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년 8월중 방중기록
* 방중계기 : 금년 4월방한하여 팔괘장의 기본내용부터(팔괘장 이론) 기본장법 팔괘전장,
팔모장,연환장, 팔괘쌍월,팔괘검등에 이르는 정식팔괘장무술을 강습하신,
손지군노사님의 생신을 기하여 방중, 예의를 표하며 보다 돈독한 유대를 꾀
한다는 취지아래 이루어 졌다.
* 기 간 : ‘2006년 8월 1일부터 3일까지
* 여 정 : ‘2006년 8월1일 오전 6시 기상 7시 - 공항행 택시( 26,000 원)이용 도착
약 5분경과 한회장님이 이어 도착 함께 수속을 마치고, 북경행 중국항공편에 탑승하였다.
오전 9시30분 출발 인천국제공항 - 북경도착 10시 30분경 미금배 노사가 영접을 나와주었다.
미금배노사 차량편으로 손지군노사부님댁으로 직행, 손지군노사님 내외,
둘째아들 손혜상선생등과 우리일행(한회장님,나)는 손노사님 자택 부근의
찬청에서 중찬으로 한국방문후 3개월여만에 중찬연회를 통해 그간의 밀린
대화를 나누면서 팔괘장 훈련에 대한 대화를 속개하였다.
중찬을 마치고, 북경 회유구(懷柔區)로 이동하였다.(손지군노사,미금배노사)
대동 회유구의 한 빈관에 여장을 풀고, 휴식한뒤 그 지역의 유지들과 손노사 님 제자들이
초청하는 만찬회에 참가하였다.
중국인들의 특유하고도 전통적인 손님접대방식에 의하여 음식과 주연회를 속개 하였다.
술잔의 오고감에따른 회포를 푸는 형태의 속내를 보여주고받는 형식으로 자리
는 매우 유쾌한 분위기로 달구어져갔으며, 자리에 참석한 회원들중 중국
민요적 대중가요제에서 1등을 했다는 사람으로부터의 노래도 감상할수 있었다.
그날은 술을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정신없이 골아떨어져버린날이 되었다.
(북경시 회유홍루반점- 구구가고야점)
술을 못하면 자리가 어색해질뻔 했다면서 내가 응대한 술솜씨가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인정이 되었는듯, 체면을 살렸다고 미금배노사가 설명했다.
‘2006년 8월 2일(수요일)
미금배노사는 우리를 대동하고 회유규부근에 있다는 모전곡(모전곡)만리장성
을 관광하였다.(일명 모텐위장청)
팔달령 만리장성과는 약간의 다른 모습을 하고있었지만, 상당히 좋았다고
생각된다.
특히, 모텐위(모전곡)장성을 가는 주변의 풍경도 좋았고, 팔달령장성만큼 북적 이지 않아
좋았던 것같다. 아울러, 케이블카를 이용한 등정과 하강하는동안 은 어린이가 된것같은 즐거
움을 맛볼수 있었다.
중국지역 정부의 관심과투자는 충분한 관광객들의 기분을 일신케해줌과
분위기 창출에 좋은 분위기인 것 같았다.
하산후 이어진 관광은 홍록사(홍루사)에 들러 예불을 하였고, 빈관에 돌아온 시간은 오후4시
경, 어제초청한 분들이 재초청한다고 하여 이에 응하였지만, 어제처럼 술을 마실순 없었다.
결국, 이틀의 여정에 따른 환영만찬과 만리장성 관광은 그렇게 끝이났다.
그래도 이들의 선배나 스승이 본인들의 무예와 교학에대한 예우가 범상치않 은 제자들에게
무엇인가 보여주고 우혜적인 조건의 환대를 하기위해 노력
한다는 모습을 보여준데서 우리는 무엇인가 배울수있었다고 생각한다.
가령 같은 종목이나 같이 애호하는 분야에대한 이해와 저변을 모색한다는
취지에서 모인 모임이라도 주변의 유지, 그 애호방면의 좋은 위치자의 동석
과, 그 지역의 치안담당이나, 고위당직자, 연에적인 방향의 기능자 혹은 안내
자등이 참석하여 분위기를 띄운다는 것이다.
그것은 참석한 사람도 흥이 나겠지만, 초대를 받은 사람은 여러 가지 방면에
서 감사하고, 그 자리를 잊지못하게 될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손지군사부님께서 친히 미금배여제자와 함께 우리일행을 대동한 상태에서
교외의 한 지역에 나들이를 하셔서 우리를 접대한다는 모임을 만드셨다는 자체에 의미를
부여한다.
‘2006년 8월 3일(목요일)
북경의 회유구에서 돌아오는날 아침 미금배노사가 다니는 학교에 들러 학교
분위기와 운동하는 학생들의 훈련상태를 살펴보았다.
학교는 회유구의 한 지역에 있었는데, 학교가 공사관계로 무술훈련은 그 근방
에 설치되어있는 체육관 용도가 아닌 철골 아이빔으로 뼈대를 구축하고 철판
스래트로 천정과 벽을 구축한 대형 창고였다.
아마도 7~800평이상은 족히 될만한 규모였다.
임대료도 월 인민폐 30,000 원정도(한화 약 3,600,000원)는 하지만, 학교의
교장선생이 잘 아는사람에게 청하여 임차하였으므로, 임대료지불은 안하상태에서 무상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훈련하고있는 학생들은 약 20여명- 8-9세부터 15,6 세 20세까지 다양하였 고, 폴랜드학생도
한사람 있었다.
훈련내용은 무술기본공 도약, 발차기, 등공번, 투로훈련(장권,형의권,번자권,
무기술등등 다양한 투로훈련으로 몸놀림의 다양, 난이도의 향상을 꾀하는
훈련으로 더욱 향상된 기량의 구사를 위해 몸의 운용능력을 단계적으로 제고
시키는 과정같아 보였다.
아울러, 우리는 한국서울에서의 검술투로(팔괘검) 학습의 복습형태로 투로 연련을
하게 되었다.
나는 연습이 미진했었기에 투로의 실연에있어 제대로 이어하기가 어려웠다.
금년중 재차 북경을 방문하게될때 그때 제대로 실연해 보이겠다고 다짐했다.
오전일정을 그렇게 마치고, 북경으로돌아오면서 중찬은 북경의 주재공무원과
식사를하게되었다. 분위기와 품위상에서 격조가 있는 그런 식사시간이었다.
중찬을 마치고, 다시 손지군사부님댁으로 돌아온 일행은 사부님댁에서 한시간
여 이런저런 이야기로 담소를 하다가 금년중 다시한번 방문할 것을 고하고
헤어지게 되었다.
손사부님께선, 집에 있는 무술운동용 무기들을 팔괘도와 판관필등 여러종류의 무술용구를
보여 주셨다.
팔괘검의 실제규격과 중량은 상당하였다.
명년에 있을 전통무술대회에 팔괘도나 팔괘검을 가지고 한번 출전해 볼 의욕을 불태워
보고자 마음먹어보았다.
중찬을 마치고 손사부님의 댁에 들러 근 두시간동안 담화를 끝으로--
한회장께선 병원의 일정 때문에 귀국길에 오르시고, 난 광동성 성도 광주행
비행기 티겠을 구하기위해 나서게 되었다.
손사부님의 아파트 밑에서 한회장님과 미금배 노사등과는 악수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 노트
인생은 그 경륜과 나이에 걸맞는 경제력을 필수로 지녀야한다.
사람을 만나고, 보낼때 융숭한 대접과 안배는 나머지 인생살이를 즐겁고 인간다운
대접을 받을수 있슴에 그 예비적 처세로 보면 될 것 같다.
부모가 되어선 그 자식의 인생살이에 보탬이 되는 자세를 견지해야함은 물론이다.
가야할 길을 가리키고, 인도하는 선배되는 인생의 자세를 보여주며, 필요한 만큼의
힘을 실어주어야 할것이다.
어디가나, 많고, 힘이 흘러넘치는 인간사회의 풍정을 보면서, 자신도 힘을 내야함을
보고 배운다.
새로운 분위기와 모습의 인간사회를 볼때 걱정과 낯설음에 일순 겁도난다.
그러나, 조시산림은일반(朝市山林隱一般)이란 말과도 같이 어디가나 마음먹기
달렸다. 는 이야기처럼 곧 익숙해질수 있을것이다.
금번 여름의 중국방문은 무척 찜통일것으로 예견했던 생각과는 각은 빗나갔고,
광동성은 북경과 많은 다름의 모습을 하고 있을것이며, 매우 낯설것이란 생각도
접해보니 생각과는 달랐다.
어떻게보면 분위기가 더욱 친숙한것같이 느껴지는 것은 왠 일일까 ?
아마도, 가깝게 위치한 이발소에서 이발도 할수 있었고, 기차표예매에 관한 문의도
한국처럼 할수 있었기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광동성 광주행은 미리예약과 안배받을수있는여지도 마련하지 않은채 무모하기까지한 여행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을만큼 사전에 세밀한 계획이 없었다.
북경에서 다음 여정의 방향과 행선지를 무심코시다시피하게 광동으로 정한 것은
사자무의 자료를 얻기위함이었다.
다른 지도자에게 배울 수 있는 여지는 우선, 내가 스스로 사자무에 대한 기본적
내용을 적극적으로 학습한 연후에 하겠다는 생각과 북경을 오게되면서 즉흥적으로
구상한 발상으로나 여길수 있겠다.
북경에서 물어본 사자무는 관심이 없었다. 북방형식이었기에 영화나, 무술의 이미지 를 한껏 함유
한 내용은 황비홍의 출연과 그 무대지가 된 광동의 연상이 떠나지 않았기때문이다.
광동의 광주행 열차표 구입은 건무 에게 전화로 예매주문을 하고 왕부정 부근의 북경호텔로비
에서 한시간여를 기다렸다.
기다리는중 호텔 직원이 다가와 나와 짐을 보면서, 왜 오래 서성이는가를 물어왔기에
사람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아마도 나의 라면박스가 수상해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한시간여 어느 처녀한사람과 좋은 몸집의 청년이 나타났다.
내게다가와 대번에 안선생님이신가를 물었다.
근 17년간의 끊이지 않는 인연으로 남아있는 마건무 - 그는 이제 여행사의 어였한
사장님이 되어있었다.
나는 그제나 이제나 마찬가지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오래 이 모습을 지킬수 있다는 목표설정과 그 목표의 설정이 잘못되지나
않았으면 하는 바램으로 자위하여본다.
내게 표를 건네주는 그들에게 값이 좀 싼 여관을 부탁하였다.
북경발 광주행 비행기표값은 1,450원정도 그러나 공항으로 이동할때는 택시를 이용해
야 했으며, 광주에서 시내까지도 택시이용- 택시비만, 약 300원정도 -
북경에서 광주까지 교통비는 대략 2,000원 정도가 소요된다고 계산해본다.
인민폐 150원(한화 약 18,000원)정도의 우리나라의 여인숙만한 방을 하나 안내받았다.
방은 50여개에 이르고 5층정도의 여관- 각층마다 직원이 한사람씩 배정되어있고,
무전기로 손님안배와 입실,퇴방 써비스등 내용들이 진행되는 그야말로 북경시내에
자리잡은 여관인만큼 북적대는 정도가 좀 대단하다고나 할까 ?
방은 그런대로 냉방장치가 잘되어 있었으나, 침구나 등등은 정말 싸구려 숙박업소
바로 그런 양태다.
세면이나, 화장실등은 3층에 공영설비를 이용해야 했다.
왁자지껄한 여관에 짐을 풀고, 문을 잠그고서 밖으로 나와 수퍼에서 간단한 잡화품
몇가지를 구입하고, 허름한 작은 식당에서 물만두반근과 연경맥주한병으로 허기를
채웠다.
여관에서 잠을 자겠다고 작심했으나, 잠이오질않았다.
추가로 56도짜리 얼커터우주를 컵라면을 안주삼아 반병을 마셨다.
그래도 잠은 이루지못했다.
새벽 5시 여관을 나서 택시를 잡았다.
공항까지 일반적으로 약 70원가량의 택시비가 나오지만, 난 100원을 주고 갔다.
공항도착 6시경-
많은 사람들의 왕래를 보면서, 카운터로 갔다.
Air china의 창구에서 표를 바꾸어야한다고 하여 다시 창구로가 표를 바꾸고
창구에서 짐을 부쳤다.
약 2시간정도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이유는 표는 오전 7시50분비행기로 되어있었
으나, 표를 바꾸면서는 8시 45분으로- 실제로 비행기가 뜬 시각은 9시가 넘어선
9시 30분이었다.
그러니, 북경에서 멀리떨어진 광주나, 홍콩,심천,등등의 이동때는 미리 철저한 준비
가 있어야한다.
8월 4일(금요일)
비행기 안에서는 국제선도 써빙하지 않는 간단한 식사일정이 있었다.
북경에서 광동성 성도 광주까지는 1,905 키로였다.
시속 1,000키로의 여객기로 약 2시간의 거리가 된다.
그러니 열차편을 이용하게되면 20 시간은 족히걸리는 거리이며, 만약 다른성,시를 거쳐가는
형태라면 꼬박 이틀은 소요된다고 보아야 할것이므로, 열차로 갈때는 도착을 언제하는지
반드시 물어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야간열차를 이용해본 생각을 해보니 - 상해-북경간의 열차여행시 주로
야간열차를 이용했는데, 당일 오후7~8시 출발하면, 익일 오전 7시경이면 지역 역에
도착할수 있었다.
열차가격은 연와차의 경우 500 원(인민폐: 한화 60,000원 가량) 아마도 북경-광주라면 1,000원에
가깝거나, 좀 넘는 가격이었을것이다.
북경에서 광주까지의 여객기 비용은 서울에서 물어보았을때의 가격보다는 싼 1,450원
정도였다.
서울의 여행사에선 잘 모르는듯- 300,000워이 넘는다고만 말했었다.
기본적으로 역까지의 이동교통수단인 택시비를 염두에 둔다면 약 2,000원정도의 경비
는 발생한다고 보아야한다.
우리네의 일상도 인천에서 부산여행을 하기쉬운것만은 아닌것처럼, 이들도 마찬가지일
거란 생각이들었다.
광주공항에서 불산을 물으니 택시비는 600원(약 73,000원)이란다.
밖에 나와 택시를 탔는데 마침 청년이(고해민) 기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친해졌다.
운전솜씨가 꾀나 큰 고 라는 청년은 자기 부친과 동갑인 내게 친절했다.
한달에 약 6,000- 8,000원을 번다고 했다.
자기 색씨도 한달에 약 1,500-2,000원을 버는데 생활비로 4,000원정도를 쓰면
저축이 가능한 돈은 약 6,000원(한화 740,000원) 정도라고 했다.
내가 보기엔 전도가 있어보여 칭찬해 주었다.
광주기장에서 시내의 열차역부근에 위치한 빈관까지 170원(고속도로비10원 또 무슨
명목으로 30원 순수택시비는 130원이므로 비싸지 않다는 설명이 있었다.의 차비를
지불했다.
고해민이가 안내해준 빈관은 광주열차역에서 멀지않은 국제학술교류빈관이란 이름의
숙소로서 꾀 괜찮아 보였다아마도 북경의 숙소와 비교되었기 때문이리라. 비용도 비교적 괜찮은
238원이었다.
트윈배드에 욕조와 냉장고등 북경에선 500원정도의 시설이었다.
여장을 풀고, 시간이 남으니 머리를 좀 깍고 열차역에 나가 내일 상해발 연와차
를 예약해 볼 심산으로 피곤한 몸을 이끌어본다.
열차역에 나가 문의했으나, 앉아서 혹은 누워서가는 열차좌석은 매진상태고 서서
가겠는가하고 묻기에 그냥 돌아왔다.
고해민 기사가 일러준대로 빈관내에 설치되어있는 상무 여행 기표,열차표를 예약
관리하는 문의처를 이용했다.
거기서 확인해보니 광주에서 무려 15시간정도나 소요되는 열차를 예매할수 있었다.
그러나, 알고보니ㅡ 15시간이 아니라 근 30시간에 육박한 열차여행을 하게될줄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으니 ~~~~~
그리고,상해화차점(상해열차역)이 아닌 남쪽의 또 다른 열차역에 도착하는 편이었다
고해민에게 연락하여 명일 아침의 일정을 약속하고, 상해의 이강선생에 연락하여
일정과 상해출발 북경도착하는 저녁열차표예매를 부탁한다고 말했지만, 그쪽에서
무어라고 이야기하는 내용등으로 전부 알아들을수 없었다.
할수없이 생각을 정리하고, 상해에서 직접 부딛쳐 차표예매를 생각해 보기로 했다.
‘2006. 8월 5일(토)
황비홍 기념관에서 상설운영한다던 사자무의 공연내용을 확인해보기위해 찾은 불산 ---
마침 불산시에 도착, 황비홍기념관을 찾은 날 기념관 앞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계속오면 공연은 취소될것이다.
입장료는 매인 인민폐 20원 우리돈으로 2,440원이다.
이곳에서도 싼편은 아니다.
우리는 기념관안을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는데, 황비홍기념관에는 역사성 기념물
다량 있었을뿐만 아니라, 소림권중에서도 특히 남파 소림권에 해당되는 영춘권과
그의 유면한 엽문선생과 그의 제자 이소룡의 기념물도 비치가 되어 있었다.
당대의 남파소림의 유명한 황비홍선생과 그의 제자 임세영과 권보와 형태를 사진
으로 남겨 그븐들의 당대적 삶과 위품을 보여주고 있는듯했다.
그러나, 정작 보려했던 사자무 공연은 물건너갔는 듯 싶어 고해민과 좀 이른듯했지
만, 식사부터 하려고 기념관 옆의 식당을 찾았다.
주루와 탕, 그리고, 야육과 미판 양판, 비주 양핑등이 우리의 식사단에 놓여졌다.
배부르게 먹었다.
식사비용은 약 60원 -
이젠 돌아가자고 식당문을 나서 잠간걷다가 기념관으로 다시 돌아왔을때는 신기한 듯
해가 쨍쨍 내리쬐기 시작했다.
고해민이이가 더 좋아했다.
드디어 공연이 시작되었다.
북을 치기시작하자 약 100여명쯤 되는 젊은 남녀들이 어디선가 몰려왔다.
의자를 포개놓은 대위를 뛰어올라가는 공연 한번, 고공사자무의 절정으로 여겨지는
철봉대위를 오르면서 가하는 기예무---
단장으로 보이는 60대의 교련님에게 명함을 얻어 즉각 귀반점길을 재촉하였다.
광주로 돌아온 시각은 오후 5시30분경, 고해민과는 다음의 만남에따른 기약을하곤
헤어졌다.
나는, 반점에서 짐을 챙겨 반점에 딸린 백화점에서 책을 몇권 구입하면서 이리저리
살피다가 반점에서 구입한 열차표를 확인하곤 화차점(광주)으로 나갔다.
광주에서 상해---
북경,상해,광주는 거의 그 장도거리가 비슷한점을 생각해 다음날 오전중에는 당도
하리란 무심한 생각에 열차편에 올랐다.
엄청난 인파와 열차객실까지 오르는 과정은 정말 대단했다.
그러나, 그것은 잠간, 순간의 어려움이었을뿐--
열차에올라 객석을 찾아 들어간후 약 2시간-- 4명이 들어가는 객실의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서, 내가 탄 열차는 상해까지 무려 27 시간이나 소요되는
여정의 열차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8월 5일(토) 오후 8시5분 광주발 1312편을 이용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된 것
하나의 잇점으로 치부하기로 마음먹었다.
8월 6일(일) 일요일을 전일 완전히 광주에서 이리저리 중국의 일부분지역을 관통하면
서 최소한 호북성,강서성,절강성등 4개성의 지역을 관통하면서 그 지방의 외면만이지
만, 풍정과 경제수준을 감잡을수 있었다.
토요일의 저녁부터 달리기 시작한 철마는 밤을 새고, 날이 밝아온 일요일 아침부터 달리기 시작
온종일을 달리고 또 달렸다.
끊임없이 달리는 열차안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무술투로의 연상훈련으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상해의 이강선생한테 전화연락을 해 시간일정에 대한 설명도하고 훈련 안배에 대한
부탁을 새로이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로인해 귀국길은 하루가 더 늦어지게 되었으니----
하지만 어쩔수 없는일- 빠른 시간안에 어떻게 할것인지 생각해야했다.
상해의 이강선생에 연락을 취해 8월 7일(월요일)의 연장로 상해마희성의 영석공원
에서의 약속을 재개하고자 마음속으로 결정을했다.
28시간 - 29시간만에 도착한 상해에는 12시가 지난 시간에 도착할수 있었다.
작년에 묵었던 빈관을 찾았다.
짐을 풀고나니 새벽한시-
몸은 피곤했지만, 잠을 이룰수없었다.
결국 뜬눈으로 밤으 지새고, 오전6시경 상해화차점으로 향했다. 지하철의 이용은 편리했고
표를 구입하여 되돌아오는데 소요된 시간은 한시간- (상해마희성에서 3-4정거장)
상해에서 북경까지 야간열차가격은 대략 500원정도인데, 이번에는 478원이었다.
떠나는 시간은 하오7시15분이며, 도착시간은 언제인가 ?하고 묻는 것을 빼놓지
않았다.
만약 광주에서처럼, 소요되는 시간이 30시간이 걸린다면 여간 큰 낭패가 아니기 때문 이다.
여기서 한가지 얻은 교훈은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라-
헛된말이 아님을 느꼈다.
지도상에 나온 그림을 참조하면, 광주와 상해간이나, 상해와 북경간의 거리는 비슷
하였기 때문에 소요되는 시간도 비슷하리라는 혼자만의 생각은 실제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는 것은 비단 하나의 교통수단이용에서만, 그런 것이 결코 어니라는
사실인것이다.
실제의 생활에서도 얼마만한 크기의 다름이 있는것인가 ? 하는 것은 자명한 일인 것
이다.
광주에서 상해까지의 열차여행은 길기만 했지만, 이것저것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갔다.
광주에서 호남인지 호북인지 여하튼 그 성을 거쳐 강서성을 지나 절강성에 진입하는
과정을 지도로 확인하면서 갔고, 절강성에서 상해시로 진입하는 과정을 지도로
살펴보는 시간도 제법되었으리라는 생각이다.
열차간에서 만난사람들은 각 지역의 말씨도 서로다르고 세대나 일을하는 정도 학식에
서 나오는 모션이나, 개성등등 여러 가지 양태의 모양을 만나면서도 즐겁고 보람있는
시간을 만들어나가야만 했다.
가령----
강서성에서 절강성으로 진입하여 느낀 것은 건물들이나, 지나는 사람들의 일상을 사는
모습들에서 절강성의 경제수준이 강서에 비하여 낫다는 사실을 보면서 느끼고, 설명을
들으면서 알게되었다는것이나, 절강에 산다는 청년의 항주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컴
퓨터프로그래머일을 한다는 청년의 일에대한, 그리고 보수에 대한 이야기- 한국에
대한 관심사 등등이었다.
청년은 한국의 맛있는 음식문화와 보수의 높낮이에 따른 내용 자기는 한달에 5,000원
가량의 월급을 받는데, 한국의 수준은 어떤가 ? 등이다.
결국 한국과 비슷하다는 나의 의견에 동조한 사람은 올해 69세의 아져씨였다.
8월 7일(월)
이런 저런 궁리와 생각을 펼쳤다. 접었다 하는 가운데, 상해에 도착을 하고 여관에서
하루를 유한후 약속대로 영석공원에 8시 50분경 도착 기다리고 있자니, 이강선생이
오토바이 편으로 당도하였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하고, 바로 훈련장으로 이동했다.
금년 5월중 상해에서 개최된 중국국제목란권 대회에는 참가할수 없었다. 고 말하고
미안하다고 나는 이강선생에게 설명했다.
그는, 명년 8월에 홍콩에서 다시 대회가 있다고 하면서 그땐 꼭 참석하라고 했다.
학생들을 잘 조련하여 함께 오라는 이선생의 당부에 나는 다짐하였다.
그리고, 네 번째 만나는 사노사에게 쌍검과 장수건을 다시 복습하였다.
이어서 이강선생으로부터 중국국제목란권교련 증서를 교부받았다.
중국목란권국제에술중심
International Coach qualification certificate of chinese Mulanfist
내게 교련원 증서를 훈련하는 내용을 보면서 주겠다고한지 2년여만에 받게 되었다.
나름대로 기분은 좋았다.
한낮의 영석공원안의 어느 휴식처로만든 수림내에 설치된 석좌대에 앉아 뜨겁고
강열하게 내리 쪼이는 태양의 열기와 빛은 우거진 나무의 잎새를 관통하면서 시야에
들어왔다.
새벽이라고 하지만 많은 인파로 시장을 이루고 있던 상해 열차역에서 표를 구입해
안정된 상태에서 훈련을 마치고 휴식하면서 바라본 잎새들은 진정 커다른 에너지를
충만하게 흡수하여 그 힘을 향유하는 듯 산들거리며, 힘찬 잎새의 바람에 산들거림
으로 내눈에 자랑하듯 뽐내는듯 했다.
강열한 빛과 열기는 29시간 타고온 열차와 잠을 한잠 못잔 피곤한 정신과 몸에게
어떤 피로를 회복케 해주는 속삭임정도로나 느껴졌다.
그만큼 영석공원의 한편에서 유한 나는 태양이 내리쪼이는 나무와 나뭇잎새를 투과
하는 자연의 보통모양에 대하여 어떤 표현키 어려운 느낌을 갖고 있었다.
이강선생과, 사노사와 작별을 고하고서, 연습시 사용했던 쌍검을 돌려주려고 운남
남로의 전사부에게로 갔다.
거기서 신편투로와 내용을 담은 이강선생의 신편 교본을 22원에 구입하고, 바로
나와 전사부가 가르쳐준 대로 버스를 탔다.
버스는 인민광장을 통과하여 복잡한 대로들이 있는 상해의 보행가와 그 주변을 지나
상해 열차역으로 향했다.
도착한 시간을 보니 6시 10분-
운남남로에서 열차역까지 소요된 시간 은 약 40분-
따지고보니 전철이나, 버스나, 택시나 소요되는 시간은 비슷한것 같았다.
드디어 귀국길에 한걸은 더 바짝 다가선 북경으로 향하는 상해발 Z 6호 열차를
한시간 여 기다리면서 후차실에서 대기하였다.
광주에서 상해로 향할때와의 분위기는 너무도 달랐다.
상해에서 북경가는 여객들은 그렇게 북적될정도는 아니었고, 열차에 오르면서 상해
행 열차칸과는 판이한 것이 여관과 호텔정도의 비유랄까 ?
깨끗하고, 안락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리고, 저녁 간찬도 배식하여 여객들의 허기를 도와주었다.
이런정도면, 우리나라도 못따라갈것같은 써비스가 이난가 ? 생각해 보았지만, 우리는
밤을 새우면서 달릴만한 국토가 아니다. 만약 남북이 통일된다면, 부산에서 신의주나
아니면, 함경도나, 평북등 황해도--
직선거리가 700~ 800은 되어야 좌우로 곡선의 철길이 만들어져 대략 1,000 키로
의 거리는 되야 저녁출발 새벽도착정도의 여정 철로여행을 꾸며볼수 있을것이다.
오늘은 7일 -
북경에 도착하는 시간은 8월 8일(화) 오전 7시경으로 예정되어 었었다.
열차는 변화없이 오전 7시경 북경화차점에 당도했다.
북경열차역을 볼때마다 느끼는 것은 처음 중국을 왔을때(아마도 1991년경~~)
북경열차역을 경과하게 되었는데 그땐 열차역 주변에 누워있거나, 열차시각을 기다
리는 인파의 모습에서였는지--
6.25를 경험한 세대는 아니지만, 아주 처참한것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결코 그런 모습은 아니다.
2008년 북경올림픽을 준비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있었기 때문이며,
매일 매월 달라지고있는 중국을 보고있기 때문이다.
8월 8일(화)
오늘은 중국북경의 마지막 날이다.
정주 무술용품점에 들러 물품들을 구경하고 몇가지를 구입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사형한분정도 연락을 취해 뵙고, 왕부정에 나가 밤풍정을
대하고, 왕부정 서점에서 신간 서적을 구경한다음 귀 반점할 생각이다.
우선, 아운촌에 위치한 중국무술협회부터 방문을 하였다.
우리가 초창기에 다니러왔던 그런 모습은 결코 아니지만, 그래도 협회내부에 위치한
서점엔 외국인들로 항상 중국무술은 외인들에 의하여 그 모습들을 일신해가고 있다
는 생각이 든다.
중국무술협회가 들어있는 아운촌의 운영팀에서는 하계시즌 특별운동종목을 운영하는데
세가지 종목중 태권도가 있어 눈길을 끌었다.
이미 지난시즌이지만, 7월 1일부터 말일까지 오전 7-9 오후 3-5 7-9시까지 매일 3
개반을 운영하였고, 회비는 인민폐 680원이었다.
싼편이 아니라 오히려 비싼편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중국은 지난 10여년간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왔다는 생각이다.
사무실을 찾아다니면 물론 초창기부터 알던 많은 중국무술 운동원, 교련출신의 현직
연구원들이 있다. 주서기교련을 비롯하여, 오빈선생이 계실수도 있고, 서상동연구원
이소걸연구원등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북경에 오면 왠지 마음은 바쁘다. 특히 이번의 경우는 바로 내일이 귀국일
이기에 더욱 그렇다.
우선, 별 필요가 없는 물건들은 우체국을 찾아 포장을 의뢰하고 한국으로 보내는
수속을 밟았다.
포장을 하고 증명하는 도장을 찍어주는데, 14원을 받았다.
포장은 20 키로를 초과할 수가 없었다. 한국으로 보내는 우편요금은 514원 하고도
50 전을 받았다.
처음 중국을 다닐때는 내가 산 항공권이 20 키로를 휴대할수있는지, 30 키로를 휴대할
수 있는지 조차 알수없었다.
지금은 초과가되어 키로당 얼마씩을 내라고 하는 항공사와 일을 보는 복무원들과의 시비
는 사전에 피해야하는 제법 처신에 있어 매너관리를 하는 입장이 되어있다.
우체국을 나서서는 내일 귀국할 때 봉을 준비했는데, 이것은 택시로 운반할 수가 없다.
근, 10 여년전에는 우리의 타우너나 대우의 작은 봉고 다마스정도의 택시가 있었다.
기본요금은 10원이었지만, 기본거리가 10 키로였다.
왠만한 거리는 10원이면 거의 가는 거리에 다다른다.
그래서 무척 싸고도 편리했다는 기억이다.
그러나, 그 택시는 아마도 5년전을 기하여 모두 사라졌다.
이렇게 세상에는 필요에 의하면, 만들고 생겨났다가도 또, 필요하면 사라져간다.
물건뿐만이 아니라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임을 알수가 있는것이다.
북경을 오면 사실 스스럼없이 만날 수 있는 사형재들이 몇분이 계시다.
이번에는 한회장님과 함께 작별을 고하면서 다음의 어느때즈음 오겠노라고, 고하였기에
손사부님과 미금배 사매에겐 또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대사형 마노사님은 어렵고, 말도 사실 어렵다.
이번에는 왕동사형한테 전화를 걸었다.
하오시간에 집으로 방문해도 좋으냐고 물었더니, 오라고 했다.
그래서 찾아나섰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예전의 그 사택은 분명 아닌 것 같았다.
찾아간 아파트 앞에서 어느 노인에 가까운 부인이 아는척을 하면서 나를 안내하려하기에
누님정도나 되는가하여 따라갔다.
중국의 비교적 좋은 아파트같은 인상은 들었으나, 외부인들과의 안전관리 문제에선 수준
급이란 점을 느낀 것은 엘리베이터에 이르기전에 이미 내부인과의 교신에 의하여 문이
열리고 닫힌다.
말하자면 누구나 엘리베이터에 이르기전에 한번의 시건장치가 모든 내부인들에게 공통
으로 적용되어 있었다.
아파트안에 들어서니 왕동사형은 우리의 파자마바람으로 나를 맞았다.
사형의 나이가 65세-
왕동사형이 50세때 우리가 이자명 사부님께 배사를 했으니- 진정 많은 시간이 흐르긴 했다.
왕동사형도 턱수염을 만지면서 늙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가 어떻게 활동하고 있다고 열심히 선전하기 시작했다.
사진에 보니 정맹열씨가 들어있었다.
정맹열씨도 열심히 중국과의 교류를 속개하여 이미 많은 팔괘장 노사들과의 친분이 있었 다.
고계무 노사의 부친에게는 배사의 예를 갖추었고,
아마도 그 이후는 간간이 북경의 팔괘장전인들과의 교류는 있었는지 추측이 된다.
그분의 한국적 팔괘장관심과 연구심은 익히 알고 있다.
아마도 신대웅씨보다는 팔괘장에 향한 향심은 더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에게
지나간 많은 세월들을 한번정도는 여념적으로 담아본다.
왕동사형의 말로는 내가 배사식에 참여했을시절의 이공성사형, 마전욱 대사형, 저국용
사형, 조대원사형, 왕동사형, 양가창사형등을 모두 함께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다고하자, 아마도 활동을 중단한 사람도 있다고 하면서 그렇게 반가운모양은 아닌 것
같은 제스추어가 있었다.
그러나, 곧 언제쯤 그런모임을 갖고자 원하는가 ? 하고 물어왔다.
난, 명년 8월경이 어떤가 ? 하고 말씀을 드렸더니, 중국은 한국처럼 8월경 하계휴가를 하지
않는다면서 오히려 10 월경이 좋다고 하였다.
여하튼 명년 다시 대화를 개진해 볼양으로 잠정적으로 그렇게 하고 싶으니 사전에 알고 계시라는
뜻의 의미를 표하였다.
어쩔 수 없는 무술계의 전래적 특징중하나가 유일무이하며, 나만의 어떤 빛나보여야하
는 일종의 생리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나보다.
그분들은 나보다도 일반적으로 10 년은 더 인생을 더 사신분들인데도 그런 기색이 확
연히 드러나 보이니 말이다.
그래서 풀빵장사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무술을 생업으로 삼지않아야 한다는 판단을
했었는데, 그 판단 역시 틀린 견해는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또 한편 고쳐 생각하면, 생업이 아니더라도 취미활동이나, 더한 움직임에서도
경쟁과, 또한 더 나아보이려는 심리는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에 해당되므로 그 심리나
심리에 의한 처신들에 대하여 민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생각은 살아가는데 유익한쪽으로 좋다는 결론이다.
다만, 사람들속에서 손가락질을 받으면서까지는 독선을 고집할 필요는 또한 없는 것이
니----l
여하튼 왕동사형은 많은 변화가 있었는듯 싶었다.
우선 가정이 많이 부유해진듯 싶다.
아파트를 약 25평형이었다면, 지금은 60평형이상이 될만큼 크게 확장을 하셨는듯-
거기에다 왕동사형의 개인 서재도 가꾸고 팔괘장 동해천 종사의 좌상을 동상으로 제작
모셔놓은것을보고 팔괘장 사랑에 대단한 관심사를 가지고 있슴을 느꼈다.
여하튼 경제적으로 많은 부유해짐을 보고나니 즐겁고 기쁜생각이 들었다.
왕동사형집에서 나와 왕부정을 향한 택시를 이용했다.
요금은 40 원 -
왕부정서점에서 조그만 영한사전한권을 구입하고, 신간 자료를 구경하였다.
거리엔 많은 인파가 흘러다녔다.
천안문광장과 천안문 그리고 광장의 좌우로 버티고 서있는 역사박물관 인민대회당 그
리고, 모택동기념관이 보이고 정양문이 멀리보였다.
장안대가를 오가는 많은 차량의 행렬을 보면서 서직문 내대가에 위치한 빈관을 향해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려는 듯 걷고걸었지만, 그 행로는 미약한 것 --
또다시 택시를 이용했다.
빈관에 도착하여 내일 귀국할 준비를 했다.
카운터에 모닝콜을 부탁하려 전화를 했더니 양택화란 사람한테 전화가 왔었는데, 전화
를 해 달라는거다.
전화를 했더니 명천, 틀림없이 가는거냐 ? 는 확인전화였다.
몹시 피곤하여 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천안문앞을 지날때부터 번개가 치더니 영락없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북경의 마지막 밤이고, 귀국하면 또다시 열심히 운동에 매진해야할일을 생각하면서 생
각에 몰두하고 있었다.
8월 9일(수요일)
아침이 되었다.
난, 눈뜨고 있는 상태에서 모닝콜 안내를 받았다.
7시에 약속했지만, 운전기사는 6시에 왔다. 실상 찾아온 시간은 정확히 찾아온 시점이
되는것이었다. 왜냐하면, 중국내 이동교통수단의 하나인 열차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하루의 일정이 딜레이되는 바람에 날짜변경예약을 한국내에 부탁을 했고, 시간도 국내
시간으로 통보받았으며, 북경에선 그 시간보다 한시간 이른시간으로 계산을 하고 있었
어야 했기때문이다. 그런내용도 아랑곳 않은채, 짐을 꾸려 차를 이용 공항으로 나갔다.
운전기사는 공항도착 바로직전에 샛길로나가 다른 운전기사와 잠시 이야길하더니 짐을
그 차에 올겨싣고는 가자는것이었다.
무어라고 설명을 하는데, 자세히 알아들을수는 없었고, 즉 자기가 공항으로 들어갔다가
단속반에 접촉이되면 벌금을 인민폐로 5,000원을 물어야 한다는것이다.
무슨 사정인지는 알길이 없었고, 아마도 면허증 관계정도나 되는가? 하는 추측뿐~~~~
그래서 그렇게 하자는데로 했다.
내가 탄 비행기는 손님이 만장한 상태는 아니었다.
올때보다는 좋은 내용의 기내식 서비스를 받을수 있었다.
서울인천국제기장에 도착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1시간 20분정도로 에정하고 있다고
방송하고 있었다.
인천에 도착하여 짐을 찾고 나와 어떻게 동인천으로 갈까를 망설이고 있는데, 누가와서
나를 툭 치며 인사하는데, 보니 약 2년전 여성복지관에서 운동을 마치기 중간정도에
서울로 이사간다며, 아쉬워했던 키가 큰 젊은 부인이었다. “ 키큰카마 ”
남편과 딸 둘을 대동한 그 회원의 이름은 생각이 나질 않았으나, 하계휴가기간동안
청도 해수욕장엘 다녀온다고 했다.
나의 금번 중국북경,광주,상해의 여정에 따른 공부기간이 그렇게 마쳐지는 순간에 이르
면서, 또 본연의 생활괘도로 돌아온 현실을 사는 느낌을 가져본다.
한가지 더 큰 느낌은 -
얼마나 좋은 세상에 살고있는가 ? 하는 느낌이다.
아침에 중국북경을 출발한 나는 정오가 되기도 전에 우리나라의 내 고향에 도착하였고,
지금은 일주일 이상 내 나라음식을 잠시 잊고있었기에 가끔 즐기던 신포동의 뼈다귀 해장국집을
향해 갈수 있다는것을 말이다.
모텐위 만리장성과
상해의 영석공원 !
그리고 광동광주의 시내와 불산시의 황비홍기념당-
북경의 천안문 앞의 야경을 돌이켜 보면서, 내나라 내고향에 못지않는 기념과 언제 보아도
또 보고싶고 와보고 싶은 사람들의 안식처를 만드는 일이 우리의 몫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