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6節 로마의 衰亡(쇠망)
失敗한 皇帝들
-西紀 80~284年-
"팍스 로마나"와 로마文明의 가장 豊饒한 時代는 180年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 이 위대한 스토아哲學者는 先帝들의 慣行을 버리고, 養子가 아니라 자기의 친아들
코모두스(180~193)를 그 後繼者로 擇하였는데, 코모두스는 戰車競走와 劍士鬪技 밖에는 재간이 없는 爲人 이었다. 그는 이런 競技에 熱中 함으로써 급속도로 帝位의 威信을 떨어뜨렸으며,
護身策을 게을리하다가 암살되고 말았다.
코모두스의 뒤를 이은 皇帝들의 政策은 事態를 더욱 惡化 시켰다. 養子制度로 돌아가기는커녕,
皇帝들은 점점 軍隊의 지지에 의지하게 되어 그들에 더욱더 많은 特典을 베풀었다. 이제 軍人은
특혜 계급이 되었고, 아주 有力 해져서 그 本分인 軍務를 제쳐놓고 政治에 개입하였다.
政治的 破綻(파탄)이 왔다. 軍事的 混亂의 時代(235~284)라는 근사한 이름으로 불리우는 時期에는 軍隊가 제멋대로 皇帝들을 廢位 하였고, 내란이 고질화하였다. 이 熱病的인 半世紀 동안에 20여의 皇帝들이 나타났으나, 제 命에 죽은 것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 나머지는 帝國의 邊境을 어지럽히는 民族과 싸우다 죽었거나, 그 財物 때문이 아니면 軍紀가 紊亂한 軍隊를 다시 支配하려 했기
때문에 軍人들에 依 하여 살해되었다. 라인-도나우國境 到處에서 게르만의 增大 하는 壓力으로
防備가 무너졌다. 게르만族은 갈리아 • 브리텐 • 스페인 및 그 밖의 移民한지 오랜 屬州들을 侵略
하였고, 로마市도 새로 城壁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東方에서는 페르샤의 古國이 活氣있는 사산王朝 밑에 復活하여, 259年에는 皇帝 발레리아누스와 그의 軍團의 一部를 捕虜로 함으로써
로마에 쓰라린 屈辱을 주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그 後繼者들의 改革
3世紀의 軍事的 混亂은, 만일 强力한 皇帝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帝國의 全面的인 崩壞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그 强力한 皇帝란 歷戰의 勇士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 (284~305)였으며,
그는 마침내 帝國을 동방식의 中央集權的 獨裁政治로 變形 시켜 버린 일련의 철저한 改革에
着手하였다. 그 改革은 293年에서 305年까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副帝요 305年에서 311年까지 皇帝였던 갈레리우스와, 그의 競爭者요 共帝였던 有名한 콘스탄티누스에 依하여 續行되었다.
이 全時期는 다소 엉크러지고 있어서 어느 것이 디오클레티아누스의 政策이며, 어느 것이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누스의 政策인지 언제나 分明한 것은 아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그 後繼者들은 아우구스투스와 다른 初期의 皇帝들이 보인 共和政體
尊重을 저버렸다. 그들은 中央集權과 地方分權, 帝國과 키비타스의 均衡을 깨뜨려서,
키비타스의 自治權을 一掃하고 屬州 知事에게 地方政治에 대한 絕對權을 주었다.
그러나 軍事的 混亂의 時代 屬州 知事들은 자주 그 軍隊 指揮權을 濫用(남용)하여 反亂의 規模를
크게 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知事들의 軍事權을 깎고 一般 屬州의 크기를
줄임으로써 그들의 忠誠을 保障하려고 하였다. 그는 屬州의 數를 倍 以上으로 늘여서 都合 100
가량이 되게 하였다. 皇帝와 知事 사이의 中間的인 監督官을 마련하기 위하여 그는 13의 管區를
創設하고, 각기 數個 屬州를 합친 것을 代官을 두어 다스리도록 하였다.
이 巧妙(교묘)한 行政的 階序制는 上部를 改編함으로써 完成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帝國의 行政과 國防을 보살피는 짐을 같이하는 共帝를 任命하였다. 뿐만 아니라 各 皇帝 즉 아우구스투스는, 자기를 돌봐주고 養子制度式 으로 자기의 後繼者로서 내밀기도 하는 副帝 즉 케자르를 任命하였다. 帝國은 바야흐로 아드리아海를 지나가는 線을 경계로 東半部와 西半部로 나눠졌다.
各 半部는 제각기 皇帝의 副帝와 首都를 가지고 있었다. 330年에 東部의 首都가 희랍都市 비잔티움의 자리에 定해지고, 이제 그 새로운 建設者 콘스탄티누스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이라 命名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西部의 首都는 로마에서 北部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옮겨졌다.
밀라노에는 로마를 橫行하던 政治的 陰諜 徒黨들이 비교적 없었거니와, 皇帝가 쳐들어오는
蠻族들을 牽制하려고 애쓰던 國境에 가까왔던 것이다.
이 새로운 措置들이 죄다 存續하지는 않았으나 앞으로 닥쳐올 事態를 豫示하였다.
로마는 밀라노와 콘스탄티노플에 代替되어 줄곧 人口가 줄어들었고, 그 아름다운 建物들이
荒廢해갔다. 그러나 그 都市의 歷史의 이 대목이 끝나면 로마는 基督教世界의 首都로서 새로운
章이 시작하게 된다. 콘스탄티누스가 그 治世의 末期에 單一한 皇帝로서 東西의 兩半部를
統一하였지마는 帝國의 東西 兩斷은 395년에 永久化하였다. 그 分界線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한 것을 좇았고, 地中海 世界의 희랍語를 쓰는 半쪽과 라틴語를 쓰는 半쪽 사이의 言語的 分界와
並行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디오클레티아누스는 東西 두 統治者•傳統 및 文化로 分斷된 유럽의
中世的 패턴을 決定짓는데 이바지하였던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改革은 그 위에 또 두 개의 傾向을 싹트게 하였다.
첫째로, 軍隊에 참다운 戰士를 얻기 위하여 그는 正規軍團에서 無賴漢과 殺人군들을 없애고
게르만人이나 다른 外人傭兵에 크게 依支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는 市民兵을 거느리고 싸우는
로마의 古習을 버리고 게르만人이 로마제국에 平和裡에 同化하도록 장려하였던 것이다.
둘째로,皇帝의 一身에 神聖한 威嚴을 더하기 위하여 그는 페르샤宮廷의 豪華스러운 禮式을
많이 빌려왔다. 억센 老兵이었는데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神의 行勢를 하여 손톱을 金빛으로
칠하고 머리에 金粉을 뿌려서 臣下들을 눈부시게 하였다. 그의 禮服의 金빛과 남빛은 그가 해와
하늘과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였다.
政府官吏에게도 으리으리한 이름이 붙었는데, 會計官은「聖財官」이, 樞密院은「聖議院」이 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헛되이 결딴난 國家의 經濟를 살리려고 애썼다.
帝國은 多年間 甚한 인플레이션을 겪어 物價는 줄곧 오르고 돈의 價値는 떨어지고 있었으니,
一部는 皇帝들이 貨幣의 貴金屬 含有量을 줄였기 때문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 貨幣質의 低落을 없애는데 얼마간 成功하였다.
그러고나서 그는 301年의 有名한 勅令으로 物價와 賃金을 固定시키려 하였다.
그 勅令은 엄청나게 仔細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다고기와 민물고기, 또 그 一等品과 二等品에
각각 다른 값을 매겼다. 여섯 가지의 長靴와 구두——勞動者用•軍人用•파트리키用•元老院 議員用 •에퀴테스用 및 婦人用——를 들어 각기 값을 定하였다. 손님과 貨物의 運賃을 列擧하였다.
글씨를 잘 쓰는 書記는 二流의 書記보다 삯을 더 받도록 하였다. 또 修辭學의 先生은 幾何學의
先生보다 더 받고, 幾何學者는 算數의 先生보다 더 받도록 하였다. 심지어는 浴場의 衣類保管所의 사환이 받는 料金까지 制限하였던 것이다. 그 勅令은 社會史의 더 놀라운 面들을 많이 보여준다.
그리고 違反者에게 死刑을 定하였지마는, 인플레이션을 막는다는 主目的은 이루지 못했다.
商人들과 顧客들이 그것에 항의하여 暴動을 일으켰고, 광범위한 暗市場이 發達하였던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政府가 必要로 하는 돈과 人力을 얻기 위하여 非常한 手段들을 썼다.
그는 각 키비타스에 돈과 物品으로 納入할 稅額을 割當하였다. 키비타스가 그 割當額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엔, 参事會員(地方議會議員)들이 私財로써 그 差額을 메꾸어야 하였다. 그 結果는
破局的이었다. 政府가 엄청난 割當을 하였기 때문에, 키비타스에서마다 参事會員들은 하지
않으려고 辭退하려 하였다. 皇帝는 그들을 억지로 留任시키고 参事會員職을 世襲化하였다.
지난날에는 榮譽로운 集團이었던 参事會員들이 어떤 權威者의 말을 빌자면, '行政府 奴隷'가
되었던 것이다.
같은 運命이 다른 社會的 集團에도 닥쳤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土地稅를 改定하여 돈보다는
現物로 물도록 하였다. 納稅하기 위해선 地主는 필요한 農産物을 耕作할 일군들을 必要로
하였으나, 3世紀의 혼란의 여파로 콜로누스(小作農)의 數爻가 갑자기 줄어 들었다.
그러므로 政府는 콜로누스들을 그 耕作하던 土地에 固定시키고 그 身分을 世襲化 하였던 것이다.
要컨대 콜로누스는 自由 農民임을 그치고 農奴가 되었다. 로마市內의 빵 配給用의 穀食을 마련
하기 위하여 아프리카에서 政府가 運營하던 라티푼디아도 勞動力不足에 부딪쳤다.
여기서도 남아 있는 콜로누스들은 그 직업에 영원히 「凍結」되었다. 職業을 世襲的으로 「凍結」
하는 政策은 다른 重要한 職業들에도 미쳤다. 이를테면, 製빵業者‧請負業者‧政府의 業務代行을 하는 商人 및 道路나 水道를 建造하고 修繕하는 勞動者들에게 미쳤던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그 後繼者들은 그럼으로써 카스트制度라고 할 만한 것을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本意 아닌, 불만을 품은 일군들을 그렇게 많이 간직한 로마의 經濟는 결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바라던 한 回復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4世紀의 記錄들은, 基督敎의 僧侶가 되거나 軍隊로
들어가거나 또는 간단히 山으로 달아남으로써 그 견딜 수 없는 짐에서 벗어나려고 한 参事會員과 콜로누스들의 記錄으로 가득차 있다. 人力 不足을 是正하려고 한 對策은 事態를 더욱 惡化시켰던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다른 政策에 대해서도 거의 같은 斷定이 내려질지 모른다.
그가 시작한 억센 專制政治는 軍事的 混亂을, 적어도 一時的으로는 없앴거니와, 帝國 國境에
들이닥친 페르샤人과 게르만人의 壓力을 잠시나마 막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政策은 帝國의
沒落을 지체시키기는 하였으나 완전히 막지는 못하였다. 强力한 藥으로 患者가 잠깐 回復하였지
마는 새로운 併發症이 생기고 그 病이 결국 致命的이 되었던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의 時代에서 476年에 마침내 서구에서 로마帝國이
사라지기까지, 두 개의 새로 일어난 制度가 점차 西地中海 世界를 支配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勢力들이란,
첫째로 基督敎會이고, 둘째로 西帝國 대신에 들어앉은 王國들을 세운 게르만族들이었다.
4•5 世紀의 쇠퇴한 로마의 歷史는 게르만族의 侵入(第5章參照)과 관련시켜 이야기하기로 한다.
여기서는 衰亡의 根本的인 原因들을 살피기로 한다.
왜 로마는 衰亡하였는가
로마 衰亡의 原因들은 그 歷史의 오랜 前日로 거슬러 오른다. 軍隊의 衰亡은 3世紀 軍團들의
政治的• 經濟的 • 壓力團體化와 함께 비롯하였다.
政治는 180年 養子制度의 廢棄(폐기)와 함께 衰亡이 시작하고, 軍事的 混亂과 디오클레티아누스의
專制政治 強行과 더불어 계속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보다 오래 전에 로마의 經濟와 社會는
심상치 않은 衰退의 不安한 징조를 보이고 있었다. 4世紀에 받아들인 部分的인 카스트 制度는,
로마社會를 좀먹고 있던 뿌리 깊은 要因들의 作用을 누르려는 企圖——絶望的이고 最後的인
企圖였던 것이다.
帝國의 社會的・經濟的 危機는 一部는 軍事的 混亂 및 人口減少에서 由來하였다.
한두 世代 전에는 흔히 主張되기를, 로마人은「人種的 自殺」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出生率을 維持하기에는 富者는 너무 放縱(방종)하고 行實이 나빴거니와 貧民은
너무 짓밟혀 있었던 것이라고 하였다. 오늘날은 이런 道學者的인 見解가 물러가고, 人口의 激甚한 減少는 軍事的 混亂의 內戰과, 두 차례에 걸친, 처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때와 다시 3世紀에
발생한 惡疾의 광범한 傳染에 起因할지 모른다는 그럴듯한 理論이 들어서 있는 것이다.
로마의 農業은 農業勞動力 不足으로 病身이 된데다가 技術的 進으로도 打擊을 받았다.
土地耕作의 效果的 技術이 때때로 發見되었으나 農民들은 그것을 쓰기를 꺼렸다.
흔히 西紀前 4世紀의 方法이 西紀 4世紀도 쓰이고 있었다.
또 農業生産의 低落은 肥沃한 穀倉地들을 메마르게 하는 오랜 旱魃(한발)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氣候의 變化는 거의 눈에 안 보일 程度로, 로마의 衰亡보다 훨씬 느린 速度로 일어났으리라는 證據가 있다. 끝으로 라티푼디아로 土地가 集中하는 줄기찬 動向과 이에 따른 獨立 小農民의
콜로누스의 身分내지 도시의 무직자로의 전락이 로마 번영의 밑둥을 찍었다. 대중의 불충분한
구매력은 인플레이션과 겹쳐서 경제를 가난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道德的• 精神的• 心理的 要因이라고 할 것들도 로마의 衰亡에 한몫 끼었다.
이 걷잡을 수 없는 要素들의 役割에 관해서는 歷史家 사이에 많은 異見을 자아내었다.
基督敎의 역할에 관한 論爭도 그 一例라 하겠다. 18世紀에 에드워드 기븐——基督敎보다
로마를 더 讚美한 이 合理主義者는 유명한 "로마帝國 衰亡史"를 쓰고, 거기서 로마 비국의 진짜
惡人役이 基督敾였다고 시사하였다. 그때부터 기본의 追從者들은 基督教가 全帝國에 퍼짐에
따라 로마人의 市民精神을 무너뜨렸다고 主張해 왔다. 基督教는 로마人의 關心을 來世로 돌리고,
納稅・軍務 밎 그들이 世俗 國家에 대하여 지고 있는 그밖의 義務들을 돌보지 않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反對로, 基督教 擁護者들은 帝國이 너무 基督敎化했기 때문이 아니고, 덜 教化
되었기 때문에 沒落한 것이라고 한다. 異敎는 圓形闘技場에서의 劍奴들의 虐殺과 로마의 道義의 墮落에서 그 極에 달한 것이라고 그들은 主張하는 것이다.
걷잡을 수 없는 要因들에 관한 異見의 또 하나의 例는, 20世紀 初期의 뛰어난 歷史家인
로스톱체프 교수가 낸 理論이다. 로스톱체프는 特權이 적은 大衆이 支配階級의 높은 生活水準과
世界的인 文化를 같이하려 했을 때 로마는 실제로 崩壞한 것이라고 主張하였다.
이「大衆의 反亂」은 軍事的 混亂期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治世에 苛烈한 階級的 對立을
자아내었다. 富裕層의 安樂한 生活과 文化가 社會에 널리 퍼지지 않아, 말하자면 蒸發할만큼
稀薄하게 퍼뜨리지 않는 限 퍼질 리 없었기 때문에, 결코 그 對立은 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스톱체프의 批評家들은 로마에 관한 그의 見解가 그의 母國 러시아——帝政이 1917年의
革命으로 共産主義者들의 손으로 무너졌다. ——에서 일어난 事件으로 크게 영향된 것이라고
指摘하고 있다.
로마의 大衆이 점점 더 그 支配者들에 不滿을 품은 것은 疑心할 나위 없다. 支配者들의 文化가
낡아빠지고 生氣를 잃은 것도 疑心할 나위 없다. 이를테면 文學과 美術에 있어 帝國 末期는
黃金時代나 白銀時代보다 뚜렷이 非生産的이었다.—— 이는 이집트 같은 다른 文明에서 우리가
이미 살핀(第1章 參照)바 있는 衰亡의 現象이다. 4.5 世紀의 作家들은 「팍스 로마나」의 훌륭한
옛 時節에 이미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前節에서 말한 몇 가지만 제외하고는, 로마의 衰亡의 精神的· 心理的 原因에 관하여
확실한 말은 하기 어렵다. 이렇게 확실치 않다는 데서 우리는 두 가지의 教訓을 끌어낼 수 있다.
첫째는, 歷史家들이 있는시대限 이와같이 크고 複雜한 問題에 관해선 항상 異見이 있으리라는
것이다. 世代마다 자기의 觀點으로 歷史를 써 나아갈 것이니, 마치 기본이 그 時代의 反기독교인
偏見으로 썼고, 로스톱체프가 帝政러시아의 崩壞로 미루어서 썼던 것과 같은 것이다.
둘째는, 이런 複雜한 事件을 說明하는데엔 唯一한 答이란 없다는 것이다. 어떤 說明을 하려면,
社會의 모든 面 —— 경제적 토대에서 상부의 政治와 文化에 이르기까지 해야한다.
또 모든 것이 歷史의 進路를 形成하는데 한몫 끼었다고 看做(간주)되어야 한다.
비록 우리는 그들이 제각기 맡은 바 정확한 役割을 언제나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第7節 結 語
로마에 관한 가장 刮目할 일은, 로마가 衰亡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오래, 거의 1000年間이나
存續하였다는 것이다. 政治的 制度로서의 로마는 西歐에서 약 1500年前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東歐에서는 帝國이 살아남아서 中世의 비잔티움帝國, 새 制度이기는 하나 항상 로마的
由來의 特徵을 간직하였던 帝國이 되었다(第6章 參照). 또 西歐에서도 로마 文明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로마의 言語는 로마法과 매한가지로 라틴諸國의 文明을 形成하는데 있어 무엇보다도
重要한 것이었다. 라틴語는 로만스(즉 로마化된)語——프랑스語・이탈리아語 · 스페인語・포르투갈語 및 루마니아語의 母體였던 것이다.
近代 英語는 게르만系의 앵글로-색슨語와 아울러 라틴語에서 由來한 바가 많다.
앞 節의 한 文章을 例로 삼아도 좋다.
The language of Rome, like the Roman law, has been of paramount importance in shaping
the civilization of the Latin countries. 이 文章의 짤막한 아주 흔히 쓰이는 말들은 대개 1000年前에
英國에서 쓰던 앵글로색슨語에서 나온 것들이다. 빤한 Rome과 Latin 외에 더 긴 낱말들은 모두
라틴語에서 나왔다. 다시 말하면, language는 Iingua (혀)에서, paramount 는 mons(山)에서,
무게를 가진다는 觀念을 나타내는 importance 는 importare (가져온다)에서, 또 countries 는
맞은 편에 있는 것들이라는 뜻으로 contra(對하여)에서 나왔던 것이다.
게다가 희랍과 東方의 文化를 傳達하였다. 로마가 地中海 世界에 政治的 秩序를 확립하지
않았더라면, 또 로마가 그와같이 世界主義的이지 못하고 오래된 文化들을 그렇게 잘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그 文化들은 사라져버렸을지 모른다. 多幸히 아주 많은 로마人은 外國文物에 대한
카토나타키투스의 偏見을 같이하지 않았다. 로마의 곧이 곧대로 模倣하는 慣習도 보람이 있었다.
이를테면 미론의 圓盤投手 의 로마의 模作은, 原作이 없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이 희랍彫刻家의
天才를 아는 唯一한 具體的인 證據物인 것이다.
뒤의 章에서 보게 되는 바와 같이, 中世의 基督敎會는 로마에 힘입은 바가 매우 컸으나 로마의
實利主義와 實用主義를 不信하였다. 中世의 終末과 함께 사람들의 關心은 來世에서 物質的
世界로 옮아갔다. 르네상스人은, 로마人의 實際的인 것에 대한 關心,安樂과 奢侈에 대한 關心으로 되돌아갔다. 이 로마人의 「스타일]이라는 遣產은 近代 유럽과 아메리카 문화의 하나의 변함없는
傾向인 것이다.
끝으로, 로마가 이룩한 「하나의 世界」는 거의 20世紀 동안이나 鄕愁와 憧憬을 자아내었다.
뒤의 世代들은 不安하고 分斷된 世界에 살면서 로마 帝國을 理想化하였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팍스 로마나」, 즉 平和와 進步와 繁榮 누린 200年間을 象徵하는 것이었다.
普遍的인 組織의 問題에 부딪쳤을 때마다 사람들은 로마의 예를 硏究하였다.
로마人의 實用的인 天才에 바쳐진 最高의 稱頌은, 아마 法律 ‧ 言語 및 組織이라는 로마
土臺가 西洋 世界의 가장 오래된 主要制度 즉 로마 카톨릭 教會를 아직도 밑받침하고 있다는
事實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