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4章 基督敎
第1節 예수와 바울
이미 初期 유태의 歷史와 관련해서 말해둔 바와 같이, 啓示宗教의 自然主義的, 歷史學的 研究方法에는 難點들이 있다. 아무리 애쓴다 할지라도 所與(주어진 바)의 聖典을 신이 直接 한 말들이라고 認定하지 않는 歷史家는 진정한 信者들과 똑 같이 그 聖典을 理解하고 解釋할 수 없게 마련이다.
우리는 本書에서 始終一貫하여 自然主義的 • 歷史學的 方法을 試圖할 작정이며, 이는 보통 「合理主義的」이라고 일컫는 反宗教的인 方法과 同一하지 않으리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讀者는 이 近代 西洋世界에서 모든 사람이 똑같이 받아들일 수 있는 기독교의 說明을 우리에게서 또는 실상 아무에게서도 바라서는 안된다. 여기서 기독교的 信仰의 全面에 걸쳐 周知된 異見들이 있음은 몸소 겪고 아는 빤한 事實이다. 실상인즉 우리 西洋世界에는 公公然하게 모든 形態의 기독교的 信仰을 否定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지금은 남들의 感情을 충분히 참작하고 偏派的인 歪曲이 說明 속에 기어들지 않기를 바랄 수 있을 따름이다. 이런 基準에 우리의 說明이 맞기를 바란다. 그러나 宗教的 感情의 바탕인 人間的 情感은 宗教를 다룰 때 완전히 억누를 수는 없다는 것을 거듭 말해두어야 하겠다.
歷史上의 예수
예수와 그의 傳道 및處刑과 復活에 관한 聖書의 記述의 正確性에 대해서는 18世紀에 近代的인 學問的 研究가 시작되면서부터 많은 論爭이 있었다. 19世紀에 「高等批判」을 일삼은 사람들 중의 極端派에는 독일의 브루노 바우어처럼, 예수가 살아 있었다는 것을 否定한 사람도 더러 있었다. 바우어가 볼 때 예수는 하나의 「神話」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系統의 批評家들은 대체로 예수의 생애에 관한 우리의 「史料」의 客觀性과 正確性을 따지는 데 그쳤다. 그런 史料로서는 「共觀 福音書」, 다시 말하면 共通한 觀點을 가졌기 때문에 共觀이라고 불리우는 新約聖書의 마가 •누가 및 마태의 福音들이 있다. 학자들은 대개 지금, 마가 복음이 세일 오랜 것으로 西紀 60年頃에 되었고, 그 저자들이 다 같이 마가福音 및 지금은 없어진 다른 史料들을 알고 利用한 痕跡이 있는 마태와 누가의 두 福音이 그 보다 20年 乃至30年 뒤의 것이라는 데에, 意見이 一致하고 있다. 이 없어진 史料의 하나는 學者들이 「Q」라고 하는 것으로, 예수 자신의 이야기들, 그의 비유와 說敎를 모은 것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共福 福音書에 있는 예수의 生涯와 傳道에 관한 이야기가 虛偽이거나 傳說的인 것은 결코 아니다. 19世紀에 聖書의 高等批判을 처음 한 世代나 그 무렵의 世代는 —— 대개 歷史研究의 새로운 方法을 자랑삼은 독일學者들이었지마는 —— 近代의 偉人의 生涯를 文書上 立證할 수 있다는 意味에서는 예수의 生涯를 文書上 立證할 수 없으므로 福音의 記述이 대개 虛構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지나친 假定을 하였다. 예수의 史實性을 否定한 極端論者는 기독교的 信仰 밖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追從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실상 이젠 그 反對 편으로 기울어져서, 대개의 學者들은 우리의 史料가 기독교를 믿기 시작한 첫 世代의 눈에 비친대로의 예수의 生涯의 충실한 回想을 전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
예수는 로마人의 새로운 世界國家의 衛星王國이었던 팔레스티나에 태어났다. 文明世界의 다른 사람들이 많이 그랬듯이, 팔레스티나의 사람들도 確固한 宗教的 信仰을 模索해왔다. 이 戰爭과 交易의 世界에서 사람들이 뒤섞임에 따라 神들과 信仰도 걷잡을 수 없게 뒤섞였다. 여호와의 律法을 가진(第1章 參照) 유태人도 이 宗教的 信仰 및 感情의 도가니를 아주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 上流階級의 많은 人士들이 희랍哲學의 影響을 받았거니와, 西紀前 37年에서 4年까지 유태의 王이었던 헤롯大王의 王室은 아주 로마化되고 희랍化되어 있었다.
대강 西紀前 200年에서 70年까지의 年代로 보이는, 斷片的이나마 잘 保存된 文書가 1947年 팔레스티나의 死海 가까이 있는 洞窟에서 發見되자. 苦心끝에 解讀되어 1955年까지 出版되어 널리 읽히고 있다. 이 (死海文書) 에서 우리는 유태 教 信仰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거니와, 특히 에세네 派라는 유태 教의 宗派 또는 教團에 관하여 알게 된 바가 많다. 이 사람들은 初期의 基督教徒처럼 俗世를 떠나 禁欲的인 共同生活을 하였다. 그 몇 世紀 前에 舊約의 豫言者들은, 여호와가 그의 選民에게 작정한 거룩한 運命을 이룩할 터인, 神이 보내는 指導者인 救世主의 概念을 明確히 定立하였다.
西紀前 1世紀의 유태教徒는 바리새와 사두개의 두 派로 分裂하고 있었다. 宗教的 觀點으로 볼 때, 司祭階級인 사두개人은 保守的이고 舊約의 律法 밖에 認定하지 않았다. 그보다 進步的인 바리새人은 律法을 補充하는 것으로써 口傳이나 宗教的 思辨의 權威를 認定하였다. 이런 根源에서 그들은 死者의 復活, 死後의 應報 및 救世主의 觀念들을 끌어내었다. 이 모든 信仰은 기독교에서 後日 더 發展하게 되었다.
예수는 西紀前 8年에서 4年 사이에 탄생하였다고 믿어지고 있다(註). 그는 邑과 마을에서 說教하고, 少數의 信徒들을 모았다. 그의 敎理는 有力層의 유태人의 敵意를 샀고, 아마 로마의 駐在官들의 敵意도 샀을지도 모른다. 權力을 가진 사람들의 눈에는 그가 社會的 革命을 唱道하는 것으로 보였올지도 모르고, 또 因襲的인 유태人이 볼 때 그는 분명히 危險한 反抗兒였다. 예수는 西紀 29年頃에 예루살렘에서 十字架에 못박혔다. 우리가 만일 유태人이 본대로 예수를 暴動煽動者, 나아가서는 反逆者로 생각한다면, 예수의 同國人인 유태人의 立場을 아마 제일 잘 理解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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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福音書는, 그가 헤롯大王의 治世에 탄생하였다고 하는데, 헤롯은 西紀前 4年에 죽었고
게다가 두 살까지의 어린애를 모두 죽이라고 命令하였다. (마태福音 第2章 16節)
예수의 가르침
예수가 무엇을 가르쳤는지, 그가 傳道한 짧은 동안의 音福이 정말 어떤 것이었는지 역사가는 確認할 길이 없다. 예수가 사실상 2000年前의 社會改革家요 革命家요 民主社會主義者였다고 하는 근대적 해석의 하나는 너무나도 偏頗的(편파적)인 것이다. 예수가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 苦痛받는 사람들, 약한 사람들에게 마음이 쏠린 것은 거의 疑心할 餘地가 없다. 治癒의 奇蹟, 山上의 垂訓(마태福音 第8章 5節및 第5章 3節)은 충분한 증거이다. 그러나 그를 단지 一種의 「自然療法者」나 理念없는 感情적인 부흥전도자로만 간주하는 것은 不當하다. 그는 禁欲보다는 現世의 좋은 것들의 향락, 猜忌(시기), 虚飾과 野卑가 없는 享樂을 설교하였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잘 알아듣도록, 또 靈魂의 救濟가 되도록 이야기하는 훌륭한 재간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感傷家가 아니라 굳센 氣質을 가졌다.
너는 어찌하여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내게 와서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가를 너희에게 보이리라.
그는 집 짓는 사람과 같으니, 파기를 깊이 하고 주초를 반석 위에 두매,
큰 물이 나서 물결이 부딪쳐도 능히 요동게 못함은 잘 지은 연고요,
오직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짓는 사람과 같으니,
물결이 부딪쳐서 집이 곧 무너져 헤됨이 크니라. (누가福音 第6章46~49節)
山上垂訓 및 그밖의 예수의 說教의 倫理는 温柔와 慈愛의 倫理였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지금도 역시 올바른 行爲라고 믿는 道德적 행위, 正直・謙遜・公正・節制 등을 力說하였다. 寬容(『너희가 판단을 받지 않으려거든 판단하지 말라』) 正義・慈悲・謙遜 등 高等宗教가 人間의 目標로 세운 모든 美德을 그는 가르쳤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흔히 그러하듯이 거기에 鋼鐵같은 觸感, 悲劇的인 感覺이 깃든다. 예수는 자기가 바란대로 남들이 본래 行動하는 줄 알던 人道主義적 낙천가가 아니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사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험하여 찾는 이가 적으느라.』 (마태福音第7章 13~14節)
그는 平和主義者도 아니었다. ——相馳하는 語句들이 더러 있지만 확실히 徹底한 無抵抗을 唱道하지는 않았다.
『악한 사람을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까지 돌려 향하라.』
『내가 세상을 화평케 하려고 온 줄 알지 말라, 화평케 하러 온 것이 아니라 병기를
일으키려고 왔노라.』 (마태福音 第5章39節, 第10章 34節)
끝으로 예수의 가르침에서 매우 重要한 神學적 교리들 특히 終末論이라는 것이 나왔다. 예수는 자주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말하고 스스로를 「人子」라 하였다. 그는 罪많은 사람들을 贖罪하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에 依해 보내어졌다. 이승에서의 回心 올바른 行爲를 통한 이 贖罪는 天堂에서의 永遠한 幸福을 가져오고, 줄곧 惡을 行한 者는 地獄에서의 永遠한 刑罰을 받게 마련이었다. 福音書는 臨迫한 終末에 관하여 훨씬 더 明確했다. 예수는 贖罪의 課業을 이룩하기 위하여 十字架 위에서 죽었고, 復活하였으며, 最後의 審判日에 이 世界를 終末지우기 위하여, 그의 說教를 들은 사람들이 더러 살아 있는 동안에 곧 돌아온다는 것이다.
最初의 基督教徒들
예수의 處刑 뒤 그 信徒의 조그만 모임이 예루살렘에서 있었다. 얼마 후에 그들 사이에 復活, 예수의 神性 및 約束된 메시아 곧 救世主로서의 예수에의 信仰이 생겼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이 最初의 基督教徒들은 유태의 信仰과 律法의 異端者였고, 유태의 대수롭지 않은 한 宗派 또는 分派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基督教의 信仰은 사람의 마음을 끄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그 때문에 유태人 社會의 테두리를 넘고 퍼지게 되었다. 이제 방금 말한 終末論은 아주 明確하였으니, 예수가 그 信徒에게 말하기를,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지 아니하여서 인자가 그 나라로 임하는 것을 볼 자가 있나니라』 (마태福音 第16章 28節)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예수 再臨의 教義로서 이 約束된 예수의 地上에서의 君臨이 1000年間 계속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千年 王國說」이라 한다. 그것은 먼 約束이 아니거니와, 天堂도 希望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地獄도 威脅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이 모두 基督教徒에게는 確實한 일들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가 개개의 信者와 예수 사이, 또 기독교 敎團의 個個人 사이에 가져온 感情적 유대의 절실함이 있었고 ——이를 다 歷史書의 冷情한 글로 옮기기가 아주 어렵다——그리고 유태人, 희랍人 ,로마人, 로마帝國의 갖가지 사람들을 죄다 基督教徒로 만든 福音이라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이 널리 퍼진 信仰의 社會적 心理적 결과를 다 알 수는 없다. 最初의 基督教徒 가운데에는 審判日이 곧 닥쳐온다는 觀念에 사로잡힌 나머지 官能과 常識의 世界와 관계된 一切를 버리고 全的으로 祈禱와 禁欲과 도취에 골몰한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분명히 이 千年王國의 信仰은 기독교로 改宗시키는데 이바지하였고, 使徒들과 그 後繼者들의 組織적인 재간과 아울러 改宗者들의 熱誠과 感激을 持續시키는데도 이바지하였다. 또한 분명히 再臨이 곧 있다는 이 信仰은 첫 世代나 조금 더 지난 뒤로 난처해지기 시작하였고, 救濟의 神學적 교리로 靈化되어야 했던 것이다.
개개의 基督教徒가 스스로 참된 教人인가 아닌가를 알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教會라는 組織團體에의 加入은 대개의 基督教徒에겐 항상 救濟에 없어선 안되는 附帶條件이었다. 기독교가 처음에 싸우며 헤쳐 나아가던 동안 이 條件을 갖추기가 비교적 쉬웠다. 왜냐하면, 教義와 紀律의 問題——福音이 괴롭고 흥분하기 쉬운 靈魂들을 끌음으로써 複雜해지는 이 問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初期의 基督教徒는 原始 基督教會 속에 유달리 强하게 뭉쳤기 때문이다.
聖바울
그렇게 굳게 뭉친 것은 一部는 初期의 教會組織者들의 지칠 줄 모른 活動의 結實이었는데, 그중 제일 뛰어난 이가 타르수스의 사울로서 예수를 본 일이 없는 改宗한 유태人이였다. 기독교에서 聖바울로 알려진 그는 예루살렘에서 最初의 基督教徒의 小集團을 迫害하는 것을 돕고 나서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몸소 심각하고 격정적인 回心을 겪었다. 바울과 그 助力者들은 新約聖書 使徒行傳과 바울의 書信들 및 그 밖의 書信들에 記錄을 남겼다. 이들에서 우리는 어떻게 그 새로운 信仰이 組織된 教會로 具現되었는가를 알 수 있고, 古代의 대개의 人物들보다 퍽 자세히 또 확실하게 人間 바울을 알게 된다.
바울은 「異邦人의 使徒」라고 불리우거니와, 그는 기독교가 世界적인 宗教가 되려면 내디뎌야 했던 한 걸음을 내디디는 앞장을 선 듯하다. 最初의 基督教徒들은 경건한 유태人들로서, 여호와와 그 律法의 信奉者가 되려고 하였다. 이 律法은 다른 것들과 아울러 複雜한 一連의 慣習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유태人도 同胞 사이에서 자라나면서 천천히 익숙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에 마음이 끌리는 희랍人과 그밖의 異邦人의 앞길을 막는 妨害物이었다. 예수 자신도 律法의 解釋에 있어 이른바 「自由主義的」이었지마는, 福音書를 보면 그는 강경한 말을 더러 하고 있으니, 특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알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오 완전케 하러 왔노라.
진실로 너희게 이르노니 천지가 패하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능히 폐하지 못하고
반드시 이루리라. (마태福音 第5章 17~18節)
유태人의 必須條件인 割禮는 기독교가 유태의 한 宗派로 남아 있는 限 異邦人의 改宗을 가로막는 妨害物의 단순한 一例이다. 防腐劑도 痲醉劑도 없던 그 當時에 成人의 割禮(할례)란 위험하고 무서운 手術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救濟策을 가졌으니, 희랍人이나 시리아人의 기독교 改宗者는 割禮를 받을 必要가 없다고 宣言하였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改宗자가 돼지고기를 삼가하거나 律法의 세세한 規定을 지킬 必要가 없다고도 宣布하였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을 여러번 또 여러가지로 거듭 말하였다.
우리는 유대 사람이나 이방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로운 사람이나
다 한 성신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느니라. (고린도 前書 第12章 13節)
또 아주 簡明하게 말하기를,
대개 문자는 죽이는 것이오 성신은 살리는 것이라. (고린도 後書 第3章 6節)
基督教徒가 救援받는 것은 유태의 律法의 文字에 依해서가 아니라 義로운 神을 믿는 유태의 信仰精神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확실히 初期의 歷史에는 결코 흔하지 않지마는 ——이크나톤이나 플라톤에서는 이런 結合을 볼 수 없다. ——바울은 世界와 肉體를 超越하는 神秘家와 일상생활에 시달린 普通 男女들의 능란한 精神적 조언자를 한 몸에 合쳐 가지고 있었다. 바울의 모든 글에는 그가 그 道德에 있어 禁欲적이었고, 기독교의 眞理가 習慣이나 推論의 問題가 아니라 超越적인 信仰의 問題임을 確信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句節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사람 중에서 말하는 지혜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오,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오묘한 이치로 말하노니
곧 옛적에 감추었던 지혜이니,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영광을 얻게 하시려고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상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고린도前書 第2章 6~9節)
그러나 바울은 이 世界의 實在나 美點을 全的으로 否定하는 東方적인 神秘家가 아니었거니와, 神秘적 열광으로 現世를 否定할 것을 가르친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실상 그는 現世와 來世, 現實과 理想 사이의 緊張, 그 뒤로 서양 세계를 확고하게 標識해온 特色있는 기독교적 긴장을 분명히 말하였다. 이 긴장을 ——자각이라 함이 더 적절하지만 ——그는 예수와 基督教徒의 신비로운 結合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져 예수의 사신 것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노라』 (고린도 後書 第4章 10節)——이는 葬禮式에 많이 쓰이는 壯嚴한 句節의 一部이다. 基督教徒는 단지 짐승만도 아니오, 사람만도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딸로서, 만일 참된 기독교도라면 永遠한 幸福을 장차 누리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이 地上에서는 그들이 육체의 한결같은 缺陷 속에 살며, 이를 전적으로 超越하지는 못한 채 스스로 可死的인 동시에 不死的인 存在임을 항상 自覺하는 것이다.
바울의 書信은 교회 기율의 問題를 많이 取扱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영혼의 救濟라는 짐을 맡고, 코린토스 · 로마 및 帝國의 많은 곳에 흩어져서 싸워나가는 기독교敎團에게 確固하지만 專斷的이 아닌 支配의 손을 미치고 있음을 본다. 그가 感情的 解放을 가져오는 새 敎說이 자아내기 일쑤인 방종을 누르려고 애쓰고 있는 것을 본다. 그가 새로 解脫한 사람들에게 기독교的 사랑을 性的 放縱으로 解釋하지 말고, 그 새로운 智慧를 豪言壯談의 方便으로 삼지 말고, 要컨대 放縱에 빠지지 말고, 敎會의 紀律을 받아들이고 조용하고 誠實하나 斷然코 기독교的인 生活을 하도록 力說하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이다.
初期의 基督敎 傳播
바울은 예수를 실제로 따라다닌 十二使徒 중의 한 사람은 아니지마는 이와 同等하게 간주되고 있다. 기독교의 傳承은 十二使徒(마티아가 유다 대신에 들어갔다)가 예수의 死後 예루살렘에 모였다가 世界의 四方으로 새로운 信仰을 傳道하러 흩어져 갔다고 한다. 베드로는 東方에서 일하고 나서 로마로 갔으며, 그곳의 첫 司教가 되고 거기서 殉教하였다고 믿어지고 있다. 바울도 로마로 가서 殉教하였다. 이렇듯 로마의 敎會는 가장 위대한 使徒 중의 두 사람을 그 共同의 建立者로 받들고 있어서, 그 威望의 아주 큰 根源이 되었다. 공관복음서의 문제를 다루는데에 쓰인 것과 같은 비판적 분석이 地中海世界 전역에 걸친 특히 로마의 사도시대의 문제를 다루는데에도 適用되었다. 新約聖書와 다른 史料에 있는 그 傳道의 이야기의 史實性에 관해서는 훨씬 더 현격한 意見差異가 나와 있다.
그 새로운 신앙은 예수가 죽은 뒤 두 世代 동안에 전체 로마帝國에 천천히 전파되었다. 이를 전파한 사람들의 더러는 聖地에 있던 맨 처음의 기독교 교단의 사람들이었다. 베드로와 바울의 로마와의 특별한 關係는 이제 로마 가톨릭 교회와 그밖의 많은 基督敎徒들의 신조로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아주 일찌기 예수의 死後 10年 乃至 20年내에 帝國의 首都요 실상 當時 西洋世界의 首都인 로마에 기독교敎團이 있었던 것은 分明하다. 이런 異邦人에의 傳道는 기독교가 미미한 宗派의 하나요 帝國의 安寧秩序에 중대한 위협이 되기 힘든 이 初期의 時代에도 여러 곳에서 反對를 일으켰다. 기독교의 傳承으로는, 베드로와 바울이 네로 治下의 로마에서 같은 날에 殉教하였다고 한다. 우리의 제일 오랜 라틴語 史料들은 基督敎徒가 蔑視(멸시)받은 宗派여서, 殺人祭式과 아울러 肉親姦通 및 幼兒殺害와 같은 무시무시한 온갖 犯罪의 嫌疑를 받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러기 때문에 殉敎者의 피는 教會의 씨앗이었으므로 기독교는 西紀 100年頃까지는 오랜 유태의 社會를 넘어 전체帝國에 씨가 뿌려졌고, 그 씨들이 자라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바울은 어린 植物들을 가꾸는 가장 능숙한 園藝家였다. 이들은 이미 굳세게 자라서 迫害의 모진 바람도 이를 죽일 수 없었던 것이다.
第2節 異敎世界의 基督敎
迫害의 理由
基督敎徒의 이른바 迫害란, 로마當局으로서는 단지 그 임무를 다하여 反逆者나 믿을 수 없는 狂人들이라고 생각되는 男女들에 대해 公安秩序를 지켰을 뿐이다. 基督敎徒는 유태 教徒처럼 그 실제의 信仰이나 慣行 때문이라기 보다는 皇帝의 神性을 容認하고 神으로서 그에게 祭物을 바치기를 拒否함으로써 로마의 法律을 어겼다. 이 初期時代에 基督敎徒가 교양 있는 희랍人과 로마人의 눈엔 난폭하고 행실 나쁜 광신자로 보였고, 大衆들에게는 위험한 脫線者로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帝國은 그 率下의 수백의 都市國家·部族 및 民族들의 道德이나 信仰의 細細한 것들에는 그리 介意하지 않았다. 數十의 男女의 神들, 헤아릴 수 없는 神靈과 精靈들이 로마 治下의 數百萬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거니와, 支配者는 보통 자신이 스토아의 學徒여서 大衆의 迷信에 대하여 蔑視的이나마 哲學的인 寬容을 가졌으므로 萬物의 本性의 一部로서 그것들을 다 기꺼이 寬容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宗教的 自由의 理想에 立脚하지 않았고 물론 教會와 國家의 分離라는 槪念에도 立脚하지 않은 이 宗敎的 自由에는 實際的인 限界가 있었다. 이 가지각색의 族屬들로 하여금 한결같은 忠誠으로 뭉치게 하기 위하여, 다시 말하면 이런 統一의 象徵으로서 國旗같은 것을 그들에게 주기 위하여 皇帝는 神으로서 崇拜되었다(第3章 參照). 그에 대한 간단한 犧牲祭式이 地方的인 宗教와 祭式에 보태졌다. 결국 神을 하나 더 믿게 되더라도 희랍-로마의 神들이나 이시스. 키벨레 또는 그밖의 재래의 多神教들을 믿던 사람들에게는 상관 없었다. 또 하나의 祭壇에 香을 한줌 더 피우는 것은 극히 간단한 일이었다. 재래의 地方的인 神들을 믿지 않은 사람들 ——이런 不信이 로마帝國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은 하라는대로 하는 것을 조금도 힘들어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新舊 어느 宗教든지 지나치게 重大하게 생각하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基督敎徒는 유태 人과 마찬가지로 꼿꼿한 一神敎徒였다. 옛날 유태人이 바알에게 祭物을 바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皇帝에게 祭物을 바칠 수 없었다. 커가는 基督敎會의 더 신중한 指導者들은 亂雜하다는 汚名을 씻으려고 애썼고, 조금도 爲政當局에 對抗하려 하지 않았다. 이런 指導者들 때문에 다음 句節이 有名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런즉 시이저의 것은 시이저에게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로 돌려 보낼지니라』(마태 福音 第22章 21節) 그러나 祭物은 하나님의 것이었다. 그래서 참된 基督敎徒는, 오늘날 列을 지어 지나가는 國旗에 帽子를 벗는 것과 같은, 즉 점잖은 시늉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第三者나 懷疑派에게 보이는 일을, 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아주 熱烈한 基督敎徒라면, 비록 基督敎徒아닌 사람들이 한다손 치더라도 시이저에게 祭物을 바치는 일 자체가 못된 짓이라고 느끼려니와 사람들 앞에서 그 느낀 바를 표명하게 마련인 것이다.
迫 害
그렇다 하더라도 帝國當局이 줄기차게 기독교를 撲滅하려고 썼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迫害는 散發的이었다. 3世紀 동안에 대여섯 번 큰 물결처럼 밀려왔고 地方에 따라 아주 달랐다. 맨 처음의 迫害요 오늘날 제일 잘 알려져 있는 迫害는, 아주 일찌기, 64年, 네로 皇帝 때에 일어났다. 이 迫害는 로마의 파멸적인 大화재의 罪를 덮어씌울 犧牲을 찾아내려는 네로의 計劃的인 수작이었다고 上流階級의 歷史家 타키투스는 記述하고 있다. 타락한 皇帝 스스로가 放火를 시켰다는 소문이 돌았다. 타키투스는 教養있는 異教徒들이 이 새 宗派를 어떻게 보았는가를 分明히 보여주면서 이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소문을 뭉개버리기 위하여, 때로는 群衆이 그리스도敎徒라고 부르고
그 非行 때문에 미움받고 있는 사람들을 罪人으로 代置시키고 극도로 殘忍하게 處罰하였다.
그 이름의 창시자인 그리스도는 티베리우스의 治世에 死刑을 받았고,...그 해로운 迷信은
잠깐 멎었으나, 다시 일어나더니 그 병폐의 본고장인 유태 뿐만 아니라, 世界의 온갖 끔찍하고
못된 것들이 모여들고 流行하는 首都에서도 퍼졌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엔 그 宗派의 뚜렷한
교도들이 붙잡히고, 다음에 그들의 자유에 依해 수많은 사람들이 放火보다는 人類에 대한 증오
때문에 斷罪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最後는 嘲弄꺼리이었다. 그들은 야수의 거죽을 입히어서
개들에게 물어뜯기거나, 十字架에 못박혀서 日沒이 되면 밤의 등불 代用으로 태워졌다.
(타키투스, <年代記》第15권 64章)
타키투스의 마음에는 基督敎徒가 罪人이라는데에 조금도 疑心이 나지않았으나, 帝國의 支配계급의 有能하고 良心的인 한 사람인 小플리니우스의 마음에는 가벼운 의심이 깃들었다. 플리니우스는 小아시아의 비티니아에서 皇帝 트라야누스(98~117年)에게, 基督敎徒에 골치를 앓고 있다고 써보냈다. 基督敎徒로 認定한다는 理由만으로 基督敎徒를 處罰할 것인가, 또는 基督敎徒들이 저지른다고 하는 무시무시한 犯罪들의 證據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基督敎徒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名單을 알려주는 匿名의 密告者를 믿을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改宗하고 트라야누스의 肖像을 崇拜하였다고 그는 썼다. 그러나 그는 이어 쓰기를,
그러나 그들이 確言하는 바에 依하면, 그들의 罪 또는 잘못이란 一定한 날에
밝기 전에 會同하는 버릇이어서, 그때 神에게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에게 頌歌
를 번갈아 노래 부르고, 엄숙한 宣誓로 무슨 못된 짓을 하기로 맹서한 것이 아니라,
詐欺나 盜賊질이나 간음을 하지 말고 거짓말을 말고 또 依託品을 내주라고 要求받거든
모른다고 하지 말기로 盟誓한 것 뿐이라는 것입니다. 會合하고 나서는 헤어졌다가
다시 모여서 飲食—— 그러나 보통의 아무렇지도 않은 飮食을 같이하는 버릇이랍니다.
.....나는 그럴수록 女司祭라고 일컫는 두 女子 奴隷에게서, 拷問의 힘을 빌어
眞實을 끌어내는 것이 더욱 必要하다고 판단했읍니다.
그러나 좋지 못한 지독한 迷信 밖에 찾아내지 못했읍니다.
트라야누스의 回答을 적어놔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로마의 法律과 秩序의 훌륭한 代表者의 回答이고, 네로가 준 印象을 씻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을 搜索하지 말라. 그들이 告發되어 罪가 드러났을 때 處罰하면 된다.
그러나 다만 當事者가 基督敎徒임을 否認하고 아니라는 증거를(다시 말하면
우리의 神들을 崇拜함으로써) 보인다면, 비록 전에 嫌疑를 받았을지라도
改悛(개전)하였다는 理由로 赦免되어야 한다. 匿名의 密告는 매우 위험한
전례를 가져오거니와, 결코 當代의 정신에 맞는 것이 아니므로 누구를 위한
증거로서도 認定되어선 안된다.
基督敎徒를 막는 對策의 강구를 命令한 사람들 자신은 熱烈한 宗教的 確信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敎養있고 寬大하고 懷疑的인 사람들이었다. 危機의 瞬間마다 그들은 基督敎徒와 같은 사람들을 除去하려 하였으나 진정한 迫害者의 광신을 가지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불을 가지고 불과 싸우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迫害를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고 보아 넘겨선 안된다. 迫害가 한창때는 아주 苛酷한 것이었고 많은 殉教者들을 냈다. 그러나 地下로 들어가고,殉教者들을 追憶하고, 줄기차게 傳道하고, 트라야누스의 편지에 뚜렷한 그런 善意를 利用함으로써 敎會는 더욱 굳세어졌고 教徒는 이 時期에 數가 더욱 많아졌다. 4世紀初의 大迫害를 마지막으로, 公的寬容이 311年에, 迫害하던 皇帝 갈레리우스에 依하여 臨終의 자리에서 署名된 勅令으로 이루어졌다. 콘스탄티누스帝 (306~337)는 313年頃에 그의 競爭者인 리키니우스와 合意하여 寬容政策을 確立하였다. 뿐만 아니라, 325年에는 니케아宗敎會議가 皇帝의 主催로 열렸다. 콘스탄티누스가 죽을 때, 教會는 로마帝國의 公的인 國家宗教가 되는 길로 나섰다.
帝國의 오래된 多神敎를 正式으로 復興— 아니 차라리 再建하려는 마지막의 公的인 大企圖가 한 번 있었다. 背教者 율리아누스 皇帝(361~363)는 로마의 支配階級 傳에 진심으로 愛着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갈릴레아人」들——그의「헬레네스」와 對照的으로 基督敎徒들을 이렇게 불렀다 ——이 희랍-로마文化의 힘들여 얻은 점잖은 것들을 뒤떨어진 東方의 迷信과 바꿔치려 하고 있다고 진정으로 믿었다. 그러나 율리아누스가 기독교와 代置시킨 것은, 희랍과 이집트와 페르샤의 宗教的 觀念 밎 관행의 혼합이라는 將來性없는 일이었다.
그가 帝位에 오른지 불과 2年만에 죽었을 때 기독교는 재빨리 율리아누스의 事業으로 크게 위협당하지는 않았던 地盤를 되찾고 넓혔다. 테오도시우스皇帝 (379~395)는 기독교를 사실상 公認敎會로 만들고 異敎의 敎派들을 追害하였다. 異敎는 1-2世紀의 상류계급과 知識人들 사이에서 지탱하였으나 이미 조직된 세력임을 그쳤다. 실상인즉 이 敎養있는 人士들은 기독교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체한 것 같다. 衰亡하는 帝國의 異敎的인 想像文學 속엔 기독교에 대한 言及이 거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냉대란 서투른 鬪爭方法이며, 異敎는 사실 闘志를 잃고 있었다.
基督敎 勝利의 問題
爛熟하고 잘 조직되고 豊饒하고 知的으로 세련된 社會에서 한때 미미하고 멸시받던 단순한 宗教的 광신자의 종파가 勝利한 事實은,劇的인 事實이오 歷史의 풀지 못한 문제의 하나이다. 이 時期에 관하여 著述하는 사람으로서 기독교가 왜 對立하는 많은 信仰들을 이겼는가? 하는 理由를 說明하려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로마帝國 沒落의 理由라는, 이와 並行하는 問題와 매한가지로, 아직도 一般的으로 一致된 見解란 것이 없다.
歷史家는 簡明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地中海 世界의 政治的 統一이 기독교 紀元 直前에 이루어졌고, 사람들의 이런 結束이 近東에서 훨씬 전에 그랬듯이, 사람들의 精神과 慣習 속에서 온갖 對立하는 信仰들을 마주치게 하였다는 點을 지적함으로써, 그 理由를 다소 밝힐는지 모른다. 이시스 • 미트라 • 아프로디테 • 오시리스• 쥬피터 및 그밖의 많은 男女의 神들이 죄다 注目을 끌려고 애썼다. 그 중의 더러는 신자를 얻으려고 서두는 떠돌아다니는 司祭들이 섬기고 있었다. 기독교는 다른 새로운 또는 새로 고쳐진 信仰들을 相對로 하였으니, 오랜 固定된 慣習만을 相對로 하여 싸운 것이 아니었다.
이런 記述에서 나아가 當時의 모든 狀況 ——로마世界의 經濟的・社會的 · 文化的 形勢가 統一的인 精神的 信仰, 사랑과 위안과 想像力의 깊이를 가져오는 宗教를 必要로 하고 있다고 主張하는 것은, 구미를 당기는 일이기는 하나 위험한 노릇이다. 다름이 아니라 이것이 오래된, 物質的으로는 비교적 進步하고 知的으로는 지친 文化였기 때문에, 活氣있고 마음을 끄는 感情的 信仰을 받아들이게 되어 있었다. 비교적 少數의 特權 上流계급은 아주 세련되어, 公公然한 合理主義나 懷疑主義者였고, 尨大한 無產者들——그 一部는 奴隷들——은 無識하였으나 그 비참한 人生이 마련해주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을 期待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있었다. 이런 世界는 悲慘한 世界로 볼 수 있으나 또한 渴望하는 世界로도 볼 수 있으니, 기독교 같은 宗教가 나타나기에는 안성마춤인 環境이었다. 이 대단한 一般化는 많은 有能한 사람들의 마음을 끈다. 그러나 입증할 수가 없다. 우리는「高等」宗教——기독교나 佛教 또는 回教——가 나타날 만한 條件을 죄다 알고 있진 않다.
더 국한된 問題 ——왜 기독교가 西紀 初의 4世紀 동안에 그 競爭者들을 이겼는가 ——도 簡明한 答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 答의 한 대목은 꽤 分明하다. 檢討해 보면 기독교와 競爭한 宗教들은 대개 鬪爭的인 信條돌이 未拾하고, 심지어는 허풍선이나 사깃군에 지나지 않은 司祭들이 傳播(전파)하는 일이 많았다는 것이 드러난다. 2世紀의 라틴 작가인 아폴레이우스는 "황금의 나귀"에서 「전능하고 萬物의 어머니인 시리아의 女神」을 끌고 다니며 시끄러운 曲馬團패 모양으로 거동하는 한 패의 司祭들을 그리고 있다. 아폴레이우스 자신은 新奇한 宗教들을 좋아한 듯하며, 자신이 이시스 崇拜에 加入한 일을 기다랗게 說明하고 그 이야기를 끝마치고 있는데, 그 祭式은 엉터리가 너무 많고 진실한 感情을 거의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 이시스 崇拜와 미트라 崇拜가 기독교 布敎의 唯一한 大敵들이었던 듯하다. 이시스 崇拜는 來世의 慰安, 慰撫하는 母性으로서의 이시스像. 이집트의 위대한 過去와의 神秘로운 因緣 및 數없이 많은 奇蹟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鬪爭的인 司祭階級이 없었거니와 推進力과 조직이 없었다. 페르샤에서 나온 미트라崇拜는 光明과 暗黑의 善神과 악마적인 敵이라는 特色있는 페르샤的 二元論과 결합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시스 崇拜에 없는 튼튼한 核心을 가지고 있었다. 그 主要한 祭式인 奉牛祭는 황소의 犧牲이 더 불은 것이었다. 信徒는 이 祭禮에서 황소의 피로 洗禮를 받았다. 미트라教는 또한 來世에서의 應報를 約束하였고, 미트라 자체는 신과 人間 사이의 仲介者로 간주되었다. 그 崇拜는 널리 흩어진 帝國軍團들이 좋아하는 宗教였으며, 다른 階級의 사람들 사이에 퍼지는 것을 막은 것은 軍隊와의 이런 結合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미트라敎에는 이시스崇拜처럼 積極的인 傳道精神을 가진 組織된 司祭團이 없었다.
이 對立하는 信仰들은 모두 基督教徒가 가진 道義心이나 훌륭한 團體組織을 가지지 않았다. 기독교가 成功한 것은 그 理念과 理想때문인가 또는 그 組織 때문인가라든지, 기독교의 成功을 푸는 참된 실마리를 주는 것은 神學인가 또는 教會史인가라고 따지는 것은, 根本的으로 歷史的 問題를
다루는 잘못된 方式이다. 기독교의 興盛을 理解하려면, 함께 作用하고 서로 決定하는 要因들로서 理念과 아울러 組織을, 精神的인 要因과 아울러 物質的인 要因을 考慮해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聖書인 新約과 舊約은 改宗시키는 일에 안성마춤이었다. 20世紀의 懷疑的인 美國人 멘켄은 다음과 같이 論評하였다.
두 사람의 傳道家가 코린토스나 에베소의 거리의 모퉁이에서 說敎하고 있다고 想像하자.
한 사람은 니코마코스倫理學(아리스토텔레스)이나 그노시스派의 발렌티누스의 說敎를 說明하고,
또 한 사람은 山上垂訓이나 詩篇 第23篇을 외운다고하자.
어느 편이 苦惱하고 渴求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모을 것인가를 짐작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H.L. Mencken,, 1934, 181面)
福音의 기쁜 消息은 一身의 永生, 天堂의 幸福, 地上에서의 벗들과의 사랑의 享有를 約束하였거니와, 마음을 달래는 儀式, 高尙한 道德律을 가지고 아마 무엇보다도 現代 心理學者들이 다소 차가운 말로 人格的「自己 確認」이라고 하는 것 ——어떤 아주 위대하고 高貴한 일, 어떤 鬪爭目的에
한몫 끼고, 평화와 親切과 善意를 위해 씩씩하게 싸운다는 自己確認을 가져왔던 것이다. 우리는 좋지 못한 時代錯誤를 犯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 아주 近代的 讚頌歌인「그리스도의 兵士들이여, 앞으로」에는 感情이 앙양된 初期基督敎徒의 氣魄이 아직도 뚜렷이 엿보인다.
실상 왜 기독교가 그搖籃地인 예루살렘으로부터 東쪽과 南쪽으로보다는 오히려 西쪽과 北쪽으로 퍼졌는가를 說明하는데 이바지하는 것은, 우리가 西洋史에서 많이 알고 있는 것과 매한가지의 이鬪志일 것이다. 기독교는 東方에서 ——적어도 地理的으로는— 일어났으나, 조로아스터教.
힌두教 및 그밖의 동방의 信仰들이 있는 土地로는 깊숙히 들어가지 못했고 아프리카에도 깊숙히 들어가지 못했다. 精神的 解釋보다도 物質的인 解釋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기서, 기독교가 이 어려운 時代에 本質的으로 로마帝國 안에서 퍼졌고 또 그 안에서 活動하기 위하여 帝國의 政治的 • 文化的 機構가 必要했던 것이라고 指摘한다. 또 사실 불과 몇 世紀 뒤엔 熱烈한 戰鬪的一神教인 回教가 일어나서 기독교의 東方의 前哨地들을 휩쓸었던 것이다(第6章 參照).
끝으로 기독교가 成功한 것은 異敎들의 世俗的 타협과 野卑와 맞섰기 때문 뿐만 아니라, 異敎의 것을 많이 지녔기 때문, 要컨대 결코 全的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點은 흔히 기독교의 混合性이라고 指摘된다. 다시 말하면, 古來의 여러 신앙의 敎說과 慣行을 빌어오고 빨아들이는 이 신종교의 能力인 것이다. 永生과 復活에 관한 기독교의 思想은 이집트 • 희랍 및 히브리의 思想과 연달았거니와, 희랍과 로마의 哲學, 특히 神秘的인 플라톤哲學은 기독교의 發展에 이바지한 바가 매우 컸던 것이다. 얼마큼 기독교가 古來의 慣習, 古來의 祭式과 慣行을 살렸으며,
얼마큼 異敎의 慣行을 길들였는가 하는 것은 훨씬 더 重要하다. 그러므로 에베소人의 군중이 處女 마리아의 母性을 擁護하는 神學者들의 勝利를 좋아하였을 때, 우리는 『에베소人의 다이아나는 偉大하도다』라는 反響을 들을는지 모른다. 또 復活祭는 先史時代의 數千間 봄의 到來를 祝祭하던 反映인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살아 있는 男女의 가슴을 헤치고 들어갔기 때문에 이겼다는 事實 앞에서는 이 많은 原因들이 모두 희미해지고 抽象的으로 보인다. 기독교는 우리와 거의 마찬가지로,自意識이 强하고 苦悶하는 世界의 數百萬의 어찌할 줄 모르던 사람들에게, 依持하고, 理解하고, 사랑하며 사
랑받는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初期의 무덤에 많이 남아 있는 基督教徒 碑銘의 하나가 있다.
執事의 아내요 품 있는 얼굴을 한 나 페트로니아는, 여기 내 뼈를 눕히고 그 安息處에 두노라.
내 남편과 아이들이여, 울음을 그쳐다오, 그리고 하나님 속에 사는 사람을 슬퍼함이 옳지 않은 줄 믿어다오.
기독교는 4世紀 初에 로마帝國에서 合法的 宗教의 地位를 획득했으나, 완전하고 명백한 勝利를 누린 것은 아니었다. 迫害와, 異教的 信仰들과의 투쟁이 있은 뒤, 기독교 자체 안에서 그 信仰의 形態의 本質을 둘러싼 오랜 중대한 鬪爭들이 벌어졌다. 이제 우리는 「古代」라는 歷史的 時代의 末期까지 기독교의 歷史를 더듬어 보련다. 分析의 明晰(명석) 위하여 우리는 기독교의 二大要素——하나는 理念과 精神, 또 하나는 政治的•社會的 組織——를 따로따로 다루기로 한다. 그러나 우리는 實生活에 있어 그 두 要素가 不可分이며 항상 서로 制約하고 서로 고치는 補充過程을 이루고 있음을 언제나 銘心하고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