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 산재해 있는 문화재는 물론 언어나 의식의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종국에 도달하는 곳이 불교일 때가 많다. 그건 아마도 고구려, 백제,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이래, 불교가 한국문화의 정수 역할을 담당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1700여 년이라는 길고도 긴 한국불교 역사는 어떻게 시작돼 오늘날까지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치게 됐을까. 지난 4월9일 구미 도리사를 찾아 그 흔적을 되짚어 봤다. 도리사는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한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사찰. 이곳에서 신라불교의 근원, 아니 한국불교의 뿌리를 찾아봤다.
<사진> 아도화상이 신라에 전법하기 위해 세웠다고 전하는 도리사 극락전 전경.
“복사꽃 만발한 상서로운 곳에 도량 세우다”
눌지왕 24년(440) 아도화상이
신라지역에 佛法을 전하기 위해
경주 다녀오다 냉산기슭에 건립
도리사로 가는 길, 이곳으로 찾아왔을 스님의 여정을 떠올려 본다. 그 옛날 고구려를 떠나 험준한 산을 지나고 다시 낙동강을 건너 신라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길도 길이거니와 신라인에게 낯선 스님이 반가운 손님이었을리 만무하다.
사실 삼국시대 당시 신라는 가장 외진 나라였으며, 대부분의 국토가 산맥으로 둘러싸인 폐쇄적인 나라였다. 그 때문인지 불교가 공인된 시기도 가장 늦다. 북방으로 기세를 떨친 고구려가 일찍이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것이나, 동진의 마라난타스님이 백제에 불법을 전한 것과 또 다르다.
<사진> 아도화상이 참선했던 것으로 전해지는 좌선대. 뒤에 세워진 비는 아도화상 사적비다.
신라는 고구려라는 매개자를 거친 후에야 비로소 불교를 접할 수 있었고, 불교가 전래된 후부터 법흥왕 14년(527)에 국교로 공인을 받기까지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독특한 역사를 가진 곳이다.
신라의 불교전래에 관한 여러 가지 설을 찾을 수 있다. <한국불교사>(경서원, 1986)에는 4가지 설로 요약해놨는데, 미추왕2년(263)에 고구려의 스님 아도가 왔다는 내용과 눌지왕(417~458) 때 사문 묵호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一善郡, 현 경북 선산)에 이르러 모례장자의 집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또 비처왕(479~500)때 아도화상이 시자 3인과 같이 모례의 집에 머물다 돌아가고 그의 시자들이 남아 경율을 강독했다는 것과 중국 양나라 대통 원년(527), 신라 법흥왕 때 아도가 일선군 모례의 집에 왔다는 설이다. 이 가운데 눌지왕 대 전래설에 무게를 두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해동고승전>에 모두 언급돼 있기 때문이다. 기록에 보면, 묵호자라 불리는 스님이 신라 땅으로 와 모례의 집에 숨어 살다가 향의 이름과 용도를 가르쳐주고 왕녀의 병을 고쳐주고 사라졌다고 한다.
일연스님은 <삼국유사>에서 아도스님과 묵호자를 동일인으로 해석했다. 얼굴이 검다고 해서 묵호자라고 불렸던 아도스님을 바로 신라에 불교를 처음으로 전한 인물로 규정한 것이다. 인근 도개리에 남은 모례장자의 유허지와 우물인 모례정은 여러 가지 불교전래설에 신빙성을 더해 준다.

<사진> 도리사의 일주문으로 사찰 경내와 멀리 떨어진 도로에 위치해 있다.
도리사에 따르면, 아도화상은 신라지역 포교를 위해 눌지왕 24년(440)에 사찰을 창건한다.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 다녀오던 길에 냉산(冷山)기슭에 복사꽃(桃)과 오얏꽃(李)이 만발해 있는 것을 본 스님은 그곳이 상서로운 땅이라 생각해 사찰을 짓고 도리사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여기서 스님은 신라인들에게 부처님 가르침을 전했다.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때인 527년보다 70여 년이나 앞선 시점으로 미루어보아 초기 전법활동은 암암리에 진행됐을 것이다. 또 아도화상 이후 신라를 찾은 스님들이 이곳을 거점삼아 불법을 전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이런 노력이 있어 신라 왕실이나 사회 저변에 불교가 알려질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법흥왕이 즉위 초반부터 불교를 국교로 공인하고자 했던 것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불교를 신앙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국왕의 불교정책에 의해 일시에 불교가 유포된 고구려, 백제와 달리 신라의 경우에는 어느 정도 불교가 유행한 뒤 불교가 공인됐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근거도 여기 있다. 이에 대해 신종원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한국의 불교 초전자와 초기불교의 성격’에서 “국가입장에서 불교가 나라를 다스리는데 득.실이 될지 따져 본 결과”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즉 새로 들어온 불교와 전통신앙 사이의 갈등, 조화, 융합의 문제를 따져본 뒤 수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법흥왕 14년(527) 이차돈의 순교 이후 불교가 신라 국교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어렵사리 국가적으로 인정을 받은 불교가 신라에서 꽃을 피운 것은 법흥왕을 이어 즉위한 진흥왕 대에 이르러서다. 그는 출가를 허락하고, 사찰 건립에 앞장섰으며, 부처님 사리를 봉안하거나 경전을 들여왔다. 또 국통 등의 제도를 마련해 국가와 교단의 발전을 이끌어냈다. 오늘날 고도(古都) 경주를 비롯해 전국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유물은 이들의 노력과 희생덕에 탄생할 수 있었던 보물인 셈이다.
구미=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사진> 보물 470호 도리사 석탑. 화엄석탑이라고도 불리는 이 탑은 고려 때 조성됐다.
구미 도리사는
신라 최초 가람…부처님 진신사리 봉안
눌지왕 24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한 신라 최초의 가람이라 불린다. 고려 때까지 사찰의 면모를 유지해 온 도리사는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사격이 기울다가 화마로 대웅전과 전각이 소실됐다. 이후 조선 영조 5년(1729) 인근 금당암으로 사찰을 옮겨 중창한 뒤 순조 23년(1823)에 조사전을 중건하고, 고종 12년(1875)에 극락전을 중수했다. 근래에 들어서는 1920년 아도화상 진영을 조성했고, 1982년 세존사리탑에서 발견된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적멸보궁을 신축했다.
절에는 아도화상을 기리는 유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적멸보궁과 태조선원 사이에 위치해 있는 아도화상의 성상이다. 2002년 새로 봉안한 이 상은 낙동강과 해평면 일대를 내려다보고 있는 곳에 위치해 있어, 주위를 아우르는 스님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와 함께 극락전 옆에는 스님이 신라에 올 때 이운해 왔다고 전해지는 사리를 봉안했던 세존사리탑이 세워져 있다. 지난 1977년 사리탑 해체 보수과정에서 사리가 모셔진 금동육각사리함(국보 208호)이 발견됐는데 8세기 통일신라 때 조성된 이 사리함은 우수한 조형미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극락전 옆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내려가 보면 소나무 숲 사이로 아도화상 사적비와 좌선대가 서 있는 것이 보인다. 효종 6년(1655)에 세운 이 탑은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그 앞의 넓적한 바위가 스님이 참선을 했다고 전해지는 좌선대다. 이와 함께 1976년 아도화상의 석상도 발견됐는데, 현재는 행방을 알 수 없다.
또 1920년 조성된 아도화상 진영은 현재 본사인 김천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밖에도 보물470호로 지정된 석탑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인 극락전 및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등이 경내에 남아 있다.
[불교신문 2522호/ 5월2일자]