너그럽게 대우하여, 많은 노예들이 마침내 自由를 얻거나 家庭교사 및 이와 비슷한 사무직을 맡게 하였다. 女子는 政治的權利가 없고 經濟的權利도 적었지만, 그외의 점에서는 거의 완전한 男女同等을 누렸다. 그들은 아테네에서 흔히 그랬듯이, 로마에서 부엌데기로 看做되지는 않았다. 그라쿠스兄弟의 어머니 코르넬리아 같은 존경받은 女家長은 로마史에 흔히 나오는 人物이다. 共和國末까지엔 아버지가 어머니에게서 갓난아기를 빼앗아 내버리는 권리가 없어졌다. 離婚이 許容되었고, 아마 20世紀까지의 歷史上의 어느 時期보다도 빈번 하였다. 그러나 많은 家庭이 화목한 듯하며, 로마作家들은 흔히 서로가 獻身的인 남편과 아내, 또는 어버이와 자식들을 찬양하였다.
全體的으로 로마人의 교육狀態는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타키투스의 非難(193面)이 全的으로 지나치다고도 할 수 없다. 知力과 財力을 가진 사람들은 여전히 아테네에서 연마하였다. 로마의 학교들은 프리톤이 세운 학원이나 헬레니즘時代의 알렉산드리아의 가장 좋은 학교들만 못하였다.
몸의 安樂에 이르러선 로마人이 그전 사람들보다 훨씬 앞섰다. 폼페이의 遺跡은 상층중산계급이 아주 안락하게, 심지어는 사치스럽게 살았음을 말해준다. 시골 別莊들, 특히 추운 北部地方의 別莊들은 흔히 유리窓門, 水道 및 陶管으로 뜨거운 空氣를 보내는 中央煖房裝置를 가지고 있었다. 富裕한 市民의 全部는 아니지만, 더러는 아주 비루해서 酒食에 미치광이가 되고는, 宴會에서 한 상의 飯食을 치우고나서 다음 상의 飲食도 실컷 먹을 수 있도록 일부러 토하기까지 하였다.帝國의 農民들은 그리 安樂하게 지내지 못했다. 都市 大衆은 6, 7層의 싸구려 建物의 아파트에 살았다. 로마의 住宅建物을 직접 보고 쓴 것을 보면,
住宅의 建築은…火災와 거듭되는 賣買 때문에 끊임없이 進行되고 있었거니와 (賣買도 끊임없었다), 購買者가 자꾸 집을 헐고 마음에 맞게 새 집을 세우고 있었으므로, 실상은 賣買라기보다
故意의 도괴倒壞였다..... 아우구스투스는 都市의 이와같은 損失을 念慮해서, 火災를 막기 위하여 義勇隊를 만들어 돕도록 하고.… 새 건물 높이를 줄여 公路의 建物이 70피이트의 높이를 넘는 것을 禁止하였다.
아우구스투스가 마련한 消防隊와 建築法에도 불구하고, 로마에는 넘어질 듯한 貧民窟들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우울할 정도로 자주 타버렸다.
住宅事情이 나쁜 로마의 貧民들은 흔히 定職이 없었다. 팍스 로마나가 絕頂에 이르렀을 때 首都의 住民의 절반이 빵의 無償配給을 받고 있었다고 推定되어 있다. 이 놀라운 推定은 다소 誤解될 念慮가 있다. 帝國의 다른 大部分의 都市에서는 事情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고, 首都에서 公共의 救恤을 받던 사람들 중에도 틀림없이 밀가루를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을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帝國住民의 꽤 많은 部分이 항상 救護를 받고 있었다는 것은 確實하다. 帝國이 그 全臣民에게 일터를 마련해주지는 않았지마는, 貧富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공짜 沐浴 및 戰車競走와 劍士 鬪技의 공짜구경을 시켜주었다. 그러나 競走에 돈을 걸어 가난뱅이가 호주머니를 털었다. 圓形 경기장의 劍士들도 많이 죽었다. 로마人의 스타일은 언제나 實用的이고 進步的인 것이 아니라 殘忍하고 無情할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